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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너를 보았다 (73/208)

73화. 너를 보았다2021.01.11.

16562814147311.jpg“누나!”

한참 어린, 그래서 발음조차 불분명한 목소리였다. 그 앙증맞은 외침과 함께 문이 열렸다. 문틈으로 등장한 것은 대여섯 살 정도 된 도련님이었는데, 린도 그럭저럭 아는 아이였다.

16562814147317.jpg‘엔지 루벨.’

린은 짐짓 놀라 루벨 후작가의 후계자를 바라보았다.

16562814147311.jpg“누나? 누나아!”

어린 엔지는 방 안을 돌아다니며 애타게 누나를 찾았다. 하지만 텅 빈 방은 고요했고, 아이는 곧 실망하며 돌아섰다.

16562814147311.jpg“여기도 없네…….”

엔지는 축 처져서 문을 닫고 나갔다. 그러자 아무도 없던 방의 벽장이 열리며 한 여자아이가 살금살금 밖으로 나왔다. 린은 조심히 발을 뻗는 여자아이를 보며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16562814147317.jpg‘레나?’

벽장에 숨어 있던 건 다름 아닌 레나였다. 아까와 달리 이 기억은 레나의 시야가 아니라 외부의 시선으로 펼쳐졌다. 이미 정립된 추억이기에 그런 거지만, 린은 영문을 모른 채 어린 레나의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이제 겨우 열 살쯤 됐을까, 유니의 또래로 보이는 레나는 정말 작고 귀여웠다. 벽장에서 나온 레나는 품에 책을 안고 있었다. 독서를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 동생을 따돌린 모양이었다. 그런데 레나가 막 카펫에 발을 디딜 때였다.

16562814147311.jpg“찾았다!”

16562814147342.jpg“엄마야!”

문이 벌컥 열리며 엔지가 다시 나타났고, 레나는 깜짝 놀라서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16562814147317.jpg‘아.’

린은 넘어진 레나를 일으키려고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린의 손길은 레나에게 닿지 않았다. 그 사이 레나를 찾아낸 엔지가 짧은 다리로 달려와 항의했다.

16562814147311.jpg“이럴 줄 알았어! 왜 숨어, 오늘 나랑 새집 만들기로 했는데!”

16562814147342.jpg“숨은 거 아니야, 잠깐 낮잠 잔 거야.”

16562814147311.jpg“거짓말 마, 숨어서 책 읽었잖아!”

16562814147342.jpg“아닌데?”

16562814147311.jpg“씨이, 그럼 빨리 새집 만들러 가.”

16562814147342.jpg“야, 그거 그냥 정원사한테 만들어달라고 하면 안 돼?”

레나가 건성으로 대꾸하며 엔지를 쫓아내려 하자 안 그래도 화가 난 엔지의 얼굴에 노여움이 차올랐다. 그래서 분기탱천한 어린이는 있는 힘껏 누나를 위협했다.

16562814147311.jpg“해준다며! 약속했잖아! 약속 안 지키면 지옥 가!”

16562814147342.jpg“응, 너랑 노느니 지옥 갈래.”

하지만 누나는 필연적으로 동생보다 강했다. 레나의 태연한 대꾸에 엔지는 충격을 받은 듯 멍해졌다. 그러더니 이내 두 눈에 눈물을 가득 채우고 빽 소리쳤다.

16562814147311.jpg“나랑 노는 게 왜 지옥 가는 것보다 싫은데! 누나 바보야!”

울컥한 엔지는 결국 와앙 울기 시작했다. 작은 꼬마는 약속도 안 지키면서 자길 성가셔하는 누나가 야속해 통곡했고, 큰 꼬마는 동생이 울자 뒤늦게 아차 싶었다.

16562814147342.jpg“아, 알겠어. 농담이야, 울지 마. 누나가 새집 만들어줄게.”

눈물 콧물 빼며 울던 엔지는 뒤늦게 사과하는 누나를 씩씩대며 째려보았다. 그래서 레나는 별수 없이 등을 내밀었고, 엔지는 그제야 눈물을 닦고 누나에게 업혔다. 누나의 목에 매달린 엔지가 훌쩍대며 경고했다.

16562814147311.jpg“나중에 크면 복수할 거야.”

