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뱀의 아들2021.04.05.
“나자의 아들이라기에 기대했는데, 어디서 하룻강아지 같은 게 왔네.”
7년 전, 니힐이 황궁에 들어온 린을 보며 처음 한 말이었다. 나자가 죽고 린이 그 뒤를 잇기 위해 황궁에 들어왔을 때였다. 어린 린은 니힐의 무심한 평가에 난처한 듯 시선을 피했다.
“눈 돌리지 마.”
하지만 니힐은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이렇게 보니 조금은 닮은 것 같기도.”
니힐은 황좌에 눕듯이 앉아 중얼대더니, 지루하다는 듯 자신의 손끝을 보며 말했다.
“그래봤자 이민족의 피가 흐르는 사자 새끼. 죽여야 마땅하겠지.”
니힐의 담담한 말에 린은 하얗게 질렸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니힐과 꼭 닮은 남자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폐하, 아이가 놀란 것 같습니다.”
린은 그가 서부공 클라비스라는 것도 한참 후에야 알았다. 클라비스의 개입에 니힐은 안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뭐, 원래는 죽여야 하지만 나자의 얼굴을 봐서 특별히 살려주마.”
니힐은 그렇게 말하며 클라비스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클라비스는 단상에서 내려와 린에게 몇 겹의 종이를 내밀었다. 이미 밀랍 봉인이 뜯긴 편지 봉투와 편지였다.
“제국어는 읽을 줄 알죠?”
린은 주저하며 끄덕였고, 클라비스는 환하게 웃으며 손짓했다. 편지를 읽어보라는 뜻이었다. 갑작스러운 요구에 린은 편지 봉투에 적힌 발신인의 이름부터 확인했다. ―나자 아이테르너 그라샤. 익숙한 이름에 린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너 때문에 나자가 죽었으니 네가 그 빈 자리를 채워라.”
린이 편지를 다 읽기도 전에 니힐이 읊조렸다. 그때 린의 두 눈은 마치 울 것처럼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걸 본 클라비스가 실소했다.
“하지만 이래서는 어렵겠는데요? 더 강해져야겠어요, 동부공.”
동부공. 그 낯선 호칭을 시작으로 악몽이 시작되었다. 싸늘한 눈빛의 괴물과 웃는 얼굴의 악마가 나오는, 도무지 헤어 나올 수 없는 악몽이었다. . . . 그날부터 린은 황제의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받고 싸움터를 전전했다. 특히 서부에 균열이 벌어진 직후엔 그곳에 혼자 던져져 살아남아야 했다. 린은 혼자 몇 주씩 망자들과 싸우고 동부에 돌아와선 의도를 가진 연인들에게 배신당했다. 상처 입고 다시 일어서는 나날이 지나 소년은 청년이 되었다. 몇 년 후, 린은 충분히 강해졌다. 아니, 강하게 만들어졌다. 린이 더 이상 황제가 내린 임무를 버거워하지 않게 되자, 니힐은 기다렸다는 듯 이렇게 명했다.
―명령이다. 가서 동부의 반란군을 소탕해라. 내게 반기를 든 것은 남녀노소 가리지 말고 죽여라. 이것까지 하면 더는 사사건건 불러내지 않겠다. 마지막이다. 네가 내 소유인 걸 증명해.
동부의 반란군. 그건 제국에게 고국을 빼앗긴 린의 동포들이었다. 니힐의 입장에선 감히 제국에 대항하는 폭도들이었다. 또한 동부공이 묵인해온 동부의 골칫거리이기도 했다.
‘어떡하지?’
황제의 서신을 받은 린은 발밑이 꺼지는 기분이었다. 폐하께서 명하셨다. 따라야 한다. 따르지 않으면, 해내지 않으면 죽음뿐이다. 하지만 지금 황제가 쓸어버리라고 하는 건 아무 죄 없는, 심지어 그와 같은 겨레의 민족이었다.
‘도망칠까?’
도망치다니, 온 세상이 황제의 땅인데 대체 어디로.
‘차라리 돌아가서 같이 싸울까?’
아니, 그렇게 되면 황제는 북부공을 보낼 거다. 결국 개죽음이다.
‘……그냥 죽을까?’
벼랑 끝까지 내몰린 린은 결국 견디지 못하고 숨죽여 울었다. 한계였다. 더는 하고 싶지 않았다. 이 처지도 지긋지긋했다. 동족들에겐 배신자라 낙인찍히고 제국민들에겐 이방인이라 손가락질당하는 것도 이젠 싫었다. 그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으며, 철저히 혼자였다. 참아온 것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에 린은 이를 악물고 목을 조르듯 울었다. 여기서 벗어나려면 죽는 것 외엔 없을 것 같았다.
