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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화. 온통 거짓말 (84/208)

84화. 온통 거짓말2021.02.18.

안 그래도 초대하겠다고 했다. 가까운 시일 내에, 집으로. 후작은 레나에게 한 약속을 지켰다. 사람을 곤경에 빠트려놓고 언제 그랬냐는 듯 손 내미는 아버지의 작태가 새삼 우스워, 레나는 턱을 괸 채 옅게 웃었다. 레나를 태운 마차는 잔잔한 수면을 스치는 배처럼 고요히 나아갔다. 달그락대는 말발굽 소리마저 없으면 마차를 탄 것도 잊어버릴 정도였다. 이것은 고귀한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였다. 대리석과 백사로 빈틈없이 포장된 도로, 조금의 삐걱댐도 없는 황금색 마차, 그린 듯 아름다운 거리의 풍경. 그 어린 날, 수도에 처음 와본 레나는 이 모든 것에 설레했다. 울퉁불퉁한 시골길에 익숙하던 아이는 휘황찬란한 도시에서 가족과 함께할 것을 상상하며 기쁨으로 눈을 빛냈다. 하지만 아이의 소망은 처참히 박살 났고, 더는 아이가 아닌 레나의 시선은 싸늘하기만 했다. 6년 만이었다. 레나 루벨은 또 6년 만에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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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후작가에서 레나 앞으로 마차를 보내기 한 시간 전이었다.

16562816455861.jpg“저, 아가씨.”

레나의 머리를 빗기던 유니가 평소답지 않게 조심히 운을 뗐다.

16562816455861.jpg“혹시 동생을 만날 생각은 없으세요?”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가 엔지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후작이 레나를 만찬에 초대했고 레나는 그에 응했다. 그럼 그 녀석도 참석할까? 고민하던 유니는 곧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들이 그 자리에 초대될 것 같지는 않았다. 편지에도 아내와 함께 기다리겠다고만 적었지, 아들에 대한 말은 없었다. 엔지는 이번에도 배제되는 모양이었고, 아직 엔지의 책갈피를 가지고 있는 유니는 그게 영 신경이 쓰였다.

16562816455861.jpg“엔지 루벨이 아가씨를 궁금해해요.”

16562816455872.jpg“그래요?”

그래서 용기 내어 말했지만 레나의 대답은 싱거웠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는 것 같아 유니는 못내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거울을 통해 유니를 보던 레나가 못 이기는 척 말했다.

16562816455872.jpg“……실은 고민 중이에요. 그 애를 만나도 괜찮을지.”

16562816455861.jpg“왜요?”

16562816455872.jpg“아버지가 제게 한 짓을 제가 그 애한테 할 수도 있으니까요.”

16562816455861.jpg“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뜻밖의 말에 유니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래서 레나는 쓰게 웃었다.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을 입 밖으로 내자니 괴로워서.

16562816455872.jpg“제가 온 이상 그 애의 삶은 어떤 식으로든 변할 거예요.”

후작의 말이 맞다. 레나 루벨은 존재만으로도 루벨 가에 위기를 불러온다. 수상한 거래에 사용된 딸은 후작은 물론 그의 아내인 후작 부인, 그리고 아들인 엔지 루벨에게도 위협이 되는 존재다. 그러니 그들을 생각하면 레나 루벨은 가문의 장녀로서 조용히 사라질 의무가 있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는 진부한 관용어에서 레나는 산 사람들을 위해 비켜줘야 하는 죽은 자였다. 하지만 레나는 희생양의 의무를 저버리고 모두가 행복해지는 일에 반기를 들었다. 너희가 누리는 안락함과 부유함보다 내 존재가 중요하다고, 이미 안착된 평화에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했다. 지금은 물밑에서 고요히 움직이고 있지만, 조만간 레나는 모두가 알 수 있게 폭로할 것이다. 그리고 주장할 것이다. 덧없이 지워진 자신의 존재를. 그게 레나가 무덤에서 돌아온 목적. 동시에 사이좋던 동생에게 다가갈 수 없는 이유였다.

16562816455872.jpg“어쩌면 저 때문에 가진 걸 다 뺏길지도 모르죠. 후작가의 영식으로서 원래 누려야할 것들을요. 그건 제가 아버지에게 당한 일과 같아요. 저도 아버지 때문에 자작가의 영애로서 누릴 것들을 빼앗겼으니까요.”

16562816455861.jpg“그런…….”

말도 안 돼요. 유니는 이렇게 반박하려다 멈췄다. 레나의 말이 부조리한 듯 납득이 됐기 때문이다. 거울을 통해 그 표정마저 읽은 레나가 가볍게 덧붙였다.

16562816455872.jpg“재밌죠. 사람에게 마땅히 누릴 것이 있다는 게, 그리고 그게 사람마다 다르다는 게.”

