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레나 루벨의 추모2021.02.22.
레지나에게 한창 단련되던 시기였다. 온몸을 혹사당하고 널브러진 레나에게 레지나가 물었다.
―혹시 지상에 보고 싶은 사람은 없어?
뜬금없는 물음에 레나는 고민하다 중얼댔다.
“없어.”
―아비야 그렇다 쳐도, 모친은?
“……잘 모르겠어.”
레나가 말끝을 흐리자 레지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설명하란 뜻이었다. 별로 반가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레지나의 고집을 아는 레나는 별수 없이 입을 열었다.
“그때 엄마도 있었어.”
―널 팔 때?
“응.”
―부부가 작당을 한 거냐?
“그건 아니야.”
레지나의 무신경한 표현에 레나가 인상을 찡그리며 부정했다. 그러곤 주저하며 덧붙였다.
“엄마는 몰랐어. 그냥…….”
―그냥?
“내가 끌려가는 걸 모른 척한 것 같아.”
레나는 그렇게 말하고 급히 하늘을 봤다. 엄마의 이야기를 꺼내기 무섭게 눈시울이 시큰댄 탓이었다. 괜히 얘길 꺼내서. 레나는 속으로 레지나를 원망했다. 그러곤 마음 한구석에 가득한 의혹을 다시 조심스레 들여다보았다. 그때 서재밖엔 엄마가 있었다. 그래서 겁에 질려 끌려가면서도 일말의 희망을 품었다. 문을 열고 나가면 엄마가 있을 거야, 엄마가 날 지켜줄 거야, 아버지를 말려줄 거야. 하지만 기대가 무색하게도 그 남자와 나왔을 때 복도엔 아무도 없었다. 그저 텅 빈 어둠뿐, 기다리기로 한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당황한 레나가 흐느끼듯 불러도 마찬가지였다. 넓고 긴 복도엔 그림자조차 남아 있지 않았고, 레나를 데려가던 남자는 레나가 길 잃은 염소처럼 우는 줄 알고 조용히 입을 막았다.
“그래서 잘 모르겠어.”
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멋대로 차올랐던 눈물을 간신히 삼켰다. 처음엔 혹시나 하는 마음도 있었다. 엄마가 서재에서 벌어진 일을 까맣게 모를 가능성과, 급한 볼일이 생겨서 먼저 돌아갔을 가능성도 상상해 봤다. 하지만 레나는 곧 인정했다. 그럴 가능성이 아주 적다는 것을. 레나의 장례는 사흘 만에 치러졌다. 엄마가 이후 자신을 찾았다면, 딸을 내놓으라고 아버지를 다그쳤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원래 그랬어.”
―뭐가?
“엄마는 아버지를 거역한 적이 없어.”
레나가 체념 섞인 목소리로 중얼댔다. 엄마는 단 한 번도 아버지의 뜻에 반대한 적이 없었다. 엄마는 상냥하지만 연약하고, 순종적인 만큼 무력한 사람이었다. 그런 엄마가 아버지에게 대드는 모습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네 아비는 정말 대단한 인물이구나.
레지나가 이야기를 다 듣고 기가 막힌 듯 푸념했다.
―어지간히 길들여놓은 게 아니고서야 어미가 자식을 포기할까.
“아버지가 나쁘다는 소리야?”
―재판할 마음은 없다. 네 어미를 두둔할 마음도.
레지나는 그렇게 말하며 레나의 붉어진 눈가를 손끝으로 쓸었다. 덕분에 레나는 괜히 더 서러워졌고, 그런 레나에게 레지나가 속삭였다.
―다만 네 마음이 길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엄마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버지에겐 더 이상 아무런 마음도 없다. 기대도 미련도 애정도 진작 다 버렸다. 하지만 엄마는? 엄마는 나를 지켜주지 않았다. 내가 어디론가 끌려가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레나는 그게 미치도록 야속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어 괴로웠다. 두려웠겠지. 나서본들 소용없었을지도 모른다. 딸을 판 남자가 아내라고 봐줄 리 없다. 그러니 도망친 엄마의 심정도 이해는 된다. 하지만 이해한다고 용납까지 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덮어놓고 원망할 수 없어서 괴로웠다.
“어떻게 해야 할까?”
레나가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댔다. 레지나는 필사적으로 답을 찾는 아이를 동정하며 대답했다.
―굳이 용서할 필요는 없다.
그러곤 이렇게 덧붙였다.
―하지만 동정은 해라. 그 또한 빼앗긴 자다.
*** 레나는 레지나의 말을 떠올리며, 여전히 시선을 피하는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남편과 딸의 시선을 피해 어디론가 숨고 싶은 기색이었다. 그 모습을 보니 남아 있던 일말의 의문이 풀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아직 남아 있었는데 이로써 확실해졌다. 저 여리디여린 여자는 남편이 한 짓을 알면서도 눈을 감았다. 연약하여 순응하기를 택했고, 막상 딸이 돌아오니 자신의 비열함을 남편에게 들킬까 봐 전전긍긍한다. 남편에게 버림받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여자. 그게 사랑하는 엄마의 실체였다. 그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니 굳이 애쓰지 않아도 동정심이 생겼다.
