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레나 루벨의 폭풍전야2021.03.29.
어린 시절 레나는 외로운 게 정말 싫었다. 유모는 정을 붙일 만하면 바뀌고, 동네 아이들은 창문 너머로 밖에 볼 수 없었다. 그 시절 레나에게 유일한 위안거리는 책과 이야기뿐이었다. 레나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비트라는 주로 시를 썼지만 이따금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를 짓기도 했다. 대개 어린 소년과 소녀가 모험을 하는 이야기였다. 레나는 비트라의 주인공 중에서 ‘유니’를 가장 좋아했다. 유니는 활발하고 씩씩하고 솔직한, 그래서 모두에게 사랑받던 아이였다. 어린 시절 레나는 유니처럼 되고 싶었고, 가족들을 만난 후엔 거의 그렇게 되었다고 믿었다. 유니처럼 소중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믿음이 깨졌을 때 레나는 더 알 수 없게 되었다. 사랑받는 게 대체 무엇인지. 대체 다들 어떻게 아껴지고 있는 건지. 그리고 시간이 흘러 레나는 또 한 사람을 만났다. 레나를 찾아 심연까지 내려온 사람이었다. 레나는 그가 어둠 속으로 찾아왔을 때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그건 레나가 자신의 일부라 여겨온 불신, 아무도 자신과 닿을 수 없다는 서글픈 확신이었다. 원한다고 모두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결국 사람들은 현실에 좌절하면서도 거기에 맞춰 살아간다. 레나에겐 그게 사람이었다. 사랑하는 사람. 사랑하는 가족. 친구, 그리고 연인. 머잖아 무덤으로 돌아가야 하는 레나는 그걸 인정하고 포기했다. 굳이 사랑하려 하지 않고 사랑받으려 하지 않았다. 특히 서로에게 유일해지는 것은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끊임없이, 정말 끊임없이 다가와 레나를 흔들고 기어이 레나에게 자신을 새겨 넣었다. 레나는 거기 속절없이 넘어가 잠시나마 생각했다. 이게 사랑받는 기분일지 모른다고. 하지만 그건 정말 잠깐이었다. 서부에 온 레나는 자조하며 다시 생각했다. 지금 돌아가고 있는 꼴을 보면, 그마저도 착각인 것 같다고.
*** 까마귀가 낸 불은 사흘이나 이어졌다. 그사이 병사들이 몇 번이나 불을 끄려고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망자들이 나타나 훼방을 놓는 바람에 불길은 한없이 타올랐다. 그 기세가 차츰 수그러든 건 마침 내린 비 덕분이었다. 자박대는 빗줄기가 불을 점점 꺼트렸고, 드디어 길이 열릴 조짐이 보이자 레나와 이우라, 그리고 루비드를 비롯한 중역들은 간만에 마주 앉았다.
“산림 내부 탐색을 재개하겠다.”
며칠간 어깨 부상을 추스른 이우라가 말했다. 그는 그 안에 까마귀의 본거지가 있을 거라고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그건 이우라만이 아니라 여태 까마귀에게 쫓긴 기사와 병사들의 생각이기도 했다.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아요.”
하지만 남부공 대리인 레나 루벨은 어쩐 일인지 반대 의견을 꺼냈다.
“아직 확인해야 할 게 있어요. 까마귀가 나타나기 전에 토벌한 망자들, 죽을 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어요. 배교자가 불러낸 망자가 아닐지도 몰라요.”
“그래서?”
“적의 실체를 모르는데 섣불리 움직이는 건 위험하지 않나요?”
“모르는 걸 알기 위해 탐색하는 거다.”
“그게 너무 위험하다는 거예요.”
레나가 위험하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하자, 안 그래도 차가운 이우라의 얼굴이 더 굳어졌다.
“그래서 경이 주장하고 싶은 건 뭐지?”
이우라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레나는 이우라의 날카로움을 피하듯 잠시 속눈썹을 내리깔더니,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이번 탐색에 참여하지 않겠습니다.”
레나의 선언에 이우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지만 레나는 그걸 보지 않으려는 듯 여상히 시선을 피한 채 말했다.
“어차피 탐색에 나서는 기사들은 공의 사람들이니 제가 빠진다고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또 같은 이유로 문제가 생기면 공을 최우선으로 지키겠죠. 그러니 최소한의 안전이 확보되기 전까지 저는 대기하겠습니다.”
레나의 발언은 뻔뻔했다. 이기적이고 비열했다. 때문에 루비드는 레나의 태도가 낯설어 당황했고, 이우라의 눈초리엔 경멸이 차올랐다.
“혹시나 해서 지켜봤는데 쓸모없는 짓이었군. 동부공과 약혼했다고 할 때 이미 눈치챘어야 했는데.”
