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동이 텄다2021.01.18.
죽여야지. 레나는 스스로 표현에 조금 놀랐다. 사람을 죽이겠다는 선언이 이렇게 쉬울 줄은 몰랐다. 동시에 내리 고민하던 것을 입 밖으로 뱉으니 내심 후련하기도 했다.
―레나.
레나가 가라앉은 표정으로 돌아서자 레지나가 곁으로 내려와 막았다.
―진심이냐?
“농담 같아?”
―그만 둬.
“왜?”
레나는 표정 없이 되물었다.
“죽어 마땅한 인간이잖아.”
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바닥에 놓인 막대를 발로 꾹 밟았다. 그것은 금과 보석으로 장식된 왕홀이었다. 방금 먼지가 되어 무너진 뱀 왕의 가슴에서 나온 그의 심장이다. 레나는 그 왕홀을 발로 끌며 중얼댔다.
“이런 인형 놀이는 아무리 해도 소용없어.”
그래, 이건 인형 놀이다. 죽지도 없어지지도 않는 걸 주물럭대며 끊임없이 반복하는 인형 놀이. 자길 지옥으로 밀어 넣은 인간들은 밖에서 멀쩡히 살고 있는데, 이런 흙장난이나 하고 있으니 속이 타들어 가는 거다.
“죽일 거야. 날 팔아넘긴 인간도, 여기 떨어트린 인간도.”
―그러라고 싸우는 법을 알려준 게 아니다.
“네겐 고맙게 생각해.”
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발끝으로 건드리던 왕홀을 집어 들었다. 이 홀이 존재하는 한 많은 심장을 가진 왕은 또다시 살아날 거다. 반대로 이걸 부수면 뱀 왕은 영영 소멸한다. 레나는 뱀 왕이 꼴도 보기 싫었지만, 왕홀을 부수지 않았다. 레지나가 반대했기 때문이다. 지금 무덤에 있는 망자의 왕들은 이미 황제에게 패했다. 그래서 진짜 심장 대신 이런 모조 심장으로 비굴하게 연명 중이다. 그래서 레지나는 이들을 살려둬야 한다고 했다. 만약 이들이 소멸하면 온전한 심장을 가진 새로운 왕이 탄생하고, 그렇게 되면 지상도 무덤도 지금보다 훨씬 더 혼란스러워진다고 했다. 그래서 레나는 레지나의 말대로 뱀 왕의 심장을 부수지 않고 멀쩡히 두었다. 때문에 이 역겨운 작자와 몇십 번이나 싸워야 했지만, 종국엔 말 같지도 않은 청혼까지 받았지만 그래도 감내했다. 레지나의 부탁이니까, 레지나는 자신을 지켜준 유일한 존재니까.
“아무리 이번엔 안 되겠어.”
하지만 그런 레지나도 지금은 레나를 막을 수 없었다.
“너무 억울하잖아. 난 아무 잘못도 없는데.”
레나는 그렇게 말하다 입술을 깨물었다. 문득 생각났다. 서부성으로 끌려갈 때, 붉은 균열 앞에 섰을 때, 처음 무덤에 떨어졌을 때, 사창가의 다락방에 갇혀 기다릴 때. 레나는 잘못했다고 빌었다. 잘못한 것 하나 없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이 없는데 용서해달라고 빌었다. 레나는 무엇보다도 그걸 참을 수가 없었다. 레나가 턱에 힘을 주며 이를 악물자, 지켜보던 레지나가 낮게 속삭였다.
―알고 있다. 어떤 마음인지.
“그럼 막지 마.”
―아니까 더 막아야겠다. 나는 너까지 그렇게 만들 순 없어.
하지만 그 말은 레나를 더 미치게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 수 없다고?”
―그래, 넌 그들처럼 되면 안 돼.
“왜?”
레나는 억지로 웃으며, 거의 울 것 같은 눈으로 반문했다.
