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접촉2021.01.04.
히엠스 그라샤. 그라샤 왕국의 다섯 번째 국왕인 그는 서른 살 젊은 나이에 왕이 되어 50년간 통치했다. 그는 왕국의 황금기에 국왕이자 교황으로서 모든 권력을 독점한 채 여든까지 천수를 누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왕이 온갖 복을 받아 여한 없는 삶을 살았다고, 후련하게 세상을 떠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그 왕은 죽음 앞에서 극심히 두려워했다. 죽음 너머는 그도 경험해본 적 없는 세계였다. 그리고 그곳은 왕관도 군대도 가져갈 수 없는 곳이었다. 이제껏 강철 같은 권세로 스스로를 지켜온 왕에게 홀로 떠나야 하는 여정은 너무나 잔혹했다. 일평생 가진 것 없이 살아온 자들은 차라리 홀가분할 수 있겠지만 왕은 아니었다. 그는 많이 가진 것에 너무 익숙했고, 그래서 임종의 순간 두려움에 떨며 신음했다. 아, 죽고 싶지 않다. 죽고 싶지 않다. 나는 조금 더 왕으로 존재하고 싶다. 신이시여, 부디 존재하지 마십시오. 나는 심판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부디 어디에도 계시지 마십시오. 노쇠한 히엠스 그라샤는 마지막 순간, 처음으로 신을 찾아 빌고 또 빌었다. 그리고 죽음이 찾아왔다. 숨이 끊어진 직후, 그는 붉게 타는 하늘 아래 있었다. 그리고 발밑엔 처절하게 팔을 뻗는 무수히도 많은 인간들이 있었다. 그들을 본 히엠스는 도망치려 했지만 걸음을 떼기도 전에 해일처럼 덮쳐오는 손에 속절없이 사로잡혔다. 아, 이게 죽음인가. 이게 지옥인가. 이것이 내 생의 대가인가. 히엠스가 인간과 아우성의 탁류 속에서 몸부림칠 때였다.
―왕이여.
―왕이시여.
문득 그를 부르는 음성이 들려왔다. 히엠스를 사로잡은 손들의 목소리였다. 히엠스가 놀라 귀 기울이자 그들이 말했다.
―우릴 이끄소서.
―우리의 왕이 되소서.
―다시 한번 우리를 일으키소서.
히엠스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보았다. 그러자 그들이 무엇인지 저절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죽은 자들이었다. 살아생전 신을 모시던 자들이었고, 제자들을 가르치던 자들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이용해 착복하고 조종하고 간음하며 교묘하게 잇속을 채운 거짓말쟁이들이었다. 모든 시대, 모든 나라에 있던 타락한 신관과 부패한 교사들이 그곳에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의 죄와 업에 억눌려, 이 너머 다음 세상으로 가지 못하고 진액에 갇힌 벌레처럼 이곳에 찐득하게 들러붙어 있었다. 그러다 자신들과 닮은 이를 발견하면 맹목적으로 손을 뻗어 무리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히엠스를 그들을 보며 깨달았다. 아, 저기에 내 자리도 있구나. 나도 저렇게 가라앉겠구나. 히엠스는 아득히 절망하며 무수한 손에게 물었다.
―내가 왕이 되면 너희는 내게 무엇을 바치겠느냐.
그러자 이미 죽은 자들의 손이 대답했다.
―모든 것을.
―존재를.
―나를.
―이름을.
히엠스는 그들의 비굴함을 비웃었다. 가련한 것들, 진창에 빠져 몸부림치는 버러지들. 잘못을 뉘우치지는 못할망정 제게 어울리는 왕을 추대해 고통을 면하고자 하는 악하고 불쌍한 것들. 자신의 죄와 업에 짓눌려 더 나아가지 못하고 벌 받는 자들. 그래, 너희야말로 나의 백성들이다. 히엠스는 망설임 없이 그 손을 맞잡았다. 그러자 죽은 자들이 그를 눌러 죽일 듯 모여들며 소리쳤다.
