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나는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어떻게 된 거지?’

레나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기억을 더듬었다. 히엠스 그라샤. 그 왕을 사로잡으려고 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충격을 받아서 놓쳤다.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지? 그다음에, 정신을 잃었나……? 마지막 기억을 떠올린 레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러곤 바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도 갇혀 있는 건가?’

레나가 서 있는 곳은 지하인 듯 어둡고 습했다. 사방은 음울한 회벽으로 덮여 있고, 싸구려 기름을 써서 탁탁 튀는 횃불이 짙은 음영을 일으키며 타고 있었다.

‘여긴…….’

레나는 여기가 어딘지 곧 눈치챘다. 한 번밖에 와본 적 없지만 또렷이 기억했다. 왜냐하면 여긴 유니를 처음 만난 장소니까. 이곳은 제국의 변두리. 전쟁터보다 치안이 형편없는, 굶어 죽는 자와 살해되는 자의 수가 매일 공평하게 늘어나는 서부 접경지역의 소도시였다. 아무 희망도 없는 곳이었다. 여력이 있는 자들은 진즉에 떠났고, 제국의 행정도 지옥과 맞닿은 그곳은 이미 포기했다. 그 무가치한 도시에 남은 것은 벼랑 끝까지 내몰려 달리 갈 곳 없는 이들뿐.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들이었고, 그래서 그들도 세상을 버렸다. 대신 자신들에게 어울리는 것을 섬겼다. 예컨대 칼이나 돈, 무도한 패거리, 그리고 망자 같은. 레나가 유니를 만난 순간도 그랬다. 두려움에 미친 인간들은 망자의 힘을 얻고자 제단 앞에서 의식을 거행했다. 굶주린 망자에게 줄 먹이까지 마련하고, 자신의 피로 사선 너머의 존재를 불러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들의 부름에 응한 건 망자가 아니었다. 망자보다 먼저 그들을 찾아온 건, 완전히 혼자가 되어 길을 잃은 레나 루벨이었다.

‘레지나가 사라진 직후였지.’

레나는 씁쓸한 얼굴로 어린 자신의 텅 빈 눈을 바라보았다. 그 시절 레나는 고장 난 태엽 인형 같았다. 세상의 비밀을 모두 알아버린 대가로 마음이 더 이상 남아나지 않아, 차라리 무덤 밑바닥에 가라앉아 죽기로 결심한 시절이었다. 그랬던 레나가 다시 지상으로 나온 건 아주 작은 변덕이었다. 사소한 흥미였고, 대수롭지 않은 호기심이었다. 피와 제단이 만든 틈 너머로 한 여자아이가 보였다. 과거의 자신과 아주 똑같은 처지의 아이였다. 그래서 레나는 저도 모르게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하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레나는 간만에 마신 바깥공기가 어색하고, 한없이 약한 인간들이 낯설었다. 그리고 이들에게 잡혀 죽음을 기다리는 아이의 처지는 너무 기괴했다. 그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서, 레나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모른 채 중얼댔다.

“……무덤에서 널 봤어.”

“너를 보고 왔어. 그냥 네가 보여서……. 그래서.”

“나한텐, 아무도 안 왔지만.”

아. 그랬구나. 레나는 그렇게 말한 후에 비로소 깨달았다. 레나가 여기 온 건, 자신에겐 아무도 안 왔기 때문이란 걸. 나한텐 아무도 안 와서. 누군가 곁에 있어주는 걸로 충분한데 결국 혼자여서. 마지막으로 믿었던 존재마저 부모처럼 배신하고 떠나서. 그래서 저도 모르게 이끌렸다. 나와 같은 처지의 네가 속상해서. 어린 레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우는 유니를 바라보았고, 어른이 된 레나는 한 걸음 밖에서 탄식했다.

‘하필이면 이런 기억을…….’

레나는 히엠스 그라샤의 재수 없음에 혀를 찼다. 괜한 걸 떠올리게 하다니. 정말 불쾌한 자식이다.

‘히엠스 그라샤는 사라졌나?’