‘아…….’
그렇게 생각한 순간 린의 뇌리로 한 가지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자신이 이미 죽으려 한 적이 있다는 걸. 그런데 아직 살아 있는 까닭도. 생각이 거기 미친 린은 본능적으로 서랍을 뒤졌다. 그러곤 가장 안쪽에 처박아둔 편지를 꺼냈다. 나자 아이테르너가 황제에게 보낸, 유서나 다름없는 편지였다. 린은 아직 나자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른다. 애당초 거의 남 같은 사람이었다. 게다가 나자는 린에게 모든 것을 떠넘겼으면서 정작 그에겐 말 한마디, 쪽지 한 장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이 편지는 린이 나자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린은 막다른 곳에서 나자의 편지를 수 년 만에 펼쳐보았다. 나자의 차가운 필체가 린의 머릿속도 차게 만들었다. 잠시 후, 린은 이를 악물며 눈물을 지웠다.
‘내가 도망쳐도 결과는 마찬가지야.’
아니, 내가 도망치면 귀신같은 이우라가 오겠지. 그럼 상황은 더 나빠진다. 그럴 바엔 차라리, 어차피 최악은 죽는 거니까 그럼 차라리.
‘살리자.’
설령 들키더라도 시도는 해보자. 어차피 내 목숨은 빌린 목숨이니까. 그렇게 하면 당신도…….
‘조금은 속죄할 수 있겠지.’
린은 나자의 편지를 집어넣으며 마지막 망설임을 떨쳤다. 그 후 린은 니힐의 명령대로 반란군을 소탕했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사람에게 지배의 권능을 사용했다. 린의 권능으로 가장 앞장서 싸우던 이들은 스스로 무기를 내려놓았고, 지도자는 이끌던 자들을 오히려 함정으로 인도했다. 그로써 수백 명에 달하는 반란군이 모두 사로잡혔고, 린은 그들의 가족까지 모조리 색출해냈다. 천 명이 넘는 동부인이 제국으로 끌려나왔다. 그들은 악마를 본 사람처럼 하얗게 질려 무어라 마구 소리쳤다. 동부의 기사들은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린은 그들의 분노와 저주에 귀 기울이며 묵묵히 승리를 선언했다. 그리고 니힐에겐 반역자들을 서부로 몰아 망자를 유인하는 미끼로 사용하겠다고 전했다. 니힐은 승낙했다. 귀족들은 환호했고, 제국민들은 몸서리쳤다. 그리고 서부 접경지를 지키던 이우라는 포로들을 끌고 장벽으로 온 린에게 말했다.
“소요에 직접 가담한 남자들만 죽이고 여자와 아이는 다시 이송해라. 그게 네가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신의다.”
그렇게 말하는 이우라의 두 눈엔 실망감이 가득했다. 동족을 배신한 린에 대한 질책이었다. 그걸 알아챈 린은 어이가 없었다. 서부 장벽에서 구르는 몇 년 동안 린은 이우라와 종종 스친 적이 있었다. 서로 가까운 사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같은 전장에서 싸우는 탓에 동질감 비슷한 것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에도 쓸 수 없는 얄팍한 유대였다. 그 증거로 린에게 반란군을 토벌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을 때 이우라는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았다. 린이 완벽히 고립되어 고뇌할 땐 조언도 참견도 도우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방관해놓고 이제와 결과만 질타하다니. 선택의 기로에 서 본 적도 없는 자가 그저 높은 곳에서 타인의 양심을 심판하다니.
“조언을 구한 적은 없는데.”
화가 치민 린은 그날 처음으로 이우라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필요도 없고 말이야.”
항상 올려다보던 그와 눈높이를 맞추고 사납게 으르렁댔다.
“내 공적에 손대지 마라. 하나도 빠짐없이 처리하고 치하 받을 예정이니까.”
일부러 더 포악하게 굴며 그가 원하는 대로 신의를 모르는 짐승이 되어주었다. 그러자 이우라의 보랏빛 눈동자가 더 싸늘해졌다.
“나자가 무덤에서 땅을 치겠군.”
이우라는 그 말을 끝으로, 더는 상종하고 싶지 않다는 듯 돌아섰다. 그 말이 비수처럼 가슴을 후볐지만 린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애당초 이우라의 말은 틀렸다. 소요에 가담한 남자들만 죽이고 여자와 아이는 돌려보내라고? 남자들만이 아니었다. 억압에 저항한 것은 여자와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간절함이란 그런 것이다. 지배자로 태어나고 살아온 이는 모르겠지만. 이후 린은 매일 백 명의 포로를 장벽 밖으로 내보냈다. 그들은 북부 기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망자의 먹이가 되었다. 아니, 먹이가 되는 것처럼 보였다. 린이 다스리는 망자들은 그들을 사냥하는 척하며 감시가 닿지 않는 깊은 숲속으로 그들을 빼돌렸다. 그리고 그즈음 까마귀가 등장했다. 그는 서부 접경지를 무단으로 점거한 배교자. 유일무이하고 전무후무한 제국의 공적이었다. ***
“지금까지 그렇게 사람들을 지킨 거예요?”
