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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우는 왕자 (63/208)

63화. 우는 왕자2020.12.07.

4년 전, 북부 플레누스 성.

16562811222849.jpg“저하, 어떻게 기별도 없이…….”

16562811222855.jpg“비켜.”

16562811222849.jpg“안 됩니다. 이우라 저하께서 집무중이십니다.”

16562811222855.jpg“비키라고!”

루비드는 막아서는 가신들을 뿌리치고 집무실의 문을 박찼다. 문을 열자마자 집무실 책상에 앉은 이우라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소리로 상황을 짐작하고 있었는지 갑자기 찾아온 루비드를 보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16562811222855.jpg“이우라!”

16562811222872.jpg“누가 허락했지?”

16562811222855.jpg“뭐?”

16562811222872.jpg“널 부른 기억이 없다.”

난입에 가까운 방문인데, 이우라는 까닭도 묻지 않고 차갑게 잘라 말했다. 그래서 루비드는 지긋지긋하게 냉정한 형을 노려보았다. 동생은커녕 사람취급도 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부아가 치밀었다. 하지만 이우라는 여상히 무표정했다.

16562811222872.jpg“나가라.”

16562811222855.jpg“형!”

루비드가 참다못해 소리를 질렀다. 그도 이우라를 오래 마주보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렇게 찾아온 건 확인할 일이 생긴 탓이었다.

16562811222855.jpg“젠장, 다 됐으니까 하나만 대답해.”

루비드가 욕설을 뱉으며 말했다. 그러곤 자신을 감흥 없이 쳐다보는 형에게 물었다.

16562811222855.jpg“아버지가 죽은 거, 황제 때문이야?”

16562811222872.jpg“그 얘긴 어디서 들었지?”

16562811222855.jpg“……진짜야?”

루비드가 맥이 풀린 얼굴로 되물었다. 하지만 이우라의 태도는 여전했다. 여전히 딱딱하고 여전히 냉랭했다.

16562811222872.jpg“어디서 들었냐고 물었다.”

16562811222855.jpg“내가 먼저야! 진짜냐고!”

루비드가 윽박지르자 이우라는 들여다보던 서류를 덮었다. 그러곤 말없이 루비드를 바라보았다. 그 침묵에 루비드의 시선이 잘게 떨렸다.

16562811222855.jpg“맞구나.”

루비드는 이우라의 태도에 확신을 얻었다. 아니면 그게 무슨 소리냐고 했을 거다. 어디서 들었냐고 물을 게 아니라, 저렇게 침묵할 것이 아니라. 확신이 생기자 루비드의 두 눈에 분노가 차올랐다.

16562811222855.jpg“형, 너는 그걸 알면서…….”

믿을 수가 없었다. 황제가 아버지를 승산 없는 전장으로 내몬 걸 알면서, 그 때문에 아버지가 죽은 걸 뻔히 알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황제의 개 노릇을 하는 형이. 루비드가 지독한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그러나 이우라는 여전히 무심했다.

16562811222872.jpg“모르는 척해라.”

16562811222855.jpg“뭐?”

16562811222872.jpg“목숨이 아까우면 모르는 척해.”

16562811222855.jpg“너 그걸 말이라고……!”

16562811222872.jpg“루비드 플레누스.”

막 소리치던 루비드는 이우라의 무거운 음성에 저도 모르게 움찔 떨었다. 그런 루비드를 쏘아보며 이우라가 씹어내듯 말했다.

16562811222872.jpg“죽고 싶지 않으면 닥쳐라.”

그렇게 말하는 이우라의 얼굴은 보고도 믿지 못할 만큼 살벌했다. 처음이었다. 이우라가 그에게 직접 화를 내는 건. 쭉 무시당해온 루비드는 난생처음 마주한 형의 위협에 덜컥 겁을 먹었다. 겁먹다 못해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됐지만, 애써 견디며 입을 달싹였다.

16562811222855.jpg“하, 하지만 아버지가…….”

16562811222872.jpg“부친은 실패했다.”

16562811222855.jpg“뭐……?”

16562811222872.jpg“능력 부족으로 실패해서 죽었다. 단지 그뿐인 걸 황제 탓으로 돌리지 마라.”

