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질투해요?2021.01.28.
―눈을 떴을 때, 내가 널 싫어하게 될 수도 있어.
화려한 음악 사이로 어린 레나의 목소리가 생생히 떠올랐다.
―레나 루벨이라는 인간의 존엄과 직결된 일이니까.
기억을 훔쳐보는 것, 마음속을 침범하는 것. 그것을 달가워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특히 저토록 고고한 숙녀라면 다른 사람보다 더 그럴 것이다. 린은 동요를 삼키며 춤추는 레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린 듯이 우아한 저 모습은, 좋게 말하면 기품이고 나쁘게 말하면 꾸밈이다. 레나 루벨은 자신을 꾸미는 데 능숙했다. 그래서 언제나 품위 있고 강인한 모습을 보여 왔다. 그런 사람이 원치 않게 민낯을 보이면 어떻게 행동할까? 린은 자신을 스쳐지나간 레나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아니야.’
린은 상처받을 것 같아 스스로를 다잡았다. 그래, 아직은 아니다. 벌써 단정 지을 필요는 없다. 황제 다음 루비드 플레누스와 춤을 추는 게 레나의 계획이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자신이 갑자기 끼어든 걸 수도 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니까 기다리자. 저 춤이 끝나면 내게 올 수도 있으니까. 린은 애써 좋게 생각했다.
―네 그런 점, 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하지만 레나가 본능 단위로 외친 말은 좀처럼 뇌리를 떠나지 않고 그를 괴롭혔다. . . . 레나는 왈왈 짖는 루비드와 춤추며 어느 정도 마음을 가라앉혔다. 린이 너무 갑자기 나타났다. 안 그래도 니힐과 춤이 끝나면 보러 갈 생각이었는데, 그가 생각을 찢고 나타나서 너무 놀랐다. 그래, 그래서 그런 거다. 갑작스러워서.
“야.”
레나가 스스로의 행동을 애써 변호하고 있을 때였다. 루비드가 불퉁한 목소리로 돌연 물었다.
“너 진짜냐?”
“선뜻 답하기엔 질문이 너무 심오하네요.”
맥락을 알 수 없는 물음에 레나가 웃으며 대꾸했다. 그 가식적인 미소에 루비드가 짜증을 내며 덧붙였다.
“진짜 루벨 후작의 딸이냐고.”
농을 던지던 레나는 더 정확해진 물음에 눈이 동그래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레나는 이내 묘한 눈빛으로 중얼댔다.
“봤군요.”
“그럼…….”
“어디까지 봤죠?”
추궁에 가까운 물음에 루비드가 말을 멈췄다. 무덤에서 레나의 기억을 들여다보는데 레나가 눈을 가리며 막았던 일이 불현듯 떠올랐다. 혹시 봐서는 안 될 걸 본 건가 싶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루비드는 내가 왜 눈치를 봐야 하나 싶어 버럭 성을 냈다.
“봤으면 뭐, 내가 훔쳐봤냐?”
“아뇨, 혹시 창피한 걸 들켰나 해서요.”
레나의 너스레에 루비드는 짧게 혀를 찼다. 그러곤 마지못해 고백했다.
“네가 루벨과 같은 집에 있는 거.”
“네?”
“봤다고, 그거.”
루비드는 변명조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것 말고는 못 봤다는 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그럼 받아들이세요.”
“뭐?”
“직접 봤는데 확인이 더 필요한가요?”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레나는 가볍게 웃으며 넘어갔다. 그래서 루비드의 표정은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그 사이 음악이 끝났다. 레나는 어울려준 루비드에게 성의껏 인사했고, 루비드는 짜증난다는 듯 홱 돌아섰다. 루비드와 헤어진 레나는 이번에야말로 린과 마주할 생각에 그를 기다렸다. 그런데 린이 다가오지 않았다. 레나는 먼발치에 선 린을 보고 고개를 갸웃댔다. 그러곤 아까 너무 매몰차게 돌아섰나 싶어 그에게 먼저 다가갔다. 그에 린은 물러나지도 않고 다가오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레나를 기다렸다.
‘뭐지……?’