16562814147342.jpg“그래, 얼른 커서 혼자 좀 놀아.”

동생이 복수를 예고했지만 레나는 놀랍지도 않다는 듯 엔지를 추슬렀다.

16562814147342.jpg“주머니에 뭐야?”

레나가 엔지의 호주머니에 뭔가 가득 들어 있는 걸 깨닫고 물었다.

16562814147311.jpg“도토리.”

16562814147342.jpg“도토리는 왜?”

레나의 물음에 엔지는 코를 훌쩍 삼키더니, 그새 기분이 풀린 듯 밝은 목소리로 삐악댔다.

16562814147311.jpg“새집 지붕 꾸밀 거야. 사막 성 모양으로.”

16562814147342.jpg“사막 성 지붕이 도토리야? 전엔 솔방울이라며.”

16562814147311.jpg“아니, 그건 동쪽 나라야. 기와 벽돌로 솔방울 모양 지붕 만드는 건 동쪽이고, 사막 나라는 지붕이 동그래서 끝에만 뾰족해. 진짜 도토리야.”

엔지는 몹시 진지한 태도로 지붕 모양을 설명했고 레나는 듣는 둥 마는 둥 대충 대꾸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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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켜보던 린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티격태격하면서도 어쨌든 어울려 노는 남매가 귀여웠다. 그리고 이 기억이 특별히 구별되어 있던 게 떠올라 조금 애잔해졌다. 그가 알기로 레나는 황궁에서 엔지 루벨과 따로 접촉하지 않았다. 지금까진 입장상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저렇게 가까운 남매였다는 걸 알게 되니 새삼 안타까웠다. 그 사이 엔지를 업은 레나는 복도를 지나 계단 앞에 섰다. 2층 복도에서 1층 홀로 이어지는 중앙 계단이었는데, 린의 눈엔 그들의 모습이 조금 위태로워 보였다. 어린 여자아이가 동생을 업고 계단까지 내려갈 수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건 대단한 기우이자 착각이었다.

16562814147311.jpg“누나, 난간 타고 가자!”

16562814147342.jpg“그래!”

엔지의 요청에 레나는 선뜻 대답하며 등에 업힌 동생을 앞으로 둘러멨다. 그러곤 동생의 작은 몸통을 깍지 껴 안은 채 계단 난간에 올라탔다.

16562814147317.jpg‘위험……!’

린이 그 모습을 보고 놀랄 겨를도 없이, 레나는 아주 능숙하게 난간을 타고 내려갔다. 그러더니 난간 끝에선 폴짝 뛰어 아주 안정적인 자세로 착지했다. 예쁜 원피스 차림의 아이가 보여준 뜻밖의 무용에 린은 그만 얼이 빠졌다.

16562814147317.jpg‘레나…….’

저 때도 이미 범상치 않았구나. 린이 레나의 대찬 모습에 실소할 때였다.

16562814231879.jpg“내가 지금 뭘 본 거지?”

어디선가 성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62814147311.jpg“아버지!”

엔지가 현관을 향해 밝은 얼굴로 소리쳤다.

16562814147317.jpg‘루벨 후작?’

린은 엔지를 따라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흠칫 놀랐다. 현관 앞엔 엔지가 아버지라고 부른, 그래서 루벨 후작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서 있었다. 하지만 그 남자는 얼굴이 없었다. 이목구비가 모두 지워진 채, 마치 그림자처럼 검은 형태만 갖췄을 뿐이었다.

16562814231879.jpg“우리 집 작은 숙녀가 설마 난간을 타고 다닐 줄이야, 귀부인이 될 아가씨가 이래서야 쓰나.”

그림자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핀잔했다. 평범한, 아니. 평범한 것 이상으로 자상한 어조였다. 얼굴이 지워진 채 그렇게 말하는 모습은 몹시 기이했다. 그래서 린은 레나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어린 레나를 볼 수 없었다. 마치 추억 속에서 후작을 몰아내듯, 단호히 어둠이 내려 기억을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직후, 린은 다시 기억의 서재로 돌아와 있었다.

16562814147317.jpg‘끊겼어.’