형의 말에 루비드의 머릿속은 또 한 번 멍해졌다. 아버지가 죽고 3년, 갑자기 변한 형이 낯설어 거리를 두었다. 나도 너 같은 거 없어도 된다고 함께 등을 돌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은연중엔 그를 믿었다. 어쨌든 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황제를 옹호하기 위해 아버지의 죽음을 폄하하는 그를 보니 발밑이 푹 꺼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말을 잃고 쳐다보는데, 이우라가 쐐기를 박았다.

16562811222872.jpg“그러니 함부로 입 놀리지 마라. 부친처럼 죽고 싶지 않다면.”

그 순간 루비드는 숨이 턱 막혔다. 기분이 아니라 실제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16562811222855.jpg“윽…….”

루비드는 창백하게 질려 뒷걸음질 쳤다. 한계까지 내몰린 마음으로 기어이 저주 같은 강박이 피어났다. ‘죽고 싶지 않다면’이라는 이우라의 말은 어디까지나 조건부의 경고였지만, 강박에 빠진 루비드에게 그 말은 죽이겠다는 소리와 다름이 없었다. 결국 루비드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이성을 잃었다.

16562811222855.jpg“시, 싫어.”

죽는다. 죽을 것이다. 이우라의 말대로, 나는 죽을 것이다. 목이 잘려 죽을 것이다. 죽고 싶지 않아. 목을 베이고 싶지 않아. 단두대 앞에 서고 싶지 않아. 잘리고 싶지 않아!

16562811222855.jpg“저리 가……!”

16562811222872.jpg“루비드.”

루비드의 상태가 변하자 이우라가 이름을 불렀다. 역효과였다. 루비드는 아예 사색이 되어 뒷걸음쳤다. 그러다 덜컥 무너졌지만 그는 주저앉아서도 다리로 몸을 밀며 도망쳤다. 도도하던 왕자는 품위를 잃고 마치 끌려나온 야생 동물처럼 구석으로 도망쳤다. 그러다 집무실 벽에 걸린 장식용 검에 머리를 부딪쳤다.

16562811222855.jpg“으, 아아악……!”

선뜩한 칼날을 본 순간 루비드의 눈이 파랗게 변했다. 죽을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목이 떨어질 것 같았다. 압박을 견디다 못한 루비드는 저도 모르게 검을 잡았다. 그러곤 정신이 나간 채 참격을 날려, 주위의 모든 것을 부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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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정신을 차렸을 때 루비드는 침대에 묶여 있었다.

16562811222855.jpg“정신이 드십니까?”

그리고 한 남자가 그를 걱정스럽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선한 인상을 가진 고상한 남자, 루벨 백작이었다. 루비드가 멍하니 바라보자 백작이 말했다.

16562811222855.jpg“엿새만입니다.”

16562811222855.jpg“엿새……?”

16562811222855.jpg“기억 안 나십니까? 이우라 저하의 집무실에서 쓰러지셨습니다.”

느리게 눈을 깜빡이던 루비드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래서 벌떡 일어나려다가 신음하며 도로 쓰러졌다.

16562811222855.jpg“윽…….”

16562811222855.jpg“움직이지 마세요. 많이 다치셨습니다.”

백작이 루비드의 결박된 손목을 풀어주며 말했다.

16562811222855.jpg“이우라 저하께서 외출금지령을 내리셨습니다.”

16562811222855.jpg“젠장, 그 새끼가 무슨 자격으로…….”

16562811222855.jpg“정말 기억 안 나십니까?”

백작이 재차 묻자 루비드가 짜증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에 백작이 목소리를 낮춰 고했다.

16562811222855.jpg“이우라 저하께 검을 휘두르셨습니다.”

16562811222855.jpg“내가……?”

루비드는 깜짝 놀라 백작을 쳐다보았다. 그 순진한 얼굴에 백작은 쓰게 웃었다.

16562811222855.jpg“아무래도 제가 괜한 이야기를 한 모양입니다. 설마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백작이 염려가 가득한 눈으로 말하자 루비드는 꾸지람 들은 아이처럼 머뭇대다 시선을 피했다.

