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동요2021.01.25.
린은 숨을 크게 마시며 눈을 떴다.
“저하!”
그가 깨어나자마자 옆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익숙한 목소리, 데카였다.
“정신이 드십니까?”
린은 말없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황궁의 침실이었으나 그가 쓰던 방은 아니었다. 창밖은 어두웠고 방 안은 등불로 어스름히 밝았다. 린은 흐린 눈으로 상황을 살피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며 몸을 일으켰다.
“얼마나 이러고 있었지?”
“하루 조금 넘게 누워계셨습니다.”
데카의 대답에 린은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루 넘게라면 벌써 승전제 당일이라는 소리다. 게다가 지금 시간은 저녁.
“승전제는?”
“이미 시작했습니다.”
데카의 담담한 보고에 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 . . 동부공은 채비만 급히 갖추고 연회장으로 달려갔다. 시종들과 함께 긴 복도를 건너는데 이미 연회장 특유의 소음이 들려왔다. 사람들의 말소리, 웃음소리, 음악소리. 동부공이 연회장 입구에 다다르자 문지기가 그의 입장을 알리려 했다. 하지만 린은 그를 막고 조용히 안으로 들었다. 린은 메인 홀로 이어지는 정문이 아닌 2층 복도와 연결되는 측문으로 들어갔다. 그로써 주목은 덜 받는 대신 무도회가 한창인 메인 홀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그로써 린은 곧장 발견했다. 흰 연미복을 입은 사람에게 리드 받으며 화려하게 춤추는 한 숙녀를. 황금빛 드레스를 입은 레나 루벨을.
레나를 발견한 린은 맥이 탁 풀리는 걸 느꼈다. 레나가 자신보다 몇 시간 일찍 깨어났다는 소식은 이미 들었다. 하지만 직접 보기 전까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부랴부랴 달려왔는데, 저렇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춤추는 모습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다행이다.’
린은 비로소 안도했다. 그러고 나니 뒤늦게 다른 것이 보였다. 레나와 함께 춤을 추는 사람. 그는 다름 아닌 황제 니힐이었다.
‘황제가 춤을?’
난생처음 본 광경에 린은 얼이 빠졌다. 어떤 자리에서든 게으른 고양이처럼 구경만 하다 사라지던 니힐이 춤이라니. 심지어 니힐은 웬만한 신사보다 정중하게 레나를 이끌고 있었다. 그 이례적인 광경에 연회장의 귀족들은 모두 레나와 니힐을 주목하고 있었다.
“왜 황제가 춤을 추고 있지?”
린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그에 데카가 대답했다.
“황제가 레나 경을 치하하며 원하는 것을 말하라 하였고, 레나 경이 춤을 춰달라고 요청하셨답니다.”
데카의 대답에 린은 헛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하여튼 대단한 레나 루벨. 사지에서 돌아오기 무섭게 다른 사지로 들어가 춤을 추다니. 린은 묘한 기쁨을 느끼며 레나와 니힐이 춤추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레나를 보느라 바빴다. 드레스 차림의 레나는 아름다웠다. 평소에도 아름다운 사람이었지만, 그야말로 작정한 모습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문득 저 숙녀가 오늘 어떻게 입장했는지 궁금해졌다. 혼자 입장했을까? 남부공의 에스코트를 받았나? 다들 레나를 보고 어떻게 반응했을까? 알아내려면 충분히 알아낼 수 있지만 린은 입을 다물었다. 지각해서 약혼녀의 에스코트까지 놓친 주제에 뒤에서 이러쿵저러쿵 캐묻는 건 도무지 면이 서지 않았다. 그리고 레나에 대한 건 레나에게 직접 듣고 싶었다. 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메인 홀로 천천히 내려갔다. 그는 저 춤이 끝나면 레나에게 다가갈 생각이었다. 이윽고 음악이 잦아들며 춤이 멈췄다. 춤추는 동안 무슨 말을 연신 주고받던 황제는 레나를 홀 가운데 버리듯이 두고 떠났다. 린은 황제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레나에게 다가갔고, 레나는 린이 거기 있는 걸 이전부터 알았는지 그를 돌아보며 살며시 웃었다. 레나가 웃으며 다가오자 린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몸은…….”
그런데 린이 운을 떼는 순간 레나가 그를 스치듯 지나쳤다. 애당초 그에게 다가간 게 아니라는 듯, 그저 가는 길에 그가 있었을 뿐이라는 듯 매몰찬 몸짓이었다. 레나가 돌연 자신을 지나치자 린은 당황했다. 그러자 그 기색을 읽기라도 했는지, 레나가 뒤에서 낮게 속삭였다.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레나에게 외면당한 줄 알았던 린은 간신히 안심했다. 하지만 이어진 말에 그는 다시 길을 잃었다.
“빚은 꼭 갚을게요.”
