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까마귀의 둥지2021.04.08.
“거기 있어, 이우라가 관심을 가질 만한 게.”
린의 목소리가 묘하게 무거웠다. 그래서 레나도 망설이듯 되물었다.
“뭐가 있다는 거죠?”
“모르겠어. 그게 뭔지는,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도.”
그건 그가 아직 소년일 때, 홀로 서부의 망자들과 싸우던 중에 발견한 것이다. ‘그들’은 깊은 숲속에 있었다. 인간의 형상이지만 인간은 아닌, 망자라 여기기에도 너무나 기이한. 린은 그들이 정말 죽은 자라면 망자보다는 유령에 가까울 거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이우라의 관심을 끌기는 할 거야. 오늘 숲에 들어갔으니 며칠 내로 찾겠지.”
“처음부터 북부공을 그쪽으로 보내는 게 목표였군요.”
레나의 말에 린은 묵묵히 끄덕였다. 그에겐 망자가 쏟아져 나오는 것보다 이우라가 서부로 오는 게 더 큰 문제였다. 하지만 숲속에 있는 그들을 발견하면 천하의 이우라도 혼란스러울 것이다. 그리고 까마귀가 진짜 숨기려고 한 것은 영영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북부공은 위험인물이니까. 동생과는 달리.”
린은 그렇게 말하며 만지작대던 까마귀 탈을 다시 썼다. 린이 얼굴을 감추자 레나가 놀라서 물었다.
“어디 가려고요?”
“북부공이 숲으로 들어가는 걸 봤으니까 나도 돌아갈 준비를 하려고.”
지금 린은 실종상태. 돌아가려면 기회를 잡아서 동부 기사들의 눈에 띄어야 한다. 그것도 꽤 까다로운 작업이니 서둘러 준비해야 했다.
“잠깐만요.”
레나는 린이 움직이려는 걸 깨닫고 그를 붙잡았다.
“굳이 그럴 필요 없잖아요.”
“응?”
“기왕 이렇게 된 거, 나한테 발견되는 편이 낫지 않아요?”
레나의 제안에 까마귀의 부리가 조금 기울어졌다.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물론 그렇지만…….”
레나의 말은 타당했지만 린은 선뜻 응하지 못했다. 이 명백한 반역에 레나를 가담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가 망설이자 레나는 더 강경히 주장했다.
“나도 북부공에게 할 말이 필요해요. 그러니까 그냥 내가 발견한 걸로 해요.”
레나가 재차 말했고, 린은 차마 안 된다고 할 수 없었다. 린이 결국 수긍하자 레나는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레나는 린과 다시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무사한 걸 확인했어도 이렇게 보내면 돌아오기 전까지 또 불안할 것 같았다. 그래서 린을 붙잡아버린 레나는 스스로의 행동에 내심 당황했다. 레나가 홀로 난감해할 때, 린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일찍 발견되면 수상하겠지.”
“그렇……죠.”
린은 까마귀 탈을 쓴 채 언제 돌아갈지, 어떤 모습으로 돌아갈지 등 이런저런 궁리를 했다. 그러더니 무언가 결정한 듯 레나를 보며 물었다.
“시간이 꽤 남는데, 한번 가볼래?”
“어디를요?”
알 수 없는 제안에 레나가 물었다. 그러자 린이 웃었다. 까마귀의 탈 아래 입술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레나는 알 수 있었다. 린이 이제껏 보여준 것 중에 가장 환하게 웃고 있다는 걸. . . . 잠시 후, 까마귀는 둘이 되었다. 레나는 린과 똑같은 탈을 쓰고 어색한 기분으로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제국의 제복을 굳이 보여줄 필요는 없으니까.”
린은 그렇게 설명하며 레나의 망토를 여며주었다. 그러더니 연지를 꺼내 새끼손가락으로 레나의 입술까지 칠해주었다.
“화장도 잘하는 줄은 처음 알았네요.”
뜻밖의 능숙함에 레나가 어이없어하자 린은 빙긋 웃었다. 그는 조금 들떠 보였고, 실제로 그랬다. 레나가 자신의 비밀을 받아준 것이 기쁜 모양이었다. 분장이 끝나자 레나와 린은 첨탑에서 내려왔다. 그러자 많은 심장을 가진 왕의 망자들이 와서 그 주변을 둘러쌌다.
“괜찮아, 내가 다스리는 거야.”
레나가 반사적으로 경계하자 린이 안심시켰다. 말마따나 뱀들은 평소처럼 포악하게 굴지 않고 주변을 맴돌기만 했다. 게다가 그 중엔 가방 따위를 목에 매고 있는 녀석도 있었다.