이 세상엔 태어날 때부터 고아인 아이도 있고 자작의 딸로 태어났으나 덧없이 밀려난 아이도 있다. 그리고 누나의 몸값으로 저도 모르는 사이 더 높은 지위에 오른 아이도 있다. 천사의 얼굴을 한 남자가 말한 것처럼 그건 각자의 복이다. 다만 가진 인간은 그것을 당연히 여기는 반면, 갖지 못한 인간은 주어진 몫을 거부하며 몸부림친다.

16562816455872.jpg“그래서 엔지를 선뜻 만날 수가 없어요.”

그런 것이다. 엔지 루벨은 자신에게 당연한 것을 조만간 빼앗길 것이다. 레나 루벨이 자신에게 당연하던 것을 송두리째 빼앗긴 것처럼. 어린 시절 레나는 자신의 안락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고민하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빼앗겼다고 생각했다. 그럼 엔지 루벨은 어떻게 생각할까? 레나 루벨의 희생 위에 세워진 후작 가가 무너져 자신에게 당연했던 귀공자의 삶이 물거품처럼 사라지면, 누가 그걸 빼앗았다고 생각할까? 레나는 답이 뻔한 질문을 두고 옅게 웃었다. 그러곤 담담히 말을 맺었다.

16562816455872.jpg“안타깝게도 말이에요.”

  . . . 레나는 유니와 나눈 대화를 곱씹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눈에 익은 길이 점점 더 익숙해졌다. 루벨 가의 저택이 가까워졌다는 뜻이었다. 레나는 그 풍경을 감회 없이 바라보다가 돌연 놀라서 막 지나간 골목길을 돌아보았다.

16562816455872.jpg‘린 씨?’

좁은 길목에 서 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검은 망토를 뒤집어쓴 키가 큰 남자였다. 마치 처음 만났을 때의 린 같았다. 그래서 급히 뒤를 돌아보았지만 이미 시야가 가려져 그 남자를 다시 볼 수 없었다. 저도 모르게 실망하던 레나는 도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애써 생각을 돌렸다.

16562816455872.jpg‘잘못 봤겠지.’

린은 동부의 일로 시찰을 나간다고 했다. 그럼 수도에 있는 동부 인사들을 만날 텐데, 저런 모습으로 혼자 다닐 리 없다. 레나는 착각을 깨닫고 힘없이 웃었다. 자조였다. 비슷한 사람만 보여도 그 사람인가 하며 놀라다니, 마치 사랑에 빠진 소설 속 주인공 같다. 레나는 제 꼴이 한심해 웃다가 차라리 후작을 동정했다. 그분도 참 운이 없다. 평안한 시기에 불러도 좋은 대우를 받기 힘들 텐데, 마침 딸이 실연한 줄도 모르고 이렇게 초대하다니. 덕분에 레나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새삼 자세히 깨달았고 곧 있을 만찬이 더 기대되었다. . . . 마차가 후작 가에 도착했다. 레나는 늪처럼 가라앉은 기분으로 마차에서 내렸다. 그럼에도 눈앞의 광경엔 짐짓 놀랐다. 6년 만에 돌아온 집은 이전과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하인들이 정문부터 현관까지 길게 늘어선 모양은 어릴 때 레나가 처음 집에 왔을 때와 똑같았다. 그리고 그 끝에는, 이번에도 후작 부부가 서 있었다. 모든 게 그대로였다.

16562816485245.jpg“레나야…….”

다만 변한 것이 있다면 하나였다.

16562816485245.jpg“정말 살아 있었구나.”

한달음에 달려와 자신을 끌어안는 어머니. 덜덜 떨면서 흐느끼는 어머니만 그날과 달랐다. 레나가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후작 부인이 속삭였다.

16562816485245.jpg“부디 아무 말도 하지 말아다오.”

겁에 질린 목소리였다. 그래서 원치 않는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어색하게 서 있던 레나는 이내 자비롭게 웃었다. 기막힌 촌극이 시작되었다. *** 지배하여 복종시키는 힘을 권력이라고 한다. 권력을 가진 자는 싸우지 않는다. 상대가 스스로 복종하기 때문이다. 권력을 가진 자는 애쓰지 않는다. 상대가 그의 필요를 먼저 살피기 때문이다. 그래서 권력을 가진 자는 여유롭다. 알아서 조아리는 자들을 자비롭게 바라보는 것으로 역할은 끝이다. 그런 맥락으로 지금 레나 루벨은 확실한 권력자였다.

16562816513953.jpg“초대에 응해줘서 고맙다.”

호화로운 식탁 끝에서 후작이 온화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 반대편 끝에 앉은 레나는 아무 인사치레도 없이 그저 웃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하다거나, 다시 가족들과 식사할 수 있어서 꿈만 같다거나. 어린 시절의 레나라면 귀엽게 재잘댔을 말을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16562816513953.jpg“음식이 입에 맞을지 모르겠구나. 신경 써서 준비하라고 했다만…….”

