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죄와 업2020.12.17.
어린 레나는 들꽃이 만발한 풀밭에 누워 책을 읽고 있었다. 몰입해서 연신 책장을 넘기던 레나는, 돌연 고개를 들고 물었다.
“이거 진짜야?”
레나의 물음에 허공에 떠 있던 레지나가 둥실대며 내려왔다. 그러곤 레나가 읽던 책을 보며 어처구니없다는 듯 중얼댔다.
―뭘 읽나 했더니…….
레나가 읽던 책은 다름 아닌 황제 니힐의 전기였다. 그것도 하필이면 니힐이 처음 무덤에 내려와 다섯 왕들을 만나는 부분이다.
“이거 진짜냐고. 정말 이렇게 말했어?”
레나가 눈을 반짝이며 재차 물었고, 그 천진한 눈빛에 레지나는 한숨을 쉬듯 웃었다. 안도의 미소였다. 아비에게 버림받고 몇 번이고 죽음에 닿은 레나 루벨. 이제 고작 열두 살인 소녀는 냉혹한 세상에 홀로 남겨졌지만, 그럼에도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을 배신한 아버지 따위 보란 듯이 잘 살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하지만 그 강한 척은 오래 가지 못했다. 새로운 불청객이 어렵사리 꾸린 일상을 어지럽혔기 때문이다. 많은 심장을 가진 왕은 은밀히 레나를 노렸고, 덕분에 레나는 영문도 모른 채 또 무덤으로 끌려왔다. 무덤에 막 떨어졌을 때 레나는 충격에 빠져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렇게 넋을 놓고 있길 수십 시간, 레지나가 들판으로 데려와 서가를 열어주니 아이는 거짓말처럼 정신을 차렸다. 그게 기특하고도 가련해, 레지나는 레나의 호기심에 순순히 어울려주었다.
―나는 다시 돌아가 너희를 지배하리라. 산 자는 죽은 자를 감당하지 못하리라……. 이거 말이냐?
레지나가 전기에 쓰인 자신의 대사를 읽자 레나는 흥분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어린 소녀는 역사의 단편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보다 레지나가 정말 이런 소설 같은 대사를 읊조렸는지가 더 궁금했다. 그 노골적인 기대감에 레지나는 겸연쩍게 대답했다.
―하긴 했지.
“우와…….”
―무례한 녀석 같으니.
레지나는 혀를 차며 레나처럼 풀밭에 엎드렸다. 그러자 레나는 더 신이 나서 종알댔다.
“그런데 왜 안 했어?
―뭘 말이냐?
“지배한다며, 근데 아무것도 안 했잖아. 다른 왕들에 비해서 너무 소극적인 거 아냐?”
무덤이 익숙해졌다고 이런 농담까지 한다. 레지나는 기가 막혀서 잠시 웃었다. 한편으론 레나가 이렇게 묻는 까닭도 이해했다. 지상에서 활개를 치는, 그리고 한때 활개를 쳤던 망자들 중 레지나에게 속한 것은 없었다. 전기에서 가장 무시무시하게 발언한 것에 비하면 ‘용서받지 못한 왕’의 존재감은 아주 희미했다. 레나가 그것을 의아하게 여기며 물었고, 레지나는 반밖에 없는 자신의 뺨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세 가지 대답이 있지만 두 가지만 하마.
“치사해.”
―우선 하나. 나는 전혀 소극적이지 않아. 평균적으로도 그렇고 다른 왕들에 비해서도. 오히려 과격한 편이지.
레나는 그다지 와 닿지 않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레나가 무엄한 생각을 하는 게 뻔히 보였지만, 레지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덧붙였다.
―그리고 둘. 지금 네가 읽는 거 다 뻥이야.
“어?”
―태반이 날조지.
상상도 못 한 말에 레나의 눈이 커졌다.
“날조라고? 전부?”
―사실에 기반 했지만 진실은 다 숨겨 놨다. 교묘하게 왜곡했지. 게다가 그거 본인이 쓴 것도 아닐 거야.
“그, 그걸 어떻게 알아?”
―글 같은 걸 진득이 쓰는 성격이 아니거든. 그거 분명 대필이야.
레지나가 비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덕분에 레나는 멍하니 굳어 버렸다.
―레나?
레나가 갑자기 얼어붙자 레지나가 안색을 살폈다. 어쩐 일인지 레나는 정말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왜 그래?
“……거짓말이구나, 이거.”
레지나가 재차 묻자 레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중얼댔다.
“난 그것도 모르고…….”
레나는 잔뜩 실망한 얼굴로 책을 만지더니 결국 책장을 덮었다. 그러곤 속상한 듯 팔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렇게 충격받을 일인가?
“몰라…….”
―황제랑 친분이라도 있어?
“……그냥, 대단하다고 생각했어.”
검을 들고 망자와 싸운 니힐, 무덤을 정복하고 황제가 된 위대한 소녀. 무덤으로 추락한 레나는 니힐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꼈고, 그의 눈부신 승리도 동경했다. 그런데 날조라니. 레나는 잠시 얻은 위로를 도로 뺏긴 기분이었다.