“왜 나만 안 돼? 왜 나만 말려? 그 인간들이 그딴 짓을 할 땐 가만히 있었으면서!”
레나가 레지나를 흉흉한 눈으로 쏘아보며 소리쳤다.
“아무도 안 말렸어! 아무도! 내가 당할 땐 아무도 관심 없었잖아! 그런데 왜 나한테만 안 되는데? 이제 와서 왜, 무슨 자격으로 날 말리는데, 왜!”
레나는 폭발하는 화산처럼 격정을 쏟아냈다. 하지만 레지나를 향한 것은 아니었다. 차라리 세상에 대고 외치는 소리에 가까웠다. 레지나도 그걸 알고 더 나직이 답했다.
―네겐 아직 기회가 있으니까.
“무슨 기회.”
―잘못하지 않을 기회.
레지나의 말에 레나의 입가에 미소가 서렸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그럼 너는?”
레나가 웃는 입과 화난 눈으로 물었다.
“넌 기회가 있을 때 어떻게 했는데?”
―기회를 차버렸지.
“그런데 왜 나만……!”
―그래서, 나처럼 될까 봐.
레지나의 고백에 레나는 일순 할 말을 잃었다. 레나가 멈칫하자 레지나는 손을 뻗어 아직 앳된, 하지만 생채기로 가득한 레나의 뺨을 감싸 쥐었다. 그러곤 악에 받친 이 소녀가 차라리 주저앉아 울길 바라며 속삭였다.
―네가 나처럼 되는 걸 견딜 수 없어.
레지나의 진심에 레나의 두 눈이 한차례 일렁였다. 잔뜩 갈라진 입술도 떨렸다. 하지만 레지나의 목소리로 채우기에 레나의 절망은 너무 깊었다.
“……네가 못한 걸 나한테 요구하지 마.”
결국 레나는 레지나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곤 들고 있던 왕홀을 힘껏 집어던지고 돌아섰다. 레나가 당장에라도 떠날 것처럼 굴자 레지나가 팔을 붙잡았다.
―안 돼, 레나.
“이번엔 나도 안 돼. 아무리 네 부탁이어도.”
―부탁하는 거 아니야.
“그럼?”
―……명령이다.
레지나의 한마디로 공기는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깨진 석상과 소녀 사이에서 냉기가 피어오르자, 지켜보던 히엠스 그라샤는 낮게 웃었다.
‘이거로군.’
무덤에 있던 용서받지 못한 왕이 소멸한 이유. 모든 왕들의 공적인 용서받지 못한 왕은 어느 날 홀연히 사라졌다. 그리고 축복을 빼앗긴 왕이 탄생했다. 무덤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만큼 길기에 왕의 교체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왕의 이름이 바뀌는 일은 처음이었다. 살아 있는 자가 망자의 왕이 되는 것도 유래 없는 일이었다. 그 이변에 어떤 내막이 있는지 늘 궁금했던 히엠스 그라샤는, 막 펼쳐지기 시작한 레나 루벨의 기억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레나와 레지나가 충돌했다. 그들은 서로를 아끼는 마음이 무색하게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았다. 레지나의 한쪽 팔이 깨져 날아갔다. 레나의 어깻죽지에서도 피가 솟구쳤다. 호각으로 시작한 싸움은 차츰 판세가 기울었고, 뜻밖에도 승기를 잡아가는 쪽은 레지나였다.
‘왜지?’
