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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화. 어김없이 나타났다 (87/208)

87화. 어김없이 나타났다2021.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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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628170211.jpg“알아내기 힘들었어요. 뒷정리를 워낙 잘하셔서.”

레나는 너무 잔인한 표정을 짓지 않으려고 애쓰며, 최대한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165628170211.jpg“그래도 다행이죠. 아버지가 불장난을 좋아하시는 걸 진작 알아서. 그마저도 몰랐으면 정말 막막했을 거예요.”

레나는 자학하듯 웃으며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방금 한 농담의 의미를 알아들었을까 싶었다. 힐끗 안색을 살피자 딱딱하게 굳은 후작이 보였다. 그는 마치 칼에 찔린 사람처럼 창백해져서 레나를 보고 있었다. 후작은 악마에게 심장을 붙잡힌 기분이었다. 그걸 어떻게, 완벽하게 숨겼는데 어떻게, 전부 불태워 잿더미로 만들었는데 대체 어떻게. 일순간 아들에게 들었던 충동이 딸에게도 똑같이 치밀었다. 자신을 똑바로 주시하는 저 아이를 당장 목을 졸라 없애고 싶었다. 강렬한 충동에 손끝이 절로 흔들렸으나, 후작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주먹을 쥐었다.

1656281702111.jpg‘증거는 없다. 이미 몇 년이나 지난 일이다. 단지 떠보는 걸 수도…….’

애써 이성적으로 생각하던 후작의 턱에 도로 힘이 들어갔다. 단지 떠본다고 보기엔 아는 것이 너무 많고 구체적이다. 게다가 레나가 굳이 자신의 또 다른 약점을 잡을 이유는 없었다. 이미 완벽히 우위를 점했는데 괜한 도박을 하진 않을 거다. 막다른 골목에 도달한 후작은 조용히 치를 떨었다.

165628170211.jpg“그래서 일전에 하신 말도 이해해요. 다 함께 죽든지, 손가락 하나를 잘라내든지 결정해야 했다는 말이요.”

레나는 경악하는 아버지를 보며 씁쓸히 말했다. 말마따나 정말 알아내기 힘들었다. 뒷정리를 워낙 잘해서 추적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레나는 아버지가 흔적을 지우기 위해 불을 지르는 사람인 걸 알고 있었다. 방법을 찾던 레나는 국립기록관에서 눈여겨볼 만한 화재 기록을 수집했고, 20년 전 루벨 성이 전소된 것을 알게 되었다.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된 루벨 자작의 성. 홀로 살아남아 빈터에서 가문을 일으켜 세운 카르도 루벨. 그 대단한 일을 정작 그 가문의 딸인 레나는 까맣게 몰랐다. 불타 죽은 친족을 조금도 그리워하지 않는 아버지. 자식에게도 말하지 않는 기원.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그렇게 시작된 조사 끝에, 레나는 어린 날에 본 낯선 손님이 누구인지도 알게 되었다. 수많은 정보상을 거쳐서 알게 된 그의 이름은 라울. 서부 변방의 유지인 루벨 가문을 보필하던 하급 귀족이었다. 20년 전, 그는 수백 명이 몰살당한 성에서 간신히 살아남았다. 어쩌면 최초의 희생자가 될 뻔한 그는 카르도 루벨이 된 남자가 불을 지르는 바람에 오히려 목숨을 건졌다. 자욱한 연기가 그 미치광이의 눈을 가려주고, 천장에서 떨어진 불덩이가 라울의 상처를 지져 출혈을 막아준 덕분이었다. 라울이 살아남은 건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어쩌면 신의 실수고, 어쩌면 악마의 저주였다. 전신에 화상을 입고 깨어난 라울은 미칠 것 같았다.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되었다. 그의 가족, 친구, 재산, 지위, 그리고 몸까지. 주제를 모르는 숲지기가 모조리 가져갔다. 라울은 차라리 죽고 싶었으나 그 전에 할 일이 있었다. 그 가증스러운 숲지기를 처단해야 했다. 그래서 마지막 힘을 짜내 수도로 향했지만, 정작 수도에 도착한 라울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돌연 잠적했다. 이유는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아마 두려웠을 것이다. 수도에서 태연히 귀족을 연기하는 ‘카르도 루벨’이. 그의 용의주도함과 치밀함, 과격함, 그리고 잔혹함이. 라울은 저 가짜 루벨과 맞설 자신이 없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몸도 성치 않은 자신이 자작으로 떠받들어지는 사내에게 덤벼본들 결과는 뻔했다. 놈이 가짜인 걸 폭로해본들 누가 내 말에 귀를 기울일까. 그의 후원자인 서부 후작에게 비밀을 폭로해볼까? 아, 하지만 그건 승산이 낮은 도박이었다. 애당초 서부 후작이 좋아하는 건 자기 목숨을 구해준 자이지 자작가의 아들이 아니었다. 그럼 미친 척 아무데서나 고래고래 소리 지를까? 그건 광인이 퍼트린 헛소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래서 라울은 기다렸다. 가짜 루벨이 빈틈을 보일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날이 갈수록 승승장구하는 놈을 고통 속에서 지켜보며 기회를 노렸다. 그러길 십수 년. 드디어 때가 왔다. 놈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서부 후작이 노환으로 죽었다. 거의 동시에 그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지체 높은 귀족이 나타났다. 카르도 루벨에게 추파를 던졌다가 거부당한 여 백작이었다. 치정으로 인한 증오심이라니, 이보다 지독해지기 좋은 것이 또 있을까. 라울은 지체하지 않고 백작에게 접근했다. 그러곤 카르도 루벨에 대한 것을 모두 털어놓았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던 백작은 루벨의 약점에 환희와 경멸을 함께 쏟아냈고, 라울은 드디어 복수할 수 있다는 생각에 덩달아 들떴다. 그 후 몸을 사렸으면 라울의 복수는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십여 년의 시간 동안 그의 삶은 몹시 피폐했다. 가난함에 고되기도 했다. 그래서 라울은 잔뜩 들뜬 김에 겁도 없이 루벨을 찾아갔다. 백작이 움직이기 전에 놈을 협박해 돈이라도 뜯어볼 생각이었다. 아니, 돈도 돈이지만 그 낯짝이 일그러지는 걸 직접 보고 싶었다.