레나는 눈앞의 광경을 외면하며 히엠스를 찾았다. 하지만 그 약삭빠른 작자의 흔적은 쉽게 드러나지 않았고, 레나는 괜히 더 심란해졌다. 오랜만이다, 곤경에 처한 건. 이 첩첩한 위기에 레나는 다시금 실감했다. 나한텐 결코 오지 않는다. 도움도, 구원도. 부모도 버린 나를 이제와 누가 찾을까. 신마저도 나를 외면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괜찮다. 상관없다. 이번에도 나는 혼자서, 어떻게든, 알아서, 해낼 테니까. 레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숨을 깊게 마셨다. 하필 보이는 게 가장 혼란스럽던 시절이라 자칫하면 저 감정에 매몰될 것 같았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마음을 다잡을 때였다.

‘……어?’

헛것이 보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 여기 있을 리 없는 사람이 서 있었다. 레나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허상을 지워보려고 눈까지 비벼봤지만 그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그의 존재감이 너무나 또렷해, 레나는 저도 모르게 중얼댔다.

“린 씨?”

그러자 그가 나를 보았다.

“레나.”

그리고 불렀다. 심지어는, 이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갑자기 나타난 린이 자신에게 달려오자 레나는 너무 놀라서 저도 모르게 주춤 물러났다. 실은 마주 다가가고 싶었는데 차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섣불리 뻗은 손이 허공을 움켜쥐게 될까 봐 무서웠다. 그래서 멍하니 굳어 있는데, 린이 어두운 기억을 밟아 넘으며 팔을 뻗었다.

“레나!”

생생한 외침에 레나는 숨을 멈췄다. 설마, 설마. 확인이 필요했다. 저 손이 닿으면, 그래서 선명한 촉감과 온기가 전해지면 그땐 확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다가오는 린을 멍하니 기다리는데, 귓가에 나직한 음성이 울렸다.

―방해꾼이 나타날 줄은.

그 소리에 레나가 흠칫 놀란 순간, 어떻게 반응할 겨를도 없이 발밑이 푹 꺼졌다.

“윽!”

마치 거울이 깨지듯 공간이 와르르 무너졌다. 가만히 서 있던 레나는 그대로 추락했고, 달려오던 린도 균형을 잃고 다시 멀어졌다.

“린 씨!”

레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린을 불렀다. 그러자 린이 레나에게 소리쳤다.

“기다려!”

그 말에 레나는 또다시 얼어붙었다. 하지만 린은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잠식해오는 어둠 속에서 다시 외쳤다.

“내가 데리러 갈게!”

레나는 부서지는 공간보다 그 말이 더 혼란스러웠다.

　 기다리라니, 데리러 가겠다니. 왜요? 묻고 싶었지만 물어볼 겨를이 없었다. 아니, 시간이 충분했어도 묻지 못할 것이다. 대답을 원치 않으니까. 그래서 주저하는 사이 린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레나는 또 다른 공간에 서 있었다. 무섭게 추락하던 것이 무색하게 마지막 순간 레나의 몸은 깃털처럼 가볍게 내려앉았다. 그럼에도 레나는 답지 않게 비틀대다 퍼뜩 놀라 중심을 잡았다. 그러곤 얼떨떨해하며 생각했다.

‘아까 그건 진짠가?’

아니, 히엠스 그라샤의 속임수일 수도. 화형장의 여인들처럼 그 비열한 왕이 만든 술수일 수도.

‘어느 쪽이든 가능성은 있어.’

레나는 최대한 냉정히 생각했다. 히엠스 그라샤가 자신을 속여서 조종하려들 가능성도 있고, 린이 권능을 이용해 찾아 왔을 가능성도 있다. 그럼 더 유력한 건?

‘히엠스에겐 시간이 별로 없어.’

심장을 뺏긴 히엠스 그라샤는 이미 형태를 잃어가고 있다. 그런데 얼마 남지 않은 힘을 쏟아 공간을 뒤엎는다? 그건 레나 앞에 나타난 린이 진짜라는 반증이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레나의 가슴이 또 한 번 술렁였다.

