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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어디 있든지 (76/208)

76화. 어디 있든지2021.01.21.

니힐은 웃지 않는다. 인상을 쓰지도 않고, 그 어떤 표정도 짓지 않는다. 그가 얼굴을 움직이는 건 말할 때와 눈을 깜빡일 때뿐, 불멸의 황제는 언제나 가면 같은 얼굴로 노예들을 주시한다. 린은 지금도 기억한다. 황제 니힐을 처음 본 순간을. 동부공의 작위를 받기 위해 황궁에 온 어린 날이었다.

16562814774306.jpg“나자의 아들.”

막 자다 깬 듯 잠긴 목소리.

16562814774306.jpg“나자 대신 동부를 맡겠다고.”

격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얇은 옷차림.

16562814774306.jpg“그럼 먼저 말해보렴. 내가 널 죽여야 하는 이유가 있는지.”

그리고 시리도록 차가운 한 쌍의 눈동자. 황제는 그런 존재였다. 방향을 잃은 눈보라, 만족을 모르는 맹수, 인간의 형상을 한 무언가. 절대 웃지 않는 깨진 조각. 그런데 니힐이 왜, 레나의 기억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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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린은 극심한 현기증 속에서 눈을 떴다.

16562814774327.jpg“으…….”

린은 어지러움을 참으며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몸의 절반이 사라져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린은 소실된 몸을 보고 흠칫 놀랐다가, 여기가 어딘지 깨닫고 한숨을 내쉬었다.

16562814774327.jpg‘충격이 너무 컸나…….’

설마 구현된 몸이 무너질 줄이야. 린은 속으로 푸념하며 사라진 감각을 일깨웠다. 그러자 날아갔던 팔다리가 다시 생겨났다. 이곳에서의 신체 수복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너무 많은 정신력을 소모한 탓에 린은 슬슬 한계를 느꼈다.

16562814774327.jpg‘더는 위험해.’

너무 오래 머물렀다. 그리고 너무 많은 것을 보았다. 린은 복잡하게 엉킨 기억을 정리하기 위해 잠시 눈을 감았다. 레나의 짧고도 긴 생애가 머릿속에 선명히 그려졌다. 자물쇠가 잠긴 기억을 제외하면 거의 다 본 것 같다. 쓸쓸한 어린 시절과 가족들의 품에서 밝게 웃던 나날, 그리고 아버지인 루벨에게 버림받던 순간도.

16562814774327.jpg‘클라비스, 그 인간은 대체…….’

린은 루벨 후작의 만행 뒤에 있던 클라비스도 보았다. 또한 그가 레나에게 황제를 죽여 달라고 부탁한 것도.

16562814774327.jpg‘기분 나쁜 인간인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그저 무능한 쾌락주의자인 줄 알았다. 하는 일이라곤 황제 옆에서 아부하며 사치를 부리는 것뿐이니까. 그런데 뒤에서 이런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니. 린은 검은 속내를 감춘 채 웃는 클라비스를 생각하다가 꼭 같은 얼굴을 가진 히엠스를 떠올렸다. 레나의 기억 속에서 본 히엠스 그라샤는 클라비스와 무섭도록 비슷했다. 한 핏줄이니 닮을 수도 있지만, 북부공과 남부공도 그라샤의 혈통인 걸 생각하면 클라비스만 유독 심하게 비슷하다.

16562814774327.jpg‘게다가 히엠스 그라샤는 금발…….’

자연히 떠오른 금발의 클라비스는, 폭발 직전에 본 금발의 니힐까지 연상시켰다. 긴 금발을 늘어트린, 너무나 밝게 웃던 니힐. 그 햇살 같은 모습에 속이 울렁댔다. 충분히 많은 것을 봤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게 잔뜩 있었다. 게다가 이미 살얼음판이라고 생각한 황궁의 상황은 예상보다 더 심각했다. 추기경이 황제 시해를 도모하고 있다니, 성공하든 실패하든 제국의 앞에 놓인 건 파멸뿐이다. 그리고 그 위험천만한 곳으로 찾아온 레나 루벨. 강한 듯 위태로우며 명료한 듯 복잡한 내 약혼녀. 린은 레나를 떠올리며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시간이 얼마 없다. 어서 레나를 찾아야 한다. 린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눈앞의 광경에 다시 말을 잃었다. 기억의 서재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책장은 다 무너지고 책은 전부 뒤섞였다. 여기서 레나를 어떻게 찾아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처음부터 다시 뒤져야 하나 싶어 막막했다.

