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레나 루벨의 정체2020.12.14.
레나 루벨의 무모함은 천하의 루비드도 질겁하게 만들었다.
“으……!”
레나가 안장을 박차며 뛰어오르자 루비드는 저도 모르게 레나에게 매달렸다. 미친 게 분명한 행동이었다. 사방에 불덩어리를 품은 망자들이 득실대는데 날뛰는 말에서 일어나 도약하다니. 하지만 더 미친 것은 그 다음이었다. 레나는 옆구리에 루비드를 달고 돌진해오는 망자들을 발판삼아 몇 번 더 뛰어올랐다. 그렇게 망자들을 밟으며 성으로 다시 돌격했다. 그러자 망자들도 레나를 막으려는 듯 불길을 키웠다. 열기가 바늘처럼 꽂히자 레나는 루비드의 뒷덜미를 힘껏 치켜들었다.
“뭐 하는……!”
루비드가 질겁하며 소리쳤지만, 레나는 아랑곳 않고 성으로 루비드를 힘껏 집어던졌다.
“지금이에요!”
뭐가 지금인데! 루비드는 울화가 치밀었지만 별수 없이 협조했다. 그러곤 가까워지다 못해 충돌할 것처럼 달려드는 성으로 힘껏 팔을 뻗었다. 망자의 성에 들어가려면, 성주의 진짜 이름을 부르면 된다고 했나? 루비드는 전해들은 이야기를 떠올리며 힘껏 외쳤다.
“히엠스 그라샤!”
아는 대로 잘 했지만, 그는 불안한 마음에 한마디 덧붙였다.
“문 열어!”
그리고 세상이 뒤집혔다.
. . . 강렬한 충격에 잠시 의식을 잃었던 루비드는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사방이 깜깜했다.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조차 헷갈릴 지경이었다. 그 아득한 칠흑 속에서 루비드는 반사적으로 땅을 짚었다. 아니, 짚으려 했다. 그런데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다. 몸을 일으키기는커녕 오히려 한차례 휘청이고 만 루비드는 곧 깨달았다.
‘뭐야, 이거.’
루비드는 바닥에 쓰러져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서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는 어디에도 닿지 않은 채, 마치 물속에서 헤엄치듯 허공을 부유하고 있었다.
‘이건 또 무슨…….’
루비드는 입술을 질근 물었다. 그러곤 별수 없이 한 이름을 외쳤다.
“레나 루벨!”
레나 루벨……! 레나 루벨……! 레나 루……. 수치를 참고 기껏 외쳤건만, 광활한 어둠은 그의 외침을 덧없는 메아리로 만들었다.
“야! 대답해!”
야……! 대답……! 다시 외쳐도 마찬가지였다. 루비드는 곤혹스러운 기분으로 어둠을 헤집다가 희미한 빛을 발견했다.
‘출구?’
그는 의심 없이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흐릿하게 깜빡이던 빛이 돌연 밀도를 높여 그를 집어삼켰다.
“으윽!”
쏟아지는 빛에 루비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시, 싫어.
그리고 이어진 목소리에는 눈을 다시 크게 떴다.
―저리 가……!
익숙하지만 낯선 목소리.
―루비드.
그리고 낯설고도 익숙한 목소리. 바로 루비드 본인과 형 이우라의 목소리였다. 루비드는 얼이 빠져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 앞에 펼쳐진 건 4년 전, 자신과 이우라의 모습이었다.
“뭐야, 이거…….”
루비드는 얼이 빠져 아직 소년인 자신과 지금보다 어린 이우라를 바라보았다. 혹시 내 기억인가?
“내 면상이 보이잖아!”
루비드는 스스로의 추측에 짜증을 내며 반박했다. 기억이라면 자기 얼굴은 안 보여야 정상이다. 하지만 루비드는 잔뜩 겁에 질린 자신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게다가 이거…… 그땐가?’
