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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화. 6년만의 생일 (92/208)

92화. 6년만의 생일2021.03.18.

레나가 이유 없이 다가와 기웃대는 루비드에게 말했다.

16562818048797.jpg“전에 한 말 그대로 돌려드리고 싶네요.”

16562818048805.jpg“뭔 소리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루비드가 인상을 썼다. 하지만 레나는 전에 루비드가 한 것처럼 ‘뭔데, 너 나랑 친해?’라고 윽박지르는 대신 그저 빙그레 웃었다. 며칠 전부터, 그러니까 이우라의 기사단으로 편성되어 황궁을 나선 후부터 루비드는 레나의 주변을 맴돌았다. 어딘지 불편하고 초조해 보이는 게, 마치 같이 있어달라고 부탁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 주제에 자존심만 세서 레나가 조금만 뭐라 해도 빽 소리 지르는 게 상당히 성가셨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레나가 말없이 웃기만 하자 루비드가 괜히 툴툴댔다.

16562818048805.jpg“그놈은 어디래?”

16562818048797.jpg“그놈이라뇨. 동부공 저하라고 하셔야죠.”

16562818048805.jpg“하, 잡견 주제에 무슨…… 왜, 뭐!”

레나가 빤히 쳐다보자 루비드는 제 발이 저렸는지 지레 큰소리쳤다. 루비드는 계속 이런 식이었다. 그래서 처음엔 이 놈이 왜 이러나 했지만, 이제는 대충 원인을 파악했다. 가만 보니 루비드는 제 형을 경계하면서 눈치를 보고 있었다.

16562818048797.jpg‘귀찮아…….’

레나는 형을 피해 자신에게 와서 왈왈대는 루비드가 진심으로 귀찮았다. 게다가 루비드에 대한 레나의 추측은 정확했다. 루비드는 이우라가 불편했다. 언짢고 짜증났다. 신경 쓰였다. 게다가 이렇게 오랜 시간 가까이 있는 건 어린 시절 이후 처음이었다. 이 와중에 중간다리 역할을 해줄 루벨 후작이나 클라비스까지 없으니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서 별수 없이 레나에게 비비는 중이었다. 참다못한 레나가 가볍게 물었다.

16562818048797.jpg“형이랑 별로 안 친해요?”

16562818048805.jpg“뭐?”

아니나 다를까 루비드는 이우라의 얘기가 나오기 무섭게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러더니 얄밉게 지껄였다.

16562818048805.jpg“그러는 넌 아빠하고 친하냐?”

말하는 본새하고는. 레나는 조금 울컥했지만 어른스럽게 무시했다. 그러곤 그를 지나치며 관문 밖, 시원하게 트인 들판에 앉았다. 말을 교체하고 식량을 보급할 동안 잠시 시간이 있었으니 부를 때까지 쉴 생각이었다. 그런데 루비드가 가지 않고 계속 서 있었다. 그 모습이 귀찮으면서도 처량했다. 그래서 레나는 별수 없이 손짓했다.

16562818048797.jpg“할 일 없으면 와서 앉아요.”

16562818048805.jpg“맨바닥에 앉으라고?”

16562818048797.jpg“그럼 손수건이라도 깔아줄까?”

레나의 반문에 루비드는 욱하더니 성큼성큼 다가와 풀썩 주저앉았다. 하여튼 쉬운 녀석이다. 루비드는 투덜대면서도 은근히 말을 잘 들었다. 조금 동생 같았다. 별로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그래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제법 친해졌다.

16562818048797.jpg“린 씨는 이틀 전에 이미 지나갔대요. 그러니 지금쯤이면 장벽에 도착했겠네요.”

장벽은 서부 접경지역과 맞닿은 최전선이다. 서부에 장벽이 생긴 건 5년 전. 그리고 그 장벽은 지금도 여전히 만들어지고 있다. 돌연 발생한 균열과 거기서 밀려나오는 망자들을 막기 위해 북부에서 끊임없이 쌓아올리는 중이다. 레나의 말에 루비드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이기죽댔다.

16562818048805.jpg“아닌척하더니 꽤 초조했나보지?”

16562818048797.jpg“초조하다니요?”

16562818048805.jpg“아직 동부만 공도 못 세웠잖아. 뭐, 맨 처음 전리품을 챙겨오긴 했지만 황제가 가져오라고 한 건 황금 따위가 아니니까 제 딴엔 애가 타겠지. 그러니까 저렇게 혼자 나대는 거고.”

루비드의 해석은 꽤 악의적이었다. 그는 린이 혼자 서부로 달려 나간 게 먼저 공을 세우기 위해서였다고 믿고 있었다.

16562818048797.jpg“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하지만 레나는 아무런 반박도 못 하고 얼버무렸다. 왠지 그건 아닐 것 같은데, 그렇다고 다른 이유를 떠올릴 수도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레나는 린이 자신에게도 아무 말도 없이 떠난 게 조금 충격이었다.

16562818048797.jpg‘이럴 거면 그런 말 하지나 말지.’