16562811222855.jpg“……됐어. 너 아니면 끝까지 몰랐겠지.”

본인의 말마따나, 백작이 아니었으면 루비드는 영영 몰랐을 거다. 황제의 잔인한 본성도, 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비밀도, 그리고 형에 대해서도. 루비드 왕자에게 진실을 속삭인 사람은 다름 아닌 이 남자, 카르도 루벨 백작이었다. 그는 2년 전 서부공의 추천으로 플레누스 성에 들어왔다. 이우라는 곧장 그를 왕자의 시종 겸 가정교사로 삼았다. 귀족답지 않게 학문에 정통한 독특한 이력 때문이었다. 카르도 루벨은 루비드를 보필하는 많은 시종 중 하나였다. 하지만 루비드는 다른 이들보다 루벨을 더 가까이 했다. 뼛속까지 이우라의 편인 북부인보다는 차라리 외지인이 낫다는 나름의 계산 때문이었다. 실제로 루벨 백작은 다른 시종들처럼 루비드를 성가시게 하지 않았다. 어쭙잖게 눈치 보는 일 없이 솔직했고, 가식을 떨지 않았으며, 사사건건 이우라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그리고 사람들이 왕자에게만 감춘 비밀도 알려주었다. 그로써 아무 준비 없이 진실의 광장으로 끌려나온 왕자는, 버거운 현실을 견디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16562811222855.jpg“이거.”

멍하니 앉아 있던 루비드가 붕대가 감긴 팔을 만지며 말했다.

16562811222855.jpg“이우라가 그런 거야?”

16562811222855.jpg“불가피한 상황이었을 겁니다.”

백작의 서툰 변호에 루비드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더니 신경질을 내며 붕대를 풀었다.

16562811222855.jpg“저하!”

백작이 놀라서 말렸지만 소년은 그를 뿌리치고 붕대를 뜯어냈다. 그러곤 아까부터 참을 수 없이 욱신대던, 칼로 찢은 게 분명한 상처를 그 앞에 들이밀었다.

16562811222855.jpg“불가피? 이게?”

루비드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되물었다. 그는 이우라가 자신을 칼로 찔렀다고 확신했다. 당연히 그랬을 거다. 당연히. 날 싫어하니까, 날 죽이고 싶어 하니까!

16562811222855.jpg“그 새끼는 가족도 없어. 부모한테도 그러는데 동생이라고…….”

루비드는 마구 성을 내다가 스스로의 말에 상처 입은 듯 입술을 깨물었다. 백작은 화내는 법밖에 모르는 소년을 잠자코 바라보더니, 그의 상처를 도로 감싸주었다. 그러곤 그늘진 얼굴로 고했다.

16562811222855.jpg“이우라 저하의 판단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16562811222855.jpg“뭐?”

16562811222855.jpg“세상은 약자와 패자의 사정을 돌보지 않습니다. 감히 말씀드리지만, 선대 북부공 저하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16562811222855.jpg“너, 감히……!”

16562811222855.jpg“만약 이우라 저하께서 그 일로 황제 폐하께 대들었다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백작이 왕자의 격노를 마주하며 덤덤히 물었다. 정답이 명백한 물음에 루비드는 말문이 막혔고, 백작은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16562811222855.jpg“강한 자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만 약한 자는 그러지 못합니다. 이우라 저하도 분명 강하지만 황제 폐하 앞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약자의 태도를 보이는 겁니다.”

약자의 태도. 그것은 아버지의 원수에게 엎드려 복종하는 것. 무참히 죽은 아버지를 대신해 그의 충견이 되는 것. 복수는커녕 원망조차 하지 않는 것.

16562811222855.jpg“그게 세상의 섭리입니다. 모두가 그렇게 살고, 그렇게 견딥니다.”

루벨의 말 대로였다. 그의 부친은 약했다. 그래서 실패했고, 그래서 죽었다. 이우라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참고, 그래서 덮는다. 루비드 플레누스는? 마찬가지다. 분하지만 그는 약하다. 그래서 무력하다. 소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에 이를 악물었다.

