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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 생일 선물 (83/208)

83화. 생일 선물2021.02.15.

켜켜이 쌓인 빨랫감 사이로 도란대는 목소리가 울렸다.

1656281616781.jpg“자랑스럽겠구나.”

16562816167816.jpg“뭐가요?”

1656281616781.jpg“너희 아가씨 말이다, 폐하가 아끼신다는 소문이 자자하던데.”

유니는 시큰둥하게 끄덕이며 남은 초콜릿을 마저 입에 넣었다. 그러자 노집사는 흐뭇하게 웃으며 화제를 이어갔다.

1656281616781.jpg“한 달 전만 해도 이방인이었는데, 이젠 내로라하는 귀족들이 줄지어 초대장을 보낸다지?”

레나 루벨의 상황을 떠보려는 속셈이 빤히 보였다. 하지만 유니는 모르는 척 어울려주었다.

16562816167816.jpg“맞아요, 요즘 들어 매일 무슨 초대장이 날아오기는 해요.”

1656281616781.jpg“그럼 사람 만나느라 바쁘시겠구나?”

16562816167816.jpg“아뇨, 평소랑 똑같으세요.”

1656281616781.jpg“초대는 어쩌고.”

16562816167816.jpg“다 거절하고 있죠.”

1656281616781.jpg“저런, 사교엔 별로 흥미가 없으신가?”

노집사는 그렇게 말하며 무언가 더 물어보려 했다. 그런데 집사의 말이 거기서 뚝 끊겼다. 갑자기 찾아온 불청객 때문이었다.

16562816196487.jpg“아, 여기 있었네!”

그렇게 말하며 나타난 건 순한 인상의 소년 사제였다. 소년은 밝은 얼굴로 유니를 찾더니, 그 옆에 있는 노집사를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16562816196487.jpg“그런데 집사는 여기 웬일이야?”

소년, 엔지가 환히 웃으며 루벨 가문의 집사에게 물었다. 그에 집사는 짐짓 당황해 되물었다.

1656281616781.jpg“도련님께선 어쩐 일로…….”

16562816196487.jpg“쟤랑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런데 집사도 저 애 알아?”

1656281616781.jpg“아, 일 때문에 오며가며 우연히…….”

집사가 얼버무리며 웃었다. 그래서 엔지도 따라했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거짓말하는 어른의 미소를 따라하며 눈을 가늘게 뜨고 웃어주었다.

1656281616781.jpg“이런, 시간이 벌써.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뵙지요.”

집사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며 어물쩍 물러났다. 집사가 떠나자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엔지가 유니에게 나직이 말했다.

16562816196487.jpg“루벨 가의 집사야. 저 사람.”

16562816167816.jpg“알고 있어.”

하지만 유니는 태연히 대꾸했고, 덕분에 엔지는 깜짝 놀랐다. 그런 엔지를 보며 유니가 얄궂게 덧붙였다.

16562816167816.jpg“너 때문에 이제 공짜 초콜릿 못 먹게 됐어.”

엔지는 멍한 얼굴로 유니를 쳐다보다가 이내 힘없이 웃었다. 야무진 유니를 보니 자신이 얼마나 순진했는지 새삼 느껴졌다. 엔지가 자조를 삼키며 말했다.

16562816196487.jpg“나는 엔지 루벨이야. 넌 이름이 뭐야?”

많이 늦었지만 엔지는 정식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유니는 이미 안다고 대꾸하려다가 일전에 도움 받은 걸 떠올렸다. 그래서 마음을 바꿔 짧게 대답했다.

16562816167816.jpg“유니.”

16562816196487.jpg“……누가 지어준 이름이야?”

16562816167816.jpg“우리 아가씨.”

유니의 대답에 엔지의 표정이 묘해졌다. ‘유니’는 누나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의 이름이었다. 그래서 유니의 이름을 듣는 순간 가슴이 술렁였다. 예전에 죽었다고 생각한 누나는 그가 모르는 곳에서 여전히 살아가고 있었다. 책을 좋아하는 본연의 성격대로, 여전히 레나 루벨로. 그 사실이 새삼 쓸쓸해 엔지의 안색이 흐려졌고, 그걸 본 유니는 고개를 기울였다. 늘 반짝반짝 웃던 녀석인데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괜히 분위기를 잡는다. 유니는 건방지다고 생각하며 엔지를 다그쳤다.