‘진짜 린 씨가 온 거야……?’

레나는 멍한 기분으로 아까 본 린의 얼굴을 떠올렸다.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왜……. 레나는 덜컥 불안해졌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난 것 같았다. 그래서 갈피를 잃고 어지러워하던 레나는 고민 끝에 안전한 답을 찾았다.

‘우린 동맹이니까.’

그렇게 생각하자 요동치던 마음이 차츰 가라앉았다.

‘린 씨는 착한 사람이고, 나는 아직 쓸모가 있으니까.’

덧붙인 이유도 그럴싸해, 레나는 겨우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론을 내린 레나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러곤 남아 있는 잡념을 떨치기 위해 홀로 선언했다.

“빚은 나가서 갚으면 돼.”

마무리를 제대로 못 해서 린 씨에게 폐를 끼쳤다. 그러니 어서 정신 차리고 상황을 타개하자. 그리고 이 빚은 반드시 갚자. 그래, 그러면 되는 거야. 레나는 그렇게 다짐하며 다시 제대로 상황을 살폈다. 히엠스 그라샤는 아무래도 아직 주변에 있는 것 같았다. 붙잡히지 않게 숨어서 지켜보는 모양인데, 이대로라면 린이 다시 찾아와도 문제였다.

‘계속 쫓아다니면서 훼방을 놓을 셈인가?’

그래봤자 시간 끌기밖에 못할 텐데. 레나가 히엠스의 진짜 목적을 의심할 때였다. 막막하던 어둠 속에서 또 다른 장면이 차츰 떠올랐다. 붉은 하늘과 검은 땅. 무덤이었다. 광활한 무덤을 배경으로 소녀 시절의 레나가 서 있었고, 그 앞에 한 남자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저건…….’

레나는 그 남자를 보고 반사적으로 미간을 좁혔다. 매끈한 갈색 피부가 인상적인 남자였다. 숯처럼 검은 머리카락은 사자의 갈기처럼 늘어졌고, 본래 도발적이었을 붉은 눈동자는 공손히 올려다보는 모양으로 온순한 기색을 띠었다. 그가 입은 질 좋고 가벼운 비단 옷은 덥고 건조한 사막에 어울리는 복식이었다. 또한 그 위로 드리운 화려한 금빛 장신구는 그의 고귀한 신분을 나타냈다. 레나는 그 눈에 띄는 사내를 보며 속으로 중얼댔다.

‘많은 심장을 가진 왕.’

약칭 뱀 왕, 속칭 변태 왕. 정도 없는 음욕의 화신으로 어린 레나를 괴롭히다가 도리어 뼈 한 조각까지 털린 놈이다.

‘일부러 이런 기억을 끄집어내는 건가?’

유니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이 또한 특별한 기억, 레나에겐 하나의 분기점이었다. 히엠스 그라샤는 그런 기억만 굳이 골라내고 있다. 아무래도 그 오만한 왕은 납득되지 않는 레나 루벨의 삶을 직접 들여다보고 판단할 작정인 모양이다. 레나는 불쾌감을 삼키며 눈앞의 광경을 일단 바라보았다. 저 때의 레나는 열네 살이었다. 뱀 왕이 자신을 노리는 걸 알고 레지나에게 싸우는 법을 배운, 가장 흉포하던 시절의 레나였다. 어린 레나는 제 앞에 무릎 꿇은 뱀 왕을 무심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막 심장을 잡아 뜯으려는 찰나였다. 벌써 몇 번째인지 기억도 안 나는 일방적인 학살이자 학대였다. 그런데 그 날은 뭔가 달랐다.

“웃어?”

레나가 많은 심장을 가진 왕을 내려다보며 중얼댔다. 어쩐 일인지 놈은 레나를 향해 은근히 웃고 있었다. 처음 보는 반응이다. 맨 처음 레나가 습격했을 때, 뱀 왕은 충격 속에서 심장을 뺏겼다. 겨우 소생한 날 레나가 다시 찾아와 심장을 빼앗을 땐 화를 냈고, 그다음부터는 한동안 진저리를 냈다. 저항하고 반항하며 싸우기도 엄청나게 싸웠다. 그러다 어떻게 해도 안 되니 회유를 시도했고, 통하지 않으니 빌었다. 빌어도 소용이 없자 울었다. 그가 심장을 뜯으러 온 레나 앞에서 울기 시작한 건 최근 일이었다. 그래서 언제까지 울까 싶었는데, 오늘은 그가 돌연 웃는다. 그걸 본 레나가 무심히 물었다.

