62화. 버려진 왕자2020.12.03.
레나 루벨이 참격을 깨트릴 때, 루비드는 자신의 안에서도 무언가가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있을 수 없는, 있어서도 안 될 일이었다.
‘이게 어떤 힘인데…….’
참격은 지난 100년간 플레누스가 북부의 왕으로 군림할 수 있게 한 힘이다. 그런데 그걸 저렇게 쉽게, 간단하게,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부수다니. 인정할 수 없는 광경에 루비드의 몸이 차게 식었다. 그 충격은 쉽게 가시지 않았고, 그는 하늘에서 불비가 내릴 때까지도 멍하니 굳어 있었다. 그래서 그 안에 속수무책 갇혀버렸다.
―재판을 시작한다.
루비드가 정신을 차린 건 웬 성마른 목소리가 귀청을 때릴 때였다.
―재판을 시작한다.
―재판을 시작한다.
그 목소리는 마치 숫돌을 긁는 것처럼 시끄럽고 요란했다. 불편한 소리에 퍼뜩 깨어난 루비드는 자신이 어딘가 동떨어졌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하늘과 땅은 보이지 않았다. 사방은 벽으로 막혀 있었고, 루비드는 커다란 그림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림자들이 루비드를 내려다보며 외쳤다.
―죄를 인정하라.
―죄를 인정하라.
그것들은 쏟아지는 물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고, 압박을 느낀 루비드는 버릇처럼 참격부터 날렸다.
“꺼져!”
참격이 스치자 그림자들은 연기처럼 흩어졌다. 그러더니 도로 뭉쳐 루비드를 더 옥죄였다.
―악마의 사주를 받아 전염병을 퍼트린 죄.
―요사스럽게 사내들을 유혹한 죄.
―마녀의 집회를 연 죄.
―심판받으라.
“이 미친 것들이 뭐라는 거야!”
루비드가 다시 검을 휘둘렀지만 소용없었다. 그림자들은 오히려 크기를 키우며 루비드의 주변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심판을.
―심판을.
―신의 철퇴를.
점점 커지는 괴성에 루비드는 진저리를 내며 귀를 막았다. 그때 루비드의 머리 위로 무언가가 쿵 떨어졌다. 직후 낯선 감정이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으, 아아악!”
그를 덮친 것은 두려움이었다. 억울함이었고, 절망감이었다. 그리고 한없는 아득함이었다. 막연한 아픔에 저절로 눈물이 차올랐다. 루비드는 자신이 무슨 일을 당하는지도 모른 채 고통에 몸부림쳤다. 속절없이 무너져 무릎을 꿇었다.
―판결.
무너진 루비드에게 그림자들이 몰려들었다.
―죄인의 자유를 몰수한다.
―죄인의 힘을 몰수한다.
―죄인의 시간을 몰수한다.
그림자들이 루비드의 몸을 유령처럼 관통하며 그의 일부를 긁어갔다. 몸이 뜯겨나가는 감각에 루비드는 덧없이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그림자들은 더 기고만장해서 그의 모든 것을 빼앗으려 들었다. 더는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한 순간, 이러다 죽을 것 같다고 느낀 순간. 그 끔찍한 심판대가 돌연 무너졌다. 뒤이어 레나 루벨이 나타났고, 고통에서 벗어난 루비드는 잠시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루비드는 어린 아이가 되어 있었다.
. . . 레나는 망연자실 주저앉은 루비드를 보며, 입가에 피어오르는 희열을 애써 참았다. 유니만큼 작아져서 제 옷을 담요처럼 두른 루비드의 외모는 퍽 귀여웠다. 하지만 레나를 웃기게 만든 건 그 앙증맞은 자태가 아니라 이 난감한 상황이었다.
‘아마 날 노린 걸 텐데…….’
태움과 그을림의 왕은 공간을 뒤틀어서 자신의 업적인 마녀재판을 재현했다. 그로써 루비드는 과거 여인들이 당한 것처럼 부당하게 착취되어 무력해졌다. 이것은 시간과 공간이 뒤틀린 무덤에서나 가능한 마술이며, 망자의 왕이 공들여 구축한 함정이었다. 그리고 히엠스 그라샤가 이런 함정을 굳이 준비한 건 저 망나니가 아니라 레나 루벨을 위해서였을 것이다.
‘걸렸으면 귀찮았을 텐데.’