165628170211.jpg“기억나요. 그날 찾아왔던 남자.”

어느 날 찾아와 평화롭던 자작 가에 파문을 일으킨 남자.

165628170211.jpg“아버지가 당황한 모습도 그날 처음 봤어요.”

당시엔 미처 몰랐다. 설마 그 사람이 모든 일의 발단이 될 줄은. 어쨌든 그의 존재가 아버지를 궁지에 몰아넣은 건 확실하다. 그가 손에 쥔 진실과 그가 선택한 뒷배는 아버지에게 파멸을 선사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악운에 강한 아버지는 살아남을 길을 모색했고, 결국 악마 같은 서부공과 손을 잡았다. 클라비스 시렌치움 그라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황제의 애완견. 제안은 아마 그가 먼저 했을 것이다. 도움이 필요한가? 충성을 맹세하겠는가, 그럼 네 딸을 바쳐라. 그래서 아버지는 결정했다. 다 함께 죽든지, 손가락 하나를 잘라내든지. 이해할라치면 못할 것도 없는 얄팍한 이야기였다.

165628170211.jpg“여기까지예요, 제가 알아낸 건. 혹시 틀린 게 있나요?”

후작은 긍정도 부정도 못 한 채 레나를 바라보았다. 지금 그를 사로잡은 건 경악 이상의 수치심이었다. 모두 들켰다. 그 고상하지 못한 흠결이, 천한 태생의 비밀이 다른 이도 아닌 딸에게 발각됐다.

165628170211.jpg“반응을 보니 대충 맞나보네요.”

레나가 웃으며 중얼댔고, 스멀대며 피어나던 후작의 수치심에 불이 붙었다. 레나는 그 기색마저 읽은 듯 말을 이었다.

165628170211.jpg“가짜 이름에 가짜 신분, 가짜 삶. 본인의 것은 하나도 없지만 아버지는 그래도 만족하시겠죠.”

살아 있으니까. 덧씌운 이름이 더없이 달콤하고 안락하니까.

165628170211.jpg“하지만 나는 만족 못 해요.”

아마 나 역시 살아 있었다면 타협했을지도 모른다. 한때 새로운 삶을 꿈꿨던 것처럼. 하지만 레나의 바람은 모두 꺾였다. 삶도, 복수도. 이제 레나에게 남은 건 단 하나.

165628170211.jpg“여기까지 말했으면 제가 뭘 원하는지 이해가 좀 되실까요?”

레나가 하얗게 질린 아버지에게 나른히 물었다. 그의 놀란 얼굴이 내심 통쾌했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슬펐다. 후작이 억눌린 목소리로 짓씹듯 대답했다.

1656281702111.jpg“기어이 집안을 망하게 하려고 하는구나.”

165628170211.jpg“누가 망하게 한다는 거죠?”

그래서 레나는 오히려 놀란 척 되물었다.

165628170211.jpg“탓하지 마세요. 내가 거짓말을 강요하나요? 잘못된 일을 시키나요? 이 요구가 부당한가요?”

레나는 말을 빠르게 나열하고 고개를 저었다.

165628170211.jpg“아뇨, 이건 전부 아버지가 미뤄둔 문제예요.”

1656281702111.jpg“그러니 죽어도 싸다는 말이냐? 네 부모도, 동생도?”

후작은 아들까지 들먹이며 레나를 추궁했다. 훌륭한 판단이었다. 엄마와 달리 동생이라는 말은 레나의 가슴을 효과적으로 후벼 팠다. 내 동생. 나처럼 무고한, 당신의 자식이라는 것 외엔 아무 잘못 없는 아이. 일순 마음이 흔들렸지만 레나는 내색하지 않고 받아쳤다.