끝난 게 아니라 끊겼다. 따스한 온도로 이어지던 추억이 후작의 등장으로 끊어져버렸다. 그 바람에 밖으로 튕겨 나온 린은 묘한 기분으로 앞서 본 것을 곱씹었다. 레나가 루벨 가의 딸인 건 새삼 놀랄 일도 아니지만, 방금 본 루벨 후작의 모습은 여러모로 뜻밖이었다. 평화롭던 어린 시절의 추억, 거기서 배제된 루벨 후작. 마치 보기 싫다는 듯 얼굴을 검게 가렸다. 린은 레나가 후작을 그렇게 기억하는 것에 꽤 놀랐다. 후작을 별로 의식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여태 태연한 척했을 뿐, 레나는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확실히 거부하고 있었다. 린은 레나의 겉과 속이 아주 다르다는 걸 새삼 깨달으며, 앞에 놓인 테이블을 다시 바라보았다. 거기엔 동생과의 추억 외에도 좋은 기억들이 조각조각 남아 있었다. 시를 읽고 가슴이 벅찼던 순간, 다 함께 다녀온 교외 나들이, 교류회에서 또래들과 어울린 일, 유독 황홀했던 봄볕이나 사랑스러운 가을바람. 마치 설탕으로 만든 것처럼 달콤하던 나날들. 하지만 그 가운데 린이 찾는 레나는 없었고, 린은 레나의 행복한 시절을 보며 마음이 점점 무거워졌다. 이토록 소중히 길러지던 아이가 대체 무슨 이유로 싸우기 시작한 건지, 그는 미처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16562814147317.jpg‘……이쪽엔 없나.’

조급해진 린은 테이블을 떠나 책장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는 똑같은 책이 빈틈없이 꽂힌 서가로 먼저 손을 뻗었다. 그런데 손을 대기 무섭게 격류가 몰아치듯 지식이 쏟아졌다. 특별히 거창한 지식은 아니었다. 제국어로 된 단어, 여러 물체의 이름, 도구의 쓰임새, 생활 상식과 매우 단순한 세상의 원리들. 대부분 린도 아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 번에 쏟아지는 양이 너무 많았다. 걷잡을 수 없이 퍼부어지는 개념에 린은 놀라서 물러났다. 동시에 당혹감을 느꼈다.

16562814147317.jpg‘정보가 너무 많아.’

사람의 의식 속은 그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광활했고, 그 안에 저장된 지식은 그야말로 방대했다. 그 깊은 골짜기 앞에서 본능이 경고했다. 더 이상 들어가면 위험하다고. 애초에 동부의 권능은 상대의 의식을 왜곡하고 파괴하는 것. 이런 식의 탐색이나 접촉은 규격 외의 모험이다. 그 사실을 알지만, 린은 이를 악물고 책장을 다시 노려보았다. 왜 이렇게 절박한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좋아하고 있지만 그건 드러내지도 못한 혼자만의 감정. 깊다고 하기엔 시간도 계기도 아직 부족하다. 그럼에도 린은 레나가 사라질 것 같은 순간마다 아득히 절망했다. 그러다 다시 돌아오면 겨우 가슴을 쓸어내렸다. 레나가 자신을 바라봤다는 말엔 모든 걸 가진 기분이었고, 친구도 연인도 아닌 동맹으로 규정됐을 땐 도로 다 뺏긴 기분이었다. 레나와의 관계는 이렇게도 엉망이다. 혼자 짊어진 감정에 시한부 약혼자라는 허울, 게다가 레나가 운 좋게 깨어난들 그다음엔 미움받는 처지가 기다리고 있다. 제 비밀을 다 털어본 자에게 호의를 유지할 사람은 없다. 레나처럼 품위를 중요시하는 사람은 더 그럴 것이다. 결국 이건 손해 중의 손해. 아무것도 남지 않는 최악의 도박.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린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러곤 아까 레나에게 한 말을 다시 중얼댔다.

16562814147317.jpg“어쩔 수 없지.”