레나는 한껏 까불던 루비드 덕에 함정을 피했다. 그리고 거기 얻어걸린 루비드는 자존심이 꼭 뭉개질만한 모습이 되었다. 어느 쪽이든 레나에게는 상당한 이익이었다. 그래서 레나는 조금 유쾌한 기분으로 주저앉은 루비드에게 속삭였다.
“괜찮아요?”
“괜찮겠냐!”
묻기 무섭게 루비드가 빽 소리쳤다. 몸이 작아지고도 그의 싸가지는 여전했고, 덕분에 레나는 다시 기가 막혔다.
“괜찮은 것 같네요, 아직 기고만장한 걸 보면.”
“뭐?”
“정말 머리가 나쁜 게 아니면 상황 파악부터 하는 게 어때요? 지금은 성질을 부릴 때가 아니라 도와달라고 해야 할 때인 것 같은데.”
지적 받은 루비드의 얼굴에 분노가 차올랐다. 말이 좋아 분노지, 어린 얼굴로 그러니 심통을 부리는 것처럼 보였다.
“건방지게 어디서 훈계질이야.”
루비드가 짓씹듯이 말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외면한 채 여느 때처럼 방자하게 굴었고, 그 모습은 결국 레나를 질리게 만들었다.
“기대도 안 했지만 정말 보람 없네요.”
레나가 혀를 차며 욱신대는 팔목을 주물렀다. 그러곤 덧붙였다.
“자신이 있으니까 그런 거겠죠? 알겠어요, 더는 참견 안 할게요. 그 꼴로는 방해도 못 할 것 같으니까.”
레나는 표정 없이 채찍을 갈무리하고 단검을 챙겼다. 그러곤 돌아선 자세로 말했다.
“그럼 이만 찢어지죠. 혹시 할 말 있으면 지금 해요.”
그렇게 묻는 레나의 말투는 다정하지도 냉랭하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용건을 묻는 투였다.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는 태도이기도 했다. 그 건조한 물음에 루비드의 눈빛이 잠깐 흔들렸다. 버릇처럼 악을 썼지만 그도 자신의 처지를 나름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망자가 돌아다니는 무덤 한복판에서 몸이 갑자기 작아졌다. 너무 작아진 마디마디가 낯선데 그를 보좌할 기사는 한 명도 없고, 타고 온 말도 진즉에 도망갔다. 이 꼴로는 히엠스 그라샤와 싸우기는커녕 제 한 몸 간수하기도 어렵다. 그러니 지금은 레나에게 몸을 의탁하는 것이 맞았다. 우선은 자존심을 접고, 레나 루벨의 친절함에 기대야 했다. 다행히 레나는 보통 사람보다 자비로운 편이었다. 그러니 못 이기는 척 붙잡으면 잡혀줄 것이다.
“……없어.”
하지만 루비드는 끝내 고집을 꺾지 않았다. 오히려 날카로운 눈으로 레나를 적대하고 밀어냈다.
“없으니까 꺼져.”
“정 그러시다면.”
레나는 별로 놀랍지도 않다는 듯 끄덕였다. 그러곤 더는 기다리지 않고 단호히 몸을 돌렸다. 레나가 완전히 등을 돌리자 루비드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움찔 떨었다. 레나의 망토자락을 잡으려는 듯 고사리 같은 손도 잠깐 꼼지락댔다. 하지만 루비드는 참았다. 목소리도 손짓도, 불안과 간절함도. 그는 모두 참고, 늘 그랬듯 자존심을 택했다. . . .
‘젠장, 제길!’
루비드는 연신 욕을 하며 헐렁한 바짓단을 걷어올렸다. 이렇게 된 거 걸어서 돌아가는 수 밖에 없다. 루비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북부 기사들이 뒤따라오고 있을 테니까 중간에서 합류하면 될 일이었다. 그래서 루비드는 눈에 띄는 제복 코트를 벗어던지고 팔다리의 늘어진 옷을 걷어붙였다. 그러곤 허리까지 질끈 동여매며 본격적으로 걸어갈 준비를 했다.
‘레이피어.’
루비드는 바닥에 떨어진 레이피어를 발견하고 그것도 챙겼다. 아니, 챙기려 했다.
“윽…….”
하지만 너무 무거워서 들고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래서 참격을 쓸 수는 있나? 루비드는 시험 삼아 양손으로 레이피어를 잡았다. 그러곤 참격을 써 볼 생각으로 힘껏 휘둘러보았다.
“으악!”