가능성이라며. 여러 가지 가능성이 아깝다며. 레나는 속으로 투덜대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붕붕 고개를 저었다. 옆에서 루비드가 미친 애 보듯 쳐다봤지만 한참이나 머리를 흔들며 삿된 생각을 떨쳐냈다.

16562818048797.jpg‘이러면 내가 꼭 서운해하는 것 같잖아.’

서운한 거 맞다. 레나도 알지만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그러곤 일부러 다른 얘길 꺼냈다.

16562818048797.jpg“그런데 정말 형하고 안 친해요?”

16562818048805.jpg“아, 왜 관심인데?”

16562818048797.jpg“그냥 궁금해서요. 여태 말하는 걸 본 적이 없어서.”

레나의 말대로 플레누스 형제는 여기까지 오며 말 한마디 섞지 않았다. 급파된 기사단의 머리로서 이우라는 기사들과 나눌 말이 많았고, 심지어 레나와도 이미 몇 마디를 나눴다. 하지만 정작 동생인 루비드하고는 절대 직접 말하지 않았다. 용무도 잘 만들지 않을뿐더러, 가끔 전달사항이 생겨도 부하들을 시켰다. 요 며칠 그걸 지켜본 레나는 이우라가 참 독하다 싶었다.

16562818048797.jpg“이우라 공은 생각보다 이성적인 분 같던데.”

왜 너하고만 그러니? 레나는 이 뒷말을 얌전히 삼켰다. 하지만 루비드는 이미 알아먹은 듯 인상이 또 험악해졌다. 빈말이 아니라, 레나가 마주한 이우라는 정말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처음 그의 기사단에 편성되었을 땐 레나도 내심 걱정했다. 일전에 이우라가 자신을 노려본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무섭지는 않지만 사사건건 감정을 소모하기는 싫었다. 게다가 자신이 북부에 끼치고 있는 피해가 있는 건 사실이니, 이우라가 호의적으로 대할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추측과 달리 이우라는 아무 감정 없이, 남부공 대리라는 지위에 맞게 레나를 대우했다.

16562818105129.jpg―직접 말을 섞는 건 처음이군.

16562818105129.jpg―앞으로 협조를 당부한다, 레나 경.

16562818105129.jpg―침묵 전쟁의 주역이라고 들었다. 뱀과 짐승을 상대한 경험은?

레나는 지극히 사무적으로 말하던 이우라를 떠올렸다. 좀 냉랭하다 싶은 감은 있지만, 그것도 지도자로서 필요한 정도의 단호함이었다.

16562818048805.jpg“몰라, 젠장. 안 친해.”

별로 다그친 것도 아닌데 루비드가 결국 짜증을 내며 실토했다. 안 그래도 그는 무덤에서 보고 온 것 때문에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어린 시절, 루비드가 이우라를 등진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자신을 찔렀기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루비드는 형을 두려워했고,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미워했다. 하지만 무덤에서 자신의 기억을 되짚으며 그게 착각인 걸 알아버렸다. 그리고 직후 형에게 걷어차였다. 황제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아주 형편없이 짓밟혔다. 때문에 루비드는 이우라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아직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16562818048805.jpg“그러는 너는?”

16562818048797.jpg“아버지랑 친하냐고요?”

16562818048805.jpg“그거 말고. 너도 동생 있잖아, 그 촉새.”

생각지도 못한 말에 레나는 당황했다. 이어서 든 생각은 여전히 말이 많구나 하는 거였다. 어릴 때도 정말 종알종알 시끄럽던 내 동생. 그다음엔 질문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동생과 친하냐니, 동생은 친하다고 말할 대상이 아니다. 레나에게 동생은 돌봐줘야 하는 대상이었다. 울면 업어주고 심심하다고 하면 놀아주고. 귀찮지만, 정말 귀찮지만……. 레나는 유니를 통해 받은 선물을 떠올렸다. 레나가 좋아하는 라벤더 향이 담긴 책갈피. 아마 엔지도 레나를 정말 치사하고 못된 누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선물을 전해준 건 어쨌든 세상에 서로 하나니까. 하나뿐인 동생, 하나뿐인 누나니까. 문득 가능성이라는 말이 다시 떠올랐다.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가능성. 시간이 얼마 없다는 이유로 외면하던 그 가능성을, 그나마 있는 시간으로 매듭지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6562818048805.jpg“야, 묻잖아.”

16562818048797.jpg“……저 지금 좀 중요한 생각 중인데.”

16562818048805.jpg“어쩌라고, 대답이나 해.”

16562818048797.jpg“아마 친할 거예요.”

루비드의 못된 채근에 레나가 못 이기는 척 답했다.

16562818048797.jpg“친했어요, 우린.”