이우라가 매몰차게 읊조렸다. 갑작스러운 동부공 이야기에 레나는 놀란 듯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신의를 아는 자라면 가까이하지 않겠지. 제 민족을 팔아넘긴 자와는, 아무리 정략이라도.”
이우라는 혐오감을 감추지 않고 대답했다. 북부의 왕, 이우라 플레누스는 신의를 모르는 자를 싫어했다. 동부공을 특히 혐오하는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동부공 리그난 아이테르너는 황제의 눈에 들기 위해 제 동족들을 희생시켰다. 제 반신이나 다름없을 그들을 보호하기는커녕 사지나 다름없는 서부로 밀어 넣었다. 이우라는 이 장벽에서 보았다. 그들이 장벽 밖으로 덧없이 쫓겨나 망자들에게 먹혀 스러지는 것을. 그 썩어빠진 짓거리를 본 이후, 이우라는 동부공과 상종도 하지 않았다. 최근 루벨 후작을 내보낸 것도 실상은 같은 이유였고, 지금 이우라는 레나에게도 비슷한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안전이 확보될 때까지 대기하겠다니. 안전이 싫은 인간은 없다. 다만 필요하니 위험을 무릅쓸 뿐이다. 결국 모두에게 필요하니까 앞장서서 희생하는 것이다.
“빠지겠다면 잡지 않겠다. 나도 비겁자에게 등을 맡길 생각은 없다.”
결국 이우라도 레나가 차라리 빠지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실력을 갖췄어도 저런 정신과 태도라면 걸림돌이 될 뿐이었다. 이우라의 날 선 말에 레나도 조금 화가 났는지, 차갑게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더 마주 앉을 이유도 없을 것 같네요.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야!”
레나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루비드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화를 내는 것도 다그치는 것도 아닌, 당황스러워 까닭을 묻는 부름이었다. 루비드가 서툴게 붙잡았지만 레나는 모르는 척 고개만 까딱였다.
“그럼 무운을 빌어요, 루비드 씨.”
그 말을 끝으로, 레나는 찌르는 시선을 뒤로한 채 돌아섰다. . . . 비겁자로 낙인 찍힌 레나는 정말 탐색에서 열외되었다. 대신 이우라와 루비드만 예정대로 산림으로 향했고, 이후 레나를 건드리는 사람은 없었다. 위험하니 빠지겠다는 소리를 대놓고 한 직후, 레나를 향하는 눈초리는 차갑기만 했다. 그래서 레나는 아무 방해 없이 혼자 망루에 오를 수 있었다. 그곳에서 레나는 서쪽의 버려진 땅을 잠자코 바라보았다. 마치 악몽처럼 벌어진 균열과 그 아래 포진한 망자들, 우거진 숲, 그리고 그 가운데 폐허가 된 도시.
‘저긴가?’
레나는 서부령의 넓은 도시를 눈으로 훑으며 중얼댔다.
‘그리고 저기.’
레나가 은밀히 눈에 담는 것은 도시에 남아 있는 높은 건물들이었다. 아카데미의 탑, 오페라 하우스, 교회의 첨탑 등. 만약 레나의 추측대로라면 저쯤에서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레나는 바쁘게 생각하며 시선을 내렸다. 이우라와 루비드가 이끄는 상당한 병력이 숲으로 향하고 있었다. 대대적인 탐색을 할 테니 한동안 요새로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레나는 그들이 멀어지는 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리고 충분히 멀어졌을 때, 레나도 말을 몰고 밖으로 나갔다. . . . 외곽의 숲으로 향한 플레누스 형제와 달리, 레나가 향한 곳은 서부의 버려진 도시 쪽이었다. 시렌치움 성이 있던 서부의 옛 중심지는 장벽에서 말을 빠르게 달리면 반 시간 만에 도달할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레나는 이우라의 귀에 자신의 일탈이 전해지기 전에 서둘러 말을 몰아 폐허로 향했다. 도시로 들어가는 건 쉬웠다. 관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원래대로라면 거리에 어슬렁거리고 있을 망자들은 모두 왕의 부름을 받아 균열 아래 집결했다. 그래서 레나는 도시를 곧장 가로질러, 아까 눈여겨 본 탑으로 향했다. 탑에 도착한 레나는 그 위로 올라가 샅샅이 뒤졌다.
‘여기가 아닌가?’
하지만 찾는 게 없는지, 곧 다시 나와 말에 올랐다. 그러곤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이어 도착한 오페라 하우스에서도 레나는 똑같이 무언가를 찾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허탕이었고, 레나는 지체하지 않고 다음 건물로 향했다. 그러길 수차례, 레나는 마지막으로 언덕 위 교회로 향했다. 방문객의 발길이 오래 전에 끊긴 교회는 차갑고 쓸쓸해 보였다.