―왕이여, 여린 살점을 태운 왕이여.
―하늘을 검게 그을린 왕이여.
―우리를 이끄소서.
―태움과 그을림의 왕이여.
죽은 자들의 노래와 함께 알 수 없는 힘이 소용돌이쳤다. 손들이 무언가 반짝이는 것을 가져왔다. 그것은 히엠스가 생전에 머리에 이던 왕관이었다. 죽은 자들이 히엠스에게 왕관을 바쳤다. 그는 손을 뻗어 왕관을 받았고, 직후 영혼이 찢기는 고통에 정신을 잃었다. 이윽고 다시 깨어났을 때, 그는 가장 젊고 아름답던 시절의 모습으로 서 있었다. 뼈와 피가 아닌 불과 재로 만들어진 몸이었다. 몸에서 알 수 없는 힘이 흘러넘쳐, 히엠스는 손아귀에 가득 찬 힘을 허공에 뿌렸다. 그러자 화산이 폭발하듯 화염이 치솟으며 이미 붉은 하늘을 더 붉게 태웠다.
“하, 하……!”
그가 생전에 일으킨 어떤 불보다 더 크고 강한 불이었다. 그것을 보며 히엠스는 기뻐했다. 납덩이처럼 무거운 심장이 타는 듯이 아팠지만, 그것을 제외하고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붉은 하늘 아래 심판은 없고 그는 여전히 왕이었다. 히엠스 그라샤가 환희할 때였다. 새 왕의 탄생을 축하하듯, 이미 무덤을 다스리던 다른 왕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끊임없이 흐느끼는 우는 왕, 애욕을 흘리는 뱀 왕, 그리고 늠름한 위용의 사자 왕까지. 그들 또한 살아생전 왕이었고, 사후엔 죽은 자들에게 선택되어 망자의 왕이 된 자들이었다. 그들은 히엠스를 자신들의 동류로 인정했고, 히엠스도 그들을 보며 확신했다. 아, 이들이야말로 왕 중의 왕. 살아서 왕 노릇 하던 자들 중에서도 특별히 선별된 진짜 왕. 왕이란 위대한 것. 특별한 것. 거스를 수 없는 것. 신이시여, 처음으로 감사합니다. 당신을 믿지 않은 내가 옳았습니다. 죽음이 닥쳐 모든 것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왕이 아니라 가련한 영혼으로 전락하는 줄 알았는데 나는 당신을 만나지 않고 왕이 되었습니다. 히엠스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불멸의 왕이 되어 무덤의 정점으로 군림했다. 100년 전, 산자와 망자의 세계가 이어질 때까지.
. . . 인간의 역사엔 무수히 많은 왕이 있지만, 그중에서 망자의 왕으로 선택된 것은 한 손에 꼽힐 만큼 적다. 그래서 그것은 히엠스에게 가장 큰 영광이자 자부심이었다. 때문에 레나 루벨의 존재는 그의 영광을 더럽히는 불순물과도 같았다. 왕도 아니고 지배자도 아닌, 승자도 강자도 아닌 보잘것없는 여자아이가 자신과 같은 반열에 들다니. 그는 인정할 수 없었다. 심지어 레나 루벨은 그의 자부심을 박살내는 데 그치지 않고 최악의 위험인물로 성장했다. 100년 전 그라샤의 딸이 무덤을 정복한 후, 무참히 패한 망자의 왕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성벽을 쌓았다. 그러니 원래대로라면 제국의 후예들은 무덤을 정복하기 위해 수년에서 수십 년에 이르는 시행착오를 해야 했다. 그런데 무덤의 최근 사정까지 다 아는 레나 루벨이 그 비밀을 멋대로 지상에 폭로하며 왕들은 다시 성 밖으로 끌려나오는 신세가 되었다. 이름이 불리면 존재를 드러내야 하는 그들의 섭리를 알리고 벌써 망자의 왕을 둘이나 도륙했다. 이러니 관심이 많을 수밖에. 그는 나중을 위해서라도 이 불경한 존재가 대체 어떻게 성립했는지, 그리고 그가 무엇을 원해서 이 사달을 내는지 알아야 했다. 한편 히엠스의 긴 이야기를 듣던 레나는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속셈으로 접근하나 싶었는데, 얘길 들어보니 이거 하나는 알겠네요.”
