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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화. 곁에 있는 게 좋았다 (82/208)

82화. 곁에 있는 게 좋았다2021.02.11.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뺨에 닿았다. 목덜미로 전해지는 체온은 나른하게 기분 좋았고, 위로 포개진 단단한 몸은 불쾌하거나 부담스럽기보다는 각별하게 다가왔다. 어두운 새벽, 단둘뿐인 고요한 침실. 전신으로 느껴지는 한 사람의 온기. 그리고 평소보다 조금 더 빠른 가슴 속의 박동. 레나는 결국 인정했다. 이 사람이 자신에게 얼마나 특별한지. 동정심으로 치부하고 싶었던 마음이 사실은 연심인 것도. 아, 어쩌자고 마음을 이렇게 키웠지? 레나는 서글픈 마음으로 자책했다. 자신의 종착지가 어딘지 알면서, 이건 스스로를 가시밭길로 밀어 넣는 것과 다름없는데. 더 괴로운 건 이 마음이 싫지 않다는 거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또 그 누군가가 자신에게 동일한 마음을 품었다는 게 싫지 않았다. 좋았다. 기뻤다. 가능하다면 더 누리고 싶었다.

16562815971805.jpg‘바보 같은 소리.’

레나는 스스로의 생각을 비웃었다. 그러곤 어수선한 마음을 가라앉히며 고민했다. 어떡해야 좋을까. 이미 모르는 척할 수 없을 만큼 짙어진 감정을. 어떡하긴, 당연히 감춰야지. 끝은 이미 정해져 있는걸. 그나마 다행인 건 이 사람도 먼저 다가올 수 없다는 것이다. 정말 다행히도 우리는 누군가를 기꺼이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 사실을 떠올린 순간, 그리고 그걸 다행이라고 여긴 순간 가슴이 베인 듯 아팠다. 그래서 레나는 린의 머리에 뺨을 기댄 채 잠시 아픔을 견뎠다. 잠시 후 입을 열었을 때 레나의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상냥했다.

16562815971805.jpg“……오해하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16562815971813.jpg“오해?”

16562815971805.jpg“린 씨를 싫어한 적 없어요. 일부러 피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반대예요. 그때, 린 씨가 구하러 와서 정말 기뻤어요.”

레나는 솔직히 말했다. 린의 눈치가 생각보다 빨라서 그 편이 나을 것 같았다.

16562815971805.jpg“아무도 안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린 씨가 와줘서, 포기하지 않고 거기까지 와줘서……. 이런 표현 조금 우습지만, 기적이 일어난 기분이었어요.”

레나의 담담한 고백에 린의 입술 새로 숨결이 옅게 흘렀다. 몰래 안도하는 모양이었다. 그 숨소리에 레나는 이걸 어쩌나 싶었다.

16562815971805.jpg“……그래서 선뜻 볼 수가 없었나 봐요.”

16562815971813.jpg“왜?”

16562815971805.jpg“일방적으로 도움 받은 게 조금 자존심 상해서.”

16562815971813.jpg“뭐야, 그게…….”

레나의 희한한 변명에 린이 중얼댔다. 다행히 더 이상 서운해하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린의 안도를 느낀 레나는 그가 못 보는 사이 쓰게 웃었다. 너도 나를 정말 좋아하는구나 싶어서. 그래서 상처 주고 싶지 않았다. 아픈 일은 조금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시를 닮은 내 소중한 사람을 아껴주고 싶었다. 레나는 자신의 품에 기댄 린의 얼굴을 두 손으로 들어올렸다. 어두워서 그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온도로 그의 기분을 헤아릴 수 있었다. 그래서 레나는 그를 보며 애써 웃었다.

16562815971805.jpg“린 씨.”

16562815971813.jpg“응.”

16562815971805.jpg“고마워요.”

레나의 진심어린 인사에 린이 대답하려 했다. 하지만 그 전에 레나가 먼저 말을 이었다.

16562815971805.jpg“이 빚은 반드시 갚을게요.”

빚.

16562815971805.jpg“동맹으로서 기대에 부응할게요.”

그리고 동맹. 린이 이 표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걸 안다. 그래서 레나는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 은근히 선을 그으며 제 위에 포개진 린의 몸을 살며시 밀었다. 레나의 손길에 린은 순순히 몸을 일으켰다. 린이 비켜서자 레나도 일어나 앉았다. 순식간에 거리가 생겼고 레나는 그 거리만큼 담백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16562815971805.jpg“불안하게 만든 건 다시 사과할게요. 하지만 믿어줬으면 해요. 우리가 동맹인 이상 일방적으로 관계를 끊는 일은 없을 거예요.”

목소리만 상냥할 뿐, 레나의 가정은 차가웠다. 동맹이 아니라면 일방적으로 관계를 끊을 수도 있다는, 동맹이라서 이 관계가 유지되는 거라는 그런 말이었다. 때문에 린은 조금 놀랐다. 그는 눈치가 빠른 편이었고, 레나의 말에 의도가 담긴 것도 곧장 깨달았다. 그래서 짐짓 당황하는 그에게 레나가 덧붙였다.