이후 소멸한 건 레지나고 왕이 된 건 레나다. 그런데 왜 저렇게 되는 거지? 무슨 반전이 벌어지는 거지? 히엠스는 의아해하며 그들을 관찰했다. 어린 레나가 무참히 내동댕이쳐졌다. 이미 피투성이지만 레나의 두 눈엔 여전히 독기가 가득했다. 얼굴이 없는 레지나는 심정을 드러내지 않고 무형의 칼날로 레나를 포위했다. 히엠스는 최후의 일격을 기대하며 눈을 부릅떴다. 다음 순간, 굉음과 함께 하늘에서 거대한 철판이 떨어졌다. 콰앙! 쾅! 쾅! 비현실적인 부피가 하늘과 땅, 그리고 히엠스의 시야까지 가득 메웠다. 왜곡된 법칙엔 이미 익숙하지만, 그럼에도 저 철판의 존재는 다소 놀라웠다. 갑자기 떨어져 땅에 내리꽂힌 그것은 어지간한 성보다 거대했다. 히엠스는 얼떨떨한 얼굴로 그 철판을 살펴보았다. 거기엔 자물쇠가 달려 있었다. 문인가? 아니. 비슷하지만 아니다. 저건 책이었다.
“설마 다 보여줄 줄 알았어요?”
난감해하던 히엠스는 불현듯 들려온 목소리에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 거대한 책 위에서, 기억이 아닌 현재의 레나 루벨이 히엠스를 향해 짓궂게 웃고 있었다.
“어떻게…….”
“원래 뱀이 잘 쓰는 수법이죠, 이거.”
상대방의 정신에 파고들어 수작을 부리는 것. 그건 많은 심장을 가진 왕이 특히 잘 쓰는 수법이었다. 소녀 시절의 레나는 뱀 왕과 싸우며 온갖 방식으로 정신을 공격당했다. 그래서 레지나의 도움으로 대책을 마련했고, 무수한 시행착오 끝에 자신의 근간이 되는 기억에 자물쇠를 채우는 데 성공했다.
“사실 좀 뜻밖이에요. 남의 속을 파헤치는 좀도둑이 뱀 말고 또 있을 줄은 몰랐거든요.”
“도둑이라니.”
레나의 저렴한 취급에 히엠스는 쓰게 웃었다. 그러곤 굳게 잠긴 책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대는 정말 놀라운 사람입니다. 같은 편이었다면 마음껏 좋아했을 텐데.”
“무의미한 가정이네요.”
“그렇죠.”
히엠스는 못 당하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이미 절반 이상 무너진 몸이 입자가 되어 날렸다. 시간이 다 됐다는 의미였다. 히엠스는 침묵의 시간이 가까워진 것을 느끼고, 레나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용서받지 못한 왕을 소멸시킨 건 그대입니까?”
레나는 답하지 않았다. 히엠스는 마지막까지 냉정한 레나를 야속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끝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군요.”
“곧 알게 될 거예요.”
“다 끝나면?”
“다 끝나면.”
레나의 대답에 히엠스가 못 당하겠다는 듯 웃었다. 그러더니 곧 미소를 지우고 낮게 중얼댔다.
“기고만장하지 마라, 어린 것아. 네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너 같은 계집을 잡아다 산채로 불사르던 나다. 요행으로 힘을 얻었다고 네 미천함까지 가려질 줄 아느냐?”
히엠스는 예쁜 외모가 무색하게 저급한 말로 레나에게 폭언을 퍼부었다. 짐짓 놀랄만한 일이었지만, 레나는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웃으며 대꾸했다.
“궁지에 몰리면 본색이 드러나는 성격이군요. 히엠스 그라샤 씨.”
난생 처음 듣는 호칭에 히엠스의 이마가 일그러졌다. 히엠스는 레나를 무섭게 쏘아보더니, 이내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댔다.
“궁지에 몰린 건 너다, 건방진 계집.”
그와 함께 부스러져가던 히엠스의 몸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유희는 이제 됐다. 꽁꽁 싸맨 비밀 속에서 죽을 때까지 헤매라!”
그 외침을 끝으로 히엠스의 갈라진 외피가 용암처럼 붉게 타올랐다. 강렬한 빛에 레나는 반사적으로 앞을 막았다.
“윽!”
