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강아지2020.12.21.
쿠웅! 또다시 진동이 일어나며 땅이 꺼졌다. 루비드는 초조한 얼굴로 자욱한 재를 바라보았다. 알현실 입구에 선 루비드는 왕좌 앞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다. 레나가 히엠스에게 다가서자 별안간 화염이 몰아쳤고, 그 안에서 싸우기라도 하는지 천둥소리가 끝도 없이 울렸다. 그러더니 다시 불이 꺼지며 시커먼 재가 날렸고, 이젠 궁까지 무너지려는 듯 바닥이 계속 진동하고 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루비드는 초조한 심정으로 레나를 찾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시야가 묘하게 이동했다. 아래에서 위로, 점점 높아졌다. 눈높이가 변하며 헐렁하던 옷이 몸에 달라붙었다. 변화를 느낀 루비드는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돌아왔어?’
작아진 손이 다시 길어졌다. 옷도 몸에 딱 맞는다. 기분 탓이 아니다. 정말 원래대로 돌아왔다. 갑자기 왜? 상태를 살피던 루비드는 레나의 말을 퍼뜩 떠올렸다. 레나가 말했다. 히엠스 그라샤가 죽으면 원래대로 돌아올 거라고.
‘그럼…….’
끝난 건가? 루비드는 눈에 힘을 주고 날리는 재와 연기를 바라보았다. 그때 누군가가 검은 잿더미를 헤치고 나왔다. 레나 루벨이었다.
“너…….”
레나는 온몸에 검은 재를 묻히고, 무언가를 견디듯 비틀대고 있었다. 멀쩡한 건지 다친 건지 알아 볼 수 없는 몰골로 레나가 계단을 내려왔다. 레나는 당장 쓰러질 것처럼 휘청대며 루비드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약속…….”
그것은 다름 아닌 왕관이었다. 레나는 그걸 루비드의 가슴팍에 떠밀며 중얼댔다.
“……지켜.”
레나는 그 말을 끝으로 쓰러졌다. 레나가 자기 쪽으로 넘어지자 루비드는 반사적으로 피했다. 콰당! 레나가 큰 소리를 내며 쓰러지자 날리던 재도 차츰 흩어졌다. 이윽고 다시 드러난 왕좌는 비어 있었다. 루비드는 텅 빈 왕좌와 쓰러진 레나 루벨, 그리고 그가 직전에 건넨 왕관을 순서대로 바라보았다. 여기 들어오기 직전 레나는 약속했다. 자신에 대한 걸 비밀로 해주면 히엠스 그라샤의 심장을 넘겨주겠다고.
‘그럼 이게…….’
루비드가 왕관을 내려다보는데 쿵 소리가 나며 성이 진동했다. 주인을 잃은 성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루비드는 내려앉는 기둥과 천장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그는 퇴로를 찾다가 다시 레나를 보았다. 재에 덮인 레나 루벨은 완전히 정신을 잃어, 죽은 듯이 쓰러져 있었다. . . . 허물어지는 성벽을 가르고 무형의 힘이 뻗어 나왔다. 성벽의 잔해가 사방으로 튀며 틈이 벌어졌고, 그 사이로 두 사람이 구르듯 빠져나왔다. 참격으로 퇴로를 만든 루비드와 정신을 잃은 레나였다.
‘망할, 내가 왜……!’
루비드는 숨을 몰아쉬며 둘러업고 있던 레나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는 기절한 레나를 챙겨야 하는 상황에 심히 짜증이 났다. 도중에 길이 막혀서 같이 매장될 뻔도 했다.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기어이 함께 밖으로 나온 루비드는 기절한 레나를 보며 퉁명스레 중얼댔다.
“빚은 갚았다.”
루비드가 그렇게 말하며 옷에 묻은 재를 털 때였다. 크르르……. 겨우 숨을 돌리려는데, 짐승의 낮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또 뭐야……!”