16562815971805.jpg“혹시라도 피치 못할 상황이 생기면 미리 말할게요. 그러니까, 연애 감정이 생기면 알리기로 한 것처럼요.”

이 말을 이렇게 쓰게 될 줄이야. 레나는 공교롭다고 생각하며 말을 맺었다.

16562815971805.jpg“그게 우리 약속이잖아요.”

16562815971813.jpg“그건…….”

16562815971805.jpg“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알죠?”

레나의 말투는 차분했다. 동시에 분명했다. 그래서 뭐라 말하려던 린은 입을 열지도 다물지도 못한 채 레나를 바라보았다. 린은 눈치가 빨랐다. 타인의 기분을 읽는 데 능하기도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린은 레나가 무슨 말을 하는지 곧 깨달았다. 레나의 기분도, 의도도. 지금 레나는 아주 상냥한 방법으로 린을 거절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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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복도로 나온 레나의 얼굴은 여느 때처럼 온화했다. 그래서 문 앞을 지키고 서 있던 기사들은 군주의 혼약자가 간병을 마치고 돌아간다고만 생각했다. 한 기사가 처소까지 수행해드리겠다고 말했다. 그에 레나는 혼자 갈 수 있다며 완곡히 거절했다. 그렇게 어두운 복도로 나온 레나는, 동부 기사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정해진 순서로 움직이던 왼발과 오른발이 우뚝 멈추자 가슴의 꿰뚫린 감각이 더 짙어졌다. 마음이 아팠다. 해야 할 말을 했을 뿐인데,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아팠다.

16562815971805.jpg‘괜한 말을 했나?’

그래서 레나는 린에게 한 말을 잠깐 후회했다. 그냥 모른 척 넘어갈 수도 있었는데. 앙큼하게 시치미를 떼고 미묘한 거리에서 연인인 듯 친구인 듯 관계를 유지할 수도 있었는데. 레나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도로 고개를 저었다. 안 될 일이다. 레나 루벨의 끝은 이미 정해져 있고 그 종착지는 무덤이다. 그러니 지금 바로잡는 게 맞다. 린을 그 나락까지 끌어들일 게 아니라면, 생이별로 그를 난도질할 게 아니라면 여기서 정리하는 게 맞다. 더 좋아하고 사랑하게 되어 헤어질 수 없는 지경이 오기 전에 멈춰야 한다. 그게 현명한 판단이다.

16562815971805.jpg“현명…….”

레나는 스스로의 표현을 멍하니 곱씹었다. 눈앞이 어지러웠다. 과연 뭐가 현명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레나는 스스로 생각한 것보다 린을 훨씬 더 좋아하고 있었다. 이제 막 싹튼 마음인 줄 알고 뽑아내려 했는데 뿌리가 생각보다 깊었다. 이슬비가 내리는 줄 모르고 돌아다니다가 온몸이 푹 젖은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의 곁에 있는 게 좋았다. 웃는 얼굴이 예뻤다. 낮은 목소리가 감미로웠다. 뭐든 잘하면서 은근히 서툰 모습도 귀여웠다. 마주치는 시선이 소중했고 가끔 닿는 손은 언제나 따뜻했다. 착한 사람이었다. 아픔이 있다는 이유로 잔인해지지 않고 힘이 있다는 이유로 난폭해지지 않았다. 무례함을 가장한 적은 있어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겐 늘 대가 없이 친절했다. 당신은 어두움을 견딘 불빛이었고 냉정을 이겨낸 다정이었다. 당신은 내가 기다려 마지않던 손길이자, 내가 발견한 가장 아름다운 시였다. 그런 당신이 지금도 이렇게 좋은데 나중엔 어떨까. 얼마나 더 사랑스럽고 소중해질까. 지금도 이렇게 아픈데, 그때는 정말 죽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레나는 아우성치는 마음을 다잡았다. 시작도 못 한 마음이 서럽다며 원망하는 걸 다그쳤다. 한편으로는 린이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했다. 상처받았을까? 서운해할까? 어쩌면 아무렇지 않을 수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그래서 레나는 벽에 등을 기댄 채 견뎠다. 잠시 후 다시 눈을 떴을 때, 레나에게 더 이상 동요의 빛은 없었다. 동트기 직전의 새벽이 어두웠다. 하지만 레나는 첩첩한 어둠을 혼자 헤치는 것에 익숙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의연히 발을 내디뎌 길을 찾았다. 도중에 잠깐 주저앉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레나는 다시 걸어갔다. *** 밤새 내린 비로 유독 차가운 새벽이었다. 니힐은 산산이 부서진 두엄의 궁을 공허하게 바라보았다. 본연의 형상을 완전히 잃어버렸지만 니힐의 눈에는 여전히 보였다. 아치형 입구와 높은 천장, 문양이 교차되는 대리석 바닥, 그 위를 가로지르는 붉은 카펫, 화려한 왕좌, 그리고 그 앞에 모인 많은 사람들……. 니힐에게 그날의 기억은 여전히 눈앞에 놓인 듯 생생했다. 그 과거가 현재보다 오히려 더 가깝게 느껴졌다. 모든 것은 여기서 시작됐다. 바로 여기서 황제가 탄생하고 제국이 시작됐다. 그리고 백 년. 한 세기 동안 대륙을 통치하며 모든 것을 원하는 대로 했다. 그럼에도 니힐 그라샤는 여전히 만족을 모른다.

