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레나 루벨의 심연2021.01.07.
레나의 피를 삼킨 린은 자신의 손에도 상처를 냈다. 그러곤 레나에게 그 피를 마시게 했다. 린은 자신의 피가 레나의 입술 사이로 흘러든 것을 확인하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낯선 어둠 속에 있었다.
‘제대로 들어왔나?’
린은 생경한 기분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처음엔 그저 어둠 속이라고 생각했는데, 눈이 익숙해지니 주변이 조금씩 달리 보였다. 이곳은 실내, 밤처럼 컴컴한 어느 방이었다.
‘사람의 의식 속은 이런 형태인가?’
사실 린도 처음이었다. 동부공의 권능을 이용해 다른 사람의 의식 속으로 침범하는 건. 그래서 여러모로 막막하지만 지금은 주저할 겨를조차 없었다.
“레나!”
린은 일단 외쳤다.
“레나! 여기 있어?”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지만, 한시라도 빨리 레나를 깨워야 했다.
“레나!”
그래서 목소리를 높여 레나를 부를 때였다. 린의 위로 무언가가 뚝 떨어졌다. 기척을 느낀 린은 반사적으로 피했지만, 그것은 작정한 듯 따라붙으며 린에게 얇은 날붙이를 휘둘렀다.
‘검?’
그것은 검을 든 사람이었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그것은 대뜸 검을 휘두르며 린을 몰아붙였다. 가까스로 피한 린은 허리춤으로 손을 뻗었다. 검은 없지만, 만들면 된다. 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팔을 휘둘렀다. 그러자 그의 손에 검이 들어왔다. 카앙! 린은 달려드는 괴한을 쳐냈다. 그러나 괴한은 튕겨나가지 않고 다시 맹렬히 검을 맞대왔다. 캉! 캉! 캉! 숨 돌릴 틈도 없이 몇 번이나 검이 맞부딪혔다.
‘강해.’
린은 좀처럼 밀리지 않는 상대를 보며 긴장했다. 저쪽에서 다시 한번 빠르게 도약했다. 카앙! 가까스로 막았지만 뼈가 떨릴 만큼 강한 충격이 전해졌다. 린이 그를 다시 쳐내려 할 때였다.
“린?”
그 괴한이 미심쩍은 목소리로 중얼댔다. 린이 놀라서 눈을 홉뜨자, 그쪽에서 다시 물었다.
“진짜 린 맞아?”
“너는…….”
린이 얼떨떨해하자 괴한이 얼굴의 복면을 걷었다. 동시에 밤처럼 어둡던 방 안이 새벽처럼 밝아졌다. 막 드러난 얼굴에 린의 눈이 더 커졌다.
“레나?”
그 괴한은 레나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레나는 아니었다. 아니, 적어도 지금의 레나는 아닌 것 같았다. 이 레나는 진짜 레나보다 키가 더 작고, 머리도 짧았다. 그리고 눈매는 살벌하게 날이 서 있었다. 그 수상한 레나가 린을 보며 중얼댔다.
“눈이 빨개서 뱀인 줄 알았는데.”
린은 그 말을 듣고 지금 자기 눈이 빨갛게 물들어 있는 걸 깨달았다. 권능을 발현하느라 눈이 토끼처럼 빨개진 린은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레나를 바라보았다. 그 유사 레나는 외모 뿐 아니라 말투와 행동도 평소와 달랐다. 어린 레나가 대뜸 손을 뻗어 린의 턱을 쥐었다. 그러더니 그의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말했다.
“진짜 맞구나. 어떻게 된 거지? 네가 왜 여기 있어? 동부의 권능인가?”
“널 깨우러 왔어.”
린은 얼떨떨해 하면서도 대답했다. 그러곤 되물었다.
“너 레나 맞아?”
“아니야. 맞긴 맞지만,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누가 네 오른손에다가 ‘너는 린이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할래?”
“나는…….”