“허탈해.”
레나는 작게 중얼대며 실망감을 삼켰다. 생각해 보면 이런 허탈함이 처음도 아니었다. 자작가의 영애이던 시절엔 로맨스 소설을 읽으며 화려한 사교계와 운명적인 만남을 꿈꿨다. 하지만 그 꿈은 변해버린 삶과 함께 아득히 멀어졌고, 그래서 레나는 다른 책을 읽었다. 어느 교사가 자신의 가난한 어린 시절을 담담히 풀어낸 따뜻한 수필이었다. 그걸 읽으며 레나도 잠깐 선생님이 되는 상상을 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괴한에게 위협을 받는 통에 먼 이야기가 되었다. 그래서 레나는, 숨도 쉬기 힘들 만큼 궁지에 몰렸지만 낙담하지 않으려고 새로운 이야기를 찾았다. 그게 황제 니힐의 전기였다. 그런데 그게 다 거짓말이란 소릴 들으니, 간신히 긁어모은 힘이 도로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괜한 얘길 했군.
레지나가 실망한 레나의 정수리를 토닥토닥 다독였다. 잠자코 위로를 받던 레나가 슬쩍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그럼 너는 나쁜 사람 아니야?”
―무슨 소리지?
“망자의 왕은 생전에 엄청난 악인이었다고 나오잖아. 그게 날조면 너는 나쁜 사람이 아닌 거지?”
레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는 투였다.
―아니, 나는 악인이다.
레나가 무엇을 기대하는지 알지만, 레지나는 단호히 대답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하지만 악인이어서 망자의 왕이 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지.
레지나는 그렇게 말하며 레나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았다. 상냥한 건지 무심한 건지 모를 손길에 레나는 볼멘소리로 중얼댔다.
“너는 왜 망자의 왕이 된 거야?”
―업을 짊어졌기 때문이다.
“업……?”
―인간이 쌓아올린 죄가 이곳에 문턱을 만들고, 그 문지기로 가장 어울리는 자가 왕이 된다. 나는 사는 동안 잘못하지 않았다. 다만 이곳에 쌓인 죄와 업이 나를 선택했고, 나는 거기에 따랐다.
레지나의 설명에 레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
―이해하게 될 거다.
레나의 항의에 레지나가 옅게 웃었다. 그러곤 자신을 닮은 아이에게 속삭였다.
―너 또한 죄와 업에 선택된 자니까.
***
“박대할 수 없으니 어쨌든 환영합니다. 축복을 빼앗긴 왕이여.”
히엠스 그라샤는 그렇게 말하며 불청객인 레나 루벨에게 인사했다. 그 나긋한 몸짓을 레나는 덤덤하게, 루비드는 경악하며 바라보았다.
“축복을 빼앗긴 왕이라고?”
루비드는 눈을 크게 뜨고 레나 루벨과 히엠스 그라샤를 번갈아보았다. 하지만 레나와 히엠스는 루비드를 무시하고 서로에게 말을 건넸다.
“나는 왕 같은 게 아니에요.”
“그럼 그대와 같이 고귀한 이를 무엇이라 불러야 합니까?”
“그냥 한 사람이요. 아주 많은 사람 중 한 명.”
“겸손이 과하군요.”
히엠스가 옅게 웃었다. 그렇게 웃으니 클라비스와 더 닮아 보였다. 좋지 않은 연상에, 레나는 표정을 굳힌 채 본론을 꺼냈다.
“심장을 가지러 왔어요.”
“알고 있습니다.”
“저항할 건가요?”
“이미 반쪽이 난 몸으로 어찌 그대를 거역하겠습니까. 그대가 성 안까지 들어온 이상 내겐 승산이 없습니다.”
레나를 대하는 히엠스의 태도는 매우 정중했다. 그가 왕인 것을 감안하면 비굴하게 보일 정도였다. 히엠스 그라샤는 이미 패배를 받아들인 듯, 여상히 홀가분한 태도로 물었다.
“우는 왕의 심장도 이렇게 가져가셨습니까?”
“첼레스테 왕은 스스로 심장을 내줬어요.”
“그랬겠군요. 그럴 수밖에요. 그대는 버림받은 자식이고 그는 버린 부모이니, 그대 앞에서 낯을 들 수 없었겠지요.”
그때였다.
“아까부터 뭔 소리야, 말을 하려면 알아듣게 하던가!”
두 왕에게 무시당한 루비드가 벌컥 존재감을 드러냈다. 심각한 이야기가 오가면 삼자는 알아서 입을 다무는 법인데, 어린 왕자는 그저 소외당한 게 분해서 레나에게 앞뒤 없이 따져 물었다.
“뭐야, 너. 저거랑 알아? 왜 알아?”
“잠깐만요, 지금 중요한 얘기를…….”
“너한테나 중요하지 내가 알바야?”
“루비드 씨.”