“그게 뭐죠?”
“당신이 왕이라는 이름에 굉장히 집착한다는 거요.”
레나의 웃음 섞인 평가에 히엠스도 입을 꾹 닫고 웃었다. 대놓고 불쾌한 기색이었지만 레나는 태연히 되물었다.
“애당초 왕이라는 게 뭐죠?”
“다스리는 존재죠.”
“아뇨, 왕은 다스릴 기회가 생긴 사람이에요.”
묘한 말장난에 히엠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지만 레나는 여상한 투로 말을 이었다.
“어쩌다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어쩌면 무거운 짐을 지게 된 그냥 여러 사람 중 하나예요.”
“그게 그대가 정의하는 왕입니까?”
“그러면 차라리 다행이게요.”
히엠스의 물음에 레나가 비웃듯 대답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세상엔 당신 같은 왕도 많죠.”
“나 같은 왕?”
“자신이 특별하다고 믿는 바람에 편협해진 왕이요. 그래서 결국 선을 넘은, 당신과 내 아버지 같은 사람.”
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치맛자락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곤 그 천의 질감을 손끝으로 확인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왕이 아니에요. 당신이 이걸 이해 못 하는 건 오직 왕들만이 힘을 가진다고 믿기 때문이에요. 당신 같은 왕들만 싸우고 이길 수 있다고 믿으니까.”
“싸우고 이기는 자들은 결국엔 왕이 되지요.”
“아뇨, 힘을 얻었다고 반드시 왕이 될 필요는 없어요.”
레나가 편협하다고 한 것이 바로 이런 발상이다. 이 또한 흔하디흔한 선입견이다. 버림받은 여자아이라고 반드시 망가져야 하는 게 아닌 것처럼, 강해진 숙녀도 반드시 왕이 되어야 하는 건 아니다. 꼭 복수할 필요도 없으며, 괴물이 될 필요는 더더욱 없다. 그저 약함과 강함을 이해하는 사람이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래서 레나는 스스로를 한 사람이라 칭하지만, 왕으로 태어난 히엠스는 그 말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럼 왕의 친구가 되어야겠군요. 그 힘과 능력을 필부의 것으로 두기엔 너무 아까우니.”
그래서 그는 오히려 레나에게 제안했다.
“혹시 황제 대신 우리와 손을 잡는 건 어떻습니까?”
“그럼 여기서 내보내 줄 건가요?”
파격적인 제안을 하려던 히엠스는 레나가 냉큼 묻자 잠깐 당황했다. 그 모습을 보며 레나가 짙게 웃었다.
“역시.”
레나는 히엠스를 보며 아까부터 만지작대던 자신의 치맛단을 북 찢었다. 그러곤 더 당황하는 히엠스에게 달려들었다. 레나가 자신을 잡으려 들자 히엠스는 몸을 재로 바꿔 피했다. 그에 레나는 기다렸다는 듯 뜯어낸 치마폭을 펼쳐 그 재를 몽땅 붙잡았다. 재는 그 안에서 벗어나려는 듯 생물처럼 움직이더니, 이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다시 히엠스 그라샤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꼼짝없이 사로잡힌 왕이 낭패한 기색을 숨기며 물었다.
“이게 무슨 짓이죠?”
“탈출 시도요. 아까 그랬죠? 혼자선 벗어날 수 없다고.”
그러니 도움을 받을 셈이다. 날 가둔 장본인, 당신에게. 위대한 왕께서 고작 수다를 떨려고 여기까지 찾아왔을 리는 없다. 기억을 훔쳐보려고 했다는 건 정보를 캐내려 했다는 의미, 그리고 정보를 캐내러 왔다면 들고 나갈 방법도 있다는 뜻이다.