“이게 린 씨의 권능인가요?”
레나의 물음에 린은 선선히 끄덕였다. 역대 동부공들은 황제에게 받은 힘의 실체를 철저히 숨겨왔다. 이유는 타인을 꼭두각시처럼 부리는 능력이 두려움과 경계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고, 권능을 발동하기 위한 조건이 까다롭기 때문이다. 동부공의 권능은 피를 매개로 한다. 그들은 자신의 피를 마신 자를 지배할 수 있고, 타인의 피를 마셔 생명을 채울 수 있다. 외부로 알려지면 골치 아픈 수준을 넘어 사사건건 의심을 사기 십상이라, 동부공들은 현명하게도 이 사실을 비밀로 했다.
“그런데 왜 전부 뱀이죠?”
“조용히 움직이기 좋거든.”
레나가 파충류 일색인 망자들을 보며 묻자 린이 대답했다.
“왠지 다스리기도 더 쉽고.”
실제로 뱀들은 다른 망자들과 달리 린의 지배를 낯설어하지 않았다. 그리고 최근 들어 린은 그 점을 의심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동부의 권능이 많은 심장을 가진 왕과 연관이 있다는 추측 때문이었다.
“……그렇군요.”
레나는 조금 망설이며 끄덕였다. 무언가 말하고 싶지만 참는 기색이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함께 말에 올랐다. 그리고 뱀들의 비호를 받으며 도시를 내달렸다. 레나는 까마귀 탈을 쓴 채 달리며 생각에 잠겼다. 어지간한 일은 이미 다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이 상황이 새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하늘은 아직 밝고 푸른데 도시 저편엔 거대하게 벌어진 균열 때문에 온통 붉음 일색이고, 저 끝엔 망자의 군대가 있고 다른 끝엔 제국의 군대가 있다. 이방인들은 그 가운데 여전히 살아가고 있으며, 레나 루벨은 그 모든 것을 등진 채 약혼자를 찾아왔다. 심란해진 레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앞에서 말을 모는 린의 등에 얼굴을 파묻었다. 마음을 너무 많이 내줬다. 착한 사람이니까 도와주고 싶다는 말도 이젠 핑계에 불과했다. 물론 린 이전에도 소중한 사람은 있었다. 떠나기 전에 모든 것을 남겨주고 싶은 유니라던가, 어쨌든 정든 남부공이라던가, 이따금 마음이 쓰이는 동생도 레나에겐 중요했다. 하지만 그들을 향한 감정과 린을 향한 감정은 질적으로 달랐다. 단지 연정을 느낄 수 있는 상대여서가 아니라, 그가 레나를 찾아 심연까지 내려오면서 레나의 굳은 신념 하나가 무너졌다. 세상은 결코 나를 돕지 않기에, 스스로 해내지 않으면 끝이라는 믿음이 그로 인해 흔들렸다. 그 와중에 린이 사라지자 레나는 두려움과 절망을 함께 느꼈다. 애써 버티다 그를 다시 만났을 땐 안심하기보다는 화가 났다. 왜 이렇게 제멋대로냐고 내 생각은 조금도 안 하냐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레나는 그 말을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 머잖아 자신이 할 일이 이것과 똑같기 때문이다.
―저는 아가씨가 하시는 일을 다 몰라요. 하지만 아가씨가 늘 떠날 궁리만 한다는 건 알아요.
―그냥, 같이 행복하게 살면 안 돼요?
―저랑 린 씨랑, 뭐 영감님도 껴달라면 껴주고요. 위험한 일이 다 끝나고, 그렇게 살면 안 돼요?
문득 유니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씩씩하다 못해 늘 위풍당당하던 아이가 어쩐 일로 눈치를 보며 이렇게 말했었다. 그때 나는 뭐라고 대답했지? 레나는 그때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긴 것을 후회했다. 레나는 옳은 길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자신의 방식에 의문을 느끼고 있었다. . . . 레나와 린은 폐허가 된 도시를 나와서도 한참 더 내달렸다. 얼마나 더 가야 하나 궁금해질 무렵, 울창한 숲이 보이기 시작했다.
“설마 여긴가요?”
그 숲을 보며 레나가 놀라서 물었다. 숲 자체는 평범했다. 다만 위치가 문제였다. 그 숲은 균열과 매우 가까웠다.
“맞아. 여기야.”
“너무 가깝지 않나요?”
레나가 균열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지대가 더 높기는 하지만, 득실대는 망자가 한눈에 보일 정도로 균열과 가까웠다. 만약 망자들이 몰려온다면 대응이고 자시고 도망부터 쳐야 할 판이었다.