16562814774327.jpg‘……찾을 수 있어.’

하지만 포기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찾고 싶어졌다. 린은 혼자가 되는 외로움을 안다. 온기가 절실히 필요하지만 아무도 곁에 없는 절망을 안다. 그래서 린은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레나를 다시 한번 만나고 싶어서, 단지 그런 이유였다. 그때였다. 난장판이 된 서재로 종이 한 장이 팔랑대며 떨어졌다. 한 장, 또 한 장. 종이는 조금씩 분량을 늘려가더니 허공에서 포개지며 차츰 책의 형태를 만들었다.

16562814774327.jpg‘뭐지?’

린은 그것을 의아하게 바라보다가 조심히 손을 뻗었다. 그러자 희미한 기억의 단편이 머릿속에 펼쳐졌다.

16562814803642.jpg―궁지에 몰리면 본색이 드러나는 성격이군요. 히엠스 그라샤 씨.

16562814803647.jpg―궁지에 몰린 건 너다, 건방진 계집.

레나와 히엠스 그라샤였다. 언제지? 이건 또 언제 기억이지? 낯선 장면을 살피던 린은 히엠스의 부스러진 몸을 보고 퍼뜩 깨달았다. 이건 자신이 레나와 잠깐 만난 후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바로 직전의 일이다. 이게 왜?

16562814774327.jpg“아……!”

린은 놀라서 탄성을 터트렸다. 맞다. 여긴 레나의 기억이 저장되는 장소. 그리고 모든 경험은 기억이 된다. 그건 의식 속에 갇힌 지금도 마찬가지.

16562814774327.jpg“이걸 왜 이제 발견했지?”

린은 놀라서 중얼대다가 곧 깨달았다. 어지럽게 날아다니던 책들이 모두 떨어져 바닥에 널브러졌다. 서재가 깨끗이 박살난 덕분에 오히려 발견할 수 있게 된 거다. 위에서 새로운 종이가 떨어졌다. 린은 손을 뻗어 종이를 잡았다. 그러자 선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62814803642.jpg―린 씨!

레나의 목소리였다.

16562814803642.jpg―오고 있어요? 날 찾고 있어요? 린 씨……!

레나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 . . 린이 서재에서 나오자, 예의 자기보호 본능이 아직 밖에 있었다. 어린 모습의 레나가 린을 보자마자 물었다.

16562814803642.jpg“못 찾은 거야?”

16562814774327.jpg“찾았어.”

린은 그렇게 말하며 다른 문을 바라보았다. 레나의 의식은 더 이상 기억 속에 없다. 불청객이 찾아온 걸 깨달은 히엠스 그라샤가 마지막 힘을 짜내 레나를 더 깊은 곳으로 밀어 넣었다. 레나의 마음, 그 저변으로. 린이 그 문으로 곧장 걸어가자 레나가 놀라서 소리쳤다.

16562814803642.jpg“자, 잠깐!”

16562814774327.jpg“괜찮아.”

레나의 당황한 외침에 린이 차분히 대답했다. 그러더니 레나가 뭐라 덧붙이기 전에 웃으며 말했다.

16562814774327.jpg“너무 싫어하지만 말아줘.”

16562814803642.jpg“……네가 날 싫어하게 될 수도 있어.”

레나가 작게 중얼댔다. 아닌 척하지만 초조한 얼굴이었다. 린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문으로 향하던 걸음을 돌려 레나에게 다가갔다.

16562814774327.jpg“조금만 만질게.”

린은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었다. 그러곤 레나가 허락하기도 전에 그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16562814803642.jpg“……뭐 하는 거야?”

16562814774327.jpg“격려.”

뜻밖의 행동과 대답에 레나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게 자신이 린에게 했던 행동인 걸 깨닫고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16562814803642.jpg“너 변태야?”

16562814774327.jpg“아닌데…….”

린이 태연하게 대꾸하자 레나의 얼굴은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평소의 레나에게선 기대조차 할 수 없는 반응에 린은 옅게 웃었다. 그러곤 강하면서도 약한 그 소녀에게 약속했다.

16562814774327.jpg“널 찾을게. 어디 있든지, 반드시.”

  *** 레나는 깊고 어두운 곳에 있었다. 마치 물속처럼 감각이 둔해지는 그런 곳이었다. 그 속에 잠긴 레나는 흐려지는 정신을 다잡으며 생각했다.

16562814803642.jpg‘태움과 그을림의 왕은?’