“난감하지? 그런 거야.”
질풍노도 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아직 들고 있던 검을 허공에 던졌다. 그러자 검은 바닥에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사라졌다.
“나도 레나 루벨이지만 네가 데리러 온 쪽은 아니야. 주 의식은 따로 있어. 나는 굳이 말하자면 레나 루벨의 자기보호 본능 같은 거.”
본능 레나의 설명에 린은 가까스로 납득했다. 레나 치고는 너무 매섭다고 생각했는데, 자기보호를 담당하는 일부라면 이런 모습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다행히 청소년 레나는 린을 더 공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경계를 완전히 푼 것도 아니었다.
“날 깨우러 왔다는 건 도우러 왔다는 뜻?”
“맞아.”
“동맹 맺길 잘했네.”
린의 긍정에 짧은 머리 레나가 쌀쌀맞게 대꾸했다. 린은 짐짓 당황했지만 이게 레나의 주 의식이 아니라는 말을 떠올리고 잠자코 끄덕였다.
“진짜 레나는 어디 있지?”
“나도 몰라.”
“몰라?”
“히엠스 그라샤가 어디론가 날려버렸어.”
사나운 눈매 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린도 그를 따라 함께 시선을 옮겼다. 창밖이 밝아진 탓에 방 안의 형태가 아까보다 확실히 보였다. 여긴 귀족 아가씨가 머물 법한 방이었다. 카펫이 깔려 있고 옷장이 놓인, 예쁜 커튼 아래 안락의자가 있는, 그런. 그리고 그 뒤로 두 개의 문이 있었다. 반말 레나가 바라본 것이 바로 저 문이었다.
“저 문은…….”
“한쪽은 레나 루벨의 기억, 다른 한쪽은 레나 루벨의 마음이야. 나는 저기 어딘가에 있어.”
린은 레나가 저기 있다는 말에 곧장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한 걸음도 채 떼지 못하고 검은 옷 레나에게 제지당했다.
“어딜 가려고?”
“레나를 찾아야 돼.”
“안 돼. 저긴 못 들어가.”
레나의 보호자 레나는 린을 단호히 거부했다. 그래서 린은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어째서?”
“레나 루벨이라는 인간의 존엄과 직결된 일이니까. 친구나 연인이어도 허락하기 어려운 영역인데, 그냥 동맹은 저 안으로 못 들어가.”
무심 레나의 거절에 린은 짐짓 당황했다.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말보다 그냥 동맹이라는 말이 마음에 깊이 박혔다. 연인은 아니라도 친구는 되는 줄 알았는데, 본능 단위로 선 긋기를 당해버렸다. 타격이 꽤 컸지만 린은 아닌 척 되물었다.
“그럼 다른 방법이 있어?”
“밖에서 부르면 돼. 다만 그 방법이 통하려면 레나 루벨이 문 가까이에 있어야 돼.”
“멀리 있으면?”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지. 계속 부르면서.”
까칠 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린을 힐끔 올려다봤다. 그러곤 뻔뻔한 투로 덧붙였다.
“도움받는 주제에 까다롭게 굴어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어. 저 안으로 누굴 들일 바엔 며칠 뻗어 있는 편이 나아.”
“……며칠?”
“레나 루벨의 의식은 한 군데만 머물러 있지 않을 거야. 여긴 바깥보다 시간의 흐름이 빠르니까, 며칠만 기다리면 주 의식을 만날 수 있어.”
“그건 안 돼.”
“빚은 몇 배로 갚을게.”
“아니, 그게 아니라 시간이 없어. 내일 저녁까지 일어나지 못하면 황제가 널 죽일 거야.”
“뭐?”
분신 레나의 눈이 돌연 커졌다. 레나의 자기보호 본능은 그 이야기에 심각하게 반응했고, 린은 내친김에 더 압박했다.