“우리한테 더 위험한 건 망자보다 제국이니까.”
린은 담담히 대답했고 레나는 금세 수긍했다. 두 까마귀는 숲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숲길을 헤매길 또 한 시간, 우거진 나무와 수풀 사이로 너른 공간이 나타났다. 마을이었다.
‘저기가…….’
레나는 숲속에 지어진 낯선 양식의 집들을 놀랍게 바라보았다. 3년 전 이곳에 오게 된 사람들은 숲에 마을을 꾸려 지내고 있었다.
“아!”
그때 수풀 너머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의 동시에 활을 맨 소년이 수풀을 헤치고 달려 나왔다. 엔지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그 소년은 린처럼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검은색이었다. 소년은 까마귀 탈을 쓴 린을 아는 체하더니, 옆에 있던 레나를 보고 화들짝 놀라 무어라 크게 떠들었다. 그래서 레나는 조금 당황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레나는 소년이 구사하는 언어를 조금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레나가 얼떨떨하게 서 있자 린이 소년의 머리를 짚으며 대답했다. 린의 입에서도 낯선 언어가 흘러나왔고, 때문에 레나는 묘한 소외감을 느꼈다.
‘처음 봐. 린 씨가 다른 나라 말을 하는 거…….’
하지만 린의 입장에선 저 언어가 모국어겠지. 레나가 신기하고 생경한 기분으로 지켜보는 사이, 소년은 린과 대화를 마치고 씩씩하게 앞장섰다. 린도 따라오라고 손짓했고, 그래서 레나는 린과 나란히 걸으며 작게 물었다.
“방금 무슨 얘기 한 거예요?”
“왜 갑자기 분열했냐고 해서 조용히 하라고 했어.”
레나는 어이가 없어서 린을 쳐다봤다. 그러자 린은 여느 때보다 붉은 입술로 웃었다. 숲길을 헤치고 마을의 입구까지 내려가자 소년이 또 뭐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마당에 나와 있던 아이들이 레나와 린을 보고 와아 하며 달려왔다. 아이들은 앞서 소년이 그랬던 것처럼 까마귀 옷을 입은 레나를 보며 뭐라 뭐라 재잘댔다. 린은 자신을 둘러싼 아이들을 별로 살갑게 대하지 않았다. 쌀쌀맞다기보다는 서툴러 보였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들은 까마귀를 포위한 채 안기거나 매달리거나 막대기로 찔러댔다. 그러다 웬 아낙이 호통을 치자 아이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또 와르르 도망쳤다. 구름떼처럼 모여들고 안개처럼 사라진 아이들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는 와중에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나와 까마귀를 맞이했다. 레나는 린의 옆에 서서 조심스럽게 그들을 살펴보았다. 린의 말대로 그곳엔 여자도 있고 남자도 있었다. 아이도 있고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도 많았다. 제국에서 흔히 입는 옷차림을 한 사람도 있었지만, 단추가 아닌 매듭으로 여미는 낯선 옷을 입은 사람도 있었다. 또한 그들은 린을 환영하기도 했지만 경계하기도 했다. 환영하는 사람들은 가까이 다가와 이런저런 말을 건넸고, 경계하는 사람들은 먼발치서 그저 바라만 보았다. 그리고 큰 까마귀와 같이 나타난 작은 까마귀를 견제하는 소녀들도 제법 있었다. 레나도 그 소녀들을 견제하며 린의 곁에 가까이 섰다.
“웬일이오? 사람을 다 데려오고. 여자?”
아까 호통친 아낙이 동부의 언어로 물었다. 린은 고개만 끄덕여 답했다. 까마귀 탈을 쓴 말수 적은 남자가 으스스하고 꺼림칙할 만도 한데, 아낙은 개의치 않고 동네 총각 대하듯 그에게 되물었다.
“무슨 사이요?”
아낙의 물음에 린은 잠시 고민했다. 스스로도 의문이었다. 지금 우린 무슨 사이일까? 일단 확실한 건 동맹이지만 그건 공적인 관계다. 사적으로 친구는 진즉에 넘었지만 그렇다고 연인이라 하기엔 이르다. 린은 골똘히 생각하다가 레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고, 레나의 부리가 어느 한쪽을 찌르고 있는 걸 보았다. 린은 뭘 그렇게 쳐다보나 하고 시선을 따라갔다가 레나가 이곳 소녀들과 기 싸움 중인 것을 뒤늦게 눈치챘다. 그들을 번갈아 보던 린은, 동부의 언어로 단호히 말했다.
“약혼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