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울렸다2021.04.01.
까마귀의 가면 아래 드러난 검은 눈은 고요했다. 반쯤 포기한, 동시에 반쯤은 겁먹은 듯 복잡한 눈빛이었다. 린은 그런 얼굴로 말없이 레나를 바라보았다. 레나는 린을 마주하고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예상이 맞아떨어진 것에 조용히 탄식할 뿐이었다.
“죽었다더니.”
레나의 무거운 음성이 침묵을 깨트렸다. 레나는 실소하듯 중얼대더니, 마른 입술을 핥으며 웃었다.
“여기 계셨네요. 생각도 못 한 차림으로.”
레나가 린의 가슴을 손으로 짚은 채, 망토의 깃털을 움켜쥐며 말했다.
“제국의 공작이 배교자라니, 황제가 망자라는 소리만큼 황당하네요.”
농담인지 빈정댐인지 모를 말에 린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레나가 린의 가슴을 밀며 몸을 일으켰다. 레나가 일어나자 린도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하지만 단지 그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가장 좋아하는 사람에게 가장 위험한 비밀을 들켰다. 빌어야 할지 입을 막아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굳어 있는 린에게 레나가 물었다.
“나한테 할 말 없어요?”
“……못 본 척해 줘.”
레나의 물음에, 린은 붉은 입술로 가련하게 애원했다. 그 한마디로 모든 것이 확인되었다. 린은 까마귀였다. 제국의 공적이었고, 망자를 다스리는 배교자였다. 제국의 공작이 배교자라니. 레나의 말마따나 황제가 망자라는 소리만큼이나 황당한 일이다. 린은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고, 그래서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수 있다고 예상했다. 하지만 그게 하필 오늘, 또 하필 레나에게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린은 권능으로 지배한 뱀들로 이우라를 보고 있었다. 그래서 레나가 다가오는 걸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요 며칠 무리한 탓에 집중력은 바닥이었고, 레나의 접근을 확인한 것도 레나가 이미 첨탑을 오를 때였다. 결국 꼼짝없이 붙잡힌 린은 레나에게 자비를 구했고, 레나는 그 한마디에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다시 허탈하게 웃었다.
“당연히 그렇게 해드려야죠.”
이어진 레나의 목소리는 묘하게 가벼웠다.
“린 씨를 곤란하게 만들 마음은 없어요. 지금 이것도 뭔가 이유가 있겠죠. 제가 알 필요 없는.”
“레나…….”
“관여하지 않을게요.”
레나가 딱 잘라 말했다. 지금 린에겐 가장 적절한 말이었지만, 어쩐지 린은 그 말이 별로 반갑지 않았다. 오히려 불안했다. 뭔가 잘못된 분위기였다. 린이 상황을 이해하려고 눈치를 살피는데, 레나가 주머니에서 짙푸른 색 천 조각을 꺼냈다. 그걸 본 린은 또 한 번 놀랐다. 그건 린이 레나에게 주고 싶어서 산 리본이었다. 린의 동요를 느꼈지만 레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이거, 혹시 제 거예요?”
뜻밖의 물음에 린은 얼떨떨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레나는 짙게 웃으며 되물었다.
“며칠 전이 제 생일이었는데, 혹시 알고 계셨어요?”
“아, 아니…….”
몰랐다. 선물은 아무 의미 없이, 그냥 레나가 생각나서 산 거였다. 하지만 그게 지금 중요한가? 린이 의아하게 바라보자 레나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여기 오자마자 린 씨가 죽었다고 들었어요. 근데 그날이 제 생일이었어요.”
그 순간 린의 눈이 커졌고, 레나의 미소는 짙어졌다. 레나는 거짓말처럼 예쁘게 웃으며 린의 가슴팍에 리본을 던졌다. 이런 건 필요 없다는 듯이. 그리 세게 던진 것도 아닌데 린은 쿵 하는 충격을 느꼈다.
“레나…….”
린이 놀라서 불렀지만 레나는 말없이 돌아섰다. 돌아서는 순간 언뜻 보인 레나의 얼굴은 말도 못 하게 차가웠다. 린은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잠깐만……!”
린은 일어나서 레나를 쫓아갔다. 하지만 레나는 멈추지 않았고, 결국 린은 레나를 앞질러서 막아섰다.
“잠깐만, 가지 마.”
린이 앞을 막으며 부탁했지만 레나는 그를 보지도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지나쳤다. 린은 다급한 마음에 레나의 팔을 붙잡았다. 그 바람에 레나의 몸이 린을 향해 돌려졌고, 레나의 얼굴을 다시 본 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레나는 몹시 분한 듯, 입술을 깨문 채 눈물을 참고 있었다. 울렸다. 그걸 깨닫는 순간 린은 숨 쉬는 것도 잊어버렸다. 시간마저 멈춘 것 같았다. 그 와중에 가슴만 천천히 저며지는 기분이었다. 린이 얼어붙자 레나는 그를 뿌리치며 고개를 돌렸다. 린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돌아서는 레나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미안해.”