그럼에도 후작은 성의껏 말을 걸며 분위기를 지켰다.

16562816513953.jpg“시간이 충분했다면 더 좋았을 텐데. 바쁜 모양이구나.”

레나가 억지 부리듯 시간을 앞당긴 것도 문제 삼지 않았다. 지금 후작은 레나에게 잘 보일 마음뿐이었다. 그 노력을 가상히 여길 만도 한데 레나는 야속하게도 침묵을 고수했다. 후작이 안 되겠다 싶었는지 옆에 앉은 아내에게 눈짓했다. 그에 후작 부인은 흠칫 놀라더니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운을 뗐다.

16562816485245.jpg“……그동안 잘 지냈니?”

안 하는 만 못한 짓이었다.

16562816485245.jpg“어떻게, 이렇게 커서…….”

결국 후작 부인은 남편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후작 부인의 긴장은 수발 중인 하인들도 느낄 정도였다. 그렇게 얼어붙어서 하는 반가운 척은 레나를 오히려 불청객처럼 만들었다. 그리고 아내를 이용해 레나를 달래보려던 후작은 흐름이 묘한 것을 곧 눈치챘다. 뭔가 이상했다. 그가 알기로 아내와 딸은 사이가 아주 좋았다. 마치 친구처럼 잘 어울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다시 만나면 둘 다 감정적으로 행동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펼쳐진 상황은 후작의 기대와 많이 달랐다. 레나는 엄마를 보고도 여느 때처럼 우아한 척 싸늘했고, 아내는 딸을 거의 무서워하고 있었다.

16562816513953.jpg‘왜?’

레나를 클라비스에게 넘길 때 아내는 관여하지 않았다. 레나야 그걸 모를 수도 있으니 그렇다 쳐도, 아내가 저렇게 긴장할 이유는 없었다. 후작이 아내의 동요를 이상하게 여길 때였다.

16562816455872.jpg“이제 좀 알 것 같아요.”

잠잠히 웃으며 지켜보던 레나가 비로소 운을 뗐다. 그러더니 후작이 반가워할 겨를도 없이 덧붙였다.

16562816455872.jpg“아버지가 왜 그리 과묵하셨는지요. 주변에서 알아서 떠들어주니 편하게 웃기만 해도 되는 거였군요.”

레나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신랄했다. 덕분에 만찬장의 분위기는 한층 더 싸늘해졌다. 하지만 후작은 당황하지 않았고, 레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편하게 말을 이었다.

16562816455872.jpg“더 즐기고 싶긴 한데, 그보단 이 자리의 목적이 궁금하네요. 왜 부르신 거죠?”

16562816513953.jpg“너와 긴히 할 말이 있다.”

16562816455872.jpg“이 분위기로요?”

레나가 어머니를 눈짓했다. 후작 부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눈을 피했고, 그걸 본 후작이 해명했다.

16562816513953.jpg“기왕 집에 왔으니 만나게 해주고 싶었다. 서로 사이가 좋았으니까.”

16562816455872.jpg“하긴 그랬죠.”

16562816513953.jpg“만약 오해하고 있다면 해명하마. 네 엄마는 그 일과 무관하다.”

16562816455872.jpg“그건 알고 있어요.”

그런데 왜? 후작은 이 상황과 분위기를 이해할 수 없었고, 레나는 그런 아버지를 동정했다. 지금 오해하는 건 후작이었다. 레나는 알고 있었다. 자신을 팔아넘긴 게 아버지의 독단이라는 걸, 어머니는 아무것도 몰랐다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함께 있었으니까. 생일을 한 주 앞둔 그날, 아버지가 밤중에 부른 그날 밤. 레나는 엄마와 함께 있었다. 불면증이 있는 자작부인은 매일 밤 다실에서 차를 마셨고, 어린 레나는 막 완성한 자수를 자랑하고 싶었다. 그래서 밤중에 엄마의 다실로 찾아갔다. 평소에도 종종 있던 일이라 집사도 아가씨가 방에 없는 걸 알고 다실로 찾아왔다. 엄마는 레나처럼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호출에 놀랐었다. 어리둥절해하는 레나에게 다음 주가 네 생일이라고 일깨운 것도 엄마였다. 아버지가 생일 선물을 주시려나보다며 부추긴 것도. 레나를 아버지의 서재까지 데려다 준 것도. 기다려 줄 테니 다녀오라고 한 것도 엄마였다. 그날 엄마는 거기 있었다. 레나가 팔려가던 날 서재의 문밖에. 그런데 레나는 그날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했다. 그리고 아버지 당신은 그걸 여전히 모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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