165628170211.jpg“죽음까지 바라진 않아요.”

1656281702111.jpg“죽으라는 말과 뭐가 다르냐, 내 치부를 온 천하에 밝히는 게 결국은 죽으라는 소리……!”

165628170211.jpg“아직도 제가 만만하시죠.”

1656281702111.jpg“뭐?”

레나의 반문에 후작이 미간을 찌푸렸다.

165628170211.jpg“만약 그렇게 되면 아버지를 해치는 건 황제와 다른 귀족들이에요. 그런데 그들에게 호소할 생각은 없고 여전히 내 입을 막기에만 급급하죠.”

레나는 차게 웃으며 덧붙였다.

165628170211.jpg“누굴 더 두려워해야 하는지 여전히 이해를 못 했나 봐요.”

당신도, 당신의 아내도. 레나는 아까 어머니가 속삭인 말을 떠올렸다. 수년 만에 만난 딸에게 한 첫 마디.

165628170819.jpg―부디 아무 말도 하지 말아다오.

  어김없이 자신의 입을 틀어막는 말이었다. 정말이지, 무덤에서 돌아온 후에도 이런 취급이라니. 레나는 질리는 기분을 삼키며 냅킨으로 옷에 뭍은 소스를 닦아냈다. 하지만 그 피 같은 얼룩은 지워지기는커녕 도리어 번지기만 했다. 레나는 우리가 서로에게 이런 사람일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자신을 바라보는 아버지에게 고했다.

165628170211.jpg“오해는 하지 말아주세요. 좀 강해졌다고 횡포를 부릴 마음은 없어요. 그리고 이건 내가 강하든 약하든 마땅히 할 수 있는 요구예요.”

죄 없이 지워진 자가 할 수 있는, 또 해야만 하는 요구.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당신은 아직 용서받을 자격이 없다. 할 말을 다 해버린 레나는 딱딱하게 굳은 후작을 향해 옅게 웃었다.

165628170211.jpg“오늘도 결론이 나긴 틀린 것 같네요. 그만 일어날게요. 아쉽지만 시간은 아직 남아 있으니까요.”

1656281702111.jpg“다시 앉아라.”

165628170211.jpg“명령하시는 건가요?”

레나를 붙잡던 후작은 레나의 반문에 입을 다물었다. 레나는 뱀 같은 아버지를 외면하고 만찬장의 출구로 향했다. 그런데 문 앞에서 돌연 걸음을 멈췄다.

165628170211.jpg“……어쩔 수 없었다고 했죠. 다 함께 죽든지, 나 하나를 잘라내든지 선택해야 했다고.”

레나가 뒤돌아선 채 물었다.

165628170211.jpg“혹시 자신이 희생하는 선택은 없었나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다. 결국 자신에게 유리한 선택을 해놓고 괴로운 척해봤자. 레나는 한숨 쉬듯 웃으며 문을 밀었다. 그러곤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며 아버지에게 말했다.

165628170211.jpg“그럼 좀 더 고민해보세요. 내게 용서받는 것과 날 죽이는 것, 둘 중 어느 게 더 쉬운지.”

  *** 레나가 저택에서 나왔을 때 하늘엔 노을이 져 있었다. 마차가 준비되어 있지만 레나는 타지 않았다. 대신 걸었다. 걸어가기엔 너무 먼 길인 걸 알지만, 지금은 그저 걷고 싶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노을이 흩어지고 별이 떴다. 어둠이 내릴 즈음 다리가 아파왔다. 통증을 느낀 순간 레나는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165628170211.jpg“아…….”

놀라서 구두를 벗어보니 발뒤축에서 피가 스미고 있었다. 뻣뻣한 가죽에 쓸려 다 까진 모양이었다. 레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밤거리엔 아무도 없었다. 밤 마차라도 구해 타려면 더 나가야 했다.

165628170211.jpg“엉망이네.”

레나는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정말 엉망이다. 가까운 벤치에 앉은 레나는 자괴감에 얼굴을 가렸다. 애써 누르고는 있지만 마음속이 동요로 가득했다. 비단 엄마를 만나서 그런 건 아니었다. 실은 오늘 집에 가기 전부터 이런 기분이었다. 그래서 저택에서도 감정적이었다. 아버지 앞에선 더 태연하게 행동하고 싶었는데 잘 되지 않았다. 아버지를 괴롭힌 것도 그 때문이다. 날 이 꼴로 만들어놓고 여전히 일말의 손해도 보지 않으려는 아버지가 미워서 작정하고 궁지로 몰았다. 조금 통쾌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허탈했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힘들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모든 걸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 할 일이 끝나면 깨끗이 떠날 생각이었는데 돌연 욕심이 나버린 거다. 어느 한 사람 때문에. 부탁한 적도 없는데 나를 나락까지 찾아온 사람 때문에. 그 사람은…….

16562817111659.jpg“레나?”

레나는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러곤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어 속삭였다.

165628170211.jpg“린 씨……?”

그 사람은 필요한 순간 어김없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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