레나는 린의 반응이 이상하다고 느꼈다. 덩달아 충분히 가라앉힌 마음이 다시 들뜨며 울렁댔다. 걸음이 절로 느려졌지만 레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 정도 동요에 흔들리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레나 경은 허리를 곧게 세우고 빠른 걸음으로 린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자신을 내려다보는 린의 옆에 다정히 섰다. 린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레나는 조금 겸연쩍어 작게 속삭였다.
“약혼식도 아직 안 했는데 불화설을 퍼트릴 순 없잖아요.”
농담이었다.
“……그렇지.”
하지만 린에겐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작게 대답한 린은 레나를 향해 웃으려다가 보는 눈이 많은 걸 알고 여느 때처럼 무표정을 고수했다. 레나는 그 표정이 낯설어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짧은 순간 두 사람 사이에 긴장감이 치솟았다.
‘린 씨 기분이…….’
‘레나 표정이…….’
두 사람은 서로 눈치를 봤다. 하지만 상대가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건 깨닫지 못했다. 그러길 잠깐, 레나가 먼저 용기를 냈다.
“우리도 춤출까요?”
아리따운 숙녀가 먼저 춤을 권했지만 린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주저했다. 동부공으로서 사교는 충분히 익혔으나 본토의 귀족처럼 그것을 즐기는 수준은 아니었다. 게다가 다 큰 남녀가 공개된 장소에서 몸을 포개는 건 그의 정서와 별로 맞지 않았다. 그래서 춤을 추자는 제안이 조금 난처했지만, 린은 감히 거절하지 못하고 레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린의 승낙 표시에 레나는 자신의 손을 그의 손에 우아하게 얹었다. 겨우 여유를 되찾아 살포시 웃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그러니까 린이 손등을 끌어당겨 입 맞추는 순간 레나의 입가에 번졌던 미소는 산산이 깨져버렸다.
“읍……!”
레나는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신음했고, 린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가 레나의 표정을 보고 또다시 당황했다. 레나는 당장이라도 손을 빼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다.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상처받은 린은 레나를 멍하니 올려다보다가 허리를 세웠다. 그러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레나의 손을 끌어당겼다. 레나도 한걸음 다가가며 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음악이 다시 흘렀고, 레나와 린에겐 달콤하면서도 초조한 시간이 시작됐다.
‘춤 못 춘다고 하더니.’
레나는 일전에 린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몰래 웃었다. 춤을 잘 추냐고 물었을 때 린은 잘 못한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좀 헤매면 열심히 끌어줄 생각이었는데, 린은 제법 능숙하게 레나를 리드했다. 레나는 린이 누구랑 춤 연습을 했을까 생각하다가, 그에게 많은 여자 친구가 있던 것을 떠올리고 입가에서 미소를 지웠다.
‘표정이 굳었어.’
한편 린은 조심히 스텝을 밟으며 레나의 기분을 읽으려 애썼다. 그런데 표정을 보니 썩 좋은 상태는 아닌 것 같았다. 린은 그게 자기 때문인지 궁금했다. 레나가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마지못해 다가온 건지, 아니면 여느 때처럼 스스럼없이 자신을 대하는지도 알고 싶었다. 동시에 평소보다 가까운 몸의 거리 때문에 좀처럼 침착할 수가 없었다. 코끝을 간질이는 향기는 난감했고 하얀 어깨를 다 드러낸 드레스 때문에 눈을 둘 곳도 마땅치 않았다. 린은 퍽 괴로웠지만 애써 마음을 다잡고 운을 뗐다.
“……처음 봐.”
“뭘요?”
“그렇게 꾸민 거.”
레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린을 올려다보았다. 펄을 뿌려 반짝이는 눈가가 새삼 사랑스러워, 린은 작게 덧붙였다.
“예쁘네.”
분위기를 풀어볼 요량으로 던진 가벼운 칭찬이었다. 하지만 그 한마디는 당사자도 모르는 사이 무거운 울림이 되어 레나를 압박했고, 가슴이 쿵 찍힌 레나는 놀라서 눈을 치떴다가 저도 모르게 중얼댔다.
“……보기엔 예뻐도 꾸민 사람은 대단히 불편해요.”