이번에야말로 사라졌겠지. 아, 하지만 모른다. 지긋지긋하게도 끈질긴 왕. 그러니 죽어서도 악착같이 왕 노릇을 하지.

16562814803642.jpg‘여긴 어디지?’

편안하다. 마치 따뜻한 욕조에 앉은 것 같이, 이대로 녹아버리고 싶은 기분이다. 레나는 그 노곤함을 떨치려고 애썼다. 안 돼, 아직 할 일이 남았어. 이제 시작이란 말이야. 레나는 입술을 깨물며 버텼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이렇게 무너질 순 없어. 나는 존재해야 한다. 그리고 증명해야 한다. 이렇게는 끝낼 수 없어.

16562814803642.jpg“린 씨!”

레나는 결국 혼자 견디기를 포기하고 소리쳤다.

16562814803642.jpg“오고 있어요?”

타인에게 의지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

16562814803642.jpg“날 찾고 있어요? 린 씨!”

이 상황을 홀로 이겨내긴 요원했고, 버티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16562814803642.jpg“린 씨, 나는……!”

그래서 레나는 일말의 희망을 붙잡고 소리쳤다. 하지만 막상 외치고 나니 곧장 불안감이 밀려왔다.

16562814803642.jpg“나는, 여기 있는데…….”

아무도 안 오면 어떡하지? 소리쳐 불렀는데, 또 아무도 안 오면. 레나는 얼마 못 가 섣불리 소리친 것을 후회했다. 어차피 아무도 듣지 못한 소리지만 스스로에게 사무쳐 후회스러웠다. 사람들은 쉽게 단정한다. 아비에게 내쳐진 아이가 제대로 된 인간이 될 리 없다고. 겉모습은 멀쩡할지라도 그 속은 썩고 타고 일그러져 엉망일 거라고.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버림받아 나락까지 떨어진 여자아이라고 반드시 망가져야 하는 건 아니다. 분노에 휩싸여 비탄을 토해낼 수도 있지만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도 아니다. 망가지거나 원한을 품을 수 있지만 그 길을 택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어떤 존재가 될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 얼마나 많은 몸부림을 쳐야 하는지. 매 순간 덮쳐오는 감정과 얼마나 치열히 싸워야 하는지, 그 힘겹고 고된 순간을 얼마나 감내해야 하는지. 단 한 번도 상냥한 적 없는 세상에 적의를 품지 않으려고 어찌나 애써야 하는지. 레나는 강해지고 싶었다. 실제로도 강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이 괜찮은 것은 아니었다. 특히 이렇게 무력한 순간이 오면, 자신의 연약함과 마주할 때가 되면 이루 말할 수 없이 괴로웠다. 그건 정말이지 괴로워서, 괴롭고 또 괴로워서……. 레나는 요동치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눈을 질끈 감고 숨을 마셨다. 그렇게 또다시 홀로 감내할 때였다.

16562814803642.jpg‘어?’

레나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방금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혹시나 싶어 돌아보던 레나는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기대하면 안 돼, 기대면 안 돼. 그러다 다치면 감당할 수 없어. 이것 봐, 잘못 들은 거야. 괜히 또 실망만 하잖아. 그 순간 다시 선명하게 소리가 들렸다.

16562814774327.jpg“……나!”

레나는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잘못 들은 게 아니다. 분명 사람의, 남자의 목소리였다. 레나가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이자 소리는 아까보다 명확해졌다.

16562814774327.jpg“레나!”

레나는 놀라서 소리의 방향을 찾았다. 그러자 저편에서 또 한 번 레나를 불렀다.

16562814774327.jpg“레나!”

린의 목소리였다. 린이 레나를 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16562814803642.jpg‘말도 안 돼.’

레나는 믿을 수 없었다. 함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중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16562814803642.jpg“린 씨!”

하지만 레나의 입술은 의지를 배신하고 외쳤다.

16562814803642.jpg“린 씨, 여기예요! 여기……!”

또 한 번 좌절할지라도 지금은 외쳐야 했다. 이번에야말로 자신을 찾아왔을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레나는 대답해야 했다. 레나가 마주 소리치자 눈앞을 가득 메우던 어둠이 찢어졌다. 휘장처럼 길게 찢긴 어둠의 틈새로 빛이 쏟아졌다. 그곳에 린이 있었다. 레나를 찾아 심연까지 내려온 그가 팔을 뻗었다. 레나는 더 망설이지 않고 마주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들은 서로를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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