16562816167816.jpg“넌 또 뭐 하러 왔냐?”

16562816196487.jpg“어? 아, 네 얘길 좀 듣고 싶어서.”

16562816167816.jpg“내 얘기가 아니라 우리 아가씨 얘기겠지.”

유니가 코웃음을 치며 빈정댔고 정곡을 찔린 엔지는 더 시무룩해졌다. 그래서 유니는 뒤늦게 말을 돌렸다.

16562816167816.jpg“뭐, 그래서 무슨 얘기가 듣고 싶은데?”

16562816196487.jpg“그냥…….”

엔지는 대답을 고르듯 뜸을 들였다. 듣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았다. 그래서 무슨 질문을 먼저 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한참 생각하던 엔지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16562816196487.jpg“레나 루벨을 만나고 싶어.”

16562816167816.jpg“안 돼.”

16562816196487.jpg“왜?”

16562816167816.jpg“아가씨는 널 만날 생각이 없으시니까.”

16562816196487.jpg“레나 루벨이 그렇게 말해?”

16562816167816.jpg“아니. 하지만 만날 생각이 있으면 진작 찾아가셨을 거야.”

유니의 주장에 엔지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 반박할 수 없었다. 지금 레나 루벨은 남부공 대리로서 공작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그러니 후작 가의 아들 정도야 만나려고 마음먹으면 언제든 만날 수 있었을 터. 그러니 엔지가 아직까지 레나를 만나지 못한 건, 레나가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 냉정한 사실에 엔지가 침울한 얼굴로 되물었다.

16562816196487.jpg“……너희 아가씨가 내 얘기 한 적 없어?”

16562816167816.jpg“전혀.”

유니는 가감 없이 대답했고 덕분에 엔지는 한층 더 속상한 얼굴이 되었다. 그 불쌍한 얼굴에 유니가 몰래 가책을 느끼는데, 시무룩해하던 엔지가 돌연 무언가를 꺼냈다.

16562816196487.jpg“그럼 이거라도 전해줘.”

엔지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꺼낸 것은 꽃이었다. 보통 꽃이 아니라 납작하게 눌러서 종이처럼 판판해진 압화였다. 예쁜 종이에 붙은 그 꽃은 가느다란 줄기에 보라색 꽃송이가 보리 이삭처럼 맺혀 있었는데, 살짝만 흔들어도 상쾌하고 보드라운 향기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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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62816167816.jpg“이게 뭐야?”

16562816196487.jpg“책갈피.”

16562816167816.jpg“이걸 왜? 선물이야?”

16562816196487.jpg“다음 주 화요일이잖아.”

16562816167816.jpg“뭐가?”

유니가 되묻자 엔지는 조금 당황했다. 그러더니 이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16562816196487.jpg“……누나 생일.”

  . . . 유니에겐 생일이라는 개념이 생소했다. 본인의 생일도 모를뿐더러, 이제껏 생일을 챙겨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건 유니 자신의 생일만 아니라 레나의 생일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유니는 엔지가 알려준 아가씨의 생일에 내심 어안이 벙벙했다.

16562816167816.jpg‘예쁘다.’

유니는 복도를 걸으며 엔지가 건네준 누름 꽃 책갈피를 바라보았다.

16562816167816.jpg‘좋은 냄새.’

이 책갈피를 책 사이에 끼워뒀다가 다시 펼치면 기분이 무척 좋을 것 같다. 책을 좋아하는 아가씨에게 딱 맞는 선물이었다.

16562816167816.jpg‘생일엔 이런 걸 주는구나.’

태어난 날을 축하하면서 그 사람이 좋아할 만한 물건을 선물한다니. 유니는 참 예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엔지의 부탁을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책갈피를 받아버렸다.

16562816167816.jpg‘전해주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아가씨가 이걸 받고 어떻게 생각할지 조금 염려스러웠다. 괜한 짓을 하는 걸까 싶기도 했다.

16562816167816.jpg“어?”