루비드는 신경질을 내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러곤 한층 더 험악하게 인상을 썼다. 그는 어느새 포위되어 있었다. 인간의 얼굴을 가진, 뿔이 날카롭게 돋아난 기괴한 맹수들이 성벽에 빼곡히 서서 레나와 루비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놈들은 언제 나타난 거지?’
저 뿔, 그리고 인간의 얼굴. 이들은 서쪽을 먹어치운, 사자를 가둔 왕의 손속들이었다. 히엠스 그라샤는 레나 루벨이 황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이상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선택했다. 반쪽으로는 하나를 이길 수 없으니, 다른 반쪽의 힘을 빌리기로. 레나 루벨을 유인해 재를 먹이고 사자를 가둔 왕에게 뒤를 맡기는 것. 이 또한 히엠스 그라샤의 안배였지만, 루비드가 그것을 알 리 없었다. 날벼락을 맞은 루비드는 레나의 채찍을 움켜쥐고 망자의 수를 헤아렸다.
“제길.”
욕 밖에 나오지 않았다. 작정하고 몰이에 나선 망자들은 사방을 빈틈없이 막고 먹잇감을 향해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 루비드는 애써 머리를 굴렸다. 맞서 싸우는 건 자살행위. 몇 놈 치고 몸을 빼야 한다. 하지만 그러려면……. 루비드는 일그러진 얼굴로 발치에 쓰러진 레나를 쳐다보았다. 돌아가는 꼴을 보니 망자들이 노리는 건 레나 루벨. 그는 상관없다. 게다가 빚은 성에서 데리고 나온 걸로 충분히 갚았다. 같이 죽어줄 의리까진 없다. 하지만…….
“젠장……!”
하지만 버리고 가면 이 독한 여자가 복수하러 올지도 모른다. 루비드는 차라리 그렇게 생각하며 쓰러진 레나의 앞에 섰다. 망자들이 돌진해왔다. 루비드는 채찍으로 참격을 날렸다. 가장 앞서 달리던 놈의 다리가 잘려나갔다. 그러자 뒤에 있던 망자들이 넘어진 놈을 밟아 다지며 더 맹렬히 달려들었다. 한 놈이 루비드를 덮쳤다. 콰득! 루비드는 채찍의 손잡이로 놈의 이빨을 간신히 막았다. 인간의 얼굴로 이빨을 세우니 기분이 더 더러웠다. 루비드는 잠시 힘겨루기를 하다가 바닥에 늘어진 채찍을 힘껏 걷어찼다. 채찍이 요동치며 촘촘히 박힌 철편에서 바늘 같은 참격이 뻗어나갔다. 파바박! 망자는 벌집이 되어 쓰러졌지만, 한 놈 치우기 무섭게 다른 놈이 덤벼들었다. 루비드는 손잡이로 놈의 안면을 내리찍고 그대로 돌려 차 날려버렸다. 그러곤 또 다른 발톱을 팔로 막았다.
“야! 일어나!”
루비드가 망자를 막으며 땅을 찼다. 레나의 얼굴에 흙이 튀었지만 레나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미치겠네, 진짜!”
루비드가 바락 소리치는 순간 또 다른 망자가 도약하며 그림자를 드리웠다. 갑자기 어두워졌다고 생각한 루비드는 고개를 들었다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뿔을 왕관처럼 세운 망자가 그림자를 안고 위에서부터 쏟아지고 있었다. 이미 두 팔을 쓰고 있어 막을 방도가 없었다. 피할 틈도, 도망칠 길도 없다. 루비드는 저도 모르게 죽음을 떠올렸다. 핑. 그때, 아주 작은 소리가 그의 귓가를 스쳤다. 동시에 가벼운 바람이 불어와 땀에 젖은 그의 머리카락을 살짝 흔들었다. 그리고 요란한 소나기 소리가 이어졌다. 투둑. 툭. 후두두둑. 소리를 내며 와르르 쏟아진 것은 토막 난 망자들의 주검이었다. 루비드를 에워싼 망자들이 모조리 잘려나가며 떨어졌다. 루비드는 단숨에 쓸려나간 망자들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뒤를 돌았다. 그러자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광경이 보였다. 붉은 옷의 이우라 플레누스. 검은 옷의 리그난 아이테르너. 그리고 그들과 같은 옷을 입은 무수히 많은 기사들.