“알고 있어요, 모두 아버지의 독단인 걸.”
그래서 레나는 가련한 어머니를 외면하고 후작에게 말했다.
“설마 오늘 그 얘길 하려고 부르신 건가요?”
레나가 담담히 묻자 후작은 깍지 낀 손에 잠시 턱을 괴었다. 그는 그렇게 분위기를 살피더니 이내 아내에게 말했다.
“자리를 비켜주겠소?”
아무래도 모녀간의 감격스러운 재회는 불가능해 보인다. 그렇게 판단한 후작은 만찬 도중에 아내를 물렸다. 귀부인에게 어울리는 대접이 아니지만 후작 부인은 싫은 기색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작은 부인에 이어 하인들까지 모두 내보냈고, 레나는 한때 가족이었던 사람들이 허둥대는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이윽고 만찬장엔 부녀만 남았다. 단둘이 되자 후작이 힘없이 운을 뗐다.
“초대에 응해줘서 조금 기대했다만.”
일부러 서운한 척하는 목소리에, 레나도 어울려 주려는 듯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제가 너무 차갑게 굴었나요?”
“엄마를 보고 싶어 할 줄 알았다.”
“인질극을 벌이고 싶었다는 말로 들리는데요.”
농담처럼 돌아온 말엔 뼈가 있었다. 그래서 후작은 한마디도 지지 않는 레나를 향해 쓰게 웃었다.
“그렇다면 인질을 잘못 고른 셈이군.”
태연히 받아치면서도 후작은 내심 의아했다. 레나가 어미에게 냉담한 것도, 아내가 딸에게 겁먹은 것도. 그는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생긴 모녀간의 문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들에게 그럴 기회나 있었나? 모종의 이유가 있다면 그 또한 이 집에서 벌어진 일인데, 내가 그걸 모를 리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시네요.”
조용히 고민하는 후작을 보며 레나가 말했다. 속을 들킨 후작이 쳐다보자 레나는 그를 놀리듯이 덧붙였다.
“원래 윗사람은 아랫사람의 사정을 헤아리기 힘들죠. 다들 환심을 사는 데 혈안이 돼서 좋은 면만 보여주려고 하니까요.”
그 말은 언뜻 후작 부인을 조롱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후작은 그게 아내가 아닌 자신에게 향한 말인 걸 곧 깨달았다. 그는 레나에게 비굴한 초대장을 보내고, 억지스럽게 앞당긴 시간에 맞추고, 아내를 앞세워 레나를 환대했다. 말마따나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안간힘을 쓴 거다. 후작은 레나의 조롱이 뼈아팠지만, 그리고 제 처지가 새삼 우스웠지만 굴하지 않았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인간이란 원래 비굴하지.”
중얼대던 후작이 돌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벽으로 걸어가 걸려 있던 장식용 검을 잡았다.
“자존심을 지키며 의연하게 살 수 있으면 좋겠지. 하지만 세상이 녹록지 않은 걸 어쩌겠느냐, 눈치껏 굽히고 숙여 연명하는 수밖에.”
검을 빼낸 후작이 그대로 레나에게 다가갔다. 레나는 미동도 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았고, 후작은 겁 없는 딸에게 물었다.
“음식에 손을 전혀 안 댔구나.”
“또 독이 들어있을까 봐요.”
“그래, 차라리 잘됐다.”
후작은 레나를 향해 옅게 웃더니, 있는 힘껏 검을 휘둘렀다. 와장창 소리와 함께 레나의 앞에 놓인 음식과 식기가 모조리 바닥으로 쏟아졌다. 레나의 하얀 블라우스에도 붉은색 소스 몇 방울이 피처럼 튀었다. 식탁의 음식을 모조리 쓸어버린 후작이 다시 검을 치켜들었다. 타앙! 과녁에 활이 꽂히는 소리가 나며 식탁에 박힌 검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후작은 식탁에 검을 꽂아 버리고는 그대로 한걸음 물러났다.
그러자 지켜보던 레나가 물었다.
“이건 무슨 의미죠?”
“이제 네 차례다.”
“차례?”
“인정하마. 너는 강하고 나는 너를 어쩌지 못한다. 이제 내게 남은 길은 너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뿐이다.”
그렇게 고백하는 후작의 목소리는 거만하지도 비굴하지도 않았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하듯 침착할 뿐이었다.
“네 뜻대로 하겠다. 그러니 기회를 준다는 말을 지켜다오.”
후작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완전한 항복이었다. 검을 내어준 것 역시 이미 무릎을 꿇은 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굴복이었다. 딸에게 몸을 낮췄지만 후작은 조금도 치욕스럽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레나가 채찍으로 망자를 떨어트리던 모습이 아직 선했다. 눈부신 드레스를 입고 황제와 춤추던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그토록 위대한 너라면 마땅히 고개를 숙일 수 있었다. 오히려 네가 내 핏줄이라는 게 자랑스러울 따름이었다. 후작은 그런 딸과 더 이상 맞서고 싶지 않아, 더 뜸들이지 않고 말했다.