레나는 그 말을 끝으로 린을 떠났다. 린은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레나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그사이 새 음악이 시작되었다. 많은 신사와 숙녀들이 짝을 지어 홀로 나왔다. 하지만 정작 린의 짝이 되어야 하는 레나는 그를 버려둔 채 다른 사람의 손을 잡았다. 레나가 다음 상대로 선택한 건 북부의 왕자, 루비드 플레누스였다. . . .
“뭐야?”
승전제에 억지로 참석한 루비드는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 서 있었다.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는 탓에 마침 그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그런 루비드에게, 막 다가온 레나가 웃으며 말했다.
“춤 춰요.”
“미쳤냐?”
아니나 다를까 루비드는 짜증부터 냈다.
“뭔데, 너 나랑 친해? 말 좀 섞었다고 어디서…….”
레나는 루비드가 입을 더 놀리기 전에 환하게 웃으며 그의 손을 붙잡았다. 붙잡았다기보다는 휘어잡고 비틀었다. 레나의 악력에 루비드는 지난날의 악몽을 떠올렸다. 그래서 그가 벌컥 화를 내려 하자, 레나가 다정히 속삭였다.
“춤 춰요. 한 번만.”
“내가 왜!”
“눈치껏 좀 맞춰주세요.”
“싫……!”
눈치와 배려는 물론 한때 같이 싸운 의리조차도 없는 루비드의 작태에 레나도 조금 열이 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함께 있을 사람이 절실해, 비열한 걸 알면서도 루비드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네가 지금 나한테 성질부릴 때니?”
“익……!”
레나의 의미심장한 협박에 루비드는 천하의 불한당을 보듯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레나가 발설하면 곤란한 이야기가 한둘이 아니라 더 이상 떽떽대진 못했다. 루비드는 마지못해 레나의 손을 잡고 홀로 나왔다. 다시 음악이 시작됐고, 그들도 다른 이들처럼 손을 마주잡은 채 둘만의 시간에 놓였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은 전혀 낭만적이지 않았다. 루비드는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느라 표정이 엉망이었고, 레나도 졸라서 춤을 추는 게 적잖이 민망한 기색이었다.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듯 레나가 자그맣게 속삭였다.
“이러니까 처음 만난 날이 생각나네요.”
“지랄. 뭐 하자는 건데?”
하지만 루비드는 가차 없었다. 레나가 웃기만 할 뿐 대답을 아끼자 그가 재차 물었다.
“춤을 추고 싶으면 네 약혼자한테 부탁하던지, 저 놈 아까 왔잖아.”
이건 눈치가 빠른 건지 없는 건지. 레나도 물론 알고 있다. 약혼자가 나타났으니 그와 춤을 추는 게 당연한 수순인 걸. 그래서다. 레나가 루비드를 끌고 나와 춤을 춘 이유. 레나는 린이 자신에게 접근하는 걸 막고 싶었다. . . . 의식의 밑바닥 그 첩첩한 어둠 속에서 린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레나가 처음 느낀 감정은 슬픔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너무 슬펐다. 어째선지 어릴 적, 별장에서 살다가 본가로 처음 왔을 때가 생각나기도 했다. 가슴이 찢기듯 아픈 와중에 자신을 찾아 준 사람이 너무 간절해, 레나는 저도 모르게 그를 끌어안았다. 두 팔 가득 그를 안는 순간 수많은 말이 입안에 맴돌았다. 당신 맞나요, 진짜인가요, 여기까지 어떻게 왔나요. 묻고 싶은 게 가득 있는데 단 한 마디도 입 밖에 꺼낼 수가 없었다. 그를 마주 안는 순간 감옥 같은 꿈이 깨져버린 탓이었다. 레나가 비로소 눈을 뜬 건 이른 오후였다. 곁에는 유니와 남부공이 있었고, 맞은편 침대에 린이 누워 있었다. 레나가 깨어나자 유니가 소리치며 안겨들었다.
“아가씨, 영영 안 일어나시는 줄 알았어요!”
유니는 그렇게 말하며 엉엉 울었고, 옆에서 바라보던 남부공도 십 년은 더 늙은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레나가 상황을 물었지만 남부공은 시간이 없다며 레나를 채근했다.
“서둘러 준비하게. 오늘 연회에 늦으면 황제가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레나는 린이 깨어날 때까지 곁을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모두에게 등이 떠밀려 의상실로 이동해야만 했다. 거기서 유니를 비롯한 하녀들의 도움으로 치장하며 대략적인 설명을 전해 들었다. 두엄의 궁이 무너진 일로 황제가 격분했고, 공작 중 하나를 죽이려다 참았으며, 대신 아직 병상에 누운 레나 루벨을 아니꼽게 여겨 다음 날 연회에 참석하지 않으면 죽이기로 결심했다고. 레나는 자신이 쓰러진 동안 벌어진 이야기에 짐짓 당황했다. 동시에 이해했다. 린이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자신을 찾았는지.
―기다려!
―내가 데리러 갈게!
