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그 남자2021.02.25.
그것은 레나 루벨이 가난한 두 번째 이유였다. 레나가 기억하는 루벨 가는 버젓한 자작가였다. 그런 집에서 딸을 왜 팔았을까? 단지 아버지의 야망과 출세를 위해? 단지 그렇다고 하기엔 미심쩍은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 레나는 조사했다. 꽤 많은 돈과 사람을 써서 수년에 걸쳐 아버지의 뒤를 캤다. 끈질기게 알아보고 또 알아봤다. 그로써 진실에 도달했을 때 레나는 조용히 탄식했다. 용서하진 않아도 동정은 하라는 레지나의 말이 절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레나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대단한 거짓말쟁이였다. 하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거짓인 그의 입에서도 진실이 흘러나온 적은 있었다.
―우린 나쁠 것이 없었는데, 왜 그렇게까지 하신 거예요?
레나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었을 때, 후작은 이렇게 답했다.
―천해서.
―벌레처럼 비천해서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다 함께 죽든지, 손가락 하나를 잘라내든지.
이건 근래 그가 한 말 중 가장 솔직한 말이었다. 동시에 그의 삶을 정확히 설명하는 말이기도 했다. 후작은, 아니, 카르도 루벨은, 아니, 이제 와선 진짜 이름을 찾아낼 수도 없게 된 그 남자는 스스로가 천한 존재인 걸 인정했다. 때문에 자신이 남들보다 더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앞뒤가 맞지 않는 말 같지만 사실이었다. 지금은 카르도 루벨이 된 자. 그는 본디 루벨 자작가의 하인이었다. ***
“망자들이 옵니다!”
“대열을 지켜라!”
“도망치는 자는 처벌하겠다!”
고함, 비명, 울음, 그리고 간혹 웃음. 전쟁터 한복판에서 터져 나오는 소음은 인간을 미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극한까지 내몰린 자들은 자신이 죽이고 있는지 죽고 있는지조차 잊은 채 본능을 따라 움직였다. 제국 80년, 서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제단을 손에 넣은 반역자들, 소위 배교자들이 황제의 폭정에게 반기를 들며 서부의 대도시 한복판에서 망자를 불러냈다. 백여 명의 배교자들이 백여 명의 망자를 앞세워 도시를 장악했고, 그곳에 황제의 이름으로 군대가 파견되었다. 그로써 한때 번화했던 도시는 산 자와 죽은 자가 얽힌 전쟁터로 전락하고 말았다. 쾅! 쾅! 쾅! 망자가 굉음을 일으키며 비좁은 골목길을 가로질렀다. 망자는 비늘이 돋은 몸통으로 좌우의 벽을 연신 후려쳤다. 벽 뒤에 숨은 병사들이 창문으로 창칼을 내질러 망자의 옆구리를 긁었기 때문이다. 시가지의 특색을 이용한 나름의 전략이었다. 하지만 고통을 모르는 망자는 그 조잡한 날붙이를 무시한 채 전면의 군대로 무섭게 나아갔다. 뱀 같은 형상의 망자가 골목 밖으로 머리를 막 내밀었을 때였다.
“지금이다!”
골목 밖 사각지대에 몸을 붙이고 있던 병사들이 창으로 망자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하지만 망자의 철갑처럼 단단한 비늘은 좀처럼 뚫리지 않았고, 배교자의 조종을 받는 망자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기사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망자가 노리는 건 기사들 뒤에 숨은 지휘관이었다.
“각하를 지켜라!”
“루벨은 어디 있나!”
지휘관의 시종들이 비명을 지를 때였다. 그때 기다렸다는 듯 건물의 2층 창문에서 한 청년이 뛰어내렸다. 과감하게 도약한 그는 창을 앞세워 온몸으로 망자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퍽하고 장작 패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망자의 세모난 머리가 쪼개지며 시커먼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우오오!”
지켜보던 기사들이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아직이었다. 숨이 다 끊어지지 않은 망자가 긴 몸통을 뒤틀었다. 그에 망자의 피를 덕지덕지 뒤집어쓴 청년은 창을 버리고 검을 뽑아들었다. 이미 너덜너덜한 망자가 꼬리로 청년을 후려쳤다. 그 매서운 비늘을 간발의 차로 피한 청년은 그대로 망자의 목 아래로 파고들었다. 그러곤 높이 치켜든 검을 곡예 하듯 돌리며 이번에야말로 망자의 목을 동강냈다. 망자의 목이 떨어진 순간 시가지 저편에서 지독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청년은 그 소리를 듣고 웃었다. 이 망자를 불러낸 놈이 미쳐가며 내지른 소리였기 때문이었다.
“루벨이 또 해냈다!”
“루벨!”
“루벨!”
기사들과 병사들이 청년의 이름을 연호했다. 그러자 그 청년, 카르도 루벨은 뺨을 적신 피를 쓸어내며 기쁘게 웃었다.