“두엄의 궁이 무너진 일로 황제가 격분했어. 그 책임을 남부에 돌렸고, 겨우 시간을 벌긴 했지만 내일까지 못 일어나면 끝이야.”
“정말이야?”
“정말이야. 그렇게 기다릴 시간은 없어.”
“이익…….”
린의 설득에 소녀 레나가 인상을 썼다. 린은 그 모습을 보며 왜 저 안으로 못 들어가게 하는지 내심 납득했다. 린이 알던 레나와 지금 눈앞에 있는 레나는 확연히 달랐다. 평소 그가 아는 레나 루벨은 친절하고 예의 바르고 교양이 넘치면서도 필요할 땐 대범한, 그야말로 이상적인 사람이었다. 반면 이 작은 레나는 성미가 사납고 말투가 거칠며 계산적이다. 자기보호 본능이라고 하니 그런 면모들이 부각된 것이겠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레나에게 이런 면이 있나 싶을 정도다. 아마 레나는 이런 민낯을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걸 알지만, 어쩌면 미움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린은 물러나지 않았다.
“들어가게 해줘.”
“하지만 넌…….”
“약혼자.”
“뭐?”
린의 말에 인상 레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사납다 싶은 눈이었는데, 그렇게 뜨니 평소의 레나와 똑같았다.
“그냥 동맹이 아니고 네 약혼자야.”
이 또한 시한부지만, 린은 자신을 마냥 밀어내는 레나가 야속해서 넌지시 주장했다. 뜻밖의 주장에 레나는 놀란 눈으로 린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인상을 쓰며 얼굴을 붉혔다. 레나의 차가운 얼굴이 빨갛게 물들자 린은 덩달아 놀랐다.
얼굴을 붉히다니, 그건 린에게만 일어나던 일이었다. 린이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자 낯이 달아오른 레나는 이를 악물고 화를 냈다.
“네 그런 점, 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진작 말 하지.”
“시끄러워.”
레나는 괜히 신경질을 냈다. 하지만 정말 싫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알겠어. 그런 상황이라면 보내줄게.”
레나는 숨을 훅 내쉬며 얼굴에 열을 식히더니, 이내 다시 냉랭해진 투로 말했다.
“레나 루벨은 과거의 기억이나 어떤 감정 속에 있을 거야. 저 안에서 나처럼 존재하는 레나 루벨을 찾아.”
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곧장 움직이려 했다. 그런데 레나가 그를 다급히 붙잡았다.
“잠깐만!”
린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자, 레나는 그를 보며 잠시 주저했다. 그러더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댔다.
“그리고 하나 더 알아둘 게 있어.”
린은 시선으로 영문을 물었다. 그에 레나는 답지 않게 망설이더니, 결국 자그마하게 고백했다.
“눈을 떴을 때, 내가 널 싫어하게 될 수도 있어.”
저 문 안에 있는 건 레나 루벨의 속마음. 그 안에는 비밀, 상처, 타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깊이 감춰둔 마음이 포함되어 있다. 그걸 다 들켰을 때 어떻게 반응할지는 스스로도 미지수였다. 레나의 경고에 린은 잠깐 멈칫했다. 하지만 정말 잠깐이었다. 린은 어린 얼굴의 레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내 덤덤히 대답했다.
“어쩔 수 없지.”
린은 그렇게 말하며 멈췄던 걸음을 다시 움직였다. 그러곤 자신을 불안하게 지켜보는 레나를 뒤로한 채, 두 개의 문 중 하나를 열었다. . . . 문을 연 순간 린은 또 새로운 공간으로 초대됐다. 그곳은 책이 가득한 서재였다. 그런데 허공에 책들이 둥둥 떠다니는 기이한 서재였다. 린은 어지럽게 떠다니는 책들을 바라보다가, 마침 가까운 곳에 떠다니는 책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눈앞에 낯선 장면이 스쳤다. 말을 타고 달리는 시야였다. 그런데 안장 앞에 웬 꼬마가 앉아 있었다. 유니? 아니, 머리가 금발이다.