‘저 새끼들이 왜…….’
같이 있지?
‘빌어먹을.’
루비드는 짧게 혀를 찼다. 꿈이다. 분명 꿈이야. 그렇지 않고서야 저놈들이 나란히 나타날 리가. 루비드가 현실을 부정하는 사이 망자들이 다시 몰려왔다. 그리고 동부와 북부의 기사들도 마주 달려왔다. 기사와 망자들이 거세게 충돌했다. 격렬한 전투가 시작됐지만 루비드는 여전히 눈앞의 상황을 믿지 못했다. 진이 빠진 몸이 덜컥 무너져, 누군가가 어깨를 받쳐 세울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거 현실인가?’
루비드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이우라를 바라보았다.
이우라의 얼굴은 여느 때처럼 굳어 있었다. 그게 경멸하는 표정인지 걱정하는 표정인지 구분할 수 없었던 루비드는, 괜히 짜증이 나서 마지막 힘을 짜내 중얼댔다.
“개새끼…….”
그 말을 끝으로 루비드는 푹 쓰러졌다. 이우라가 마지막까지 버릇없는 동생을 챙길 때, 린은 약혼녀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레나!”
린은 쓰러진 레나를 일으켜 품에 안았다. 그리고 얼굴에 묻은 재와 흙을 털어내며 상태를 살폈다.
“레나, 레나.”
상처는 없는데, 아무리 불러도 일어나지 않았다.
“퇴각한다!”
이우라가 북부 기사들에게 명했다. 망자들이 울었다. 피와 살이 튀었다. 그 혼돈의 중심에서, 린은 깨어나지 않는 레나를 절박하게 끌어안았다. *** 그 시간, 유니와 엔지는 두엄의 궁에서 균열로 들어간 기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유니는 레나의 당부대로 동부의 보호를 받았고, 어쩌다보니 엔지도 그 곁에 있었다. 그래서 두 아이는 나란히 앉아 사람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바랐다.
“누가 나옵니다!”
한 기사의 외침과 동시에 말 한 마리가 균열을 깨트리며 달려 나왔다. 린과 레나였다.
“아가씨!”
유니는 린에게 안긴 레나를 보자마자 하얗게 질려 달려갔다. 엔지도 유니를 따라가려다가 우뚝 멈췄다.
‘안 돼.’
나는, 가면 안 돼. 본능처럼 판단한 엔지는 애써 걸음을 멈췄다. 그러곤 기절한 듯 기사들의 부축을 받아 옮겨지는 레나 루벨을 바라보았다. 혼란스러웠다. 갑자기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일은 누군가가 꾸민 일처럼 보였다. 차마 믿고 싶지 않은 가설에 엔지는 몰래 바라보았다. 저편에 선 자신의 아버지, 루벨 후작을. . . . 약 한 시간 전, 루비드가 두엄의 궁을 무너트린 직후였다. 레나와 루비드가 균열로 넘어가는 모습을 보며, 엔지는 아프게 뛰는 가슴을 몰래 움켜잡았다. 상상도 못 했다. 망자들이 갑자기 쏟아져 나올 줄은, 두엄의 궁이 이렇게 무너질 줄은.
‘그런데 아버지는 왜…….’
왜 날 챙긴 거지? 마치 이런 일이 생길 줄 미리 알았던 것처럼. 엔지는 쿵쿵 뛰는 가슴을 누르며 아버지를 몰래 바라보았다.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정황이 말하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을 만든 게 아버지, 루벨 후작이라고. 마침 아버지는 기사들에게 명령하고 있었다. 몇 명의 기사가 북부공에게 소식을 전하기 위해 말을 타고 달려갔다. 그리고 따로 무언가 당부받은 기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걸어서 두엄의 궁 밖으로 나갔다.