골똘히 생각하던 유니는 방 앞에 도착했을 때 놀라서 걸음을 멈췄다. 열 명은 됨직한 사람들이 복도에 줄지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유니는 그들을 보고 책갈피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곤 뉘신데 여기서 이러시냐 물으려 했다. 그런데 유니가 운을 떼기도 전에 그들이 먼저 아는 체했다.

1656281616781.jpg“아, 레나 경의 하녀!”

그들은 유니를 보자마자 우르르 몰려왔다. 그러더니 너나 할 것 없이 유니에게 편지나 카드 따위를 들이밀었다.

1656281616781.jpg“이걸 레나 경께 전해주렴.”

1656281616781.jpg“이것도.”

1656281616781.jpg“여기도!”

유니는 어어 하는 사이 십여 장의 편지와 카드를 넘겨 받았고, 심부름꾼들은 답변을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며 사라졌다.

16562816167816.jpg“우씨, 내가 무슨 비둘긴 줄 아나…….”

유니는 꿍얼대면서도 편지를 모두 챙겨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곤 아직 고요한 방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16562816167816.jpg“아가씨, 일어나셨어요?”

대답이 없다. 그래서 유니는 자연스레 침실 쪽을 돌아보았고, 거기서 아가씨를 발견했다. 레나는 아직 자고 있었다.

16562816167816.jpg“아가씨, 해가 중천이에요! 쉬는 날이라고 그렇게 잠만 주무시면 어떡해요?”

유니가 종종걸음으로 달려가 레나를 깨웠다. 그러자 레나가 슬피 애원했다.

16562816306712.jpg“조금만 더요…….”

16562816167816.jpg“이미 아침도 걸렀는데 점심 식사는 하셔야죠! 어제 대체 몇 시에 들어오신 거예요?”

린 씨가 쓰러졌다는 소식에 한달음에 달려갔던 아가씨는 유니가 깜빡 잠들 때까지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귀가 시간을 물었지만 레나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으며 대답을 피했다.

16562816167816.jpg“린 씨는 괜찮아요?”

유니가 무심코 묻자 레나가 그제야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특정 화제에 잠이 달아난 탓이지만, 정작 말을 꺼낸 유니는 그 사실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16562816306712.jpg“네, 새벽에 일어났어요. 다행히.”

레나는 짧게 대답하며, 유니가 오늘은 이걸로 장난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유니도 오늘은 린 씨를 소재로 까불 마음이 없었다. 주머니에 든 책갈피 때문이었다. 유니는 이걸 어떻게 전할까 고민하다가 문 앞에서 받은 편지와 카드부터 펼쳐보였다.

16562816167816.jpg“아가씨, 아가씨 앞으로 편지가 잔뜩 왔어요. 이번엔 문 앞에 안 놓고 기다리다가 직접 줬어요.”

16562816306712.jpg“회신을 안 해서 그런가보네요. 어떤 내용인지 좀 봐줄래요?”

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씻을 물을 따랐다. 그러곤 귀를 열어둔 채 세수를 시작했다. 유니는 레나의 부탁대로 편지를 하나하나 펼쳐 읽었다.

16562816167816.jpg“친애하는 레나 경. 경을 우리 다과회에 초청합니다. 부디 오셔서 경의 용맹과 무용을 우리에게……”

16562816167816.jpg“복 있을진저. 사랑하는 레나 경. 자비로운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의 예배로 경을 초대하오니…….”

16562816167816.jpg“존경하는 레나 경께. 지난 전야제 때의 무례를 사죄하고자 편지 드립니다. 레나 경이 어떤 분이신지 미처 모르고 저지른 잘못을…….”

편지의 내용은 다양한 듯 똑같았다. 다과회, 승마모임, 연주회, 기도회, 낭독회, 꽃꽂이 모임 등이 있으니 부디 참석해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나마 참신한 건 전야제 때의 일을 사과하는 편지였는데, 그것도 결국엔 함께 차를 마시며 회포를 풀자는 이야기로 끝나 그리 다를 바 없었다.

16562816306712.jpg“다들 느긋하네요.”