‘여기가 마지막…….’
여기도 없으면 어쩌지? 일순 약한 마음이 올라왔다. 그래서 레나는 다급히 스스로를 다잡았다. 그런 생각은 불필요하다. 절망도 좌절도 아직 이르다. 아직은. 레나는 이를 악물고 교회의 첨탑을 올랐다. 까마득히 이어지는 나선 계단을 한창 밟아 오를 때였다. 아무 기척 없이 텅 비어 있던 주위에서 돌연 뱀들이 스멀대며 기어 나왔다. 그걸 본 레나는 놀라기보다 안심했다.
‘여기였어.’
드디어 찾았다. 레나는 그가 혹여 도망칠까 봐 곧장 뱀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뱀들이 레나를 쫓아내려는 듯 위협했다. 하지만 레나는 그것들을 무시하며 밟고 지나갔다. 간혹 뱀들이 긴 몸통으로 레나의 허리를 휘감아 붙잡으려 했지만 단지 그뿐, 함부로 독니를 드러내는 것은 없었다. 망자들을 수월히 주파한 레나는 비로소 도달한 첨탑 문을 부수듯 박찼다. 그곳에 있었다. 레나가 내리 찾던 자가. 붉은 하늘을 등진 까마귀가. 레나와 마주한 까마귀는 어제처럼 기묘하게 웃지 않았다. 그저 굳은 듯이 서서 레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또 보네요.”
계단을 막 올라온 레나가 숨을 고르며 말했다. 옅게 웃으며, 마치 친구를 대하듯이. 하지만 레나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그 미소에 속지 않을 것이다. 웃는 입술과 다정한 목소리와 달리, 지금 레나의 눈은 더없이 싸늘했다. 그러나 까마귀는 거리 때문에 그걸 미처 볼 수 없었고, 인사에 화답하는 대신 다가오는 레나의 발 앞에 비수를 던졌다. 더 다가오지 말라는 뜻이었다.
“……계속 지켜봤으면 알겠지만 나는 혼자예요. 아마 당신도 그렇겠죠.”
날아온 비수에 잠시 멈춘 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발치의 비수를 뽑았다. 그러더니 다시 까마귀를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 내가 아는 사람이죠?”
레나의 물음에 까마귀가 돌아섰다. 창문으로 달아날 작정이었다. 이 높이에서 창문이라니, 레나는 가당치도 않은 시도를 하는 까마귀에게 비수를 던졌다. 팍! 비수가 까마귀의 망토를 꿰며 나무 창틀에 박혔다. 망토 때문에 발이 묶인 까마귀가 잠시 주저하는 사이 레나가 달려들었다. 검을 뽑아 휘둘렀지만 까마귀는 피하기만 할 뿐 섣불리 무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의 기색은 이우라와 싸울 때 하고는 영 딴판이었고, 그게 레나를 조금 더 화나게 만들었다. 그래서 레나도 휘두르던 검을 던져버리고 까마귀의 탈로 손을 뻗었다. 저 거슬리는 새대가리를 그대로 벗겨버릴 셈이었다. 하지만 레나의 손은 도중에 막혔다. 까마귀가 레나의 양 손목을 붙잡은 탓이었다. 레나는 까마귀의 손을 떨쳐내려고 팔을 비틀었다. 하지만 상대는 만만치 않은 힘으로 레나를 막았다. 한참이나 힘겨루기를 했지만 레나는 결국 까마귀의 가면을 벗겨낼 수 없었고, 악에 받쳐서 입술을 깨물다가 까마귀의 붉은 입술에 시선을 고정했다. 레나의 눈이 일순 가늘어졌다. 무언가 결심한 레나는, 그대로 까마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읍……!”
여태까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던 까마귀가 신음인지 탄성인지 모를 소리를 터트렸다. 기분 탓인지 그 소리가 레나에겐 매우 익숙했다. 고작 입을 맞춘 것뿐인데, 제국의 공적은 크게 동요하며 뒤로 물러났다. 까마귀가 몸을 빼자 레나는 그의 망토 안으로 발을 밀어 넣어 다리를 걸었다. 까마귀의 걸음이 잠깐 엇갈렸고, 그 사이 레나는 올라타듯이 그를 덮쳤다. 콰당! 까마귀는 맥을 못 추고 뒤로 넘어갔다. 그와 함께 쓰러진 레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까마귀의 탈을 벗겼다. 새카만 탈이 벗겨지며 하얀 얼굴이 드러났다. 그리고 나타난 얼굴을 보며, 레나의 두 눈에 만감이 교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