. . .
“기분 나쁜 놈.”
카르도 루벨을 쭉 지켜보던 남자가 나직이 경멸을 드러냈다. 그는 루벨 자작 가를 섬기는 하급 귀족이자 카르도 루벨의 종자였다.
“빨리 뒈져라, 어쭙잖게 설치지 말고.”
하지만 그는 자신이 모셔야 하는 도련님을 전혀 존중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의 눈을 피해 하대하고 모욕했다. 하지만 익숙한 일인 듯 카르도 루벨은 손을 씻으며 대꾸했다.
“종자면 종자답게 굴지 그래?”
“너나 대역답게 굴어라, 미천한 놈아.”
사내의 윽박에도 카르도는 잠잠히 웃었다. 용암 같은 분노를 뱃속에 숨기고 웃는 것은 그에게 익숙한 일이었다. 제국 80년. 모든 것이 최악이었다. 접경지역에선 망자가 득실대고 연이은 전쟁으로 곳간은 텅 비었는데 밖에서 들여온 노예들 때문에 평민들은 일거리마저 없었다. 농사를 지어보려 해도 땅이 없고 어렵사리 일을 구해도 딱 노예의 밥값만큼의 삯을 받으니, 하루 한 끼 마른 빵을 먹으면 운이 좋은 것이고 식탁에 채소가 놓이면 부유한 것이었다. 때문에 끼니만 때울 수 있다면 못할 일이 없었고, 그건 카르도 루벨이라 불리게 된 이 청년도 마찬가지였다.
“농담입니다, 너무 화내지 마시죠. 그러다 누가 보면 어쩝니까?”
종자의 으름장에 카르도가 너스레를 떨며 웃었다. 종자는 그 태도에 비로소 만족한 듯 표정을 풀었다. 실은 이게 당연했다. 지금 자작 가의 아들 행세를 하는 저 놈은 본래 루벨 가의 하인이다. 그것도 사냥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미천한 숲지기였다. 그런 놈이 잠깐이나마 루벨의 성을 쓰며 귀족 노릇을 하는 건 배교자들의 반란 때문이었다. 황제는 서부 귀족들에게 당장 반역자들을 처단할 것을 명했고, 서부공은 각 가문의 아들을 징집했다. 하지만 서부 변두리 귀족인 루벨 자작은 소중한 아들을 전쟁터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들과 연배가 비슷한 하인 중에서 그나마 외모가 준수한, 잘 꾸며놓으면 충분히 귀티가 날법한 놈을 골라 아들의 대역으로 삼았다. 그렇게 선택된 것이 어린 숲지기 사냥꾼이었고, 그놈은 지금 카르도 루벨이라는 이름으로 팔자에도 없는 귀족 행세를 하고 있었다. 그런 내막을 뻔히 아는 종자는 제 아랫것을 상전으로 모셔야 하는 상황에 부아가 치밀었다. 게다가 카르도 루벨이 이토록 선전하는 것도 예상 밖의 일이었다. 루벨 자작은 카르도 루벨이 조속히 죽기를 희망했다. 황제 폐하께서 명령한 일에 잔재주 부린 걸 들키면 곤란한 탓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전방에 배치되게 손을 썼는데, 놈은 죽기는커녕 물 만난 고기처럼 날뛰었다. 군사훈련이라고는 받아본 적도 없는 놈이 노련한 기사처럼 망자들을 썰어댔고, 이젠 중요한 순간마다 이름이 불리는 지경까지 되었다.
‘이래서야 뒷감당이 힘들어진다.’