루비드는 이때가 언제인지 깨닫고 더 인상을 썼다. 아버지가 황제 때문에 죽은 걸 알게 되어 형에게 찾아갔던 날. 이우라에게 따지다가 빌어먹을 강박 때문에 소란을 피운 날이었다.
‘제길.’
루비드는 언짢은 눈으로 자신의 추태를 바라보았다. 참고 보기 괴로웠지만, 정신을 잃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 견뎠다. 루비드가 지켜보는데, 과거의 루비드가 잔뜩 겁먹어 주저앉았다. 그러더니 장식용 칼을 보고 결국 눈이 뒤집혔다.
―으, 으아악……!
과거의 루비드는 결국 검을 휘둘렀다. 핑! 날카로운 참격이 이우라의 책상을 대각선으로 갈랐다. 이우라는 급히 몸을 피했지만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참격이 그의 왼쪽 어깨를 길게 베었고, 이윽고 그의 팔에선 피가 쏟아지듯 흘렀다.
‘뭐야.’
루비드가 그 모습을 보고 놀라는 사이 시종들이 소리쳤다.
―저하!
기겁하는 시종들에게도 참격이 날아갔고, 그들은 넘어지고 구르며 혼비백산 도망쳤다. 그리고 이우라는 다친 팔을 움켜잡고 루비드에게 달려갔다. 그때 그는 맨손이었다.
‘다쳤다고?’
루비드는 당혹스러웠다. 그는 이우라의 부상에 대해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얕게 스친 것도 아니고 저렇게 깊게 베였으면 말이 안 나올 리가 없는데. 루비드는 반신반의하며 계속 지켜보았다. 과거의 루비드가 울면서 검을 휘두르자 이우라가 몸을 던져 그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러곤 날뛰는 루비드의 팔을 붙잡았다. 팔이 잡힌 루비드의 얼굴은 더 창백해졌다. 공포에 잠식된 소년은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옥죈 것을 떨치기 위해, 형의 손과 자신의 팔을 검으로 내리 찍었다.
‘거짓말……!’
루비드의 경악을 끝으로 다시 암전이 내렸다. 과거에서 어둠으로 돌아온 루비드는 혼란에 빠져 숨을 몰아쉬었다. 진짠가? 아니면 대충 꾸며낸 상상? 루비드는 의심을 거듭하며 아직 팔에 남은 상처를 손으로 꾹 눌렀다. 그때 또 다른 빛이 시야에 맺혔다.
‘또 뭐야.’
루비드는 주저하지 않고 다시 그쪽으로 다가갔다. 이번에도 빛이 쏟아지며 그를 전혀 다른 세상으로 끌어들였다. 이번에도 어떤 방이었다. 하지만 루비드가 아는 공간은 아니었다. 이곳은 그가 지내는 성보다 격이 떨어지는 평범한 저택이었다. 바이올린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한 여자애가 혼자 바이올린 연습을 하고 있었다. 루비드는 그 아이를 무심코 쳐다봤다가 아까와 다른 의미로 놀랐다.
“레나 루벨?”
바이올린을 연습하는 여자애는 다름 아닌 레나였다. 레나는 열 두어살 정도 되어 보였는데, 햇살이 내리는 창가 앞에서 바이올린을 켜고 있었다. 그런데 부드럽게 흐르던 선율이 갑자기 튀며 연주가 멈췄다.
―아야…….
레나가 울상을 지으며 현을 누르던 손끝을 호 불었다. 어린 레나는 얼얼한 손가락을 입에 물고 문 쪽을 힐끗 쳐다봤다. 그러더니 음모를 꾸미는 꼬마처럼 선반 쪽으로 다가갔다. 레나가 거기서 장식 밑에 숨긴 책을 꺼냈다. 바이올린 연습에 지친 레나는 구석에 숨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눈을 반짝이며 책장을 넘기는 레나는 꽤 행복해 보였다. 그래서 루비드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레나의 머리를 때려보았다.
“쳇.”