“가끔 돕기만 했어. 강한 사람들이라서, 그 다음부턴 스스로 살아남았으니까.”
린은 그렇게 대답하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혼자 안고 있던 비밀을 털어놓으니 조금 홀가분했다. 한편 린의 비밀을 넘겨받은 레나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3년 동안 천여 명의 사람을 감추고 돌보다니.
“그 사람들은 까마귀가 린 씨인 걸 알아요?”
“아니.”
“왜 얘기 안 했어요?”
“위험해서.”
담담히 말하는 린을 보며 레나는 그저 탄식했다. 그 많은 사람 중 밀고자가 나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싸울 때 힘을 보태지 않고 뒤에서 돕는 린을 위선자라고 비판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린은 동포들에게도 이름 없는 까마귀로 남았다. 그로써 마지막까지 이방인이 되었다.
“어떻게 그래요?”
“그래서 혼자 다녔어. 그편이 자리를 비우기 쉬우니까.”
린은 레나의 물음을 묘하게 오해하고 대답했다. 레나는 린이 착각한 걸 눈치챘지만,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발로 뛰는 공작님, 독단적이고 독선적이어서 혼자 다니길 좋아하는 동부공. 모두 까마귀의 역할을 해내기 위해 만든 모습이었다.
“……이번엔 자리를 비울 수가 없어서 실종된 척한 거군요.”
레나의 한숨 섞인 말에 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다른 때라면 밤중에 몰래 나다니거나 했을 텐데, 이번엔 상황이 조금 달랐다. 망자들이 몰려나오는 규모가 상당하다 못해 심각했고, 이 정도면 북부공이 움직일 가능성이 컸다. 다른 녀석들이라면 모르겠지만, 이우라를 상대로 눈속임은 어려웠다. 며칠 전에도 몇주 눕혀놓을 생각으로 허를 찌른 건데 그 괴물 같은 이우라는 기습마저 피하고 가벼운 상처만 입었다. 사정을 다 듣고 나니, 레나는 그를 퍽퍽 때린 것이 조금 미안해졌다. 동시에 야속한 마음이 들었다. 나한테 얘기했으면 도왔을 텐데. 레나는 혼자 다 떠안는 린을 원망하다가, 스스로에게 뜨끔해서 괜히 말을 돌렸다.
“그런데 이건 너무 악취미 아닌가요?”
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린의 까마귀 탈을 집어 들었다.
“게다가 가리려면 다 가리는 쪽이 낫지 않아요? 굳이 화장까지 할 바에는.”
레나는 일부러 린의 입술을 눈짓했다. 그를 창피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예상대로 린은 입술을 가리며 부끄러워했다. 하지만 그가 반대편 손으로 레나의 입술을 닦아낸 건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레나가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자 그가 변명했다.
“묻어서.”
린은 그렇게 말하며 붉게 물든 손가락을 보여주었고, 레나는 린을 놀릴 상황이 아니었던 것을 깨닫고 속으로 몸부림쳤다.
“그,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필요한 조치는 끝났으니까 돌아가려고.”
“어떻게?”
“부상당한 채 발견되는 걸로…….”
동부 기사들은 여전히 동부공을 찾고 있다. 비록 목적은 시신 수거에 가깝지만, 그들에게 발견되면 기적적으로 생환한 척할 수 있다. 레나는 다칠 예정이라고 선언하는 린을 매섭게 쏘아보며 되물었다.
“그럼 사람들은 다 대피한 거예요? 숲을 탐색했는데 아무것도 없으면 북부공은 다른 곳까지 수색할 거예요.”
“애당초 그 숲이 아니었어.”
“네?”
“사람들이 숨은 장소, 지금 이우라가 수색하는 숲이 아니라 균열에 더 가까운 다른 숲이야.”
“그럼 지금 북부에서 수색하는 곳은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다는 거예요?”
그럼 결국 마찬가지다. 허탕을 친 북부공은 다시 수색에 나설 것이다. 레나가 미심쩍게 되묻자 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비어 있지는 않아.”
린은 그렇게 말하며 레나가 악취미라고 혹평한 까마귀 탈을 바라보았다.
“거기 있어, 이우라가 관심을 가질 만한 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