그래,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는 걸로 고민해봐야 소용없으니,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린은 마음을 다잡고 다시 책장 앞에 다가섰다. 이건 손해 중의 손해. 아무것도 남지 않는 최악의 도박. 그럼에도 굳이 뛰어들 이유가 필요하다면, 딱 한 가지만 꼽자. 린은 레나 루벨이 세상에 존재했으면 한다. 이유는 그 정도로 충분하다. . . . 이후 린은 수십, 아니 수백 권의 책을 지나왔다. 눈을 뜬 린은 또다시 낯선 순간 속에 있었다. 무거운 피로감이 몰려왔지만 그는 애써 정신을 다잡고 주위를 살폈다. 어두운 밤이었다. 차가운 석조건물을 배경으로 불길이 음산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동물 탈을 쓴 사람들이 여기저기 쓰러져 있었다. 그들은 부상을 입은 듯, 피 흘리며 신음했다. 그 살풍경에 린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동물 탈을 본 린은 반사적으로 제단을 찾았다. 아니나 다를까, 기이한 문양의 돌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린은 이게 어떤 상황인지 안다. 이것은 망자를 숭배하는 배교자들의 집회였다. 그런데 상황이 묘했다. 제단은 이미 피로 젖었지만 그곳에 망자는 없고, 탈을 쓴 배교자들은 상처 입은 채 바닥을 뒹굴고 있다. 대신 밧줄에 묶인 어린아이와 검은 옷을 입은 소녀가 그 가운데 서로 마주본다. 그들을 발견한 린이 조용히 탄식했다.

16562814147317.jpg‘레나.’

검은 옷을 입고 머리를 짧게 친 소녀는 다름 아닌 레나였다. 서재 밖에서 만난 레나의 자기보호 본능과 거의 같은 모습이었다. 다만 분위기는 확연히 달랐다. 지금 이 레나는 감정을 모두 잊은 듯, 권태로운 눈으로 바닥에 주저앉은 아이를 보고 있었다. 레나의 단검 끝에서 핏방울이 떨어졌다. 미루어 짐작해보건대, 배교자들을 쓰러트린 건 레나인 것 같았다. 집회에 난입한 레나 루벨. 그에 당황한 건 배교자들뿐만이 아니었다. 손발이 묶인, 망자의 먹이로 준비된 아이도 놀란 눈으로 레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이는 홀연히 나타난 레나를 멍하니 바라보더니, 겁먹은 걸 감추려는 듯 뾰족한 목소리로 물었다.

16562814259824.jpg“너, 망자야?”

레나는 그 아이를 빤히 바라보더니 느리게 대답했다.

16562814147342.jpg“아니.”

16562814259824.jpg“그럼 사람이야?”

레나는 말없이 끄덕였다. 그러고 가만히 서 있었다. 마치 고장 난 시계처럼, 태엽이 풀린 인형처럼. 그 기이한 모습에 아이가 재차 물었다.

16562814259824.jpg“날 죽일 거야?”

레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그저 침묵했다. 그러자 아이가 이를 악물고 화를 냈다.

16562814259824.jpg“죽일 거면 빨리 끝내. 괜히 시간 끌지 말고.”

아이는 그렇게 말하며 레나를 무섭게 쏘아봤다. 그러길 한참, 레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16562814147342.jpg“……무덤에서 널 봤어.”

마치 길을 잃은 사람처럼 혼란스러워하며 아주 느리게 말했다.

16562814147342.jpg“너를 보고 왔어. 그냥 네가 보여서……. 그래서. 나한텐, 아무도 안 왔지만.”

독백인지 푸념인지 모를 말을 속삭이며 레나는 괴로워했다. 뭔가에 사로잡힌 모습이었다. 아이는 그런 레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잔뜩 억눌린 목소리로 되물었다.

16562814259824.jpg“……날 죽일 거야?”

레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 작은 약속에 힘겹게 버티던 아이의 눈에 차츰 눈물이 차올랐다. 아이가 결국 울음을 터트렸지만, 레나는 달랠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바라만 보았다. 린은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지금까지 여러 단편을 거쳐 왔지만, 그는 여전히 레나의 궤적을 다 읽을 수 없었다. 그가 본 레나의 순간들은 한없이 행복하다가 한없이 외로웠고, 한없이 안락하다가 한없이 위험했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 있는 레나는 마치 인형처럼 텅 비었다. 린은 그 모습이 안쓰러워 만질 수 없는 걸 알면서도 손을 뻗었다. 그때 기적 같은 음성이 들려왔다.

16562814147342.jpg“린 씨?”

그가 아는, 그리고 그를 아는 레나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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