16562811222855.jpg“하지만 낙심하지 마십시오, 저하. 저하께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때, 고개를 떨어트린 루비드에게 루벨이 속삭였다. 더 없이 다정하게, 그리고 은근하게.

16562811222855.jpg“강해지십시오. 약자가 아닌 강자가, 빼앗기고 죽는 자가 아니라 빼앗고 죽이는 자가 되십시오. 그것만이 저하께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입니다.”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 그 말이 루비드의 안에 잠든 강박을 다시금 건드렸다. 소년의 눈이 일렁이자 백작이 그윽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16562811222855.jpg“할 수 있습니다. 저하처럼 고귀한 혈통과 강한 심성, 그리고 그라샤의 권능을 물려받은 분이라면 얼마든지, 충분히.”

16562811222855.jpg“어떻게…….”

16562811222855.jpg“권능을 갈고 닦아 강해지십시오. 그리고 황제 폐하께 가치를 인정받는 겁니다.”

16562811222855.jpg“황제에게?”

16562811222855.jpg“저하, 명심하십시오. 폐하는 인간이 아닙니다.”

루비드가 반발하자 루벨은 더 은근히 설득했다.

16562811222855.jpg“늙지도 죽지도 않는 존재가 어찌 인간이겠습니까. 차라리 해와 달과 같은 존재라 여기십시오. 그의 변덕도 태풍이나 산사태 같은 어쩔 수 없는 거라 생각하십시오. 그렇게 받아들이고 이용하는 겁니다. 인간이 물줄기에 터를 잡듯이, 햇빛에 기대 하루를 꾸리듯이, 이우라 저하께서 하고 계신 것처럼 말입니다.”

이우라의 이름이 나오자 루비드의 눈이 다시금 흔들렸다. 백작은 그 거칠고도 순진한 소년을 바라보며 담담히 쐐기를 박았다.

16562811222855.jpg“그렇게 되면 그 누구도 저하를 해치지 못할 겁니다. 다른 공작들은 물론, 이우라 저하 또한.”

백작은 신기할 정도로 소년의 마음을 잘 알았다. 루비드는 가장 듣고 싶은 말을 골라서 하는 백작에게 자각도 없이 마음의 빗장을 풀었다. 당부를 받아들인 루비드의 눈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루비드의 눈빛이 바뀌자 루벨은 몸을 숙이며 어리고 순진한 왕자에게 경의를 표했다.

16562811222855.jpg“그러니 저하께선 강해지는 데 집중하십시오. 꺾이지 말고, 굴하지 말고, 그저 가치를 증명하십시오. 그 외의 것들은 제가 다 하겠습니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갖춰야 하는 성품, 예절, 규범. 그런 것은 네게 필요 없다. 괴물의 말은 모두 옳고, 괴물의 행동은 그 자체로 하나의 규율이 될 테니. 무력한 인간은 그저 서글피 따라야 할 뿐. 그리고 영리한 인간은 괴물에게 목줄을 채워 개처럼 다루지. 백작은 웃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더 깊게 고개를 숙였다. 다행히 루비드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지금도 모른다. *** 소매로 눈가를 누르고 있던 루비드는 제 분을 참지 못해 다시금 땅을 차며 분통을 터트렸다. 하지만 다리가 짧아져서 그마저도 대부분 헛발질이었고, 덕분에 루비드는 한층 더 미칠 지경이었다. 결국 루비드는 여기가 무덤 한복판인 것도 개의치 않고 그대로 벌렁 누워버렸다. 다 끝났다. 이 몸으로는 망자와 싸울 수도 없고, 이 몸으로는 멀쩡히 돌아갈 수도 없다. 게다가 이 몸으로는 돌아가서도 문제다. 애새끼가 된 그를 반길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16562811222855.jpg‘차라리 죽을까.’

루비드는 그렇게 생각하곤 이를 악물었다. 그러곤 숨을 죽이며 다시 소매로 눈을 꾹 눌렀다. 그렇게 잠시 숨을 참고 있을 때였다.

16562811419684.jpg“설마.”

루비드의 귓가에, 정말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62811419684.jpg“지금 울어요?”

레나 루벨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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