하지만 참격 대신 레이피어가 날아갔다. 그의 작은 손은 기다란 쇳덩어리를 쥐고 흔들만큼 야무지지 못했다. 루비드는 뎅그렁대며 날아간 레이피어를 황망히 바라보았다. 검 하나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는 상황에 그는 자신의 처지를 또 한 번 실감했다. 그리고 걸어서 돌아가려던 직전과 또 다른 결론에 도달했다.
‘이 꼴로는 안 돼.’
루비드는 이번에야말로 공을 세울 각오로 레나 루벨의 뒤를 쫓았다. 그런데 공을 세우기는커녕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꼬락서니로 돌아가서는 나서지 않은 만도 못했다.
“젠장……!”
신경질이 난 루비드는 힘껏 발을 구르더니 애꿎은 레이피어를 걷어찼다. 그러곤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막막했다. 막막한 와중에 형의 싸늘한 눈빛이 떠올라 진저리가 났다. 진저리를 치고 나니 이번엔 눈가에 열이 올랐다. 그래서 루비드는 이를 악물며 소매로 두 눈을 눌렀다. 북부의 왕, 이우라 플레누스 그라샤. 잘나디 잘난 그는 루비드 보다 다섯 살이 많았다. 지금은 서로 본 체도 안 하지만, 어릴 땐 그리 나쁘지 않았다. 나이 차 때문에 같이 어울릴 일이 없어도 소년 시절의 이우라는 이따금 동생을 찾아와 이것저것 알려주고 놀아줬다. 그런데 그 평범한 형제지간은 아버지의 죽음을 기점으로 완전히 뒤틀렸다. 선대 북부공은 망자와의 전쟁에서 전사했다. 루비드가 꼭 지금처럼 어릴 때, 그러니까 열 한 살 때의 일이었다. 부친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어머니도 쓰러졌고, 선대가 맡았던 모든 역할과 책임은 장남인 이우라에게 전가되었다. 그리고 어린 루비드가 의지할 수 있는 것도 이우라 뿐이었다. 루비드는 이우라가 곁에 있어주길 원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이우라는 갑자기 루비드와 거리를 두었다. 찾아오지도 않고 보더라도 무시했다. 찾아가면 내쫓았고 말을 걸어도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참다못한 루비드는 냉정해진 형에게 직접 물었다. 왜 나를 혼자 두냐고 따졌다. 그에 이우라는 아주 오랜만에 동생을 보며 말했다. ‘가까이 오지 마. 내가 네 목을 벨지도 몰라.’라고.
루비드의 처형 강박이 시작된 건 그때쯤이었다. 참격을 쓸 수 있게 된 것도 역시 비슷한 시기였다. 아버지를 잃고 형이 변해버린 와중에 처형 강박까지 겪는 소년에게 참격은 생명 줄과도 같았다. 그건 황제가 하사한 힘, 황족으로 군림할 자격을 지닌 자에게만 부여되는 권능. 이 힘을 쓸 수 있다면 이우라가 자신을 함부로 하지 못할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동시에 틈을 보이면 형 이우라가 자신의 목을 베어갈지도 모른다는 강박 역시 은연중에 강해졌다. 그래서 루비드는 숨을 죽인 채 기다렸다. 큰 맹수를 경계하는 작은 맹수처럼, 성장해서 스스로를 지킬 수 있게 될 날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가 북부의 왕인 형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방법은 두가지였다. 먼저 형을 치거나, 형보다 강한 황제의 비호를 받는 것. 전자든 후자든 루비드가 강해져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루비드는 형을 죽이는 것보단 황제의 편에 서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일말의 형제애가 남아 있던 탓이었다. 하지만 그 판단도 오래가지 않았다. 몇 해 후, 아버지의 죽음이 황제 니힐의 심술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된 탓이었다. ***
“여기 있어.”
린은 유니에게 당부하며 말에 올라탔다. 동부 기사들에게 보호를 받게 된 유니는 불안한 눈으로 린을 바라보았다.
“아가씨를 꼭 같이 와요!”
어린 하녀의 외침에 린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러곤 붉은 균열을 향해 말머리를 돌렸다. 지금 레나는 혼자 무덤에 가 있다. 루비드가 그 뒤를 쫓았고, 곧 북부의 기사들도 루비드를 따라갈 것이다. 그럼 레나는 무덤에 고립된다. 그래서 린은 레나의 곁을 지키기 위해 서둘러 채비했다. 그런데 막 출발하려던 찰나, 돌연 성의 입구가 소란해졌다.
‘뭐지?’
무심코 돌아본 린의 시야에 반갑지 않은 얼굴이 들어왔다. 두엄의 궁이 난장판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타난 이우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