머리를 장미수로 감기는 와중에 린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때의 표정, 억양, 그리고 몸짓까지. 그 순간 마음이 술렁대더니 갑자기 가슴 안쪽이 아파왔다. 까닭 모를 흉통에 레나는 숨을 깊게 마시며 스스로를 달래려 애썼다.
‘린 씨가 일어나면 고맙다는 인사부터 하자.’
레나는 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했다. 아까 의식 속에 갇혔을 때처럼, 우리가 동맹이며 린 씨는 착한 사람이고 나는 아직 쓸모 있는 패라는 사실을 상기했다. 하지만 마음에 차오른 동요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고, 소리 없이 전전긍긍하던 레나는 결국 속으로 시구를 중얼댔다.
‘그대는 한여름의 차가운 꿈이어라.’
레나는 습관처럼 떠올린 시구에 그만 탄식했다.
“아…….”
“어디 불편하세요?”
“아뇨, 괜찮아요.”
머리를 말리던 유니의 물음에 레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쓴물을 삼켰다. 하필 떠올린 시가 이 시라니. 그대는 한여름의 차가운 꿈이어라 첫눈 같은 그대가 온 줄 알고 손을 뻗으면 깨진 꿈자리에 그리움만 차게 남아 덧없는 밤에 나만 홀로 남아 길 잃은 나만 또 울며 그대를 찾노라 한여름의 꿈. 시인 비트라가 죽은 누이를 그리워하며 지은 시. 그 시인에겐 세 살 많은 누나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젊은 나이에 요절했고, 가족 간에 우애가 깊던 비트라는 죽은 누이를 그리며 이 시를 썼다. 원래도 좋아하던 시지만 그 의미가 이토록 사무치게 와 닿는 건 처음이었다. 히엠스 그라샤가 만든 감옥 속에서, 레나는 린을 보고도 선뜻 손을 뻗지 못했다. 저 시인처럼 덧없이 손을 뻗었다가 실망할까 봐, 그리고 무너질까 봐. 하지만 린이 다시 찾아왔을 때 레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팔을 뻗었다. 그 순간의 온기가 아직도 선해, 레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동시에 깨달았다. 우리가 동맹이고, 린 씨가 착한 사람이고, 나는 아직 쓸모 있는 패라며 되뇌는 게 변명에 지나지 않음을. 레나는 자신이 애써 딴청을 피우고 있음을 힘겹게 인정했다. 그리고 다짐했다.
‘린 씨가 일어나면 고맙다고 해야지.’
덕분에 살았다고, 덕분에 가장 두려워하던 일도 면했다고. 그래서 고맙다고. 그렇게 인사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 다짐은 린을 본 순간 와르르 무너져 버렸다. . . .
“웃기지도 않네, 진짜. 누구한테 보여주려고 이래? 루벨이냐? 어? 황제 다음에 나랑 춤추면 네가 뭐라도 될 것 같아?”
레나는 루비드의 해석이 꽤 참신하고 생각했다. 제법 그럴싸하기도 하다. 그래서 누군가 이 행동의 까닭을 물으면 그가 알려준 대로 ‘인맥을 과시하기 위함’이라 둘러대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투덜대면서도 루비드는 착실히 스텝을 밟았다. 그래서 음악 아래 두 사람은 제법 그럴싸한 모습을 연출했다. 덕분에 루비드의 말마따나, 황제에 이어 북부 왕자와 춤추는 레나는 대단히 주목받았다. 특히 지난 전야제 때 레나와 루비드의 충돌을 기억하는 귀족들은 두 사람의 관계 변화에 크게 놀랐다. 그리고 레나가 섭렵한 권력구도를 헤아리며 몰래 혀를 내둘렀다. 황제의 총아이자 남부의 대리인, 동부의 약혼녀, 게다가 북부 왕자의 친구라니. 황궁에서 레나를 이방인이라 칭할 수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 루비드에게 춤을 신청한 게 꽤 선언적인 행동이 되었지만, 그래서 지켜보고 있을 루벨 후작에게 상당한 압박이 되겠지만 정작 레나는 그런 걸 신경 쓸 정신이 아니었다. 무수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러나 레나의 안중에 그들은 없었다. 레나의 의식은 단 한 사람, 차마 쳐다볼 수도 없는 한 사람에게 온통 쏠려 있었다. 분명 레나는 린이 깨어나면 인사하려고 했다. 그가 찾아왔을 때 어떤 심정이었는지 나누려고 했다. 그런데 막상 린을 보니 할 말이 사라졌다. 그래서 그랬다, 그래서. 레나는 시간을 벌기 위해 눈에 띄는 빨간 것으로 돌진했다. 그게 루비드인 건 사실 한발 늦게 눈치챘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춤 신청까지 해버렸다. 린이 계속 쳐다보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레나는 린에게 인사하고 싶었다. 고마운 마음을 충분히 표현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정말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레나는 지금 동요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