린은 레나를 끌어안으며 아프게 속삭였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놔.”
“레나, 정말 미안해. 나 좀 봐…….”
“놓으라고……!”
레나는 얼굴에 닿는 까마귀 깃털에 진저리를 내며 린을 밀었다. 하지만 린은 레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거의 빌듯이 사과하면서도 레나가 빠져나가려고 하면 집요하게 매달렸다. 짜증이 난 레나는 린의 가슴을 내리쳤다. 진심이 담긴 주먹이 가슴을 퍽퍽 쳤지만 린은 아픈 티도 못 내고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러다 결국 레나의 분노가 폭발했다.
“뭐가 미안한데!”
“저, 전부…….”
“전부 뭐, 미안하다면 다야?”
“아니, 미안…….”
“대뜸 죽은 척해놓고 미안하다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데,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데. 치미는 원망에, 레나는 있는 힘껏 팔을 당겨 린의 명치를 후려쳤다. 온갖 폭행을 견디던 린도 이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저도 모르게 헉하는 숨소리가 터져 나왔고, 동시에 몸에 힘이 풀리며 맥없이 쓰러졌다. 결국 린을 쓰러트린 레나는 그제야 아차 하며 정신을 차렸다. 린은 바닥에 웅크린 채 미동도 하지 않았고, 레나는 놀라서 입을 가렸다. 설마 죽었나? 하지만 다행히 린은 살아 있었다. 그는 숨 쉬기 어려워하면서도 손을 뻗어 레나의 망토 자락을 잡았다. 그러곤 다시 한번 사과했다.
“미안해.”
“……뭐가 미안해?”
“울려서…….”
뾰족하게 되묻던 레나의 얼굴이 한층 더 살벌해졌고, 린은 말실수를 깨닫고 서둘러 정정했다.
“걱정하게 만들어서.”
이게 정답인지 레나의 분위기가 한결 누그러졌다. 린은 눈치를 보다 일어나 앉았다. 그러곤 레나를 올려다보며 다시 말했다.
“금방 돌아갈 생각이었어.”
“어떻게, 피투성이로? 겨우 살아남은 척하면서?”
“그건…….”
“그럼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기뻐하면 되는 거였어?”
그렇게 되묻는 레나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속상하고 억울한 투였다. 평소라면 상상도 못 할 솔직함에, 린은 머뭇대다가 레나의 팔을 당겼다. 레나는 잠시 버티더니 결국 풀썩 주저앉으며 린에게 기대버렸다.
“미안해.”
레나가 무릎에 앉자, 린은 레나의 머리에 뺨을 댄 채 연신 사과했다.
“내 생각이 짧았어. 너무 급해서 생각을 미처 못 했어. 미안해.”
그러길 한참, 레나가 긴 숨을 내쉬더니 린에게 안긴 채 중얼댔다.
“왜 제대로 안 싸웠어?”
“응?”
“북부공하고 싸울 때처럼 안 했잖아. 방금 전에도 마음먹고 싸웠으면 됐는데.”
“그건…….”
“봐준 거야?”
레나의 목소리에 다시 날이 섰다. 그래서 린은 서둘러 변명했다.
“봐준 적 없어. 내가 못 싸운 거야.”
린은 레나의 손에 깍지를 끼며 속삭였다.
“너하고는 못 싸우니까, 그건 봐준 게 아니라 진 거야.”
린의 절절한 해명에 마음이 조금 풀린 듯, 레나는 또 한 번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러곤 린의 가슴에 조금 더 머리를 파묻었다. 그래서 레나를 보듬던 린은 심정이 점점 곤란해졌다. 심호흡을 하기 위해 위로 향한 그의 얼굴은 이미 완연한 붉은 색이었다. 정체를 들킨 직후엔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몰랐는데, 마음을 가라앉히고 되짚어보니 엄청난 일들이 연달아 벌어지고 있었다. 맨정신으로 레나와 입을 맞췄고, 우는 레나를 껴안고 달랬다. 심지어 지금은 레나를 아예 무릎에 앉혀놓고 온몸으로 보듬고 있다. 린은 자신의 손이 각각 레나의 어깨를 안고 레나와 깍지 끼고 있는 것이 더 없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어떻게 이랬는지도 모르겠고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지금 린을 괴롭히는 건 레나의 체온만이 아니었다. 정체를 알아내겠다며 밀어붙이다가 여의치 않으니 입을 맞춰온 레나도, 눈물을 매단 채 화를 내던 레나도, 안고 달래는 동안에도 계속 억울해하는 레나도 린을 힘겹게 만들었다. 줄곧 지내면서 레나가 이렇게까지 자신을 표현한 적은 없었다. 린은 이 강철 같은 숙녀가 자기 때문에 무너진 걸 깨닫고 미안한 것 이상으로 행복해졌다. 레나가 자신을 좋아하는 건 이미 알고 있지만, 이렇게 사랑받을 줄은 몰라서 조금 죽을 것 같았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면 좋을 텐데. 하지만 그들에겐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잠시 후, 마음을 추스른 레나가 몸을 일으켰다. 린은 안타까워하면서도 레나를 순순히 놓아주었다. 그러곤 물었다.