예상은 했지만 때려지지는 않았다. 지금이라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루비드는 아쉬워하며 레나의 방, 레나의 옷차림, 레나가 읽는 책 제목 따위를 관찰했다. 그러길 얼마, 딸깍하고 문소리가 났다. 레나는 후다닥 책을 숨기며 변명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어……?
하지만 정작 레나의 입에서 나온 말은 희미한 의문뿐이었다. 문을 열고 나타난 건 웬 중년 남자였다. 귀족도 아니고 집사나 하인도 아닌, 이 저택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남루한 사내였다. 그래서 레나는 낯선 사람과 마주한 아이답게 뻣뻣이 굳었다.
―반갑다, 네가 레나구나.
남자는 레나를 보더니 격 없이 인사를 건넸다. 그러곤 다소 짓궂게 덧붙였다.
―너도 ‘루벨’이니?
―그만 가십시오.
그때 또 다른 남자가 나타나 그 무례한 중년 남자를 밀어냈다. 나중에 등장한 인물은 루비드도 익히 아는 자였다.
“루벨?”
그는 루벨 후작이었다. 루비드는 젊은 루벨 후작을 보고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진짜 딸이었어?”
루비드는 기만당한 것을 깨닫고 이를 아득 물었다.
―그래, 알겠다. 오늘은 이만 갈 테니 또 보자.
루벨 후작에게 떠밀린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못 이기는 척 돌아섰다. 어린 레나는 까닭을 몰라 그 모습을 어리둥절하게 바라만 보았다. 그리고 갑자기 불이 꺼졌다. 또 어둠인가 싶더니, 주위가 다시 밝아왔다. 그리고 직전과 조금 달라진 모습의 레나 루벨이 보였다. 레나는 아직 어렸고, 창고 같은 다락에서 웅크린 채 울고 있었다. 루비드가 그 장소를 다 살피기도 전에 세상이 다시 깜빡였다. 그다음에 보인 것은 머리를 짧게 자른 레나였다. 이전보다는 조금 컸지만 아직 어려 보였다. 짧은 머리의 레나는 피처럼 붉은 하늘을 등지고 서 있었다.
‘여기 무덤인가?’
설마, 왜 벌써? 루비드는 반신반의하며 레나를 보다가 흠칫 놀랐다. 레나의 두 눈이 굶주린 포식자처럼 흉흉했다.
‘뭐야, 이건…….’
루비드는 삽시에 변해버린 레나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다. 몰래 책을 읽던 귀족 여자애, 허름한 창고에 갇혀 울던 소녀, 그리고 칼날보다 더 날카롭게 벼려진 레나 루벨. 루비드가 그 모습을 혼란스럽게 바라볼 때였다. 주변이 또 한 번 번쩍였다. 이번에 나타난 건 긴 머리를 질끈 묶고 푸른 제복을 입은 레나였다.
“……너냐?”
루비드는 혹시나 싶어 말을 걸었지만, 이번에도 환상인 듯 레나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루비드는 혀를 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긴 또 어디야?”
레나가 선 곳은 루비드에게 전혀 생소한 곳이었다. 심지어 제국도 아닌 것 같았다.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 안이었는데, 건물이 벽돌이나 목재가 아니라 회벽으로 칠해져 있었다. 그림에서 본 고대 국가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레나 루벨 앞에, 마찬가지로 고대의 복식을 한 남자가 무릎 꿇고 엎드려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남자가 몸을 바짝 낮춘 채 레나에게 말했다. 그러자 레나는 담담한 목소리로 화답했다.
―심장을 가지러 왔어요, 첼레스테.
‘첼레스테?’
첼레스테라는 말에 루비드는 눈을 홉떴다. 동시에 깨달았다. 저건 첫 원정 때의 레나 루벨이다. 그리고 이건 아무도 전말을 모르는, 첫울음을 삼킨 왕의 심장을 손에 넣던 순간이다. 루비드는 놀라서 엎드린 자를 다시 쳐다보았다. 단순히 고대의 복식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왕을 상징하는 홍색 옷을 입고 있었다. 그 왕, 첫울음을 삼킨 첼레스테가 말했다.