레나가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며 푸념했다. 두엄의 궁이 무너지고 황궁 한복판에서 전투가 벌어진 게 불과 며칠 전이다. 그런데도 중앙의 귀족들은 예정된 사교를 멈추지 않았다. 위기감을 못 느끼는 건지 아니면 이 또한 일종의 광기인지, 레나는 어느 쪽이든 참 희한하다고 생각했다. 유니는 레나가 어떤 초대에도 응할 생각이 없는 걸 알고 편지를 빠르게 넘겼다.

16562816167816.jpg“오. 동부공이 보낸 편지가 있네요.”

뜻밖의 소식에 레나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16562816306712.jpg‘린 씨가?’

레나가 말릴 틈도 없이 유니가 편지의 봉인을 뜯었다. 그러곤 태연한 목소리로 편지를 읊었다.

16562816167816.jpg“수도 시찰로 며칠간 자리를 비울 예정. 음, 우리 주인님은 편지도 되게 짧군요.”

편지의 내용은 레나의 생각보다 훨씬 담백했다. 애당초 레나가 예상한 화제도 아니었다. 지난 새벽에 한 얘기가 언급될 줄 알았던 레나는 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곤 린의 편지 내용을 뒤늦게 곱씹었다.

16562816306712.jpg‘자리를 비우는구나…….’

덕분에 앞으로 오늘 밤 산책을 나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할 필요도 없어졌다. 레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내심 마음이 착잡했다. 저 짧은 편지에 담긴 린의 감정이 궁금했다. 밤새 아팠으면서 돌연 시찰을 나간 이유도 신경 쓰였다. 혹시 어제 일 때문일까 싶어 괜히 애가 탔다. 레나가 머리의 물기를 닦는 척 골똘히 생각할 때였다.

16562816167816.jpg“어?”

유니가 또 다른 편지를 보고 놀란 소리를 냈다. 레나가 쳐다보자 유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16562816167816.jpg“루벨 후작 가에서 온 편지예요!”

유니는 그렇게 말하며 곧장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친애하는 레나 경. 경과 재회한 지도 곧 한 달이 되어갑니다. 그 짧고도 긴 시간 경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너무 많은 강을 건넜지만 그럼에도 우리에겐 끊어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고 믿습니다. 하여 경을 만찬에 초대하고 싶습니다. 다음 주 화요일, 그대가 크고 자란 그 집에서 다시 한번 그대의 목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초청에 응해주신다면 아내와 함께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거절하지 마시고 너그러이 참석해주시기 바랍니다. 카르도 루벨 후작이, 그대의 고결함에 존경을 보내며.  

16562816167816.jpg“어쩐지, 아가씨가 바쁜 건 왜 물어보나 했더니!”

유니는 아까 루벨 가의 집사가 한 말을 떠올리고 어이없다는 듯 소리쳤다. 한편 레나는 아버지의 편지에 전전긍긍하던 마음이 차갑게 가라앉는 걸 느꼈다. 게다가 초대된 날이 하필이면 다음 주 화요일이다.

16562816306712.jpg‘그 날이 내 생일인 걸 알고 이러시나?’

알아도 우습고 몰라도 우습다. 어릴 때 팔려가던 그날도 생일 직전이었는데,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부름을 받았다. 레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짙게 웃었고, 그걸 본 유니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16562816167816.jpg“가실 거예요?”

16562816306712.jpg“당연히 가야죠. 다만 시간을 좀 바꿨으면 좋겠네요.”

16562816167816.jpg“언제로요?”

16562816306712.jpg“오늘 저녁으로요.”

레나가 예쁘게 한 대답에 유니의 눈이 동그래졌다. 오늘 저녁이면 이제 대여섯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그동안 만찬을 준비하라는 건 누가 봐도 억지였다. 그래서 아가씨가 농담을 하나 싶었지만 레나는 진심이었다. 레나는 곧장 답장을 썼다. 초대에 응하고 싶으나 일신상의 이유로 오늘이 아니면 어렵겠다고 보란 듯이 도발했다. 후작이 어떻게 나올지 볼 심산이었다. 레나는 그 편지를 후작 가에 보냈다. 그에 대한 답변은 한 시간이 채 지나기 전에 돌아왔다. 편지를 받은 유니는 퍽 우스운 기분으로 아가씨에게 후작의 답을 전했다.

16562816167816.jpg“이따 5시까지 마차를 보내겠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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