들뜬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한 말이었다. 그래서 조금 뾰족했다. 안 그래도 눈치를 보던 린에겐 어김없이 차가웠다.
“미안, 몰랐어.”
“아뇨, 미안할 것까진…….”
린은 놀라서 사과했고 레나는 더 놀라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었다. 레나는 안 그래도 기분이 이상한데 평소보다 더 조심스러운 린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린은 레나가 본능 단위로 자신을 거부하고 있다는 생각에 점점 초조해졌다.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두 사람은 전혀 다른 마음으로 같은 것을 고민을 했다. 그들이 바라는 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예전처럼 지내는 것이었다. 이 애매한 분위기를 타파하고 싶은 건 피차 마찬가지라, 두 사람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저기.”
“아까.”
하필 동시에 운을 뗀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다시 눈치만 살폈다.
“먼저 말씀하세요.”
“아니, 먼저 해.”
그들은 양보하느라 또 시간을 끌었고, 그럴수록 마음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 결국 먼저 입을 연 건 린이었다.
“……루비드 플레누스와 춤 춘 건 미리 약속한 거야?”
“아…….”
레나는 솔직하게 아니라고 말하려다가 멈췄다. 아니라고 하면 린을 외면한 채 충동적으로 루비드에게 돌진한 걸 들키게 된다. 그래서 레나는 대답을 멈추고 빙그레 웃었다. 그러곤 시치미를 떼며 말을 돌렸다.
“그건 왜요?”
“그냥, 궁금해서.”
린은 어물쩍 대답했다가, 한발 늦게 덧붙였다.
“……당연히 나한테 먼저 올 줄 알았어.”
어쩐지 서운한 투였다. 마치 투정 같은 속삭임에 레나는 아랫입술을 꼭 깨물고 입가에 힘을 줬다. 왠지는 모르겠는데 입꼬리가 멋대로 올라가려고 했다. 그래서 레나는 안간힘을 쓰며 린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린은 조금 시무룩한 얼굴이었다. 게다가 왠지 토라진 표정이었다. 그게 너무 귀여워, 레나는 저도 모르게 장난을 쳤다.
“설마 질투해요?”
레나의 물음에 린은 레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한참 후에야 작게 대답했다.
“응.”
비열한 기습이었다. 약점을 노린 필살의 수였고,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는 회심의 일격이었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레나 루벨의 심장은 속수무책 부서졌다. 그에 치명상을 입은 레나 루벨은 생존 반응을 제외한 모든 기능을 상실했다.
*** 방에서 꼬박대며 졸던 유니는 문밖의 소리에 눈을 떴다.
‘아가씨가 오셨나?’
유니는 크게 하품을 하며 눈을 비볐다. 어느새 달이 환하게 빛나는 한밤중이었다. 밖에서 도란도란 말소리가 들리더니, 곧 문이 열리며 화려한 드레스 차림의 레나가 들어왔다. 막 돌아온 레나는 유니가 맞이할 틈도 없이, 그대로 방을 가로질러 침대에 쓰러졌다.
“아앗, 아가씨! 그대로 누우면 어떡해요!”
“심장이 너무 아파요.”
“네?”
레나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가슴을 부여잡았고, 유니는 고개를 갸웃대면서도 레나의 꽉 조이는 드레스를 등에서부터 풀었다.
“황제 폐하는 무사히 만나셨어요?”
“네…….”
“잘 해결됐고요?”
“네…….”
“문 앞까지 데려다준 건 린 씨예요?”
레나는 얼굴을 침대에 파묻은 채 끄덕였다.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다. 레나는 어영부영 세 번째 춤을 추고 연회장을 나왔다. 표면적으로는 피곤하다는 이유였다. 그에 파트너인 린은 레나를 문 앞까지 에스코트해주었고, 레나는 방금 막 그와 작별하고 침대로 직행한 참이었다.
“참 훌륭한 주인님이에요. 모르시죠? 아가씨 누워 계실 때 린 씨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유니가 레나의 구두를 벗기며 조잘댔다. 덕분에 레나는 또다시 낯이 뜨거워졌다.
“근데 우리 주인님은 왜 안 들어오세요?”