루벨의 종자는 위기감을 느꼈다. 카르도 루벨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자. 존재감을 키워서는 안 되는 자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지휘관이 무능하다는 점이었다. 그는 휘하 기사들의 공을 빼앗을 줄만 알지 두각을 드러내는 자를 중용하는 능력은 없었다. 루벨의 종자는 그 사실에 겨우 위로를 얻었다. 그리고 때를 살폈다. 배교자들의 소탕도 이제 머지않았다. 카르도 루벨은 그 전에 죽어야 했다. 망자에 의해서든, 모종의 사고로 인해서든 말이다. 종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가 마땅히 완수되리라 생각했다. 사냥에는 능숙할지 몰라도 아무것도 모르는 천민 어린애쯤이야, 손쉽게 처리할 수 있을 거다. 종자는 그렇게 믿었다. 완벽한 오해였다. 이미 기회를 잡은 카르도 루벨은 순순히 물러날 마음이 없었다. 게다가 그는 상상 이상으로 영악하고 악운에 강한 자였다. . . . 배운 건 없지만 사냥의 감은 누구보다 예리했다. 그래서 반란 진압이 끝나면 자신이 처리되리라는 것도 진즉에 눈치챘다. 하지만 그 사실에 분노하지는 않았다. 카르도 루벨이 된 청년은 대역으로나마 귀족 노릇을 해본 것이 기뻤다. 이렇게 좋은 것이 있다는 걸 그 허름한 오두막에선 미처 몰랐다. 입은 옷, 먹는 음식, 잠드는 자리, 그리고 자신을 대하는 사람들의 눈빛과 표정마저 숲지기로 있을 때와는 딴판이었다. 고독한 사냥꾼은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이 사람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그걸 깨닫는 순간 야심이 싹텄다. 그는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고, 놓치지 않기로 했다. 다행히 그 일은 쉬웠다. 귀족이라고 거들먹대던 인간들은 생각보다 멍청했고, 사냥은 그의 특기였다. 반란 진압이 끝나기 직전, 카르도는 루벨 가문으로부터 팽 당하기 전에 사로잡힌 배교자들에게 찾아갔다. 거기서 그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그날 밤, 감옥에서 풀려난 배교자들이 최후의 발악으로 맹공을 퍼부었다. 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 그들은 진압군의 내부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고, 순식간에 지휘관의 처소까지 침범했다. 지휘관은 죽음을 직감하며 꼴사납게 울었다. 그때 구원자가 나타났다. 이미 진압 작전 중 수많은 공을 세운, 카르도 루벨이었다. 야습을 당한 지휘관은 카르도 루벨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고, 그 마지막 전투를 끝으로 반란은 완전히 진압되었다. 지휘관인 서부 후작은 카르도 루벨을 생명의 은인으로 여겼다. 그래서 종전보고를 하기 위해 황궁으로 갈 때 그를 데려갔다. 그러고 서부로 돌아와서는 루벨의 영토까지 친히 방문해 루벨 자작을 만났다.
“경의 아들이 내 목숨을 살렸네.”
서부 후작은 루벨 자작에게 카르도 루벨을 연신 칭찬했고, 루벨 자작은 난감함을 삼킨 채 그 가짜 아들을 다정히 어루만져야 했다. 서부 후작이 머무는 동안 카르도 루벨은 진짜 자작가의 아들처럼 대접받았다. 그러길 며칠, 드디어 서부 후작이 떠난 날 밤이었다. 카르도 루벨은 그날도 가장 안쪽의 좋은 방에서 잠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살금 대는 발소리가 사냥꾼의 예리한 귀를 깨웠고, 이윽고 노크도 없이 몇 명의 장정이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카르도 루벨을 섬기던 종자와 하인들이었다.
“무슨 일이지?”
카르도가 자연히 하대하자 종자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더니 이내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댔다.
“정말 천지 분간을 못 하는구나, 천한 놈이.”
종자가 그렇게 말하며 칼을 빼들었다. 다른 하인들도 밧줄과 몽둥이를 들어올렸다. 그러나 카르도는 미동도 않고 앉아서 느긋이 말했다.
“혹시 토사구팽이라는 말 알아? 동방에서 온 말인데, 토끼를 잡고 나면 개를 삶는다는 뜻이야.”
“이제야 네 처지를 알았구나.”
“처지를 모르는 건 너야.”
“뭐?”
“토끼를 잡는 것도 개를 삶는 것도 사냥꾼이 하는 일이란다, 멍청한 집돼지야.”
카르도는 그렇게 말하며 숨기고 있던 단검으로 제 손가락을 벴다. 종자는 그게 무슨 짓인지 몰라 주춤했다가 곧 눈을 홉떴다. 지독한 유황냄새가 사방에서 진동했기 때문이다. 서부 후작이 떠난 날 밤, 망자가 나타나 루벨의 성을 휩쓸었다. 카르도 루벨에게 원한을 품은 배교자들의 소행이었다. 그날 루벨 가의 식솔은 모두 죽었다. 단 한 사람, 카르도 루벨만 제외하고. . . .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은 카르도 루벨은 그를 딱하게 여긴 서부 후작의 도움으로 수도에 자리를 잡았다. 이후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야심찬 숲지기는 귀족의 자질을 무서운 속도로 익혀나갔고, 그의 입지를 공고히 해줄 아내도 맞이했다. 하는 일마다 호황이었고 인맥도 영향력도 나날이 늘어났다. 거기에 예쁜 딸과 영특한 아들까지 얻었으니 모든 것이 완벽했다. 하지만 그 남자가 나타나며 모든 것이 틀어졌다.
“반갑다, 네가 레나구나.”
루벨 가의 저택으로 찾아온 남자는 자작 영애를 보더니 격 없이 인사를 건넸다. 그러곤 다소 짓궂게 덧붙였다.
“너도 ‘루벨’이니?”
카르도 루벨의 딸에게 그렇게 묻던 남자. 그는 카르도 루벨이 저지른 일생일대의 실수였다. 그는 루벨 성의 참극 속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루벨 가의 종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