“너를 루벨 가의 딸로 인정하마. 대외적으로도, 공식적으로도.”
그러니 나를 용서해다오. 후작은 이 뒷말을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레나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후작의 간청에 레나는 기쁜 듯 아쉬운 듯,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 아버지가 반역에 가담한 증거인데, 그건 어쩌실 거죠?”
“수습하겠다.”
“수습이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널 문제없이 복귀시키겠다.”
후작이 굳게 약속하며 다시 레나의 낯을 살폈다. 하지만 레나의 표정은 여상했다. 만족하는 듯 비웃는 듯 모호한 눈으로 제 아비를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레나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온 건 그다음 일이었다.
“역시 제가 한 말을 이해 못 하셨네요. 문제없이 복귀시키겠다니.”
레나는 혀를 차며 탄식했고, 때문에 후작은 짐짓 당황했다. 그는 레나가 뭘 걸고넘어지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레나가 굳이 부연해도 마찬가지였다.
“적당히 이야기를 꾸며서 사람들의 입을 막겠다는 소리면 틀렸어요, 아버지. 그건 제가 원하는 게 아니에요.”
틀렸다니, 원하는 게 아니라니. 자신을 대외적으로 인정해달라고 한 건 레나였다. 그게 레나가 제시한 용서의 조건이었다. 그래서 후작은 모든 부담과 위험을 감수하고 레나 루벨을 집안으로 들일 작정을 했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최대한 그럴듯하게 꾸며 잘못된 것을 되돌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레나의 반응은 여전히 싸늘했고, 후작은 계속 어긋나는 레나가 곤혹스러웠다. 한편 레나는 그런 아버지를 차라리 동정했다. 인정한다. 아버지가 꽤 많이 양보한 걸, 제법 상식적인 대안을 내놓았다는 것도. 비단 이번만이 아니라 저번에도 그랬다. 후작은 난데없이 나타난 레나에게 새 삶을 주겠다며 회유했다. 그 또한 좋은 시도였다. 만약 남들과 같은 미래가 있다면 레나도 굳이 사양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레나 루벨은 이미 끝이 정해진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가 바라는 것 또한 계속 살아갈 자들과는 다르다.
“저는 아버지의 딸이 되고 싶은 게 아니에요. 후작 가에 속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요. 계속 말씀드리지만 제가 원하는 건 단지 저예요.”
이미 죽은 것과 다름없는 이에게 안락한 삶은 무의미하다. 곧 떠날 사람에게 좋은 자리를 약속해봐야 그 또한 무의미하다. 그들이 바라는 건 산 자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들의 바람은 그저 존재하는 것, 그리고 기억되는 것.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으니 그렇게나마 함께하는 것. 부정당하고 왜곡된 삶을 회복하고 되돌리는 것. 영영 지워지기 전에 그 삶을 오롯이 인정받는 것. 그것은 어쩌면 장례. 당신들이 대충 파묻은 그것과는 다른 진정한 추모. 꺼지기 직전의 촛불 같은 레나 루벨이 가진 마지막 이기심이다.
“저는 존재하길 원해요. 다른 무언가가 아니라 온전한 자신으로. 당신에게 버림받고 무덤에 떨어진 순간까지 완전하게.”
왜냐하면 이미 너무 많이 지워졌으니까. 꼭 그렇게 지워진 자들이 무덤 아래 가득 쌓여 있으니까. 너희가 기억하지 못한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지워지고 잊혀서 묻힌 이름은 여전히 그곳에 있다.
“제가 하는 말, 이해가 되세요?”
레나는 이유를 모두 감춘 채 후작에게 물었다. 후작은 당연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레나는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였다. 하지만 자신의 처지를 알려 그에게 숨 쉴 구멍을 주고 싶진 않았다. 나는 당신에게 미래를 빼앗겼다. 사랑하고 싶은 사람에게 마음을 열지도 못한다. 당장 죽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미 많은 것을 양보하고 있으니, 이 정도 시험은 마땅하다.
“이해 못 하겠다는 표정이시네요.”
레나가 날 선 마음을 다스리며 온화하게 말했다. 그러자 가만히 듣고 있던 후작이 억눌린 목소리로 대꾸했다.
“결국 집안을 불살라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거구나.”
“그렇게 받아들이실 줄 알았어요.”
딱 예상한 반응이었다. 레나는 딸을 죽여 놓고 필사적으로 살아남으려 하는 아버지가 미워 넌지시 운을 뗐다.
“알고 있어요. 아버지가 그와 정반대의 삶을 살아오신 걸. 그래서 늘 필사적이었다는 것도요.”
레나가 그렇게 말하며 옅게 웃자 후작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후작은 의미심장하게 말하는 레나를 보며 엔지를 목 조르고 싶을 때와 같은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엔지와 달리 레나는 겁먹지 않았다. 영문을 몰라 절절매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되찾기보다는 영영 감추고 싶으신 거죠?”
다만 시치미를 떼며 아버지의 가장 아픈 구석을 찌를 뿐이었다.
“카르도 루벨이 되기 전, 자신의 진짜 이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