유니가 얄궂게 장난을 쳤고, 침대에 엎어졌던 레나는 그제야 주섬주섬 일어나 앉았다. 깐족대던 유니는 그제야 레나의 심란한 얼굴을 확인하고 놀랐다.
“아가씨? 무슨 일 있었어요?”
“……린 씨가 너무 친절해서요.”
“네?”
알아듣지 못할 말에 유니가 고개를 갸웃댔다. 레나는 그 무구한 얼굴을 보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아니, 복잡한 건 마음이고 사실 이건 아주 단순한 문제다. 유니는 레나를 좋아한다. 왜냐하면 구해줬기 때문이다. 유니는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은, 그래서 말하기보다 도망치는 법을 먼저 배운 빈민가의 고아였다. 그 아이는 혼자서도 굶어 죽거나 병들어 죽지 않고 용케 살아남았지만, 결국엔 배교자들에게 붙잡혀 망자의 먹이가 될 처지였다. 그때 레나가 나타나 유니를 구했고, 그 후 유니는 병아리가 엄마 닭을 쫓듯 레나를 쫓았다. 그리고 자신을 보호하는 레나에게 무한한 애정과 헌신을 보냈다. 생명의 은인에게 감사와 호감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 마찬가지다. 레나가 린에게 새삼 가슴이 떨리는 것도, 결국은 같은 맥락이다.
“친절한 린 씨가 새삼 멋있어요?”
유니의 장난 섞인, 동시에 무섭도록 예리한 물음에 레나는 쓰게 웃었다. 유니의 말대로 린은 멋있다. 그래서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자신을 구해주기까지 했다면, 호의를 넘어 사랑을 느끼는 것도 다분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레나는 전처럼 즉각 부정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고, 유니는 레나의 반응에 오히려 놀랐다.
“정말이에요?”
“안 될 일이죠.”
“네?”
“안 될 일이에요, 정말.”
레나는 혼잣말인지 뭔지 모를 소리를 중얼댔다. 그에 눈을 빛내던 유니는 눈을 깜빡이다가, 돌연 심각한 얼굴로 속삭였다.
“……왜 안 돼요?”
“네?”
레나에겐 지레 몸을 사리는 버릇이 있었다. 특히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레나는 늘 스스로를 제한했다. 그럼 안 된다면서, 그럴 수 없다면서. 유니는 레나가 그럴 때마다 불안한 마음을 숨기고 넘어갔다. 하지만 오늘은 평소와 느낌이 달라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누굴 멋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누굴 좋아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잖아요. 딱히 안 될 일은 아니에요.”
유니의 직언에 레나가 짐짓 놀랐다. 그래도 유니는 모르는 척 말을 이었다.
“저는 아가씨가 하시는 일을 다 몰라요. 하지만 아가씨가 늘 떠날 궁리만 한다는 건 알아요. 그러니까 모르는 대로 얘기할게요. 그냥, 같이 행복하게 살면 안 돼요?”
행복하게. 그 생소한 표현이 찬바람처럼 레나를 스쳤다.
“저랑 린 씨랑, 뭐 영감님도 껴달라면 껴주고요. 위험한 일이 다 끝나고, 그렇게 살면 안 돼요?”
아이의 물음은 달콤하고도 잔혹했다. 레나는 할 말을 고르듯 눈동자를 천천히 움직이더니, 결국 체념하듯 중얼댔다.
“그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레나는 이번에도 그렇게 침묵했다. 그 앞에서 유니는 목까지 차오른 말을 도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애써 웃는 레나의 얼굴이 너무 쓸쓸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레나는 유니가 물어봐준 덕분에 새삼 자신의 처지를 확인했다. 바보처럼 뭘 설레어 하는지. 애당초 고민할 거리도 아니었다. 서로에게 유일해지는 건 부담스럽다. 책임지지 못할 일은 시작도 안 하는 게 맞다. 누군가의 파트너가 되는 건 잠깐 춤출 때로 충분하다. 왜냐하면 레나 루벨은 할 일을 마치면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무덤에서 돌아온 여자는 무덤으로 돌아가야 한다. 모든 일이 끝났을 때, 레나가 있어야 할 곳은 이 세상이 아닌 무덤 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