히엠스가 꺼지기 직전의 촛불처럼 마지막 빛과 열기를 토해냈다. 레나는 공간이 뒤틀리는 것을 느끼며 저 화염 폭풍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발밑이 날아가고 하늘마저 녹아내리며, 레나도 별수 없이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 같은 시각, 린은 당황해서 눈앞의 광경을 보고 있었다. 직전까지만 해도 그는 레나의 기억 속에서 레나를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충격과 함께 밖으로 튕겨 나왔고, 나와서는 정신을 차릴 겨를도 없이 몸부터 추슬러야했다.
“큭……!”
어디선가 몰아닥친 광풍에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서재는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책장과 책들이 허공에서 회오리쳤고, 벽과 바닥은 기틀을 잃어버린 듯 제멋대로 뒤틀리고 일렁댔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린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러다 이 난리가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곧 찾아냈다. 알 수 없는 진동과 광풍은 자물쇠가 잠긴 책장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서재 한쪽엔 자물쇠가 걸려 있어 펼쳐볼 수 없는 책들이 있었다. 그 책 안에서 강한 힘이 몰아쳤다. 마치 저 자물쇠를 부수려는 듯, 안되면 이 주변을 모조리 부수려는 듯이.
‘안 돼.’
그걸 본 린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여기 있는 것은 모두 레나의 일부다. 만약 손상이 일어나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위기감을 느낀 린은 몸을 더 낮추고 몰아치는 힘을 역행하며 자물쇠 걸린 책으로 다가갔다. 겨우 책장 앞까지 다가간 린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곤 생모에게 물려받은, 평생 원한 적 없는 힘을 있는 대로 끌어 모았다. 린의 눈동자가 핏빛으로 물들었다. 살벌한 충동이 혈관을 타고 번졌지만 린은 필사적으로 참으며, 겨우 가까워진 폭풍의 중심으로 팔을 뻗었다. 린의 손이 책에 닿자 스파크가 튀며 거친 마찰이 일어났다. 폭발하는 힘과 그것을 억누르려는 힘이 허공에서 엉켰다. 몸이 찢기듯이 아팠지만 린은 버텼다. 그러자 밀고 당겨지던 힘이 폭발하며 잠겨 있던 기억이 마구잡이로 쏟아졌다. 기억이 범람했다. 모두 조각조각 잘려 뭐가 뭔지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유독 멀쩡한 형태를 유지한, 익숙한 얼굴 하나가 린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니힐?’
린은 고통 속에서 눈을 홉떴다. 레나의 기억 속에서 터져 나온 것은 다름 아닌 황제 니힐의 얼굴이었다. 아니, 니힐과 똑같이 생겼지만 다른 사람인 것 같다. 그 여자는 머리가 길고 금발이었다. 무엇보다도 웃고 있었다. 니힐이 저런 식으로 웃을 리가. 린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며 그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 순간 온 세상이 하얗게 탈색된다 싶더니, 기어이 폭발이 일어났다. ***
“아!”
유니의 탄성에 앉아서 선잠을 자던 남부공이 퍼뜩 눈을 떴다.
“무슨 일이냐?”
“움직였어요!”
남부공의 물음에 유니가 침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 침대엔 동부공 리그난 아이테르너가 누워 있었다. 남부공은 일어나서 침대 맡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어린 하녀의 주장과 달리 그 젊은 사내는 고요히 눈을 감고 있었다.
“제대로 본 게냐?”
“제대로 봤어요, 잠깐이지만 움직였어요.”
유니가 억울하다는 듯 반박하자 남부공은 그저 한숨을 내쉬었다.
“잠깐 경련이라도 한 모양이지.”
남부공은 씁쓸히 중얼대며 고개를 돌렸다. 동부공이 누운 침대 옆엔 또 다른 침대가 있었다. 그리고 그 침대에도 깨어나지 않는 사람이 누워 있었다. 레나가 정신을 잃은 지 만 하루가 더 지났다. 그리고 동부공이 덩달아 의식을 놓은 지도 벌써 한나절이다.
‘한 시간 안에 떠나라고 했거늘.’
떠나기는커녕 드러누워 버리다니. 어이가 없었지만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남부공은 피가 마르는 심정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동이 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