“웃겨?”

“아니요. 다만 신기합니다.”

뱀 왕이 공손히 대답했고, 맥락 모를 말에 레나가 눈으로 까닭을 물었다. 그에 뱀 왕이 처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인이 이토록 강해질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위대한 여인에게 지배받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도.”

여인이라니. 레나는 이제 겨우 열네 살이었다. 레나는 역겹다고 생각했지만 일단은 지켜보았다. 그에 뱀 왕은 레나가 흥미를 보인다고 믿으며 더 간곡히 말했다.

“귀하는 내 심장을 수십 번이나 빼앗았습니다. 그건 귀하가 내 심장을 그만큼 다시 돌려줬다는 뜻이죠.”

“그래서?”

“내게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가 단지 보복 때문입니까?”

미쳤네. 레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할 말을 잃었고, 많은 심장을 가진 왕은 그 앞에서 이러쿵저러쿵 멋대로 떠들어댔다. 너의 강함을 존경한다. 너의 존재를 공경한다. 너와의 관계에 특별함을 느낀다. 나는 이미 네게 사로잡혔으며, 살아생전에도 이토록 강렬한 끌림은 없었다. 귀하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신부가 되어주세요. 이게 미쳐서 막 하는 말인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고 하는 소린지 모르겠지만, 하나는 분명했다. 그 입에서 나오는 게 전부 대단한 아첨이라는 것. 난생처음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이토록 구구절절 사정하는 건. 설득하려 들고 회유하려 들며 환심을 사려고 애쓰는 건. 그리고 그의 비굴은 레나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었다. 지금까지 레나는 스스로를 강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비록 몸은 연약하지만 마음만은 굳세어 좌절하지 않고 일어서는 사람이라 믿었다. 하지만 다시 잘 생각해 보니, 나는 강한 사람이 아니라 약한 사람이었다. 동시에 비굴한 사람이었다. 스스로 살아남을 자신이 없어 환심을 사려고 노력했고, 그럼에도 소용이 없자 고고한 척 그들의 죄를 외면했다. 그건 강한 것도 착한 것도 아니었다. 싸울 방법이 없어 그저 참고 삭힌, 비굴한 멍청이였을 뿐. 환멸을 느낀 레나는 더 참지 않고 많은 심장을 가진 왕을 도륙해 심장을 강탈했다. 멋대로 지껄이던 뱀 왕이 먼지처럼 흩어지자, 허공에서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분풀이는 그쯤 해둬라.

위에서 지켜보던 레지나였다. 얼굴이 온전치 않아 표정이나 눈빛을 읽을 순 없지만, 레나는 레지나가 자신의 행동을 못마땅해 하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역겨운 놈은 더 이상 널 노리지 않을 거다. 그러니 이제 멈춰라. 그 이상 가면 네가 망가진다.

망가진다니, 이제 와서 무슨. 레지나의 경고에 레나는 지루한 한숨을 토했다.

“안 그래도 그만하려고 했어.”

방금 뱀 왕은 죽기 직전에 행복하게 웃었다. 울화가 다 풀릴 때까지 놈을 죽이려고 했는데, 그 면상을 보니 더 상대하고 싶은 마음이 싹 가셨다. 하지만 그렇다고 불덩이처럼 맺힌 분노까지 사라진 건 아니었다. 그 불은 여전히 활활 타며 레나를 부추기고 있었다. 그래서 레나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중얼댔다.

“집으로 돌아갈래.”

―집?

“아버지를 만나야겠어.”

―만나면?

레지나의 물음에, 레나는 귀찮은 일을 앞둔 사람처럼 대답했다.

“죽여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