―무슨 여자가 힘만 세 가지고…….
안장 앞에 앉은 자그마한 뒤통수가 건방지게 조잘댔다. 그에 레나가 웃으면서 대꾸했다.
―힘센 여자가 이상하면 우는 남자는 어떨 것 같아요?
―크윽…….
꼬마가 분한 듯 이를 갈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렇게 드러난 얼굴에 린은 깜짝 놀랐다.
“루비드 플레누스?”
안장 앞에 앉은 꼬마는 다름 아닌 루비드였다. 그런데 그는 매우 어렸다. 린은 어떻게 된 일인가 살펴보다가 그 꼬마가 입은 옷이 부자연스럽게 크다는 걸 눈치챘다.
‘설마, 어제 있던 일인가?’
태움과 그을림의 왕을 치러 갈 때 레나와 루비드는 함께였다. 그때 둘이 꽤 고생한 줄은 알았지만, 설마 저런 일이 있었을 줄은. 린은 조금 징그러운 기분으로 작아진 루비드를 바라보았다. 루비드는 끊임없이 떽떽대며 자길 챙겨주는 레나에게 반항했다. 하지만 레나는 그걸 웃으면서 받아주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히 부아가 치밀어 린은 책을 도로 덮어버렸다. 그러자 린의 시야는 다시 그 어수선한 서재로 돌아왔다.
‘레나의 기억이구나.’
책을 만져본 린은 여기가 어딘지 비로소 이해했다. 밖에 있던 파수꾼 레나는 두 개의 문이 각각 레나 루벨의 기억과 마음으로 이어진다고 했다. 지금 이곳은 아무래도 기억 쪽인 것 같았다. 린은 시험 삼아 또 다른 책으로 손을 뻗었다.
―린 씨……!
그 순간 자신의 이름이 터져 나와 린은 깜짝 놀랐다.
―린, 읍!
레나의 외침은 도중에 틀어 막혔고, 대신 시야 가득 붉은 눈이 들어왔다. 그걸 본 린은 화들짝 놀라 책에서 손을 뗐다.
‘이거 그때잖아.’
그때, 많은 심장을 가진 왕의 함정에 빠져 저도 모르게 레나를 덮쳤을 때. 심장이 쿵쿵 뛰었다. 린은 죽도록 후회하는 그 일을 갑자기 직면해 충격에 빠졌다. 동시에 무서운 유혹을 느꼈다. 린은 이때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서 보고 싶었다. 과연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아니.’
하지만 린은 그 책에 다시 손을 뻗는 대신 고개를 저으며 물러났다. 그때,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레나는 그의 셔츠를 입고 있었다. 도중에 옷이 헤쳐졌다는 뜻인데, 그런 모습을 굳이 돌려보는 건 너무 무례한 짓이다. 그렇게 생각한 린은 애써 호기심을 참고 돌아섰다. 그러곤 떠다니는 다른 책으로 손을 뻗었다. 그때마다 황궁이나 무덤을 배경으로 레나가 겪은 일들이 나타났다.
‘허공을 떠다니는 건 최근 기억이구나.’
몇 권의 책을 만져보니 이곳의 구조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막 떠다니는 건 최근의 기억, 바닥에 흩어진 건 별로 인상에 남지 않은 일상의 기억이었다. 레나의 의식이 어딘가 머물러 있다고 하면 이런 곳은 아닐 것 같았다. 그래서 린은 책장으로 눈을 돌렸다. 잘 보니 책장도 제각각이었다. 깨끗하게 정리된 책장이 있고, 대충 쌓아둔 책장이 있고, 자물쇠가 걸린 책장도 있었다. 그리고 테이블에 펼쳐둔, 책갈피를 예쁘게 꽂아둔 책도 있었다. 테이블에 놓인 책은 왠지 레나가 특별히 아끼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린은 그 책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아주 어린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나, 하고 외치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