‘심부름인가?’
엔지는 걸어가는 기사를 의아하게 바라보다가, 아까 저곳으로 누가 빠져나갔는지 떠올리고 헛숨을 삼켰다.
‘하녀!’
아까 레나 루벨의 하녀가 밖으로 달려 나갔다. 설마, 그 애를 찾으러 간 건가? 엔지의 심장이 또다시 쿵 떨어졌다.
‘아니겠지. 걜 굳이 왜…….’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던 엔지는 도로 입술을 깨물었다. 유니는 레나 루벨의 유일한 하녀. 그 곁을 가장 가까이 지키는 사람이다. 그러니 이용가치는 얼마든 있다. 정보를 캐낼 수도 있고, 인질로 삼을 수도 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엔지는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그러곤 아버지의 눈을 피해 궁 밖으로 빠져나갔다. 잠시 후, 밖으로 나온 엔지는 기침을 참으며 달렸다. 숨이 가빠지자 목에서 쌕쌕대는 소리가 났지만 엔지는 고통을 참고 유니를 찾았다. 그렇게 정원을 반쯤 가로질렀을 때, 엔지는 곧장 유니를 발견했다.
“야, 이거 안 놔!? 야 이런 씨……!”
난생처음 듣는 욕이 정원 안쪽에서 들려왔다. 엔지는 숨을 몰아쉬며 그 방향으로 달려갔다. 담벼락의 철창 사이를 지나고 수풀을 헤치니, 유니를 어깨에 들쳐 멘 사내들이 보였다.
‘어?’
그런데 뜻밖에도 그들은 푸른 제복을 입고 있었다. 엔지가 남부 기사들을 보고 주춤하는데, 그때 발버둥 치던 유니가 엔지를 발견했다.
“야!”
유니의 외침에 기사들도 뒤를 돌아보았다. 덕분에 엔지는 움찔했다가 하는 수 없이 수풀 밖으로 나왔다.
‘왜 남부 기사들이…….’
억지로 나오긴 했지만 상황을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북부 기사들이 있을 줄 알았는데, 어떻게 된 거지? 엔지는 자신이 끼어들어도 되는 상황인지 몰라 주저했다. 그러자 유니가 빽 소리쳤다.
“얘네 너희 아빠 똘마니야!”
그리고 유니의 외침은 기사들보다 엔지를 더 당황하게 만들었다. 엔지는 유니에게 자신의 이름과 정체를 밝힌 적이 없었다.
“빨리 이놈들 말려 봐!”
유니가 재차 소리쳤고, 잠깐 당황했던 엔지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저, 저는 엔지 루벨입니다. 그 애 내려주세요.”
엔지가 이름을 밝히며 나서자 기사들이 주춤댔다. 그들은 엔지를 아는지 곤혹스러운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아버님의 명입니다.”
“그래, 이것 봐! 이럴 줄 알았어! 너네 다 죽었어, 내가 영감님한테 다 이를 거야!”
유니가 자길 들쳐 멘 기사를 무릎으로 찍으며 소리쳤다. 유니의 외침에 기사들의 얼굴이 일그러졌고, 엔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저 바보……!’
저렇게 협박하면 기사들이 유니를 놔줄 리 없다. 어쩌면 유니의 입을 영영 막기로 이미 결심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렇게 된 이상 기사들이 자신의 말을 들을 것 같지도 않았다. 난감해진 엔지는 하는 수 없이 모험을 감행했다.
“아, 아버지!”
엔지가 눈을 크게 뜨며 중얼댔다. 기사들은 흠칫 놀라 그쪽으로 눈을 돌렸고, 그 틈에 엔지는 유니를 들쳐 멘 기사의 오금을 힘껏 걷어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