“화 풀렸어?”
“아뇨.”
레나의 목소리는 여전히 싸늘했다. 그래서 린은 찔끔했지만 아까만큼 눈치를 보지는 않았다. 레나가 일어나서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기자, 린도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나인 건 어떻게 알았어?”
“얼굴을 내놓고 다녔으면서 어떻게 알았냐니요.”
레나가 기가 차다는 듯 말하자 린은 놀라서 턱을 감쌌다.
“못 알아볼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사람은 못 알아보겠죠.”
“어?”
린이 더 놀라서 쳐다보자 레나는 그저 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평생 비밀이다. 레나가 린의 입술 모양을 바로 알아볼 만큼 거기에 관심이 많은 건. 예전에 무덤을 함께 탐색할 때, 린이 뱀 왕의 지배를 받아 레나를 덮쳤던 그때. 린은 까맣게 모르겠지만 레나는 린이 깨어날 때까지 심각한 내적 갈등을 겪었다. 내심 좋아하는 사람이기는 한데 그래도 첫 키스를 이렇게 날린 것은 억울해서 그의 입술을 한참이나 때려준 일은, 정녕 일생일대의 비밀이었다. 게다가 레나가 린을 알아본 건 사실 추론보다 믿음의 영역이기도 했다. 동부공이 죽었다고 여기는 대부분의 사람과 달리 레나는 그걸 악착같이 부정했다. 린의 찢어진 망토를 건네받았을 땐 레나도 망연자실했지만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엔 의심했다. 린이 죽었다고? 아니, 아직 확실한 건 아니다. 린 씨가 그렇게 죽을 리 없어. 내 눈으로 시체를 확인하기 전까진 믿지 않을 거야. 어쩌면 현실 부정이었다. 레나는 머리를 차게 하며 가능성을 최대한 끌어 모았다. 그러자 점점 더 의심스러워졌다. 린이 공을 세우려고 혼자 뛰쳐나갔다니, 과연 그럴까? 동부의 기사들이나 북부공은 이미 납득하는 모양이지만, 레나는 그 말을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다. 레나가 아는 린은 공적에 집착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황제의 비위를 맞추는 건 어디까지나 목적이 아닌 수단이었다. 그런 사람이 이토록 무모하게 행동한다? 그리고 그 무모한 짓의 결과로 보란 듯이 죽어버린다? 아니, 린은 그렇게 미련한 사람이 아니다. 레나는 이 믿음 하나로 버텼다. 죽었을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견뎠다. 그리고 숲속에서 까마귀를 만났을 때, 그와 검을 맞대기 위해 밀착했을 때 레나는 알아차리기보다는 느꼈다. 이 사람인 걸, 그가 내 사람이라는 걸. 그걸 깨달은 후엔 모든 게 손에 잡히듯 보였다. 숲은 미끼일 것이다. 화살 자국도 화재도, 이우라를 끌어들이기 위한 연막이다. 애당초 죽은 척까지 할 만큼 용의주도한 사람이 그렇게 단서를 줄줄 흘려놓을 리 없었다. 하지만 이우라는 반드시 숲으로 향할 것이다. 책임자로서 가장 의심스러운 구역을 방치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레나는 이우라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혼자 까마귀를 찾기로 했다. 그로써 결국 린을 찾아낸 레나는 그에게 요 며칠간 쌓인 울분을 다 쏟아냈고, 조금 진정되자 비로소 상황을 물었다.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지 말해줘요.”
드디어 올 게 왔다는 생각에 린은 잠시 주저했다. 하지만 이제 와 입을 다물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이내 천천히 운을 뗐다.
“여기 고향 사람들이 있어.”
“고향 사람들이라면, 린 씨가 원래 살던 나라의……?”
레나의 확인에 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서부에 몰래 둥지를 튼 건 3년 전이었다. 3년 전, 제국의 황제 니힐은 어린 동부공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명령이다. 가서 동부의 반란군을 소탕해라.
―네가 내 소유인 걸 증명해.
당시 소년이던 린에게 그건 죽으라는 말보다 더 끔찍한 명령이었다. 니힐이 지목한 동부의 반란군은 제국에 고국을 빼앗긴, 린의 동포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