“딱히 협조는 안 해도 돼요. 당신이 멋대로 들어온 것처럼 나도 마음껏 해볼게요.”
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사로잡힌 히엠스의 목에 손을 얹었다. 그러곤 이것이 꿈인 것을 상기하며 자신의 의식이 아니라 히엠스의 의식에 집중했다. 그렇게 나갈 길을 찾을 때였다.
“윽!”
돌연 아찔한 충격이 느껴지더니 세상이 촛불처럼 흔들렸다. 레나는 저도 모르게 머리를 쥐며 비틀댔고, 그 틈에 히엠스는 레나의 손을 뿌리쳤다.
‘어딜……!’
레나는 히엠스를 다시 잡으려는 듯 손을 펼쳤다. 그런데 또다시 세상이 덜컥 흔들리며 눈앞이 깜깜해졌다.
“몸이 공격받는 모양입니다.”
한참 먼 곳에서 히엠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레나는 그가 어디 있는지 방향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애석하네요, 좋은 시도였는데.”
히엠스가 기고만장하게 말했다.
“대화는 즐거웠습니다. 더 있다간 곤란해질 것 같으니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다급해진 레나는 애써 정신을 다잡았다. 그때 또 한 번 벼락같은 충격이 쏟아져 레나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히엠스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더 멀어졌다.
“그럼 부디 평안한 시간 되시길.”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 인사말을 끝으로 히엠스는 레나의 의식 속에서 사라졌다. ***
“무슨 짓이에요!”
유니는 놀라서 새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남부공은 개의치 않고 레나의 뺨을 내리쳤다. 그럼에도 레나가 깨어나지 않자, 그는 다시금 손을 치켜들었다.
“그만해요!”
보다 못한 유니가 남부공의 팔에 매달렸다. 그에 남부공이 괴로운 얼굴로 말했다.
“깨어나지 않으면 죽는다.”
“그렇게 깰 거면 진즉에 일어났겠죠!”
유니의 반박에 남부공의 표정이 더 일그러졌다. 의사가 약도 써봤다. 찬물로 얼굴을 씻겨보고, 손발을 주물러보기도 했다. 그래도 일어날 기미가 없자 보다 못한 남부공이 레나의 따귀를 때리며 그를 깨웠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더는 방법이 없어 침음할 때였다. 문가가 소란하다 싶더니, 반갑지 않은 손님이 나타났다. 동부공 리그난 아이테르너였다. 눈엣가시 같은 놈이 찾아오자 남부공은 이를 악물었다.
“여긴 무슨 일이지?”
“약혼녀를 보러 왔다.”
“예의도 모르는 놈, 상대할 시간 없으니 나가라!”
남부공은 곧장 린을 내쫓았다. 황제에게 수모를 당한 게 불과 몇 시간 전이다. 그 모습을 고스란히 본 상대와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린은 남부공의 말을 무시한 채 밀고 들어왔고, 남부공은 다시 호통 치려는 듯 숨을 크게 마셨다. 그때 유니가 다시 끼어들었다.
“혹시 모르잖아요. 어쩌면, 무슨 방법이 있는지도.”
유니의 중재에 남부공은 숨을 멈추고 다시 린을 쳐다보았다. 그가 뭔가 가져온 것 같지는 않았다. 린을 불만스럽게 쏘아보던 남부공은 결국 이를 갈며 돌아섰다.
“한 시간 후에 돌아오겠다. 그 전에 알아서 사라져라.”
남부공은 그렇게 말하며 떠났고, 방에는 린과 유니만 남았다.
“무슨 방법이 있어요?”
유니가 린에게 애원하듯 물었다. 그에 린은 자신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둘만 있게 해 줘.”
유니는 불안한 얼굴로 레나와 린을 번갈아 보더니, 이내 돌아서서 방을 나갔다. 그로써 레나와 단둘이 된 린은, 빨갛게 부은 레나의 뺨과 피가 맺힌 입술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린은 엄지로 레나의 입술을 쓸었다. 그러곤 손끝에 묻어난 레나의 피를 핥아서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