―그렇게 하십시오. 당신의 뜻을 어찌 거부하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겸손했다. 또 레나를 이미 아는 투였다. 첼레스테가 천천히 몸을 세웠다. 고개를 든 그는 울고 있었다. 그가 슬피 울며 레나에게 물었다.
―나를 용서해주시겠습니까?
―당신이 용서를 구해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의 아이예요.
고통스러워하는 첼레스테에게 레나가 대답했다. 그러자 첼레스테는 더 괴로워하며 재차 물었다.
―그 아이도 당신 안에 있습니까?
―모르겠어요, 너무 많아서.
―부디 날 용서한다고 해주세요. 그러지 않으면 나는 이 후회를 떨쳐낼 수 없습니다.
첼레스테가 몸을 떨며 레나의 발끝에 손을 얹었다. 그러곤 다시 엎드려 오열하며 청했다.
―제발 내게 자비를 베푸세요, 축복을 빼앗긴…….
그때, 강한 손이 루비드의 눈을 가리며 뒤로 확 끌어당겼다.
“윽!?”
루비드는 기겁하며 그 손을 붙잡았다. 그러자 귓가로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깊게 들어가면 위험해요, 루비드 씨.”
레나의 목소리였다.
“너!”
드디어 레나를 만난 루비드가 소리쳤다. 레나는 그를 도로 놓아주었고, 앞을 가리던 손이 사라졌을 때 루비드의 주변은 다시 어두워져 있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도 레나의 모습은 똑똑히 보였다. 얼떨떨해하는 루비드에게 레나가 말했다.
“여긴 틈이에요.”
“틈?”
“지나간 시간이 쌓이는 곳이요. 잘못 빠지면 영영 헤매게 되니까 조심해야 돼요.”
루비드는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레나를 바라보았다. 레나는 여전히 침착했고, 참다못한 루비드가 대놓고 물었다.
“너 정체가 뭐야?”
“곧 알게 될 거예요.”
“뭐?”
“그래서 하는 말인데, 비밀로 해줄래요? 여기서 알게 된 것들.”
까닭 모를 요청에 루비드가 눈썹을 찌푸렸다.
“내가 왜?”
“그냥 해달라는 건 아니에요.”
레나는 이 녀석이 삐딱하게 나올 줄 알고 조건을 달았다.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조건이었고, 아니나 다를까 루비드는 대놓고 들떴다가 곧 못 이기는 척 끄덕였다. 레나는 참 단순한 녀석이라고 생각하며 루비드에게 손짓했다.
“그럼 가요, 이쪽이에요.”
레나는 루비드의 손을 잡고 막막한 어둠을 헤쳤다. 레나는 칠흑 속을 쭉 나아가더니, 암막 커튼을 걷듯 어둠을 옆으로 밀었다. 어둠의 틈새로 빛이 쏟아지며 또 새로운 공간이 나타났다. 그곳은 왕의 옥좌가 높게 선 알현실이었다. 루비드는 그 알현실을 보며 묘한 기시감에 휩싸였다. 어쩐지 와본 적이 있는 장소 같았다. 루비드가 알현실을 둘러보는데, 나긋한 목소리가 울렸다.
“결국 여기까지 오셨군요.”
“클라비스……?”
루비드는 화려한 옷을 걸친 남자를 보고 저도 모르게 중얼댔다. 한 남자가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신성한 분위기를 가진, 그래서 계단이 아니라 구름을 밟고 내려오는 착각에 빠질 정도로 아름다운 남자였다. 루비드는 그를 보고 곧장 클라비스를 떠올렸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다른 사람이었다. 많이 닮긴 했지만, 저 남자는 클라비스와 달리 금발이었다.
“히엠스 그라샤.”
레나가 금발의 남자를 보고 중얼댔다. 루비드가 그 이름을 듣고 눈을 홉뜨는 사이, 히엠스 그라샤가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
“박대할 수는 없으니 어쨌든 환영합니다.”
그러곤 레나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축복을 빼앗긴 왕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