그러곤 한숨 쉬듯 웃었다. 이틀 후면 레나의 생일이다. 까맣게 잊고 있던 걸 동생이 알려줬다. 라벤더 향기를 담아서. 6년 전 그날 이후 생일이 돌아오는 게 정말 싫었는데, 이번엔 좀 다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틀 후엔 아마 당신을 만날 수 있겠지. 레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곧 다가올 그날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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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핑! 거센 바람 소리와 함께 말도 안 되는 크기의 참격이 협곡을 가로질렀다. 콰르릉대는 굉음과 함께 가파른 절벽이 무너졌다. 그러자 암벽과 함께 몇 사람이 추락했다. 비참한 비명소리가 메아리치더니, 직후 기사단을 에워싼 망자들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16562818048805.jpg“쳇.”

레나의 옆에서 짧게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루비드였다. 그 녀석은 제 형이 날린 참격을 보고 괜한 자격지심에 짜증을 내고 있었다. 망자들이 이우라의 기사단을 습격했다. 이번이 벌써 세 번째였다. 서부 접경지역에 가까워지며 그들은 심심치 않게 공격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공격하는 건 통상의 망자가 아니라 배교자에게 조종당하는 망자들이었다. 아무래도 서부의 배교자들은 이우라가 접경지역의 병력과 합류하는 게 달갑지 않은 모양이었다.

16562818048797.jpg‘균열에서 망자들이 몰려나오면 본인들도 무사하진 못할 텐데.’

그래도 제국의 공작보단 망자가 낫다는 뜻인가? 레나는 이우라의 활약을 지켜보며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서부는 망자에게 먹힌 후 배교자들의 근거지가 되었다. 그런 곳으로 무시무시한 북부공이 다가오고 있으니, 그들로서는 달갑지 않은 게 당연했다.

16562818048797.jpg‘그럼 린 씨도 습격을 받았을까?’

레나는 문득 걱정됐다. 장벽으로 향하는 길은 험난하고 가팔랐다. 발을 조금만 헛디뎌도 까마득히 추락하는, 급습에 정말 취약한 지형이었다. 이우라처럼 참격으로 적을 단숨에 몰아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고전을 면치 못할 텐데.

16562818048797.jpg‘괜찮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린 씨인걸. 착하지만 강한 사람이다. 굳이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16562818105129.jpg“잔당이 있는지 확인해라.”

망자들이 녹아 사라지자 이우라가 기사들에게 명했다. 기사들은 말을 몰아 가파른 절벽 길을 올랐고, 잠시 후 검은 털 망토를 들고 왔다. 동물의 탈이 달린 불쾌한 망토였다.

16562818105129.jpg“까마귀의 추종자들인가.”

이우라가 그 조잡한 동물 탈을 보며 무심히 말했다. 그 말에 레나도 떠올렸다.

16562818048797.jpg‘그러고 보니 여기가 까마귀의 본거지였지.’

까마귀. 수많은 배교자들 중에서 제국의 공적으로 지정된 유일한 존재. 그는 새까만 까마귀 탈을 쓰고 다녀 까마귀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리고 그 외엔 모든 것이 불명이었다. 심지어 혼자인지 무리인지 조차 밝혀지지 않았다. 아주 드물게 목격되면 늘 혼자이지만 기이할 정도로 큰 규모의 망자를 거느리고 있어, 까마귀 탈 속에 여러 사람이 있을 거라고 추측할 뿐이었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그 악명은 익히 들어 알기에, 레나는 이 길을 먼저 간 린이 조금 더 걱정되었다. 하지만 지금 가슴이 쿵쿵 뛰는 게 걱정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계곡 너머로 서부 접경지의 장벽이 보였다. 드디어 도착했다. 레나는 예정대로 오늘 린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그리고 오늘은 레나의 생일이었다. . . . 장벽의 관문 앞에서 레나는 급히 머리를 매만졌다. 말을 달리느라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썼는데, 너무 초췌해 보이지 않기만을 바랐다.

16562818105129.jpg“동부공은 왔나?”

관문을 통과한 이우라가 가장 먼저 린을 찾았다. 하지만 관문을 지키는 병사들은 누구도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은 눈치껏 비켜섰고, 그 사이로 검은 제복을 입은 기사들이 나왔다. 동부의 기사들이었다. 그 묘한 분위기에 레나는 문제를 직감했다. 그래서 곧장 동부 기사들에게 물었다.

16562818048797.jpg“린, 아니. 저하는요?”

16562818161934.jpg“오늘 길에 까마귀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한 기사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16562818161934.jpg“한밤중이었습니다. 숨어 있던 망자들이 저하를 노렸고, 저하께서는 절벽 밑으로 추락하셨습니다.”

레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레나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을 보며 기사가 어렵사리 말을 이었다.

16562818161934.jpg“바로 뒤따라갔지만 저희는 다음날 새벽에야 절벽 밑까지 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찾은 건 이것뿐이었습니다…….”

기사는 그렇게 말하며 검은 천을 내밀었다. 그것은 망토였다. 반쯤 찢어진 피 묻은 망토. 동부공 리그난 아이테르너의 일부였다. 레나는 그것을 망연자실 바라보았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오늘이 원래 그런 날이기는 했다. 오늘은 레나의 생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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