1656281602973.jpg“나와라.”

눈으로 무너진 터를 세우던 니힐이 불현듯 명했다. 하지만 주변은 고요했고, 기다리던 니힐은 고개를 돌려 무너진 기둥 쪽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기둥 뒤에서 새하얀 성의를 걸친 자가 걸어 나왔다.

16562816029734.jpg“역시 못 당하겠네.”

짧은 푸념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다름 아닌 클라비스였다. 그는 숨어 있다가 나온 주제에 몹시 뻔뻔한 투로 니힐을 맞이했다.

16562816029734.jpg“황송합니다. 이 누추한 곳까지 행차해주시다니.”

1656281602973.jpg“빈정대지 마라.”

16562816029734.jpg“빈정대다니요. 제가 감히 어찌.”

클라비스가 매끄럽게 대꾸하자 니힐은 표정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 차가운 시선에 클라비스는 힘없이 웃었다.

16562816029734.jpg“농담이야. 화내지 마.”

클라비스가 친근하게 말하자 니힐은 그제야 시선을 거뒀다. 니힐이 무너진 궁전을 다시 바라보며 물었다.

1656281602973.jpg“궁전의 복구는?”

16562816029734.jpg“설계사들을 소집했어. 하지만 자료가 없어서 시간이 좀 걸릴 거야.”

1656281602973.jpg“복구가 끝날 때까지 설계사를 매일 한 명씩 죽이면 금방 되겠지.”

니힐의 발언에 클라비스는 침묵했다. 그러자 니힐이 그를 힐끗 돌아보며 중얼댔다.

1656281602973.jpg“농담이야, 웃어.”

니힐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하자 클라비스는 모호한 미소를 떠올렸다. 익숙한 듯 피로한 듯, 평소와는 결이 다른 미소였다. 클라비스는 그렇게 민낯을 드러내며 니힐에게 다가갔다.

16562816029734.jpg“춤추면서 무슨 얘기 했어?”

난데없는 물음에 니힐이 고개를 기울였다. 클라비스는 순순히 부연했다.

16562816029734.jpg“레나 루벨하고 춤추면서 말이야. 계속 말하던데.”

니힐은 그제야 클라비스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그런 일도 있었지. 불과 며칠 전 일인데 아주 까마득한 옛날 일 같이 흐렸다. 그래서 니힐은 천천히 기억을 더듬으며 레나와 나눈 대화를 생각해냈다.

16562815971805.jpg―폐하와 춤을 추고 싶습니다.

원하는 것을 물었더니 레나 루벨은 춤을 추고 싶다고 했다. 희한한 청이라고 생각했지만 허용 범위라 함께 손을 잡고 홀로 나갔다.

16562815971805.jpg―혹시 히엠스 그라샤의 마지막이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같이 춤을 추는데 레나 루벨이 돌연 이렇게 물었다. 그래서 나는 뭐라고 대답했지?

1656281602973.jpg―끈질기게 들러붙다가 추하게 발악했겠지.

그래. 이렇게 말했다. 그에 레나 루벨은 정확하시네요, 라며 웃었다.

16562816029734.jpg“끈질기고 추하고, 그라샤의 특징이네.”

이야기를 전해들은 클라비스가 웃으며 중얼댔다. 그러더니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16562816029734.jpg“예상보다 빠르지? 정복을 시작한 지 한 달도 안 됐는데 망자의 왕을 둘이나 데려왔어.”

1656281602973.jpg“레나 루벨. 흥미로운 변수다.”

16562816029734.jpg“그러게.”

니힐의 평가에 클라비스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긍정했다. 그러곤 푸념하듯 덧붙였다.

16562816029734.jpg“나머지 왕들도 곧 오겠지. 레나 루벨도 젊은 공작들도 우수하니까. 그렇게 되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데…….”

클라비스가 말끝을 흐리며 니힐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니힐의 시선은 여전히 무너진 궁전을 향하고 있었다. 그 무심한 황제에게 추기경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16562816029734.jpg“이제라도 멈출 생각 없어?”

1656281602973.jpg“없어.”

니힐의 대답은 단호했다.

1656281602973.jpg“나는 아직 만족하지 못했다.”

16562816029734.jpg“언제까지 해야 만족하겠어?”

1656281602973.jpg“영원히.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16562816029734.jpg“……우린 정말 끔찍한 존재야.”

클라비스는 별로 놀랍지도 않다는 듯, 오히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푸념했다. 그러곤 웃으며 되물었다.

16562816029734.jpg“그렇지? 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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