“너, 망자냐?”
“……네?”
앞뒤만이 아니라 밑도 끝도 없는 말에 레나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루비드는 더없이 진지했다.
“그건 아닌데…….”
“그럼 왜 망자처럼 부르는 건데?”
축복을 빼앗긴 왕. 루비드에겐 그 표현이 망자의 이름으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의문이 생긴 루비드는 참지 않고 떽떽댔고, 그 천지 분간 못하는 모습에 히엠스 그라샤가 물었다.
“그 참신한 동물은 뭐죠?”
“당신의 자손이요.”
레나의 짧은 대답에 히엠스가 실소를 터트렸다.
“100년 전엔 딸이 내 반쪽을 깨 가더니, 나머지 반쪽은 아들이 가지러 왔군.”
히엠스는 그렇게 자조하더니 루비드에게 손을 뻗었다.
“기왕 이렇게 됐으니 얼굴이나 가까이서 보고 싶구나. 올라오너라. 그라샤인 너는 여기 오를 자격이 있다.”
히엠스가 그렇게 말하며 손짓하는 순간 루비드는 깨달았다. 묘하게 익숙한 이 장소가 어딘지. 여기는 다름 아닌 두엄의 궁이었다. 폐허가 되기 전, 두엄의 궁이라 불리기 전 왕궁으로서 찬란히 빛나던 바로 그 알현실이다. 이곳이 어딘지 알아챈 루비드는 심경이 조금 변했다. 히엠스 그라샤가 자신의 조상인 것이 비로소 실감나서, 그는 올라오라는 명령에 저도 모르게 주춤했다.
“가지 말아요.”
하지만 움직이기 전에 레나가 막았다.
“함정일 수도 있어요.”
“여기서 더 발악할 생각은 없습니다.”
레나가 경계하자 히엠스가 서글피 중얼댔다. 하지만 레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많은 심장을 가진 왕이 경고했다. 광신도와 전쟁광이 자신을 노리고 있다고. 그러니 이게 다는 아닐 것이다. 레나는 히엠스 그라샤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닌 것을 염두하고 루비드 앞에 서며 말했다.
“그만 가져가겠습니다.”
“부디, 가져가십시오.”
레나의 요구에 히엠스는 항복한 왕처럼 망토롤 벗고 몸을 낮췄다. 레나는 루비드를 뒤에 남겨둔 채 알현실의 붉은 카펫을 밟으며 왕에게 다가갔다. 레나가 계단을 밟고 왕좌 앞에 설 때까지도 히엠스는 그렇게 죽은 듯 숙이고 있었다. 레나는 그에게 천천히 다가가 손을 뻗었다. 그 순간 히엠스 그라샤의 등에서 불꽃이 날개처럼 돋아나 레나를 휘감았다.
‘그럼 그렇지!’
레나는 지독한 열기에 급히 몸을 물렸다. 하지만 연기와 함께 치솟은 화염은 그보다 빠르게 레나를 감쌌고, 그 안에 꼼짝없이 갇힌 레나는 별수 없이 다시 돌진했다. 이글대는 불꽃 속에서 붉게 달아오른 히엠스 그라샤도 레나에게 달려들었다. 카앙! 레나의 단검과 히엠스의 손이 맞물렸다. 그의 손은 마치 용암처럼 이글대며 레나의 검을 붉게 달궜다. 전도되는 열기에 레나는 검을 버리고 채찍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소용돌이치는 불꽃 속에서 업화를 짊어진 왕과 무한에 가깝게 충돌했다.
“갓 태어난 왕이여! 너를 저주한다!”
히엠스가 레나의 맹공을 견디며 소리쳤다.
“무엄하다! 참람하다! 건방지다! 썩은 장작들을 끌어다가 왕 노릇 하는 너를 저주한다! 너를 반드시……!”
히엠스의 외침이 뚝 끊겼다. 열기를 견딘 채찍이 그의 타오르는 살갗을 기어이 깎아내 심장을 찾아 긁었기 때문이다. 심장이 겉으로 드러나자 히엠스의 몸이 경직되며 열기가 사그라졌다. 히엠스가 멈추자 레나는 숨을 몰아쉬며 그의 몸을 휘감은 채찍을 더 바짝 조였다. 그러곤 숨을 길게 내뱉으며 중얼댔다.
“신을 믿지도 않으면서 무슨 저주.”
레나의 조롱에 히엠스는 힘없이 웃었다. 열기가 식은 그는 숯처럼 부서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아름답고 선량했다.
“역시 반쪽으로는 하나를 이길 수 없구나.”
“알면서 왜 굳이.”
“반쪽이 둘이 되면 그 또한 하나지.”
히엠스가 채찍에 묶인 채 옅게 웃었다. 그러더니 마지막 힘을 짜내, 자신의 몸을 그을림으로 폭발시켰다.
“윽!”
레나는 재빨리 입을 막았다. 하지만 늦었다. 레나는 저도 모르게 그 새카만 그을림을 한 모금이나 삼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