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설상가상2021.04.12.
“여기가 린 씨 집이에요?”
레나는 절벽 아래 지어진 집을 보며 물었다. 오두막집도 벽돌집도 아닌, 벽이 흙으로 칠해진 아담한 집이었다. 린은 동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레나를 마을 외곽으로 데려왔다. 마을과 꽤 떨어진 그곳에 고즈넉한 집이 있었다.
“집까지는 아니지만…… 내가 머무는 곳은 맞아. 사람들이 지어줬어.”
3년 전 동부 사람들을 이곳으로 대피시킨 후, 린은 그들을 몰래 지키면서도 접촉은 최대한 피했다. 괜한 위험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1년가량 지났을 때, 한 아낙이 그에게 외쳤다.
―또 보기만 하다 가시오? 그러지 말고 좀 앉았다 가오.
열 살 난 아들이 있는 그 아낙은 까마귀 탈을 쓴 사내를 그렇게 불러다 앉혔다. 그러곤 긴장한 린에게 말했다.
―무슨 쫓겨난 강아지도 아니고 찾아와 기웃대기만 하면 어쩌란 거요? 우리 모두 그쪽에 신세진 걸 알고 있으니 이제 오려면 입구로 오시오. 멀찍이서 보고만 가지 말고.
아낙은 그렇게 말하며 린에게 밥상을 차려주었다. 하지만 린은 그 밥을 먹지 못했다. 그때만 해도 까마귀의 탈이 얼굴을 모두 가리는 형태였기 때문이다.
“그때 가면 모양을 바꾼 거예요?”
레나가 반신반의하며 묻자 린이 입술만 드러난 요망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까마귀의 부리가 위아래로 흔들리자 레나는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귀여워.’
밥을 못 먹어서 탈을 바꿨다니. 항상 느끼는 거지만 이 남자는 귀엽고 짠한 구석이 있었다. 밥상 앞에서 한참 고민하다 탈을 바꿨을 린을 상상하자 레나는 조금 애잔하면서도 행복해졌다. 그렇게 생각한 건 그 아낙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까마귀가 기껏 차려준 밥상을 내버려둔 것에 혀를 차다가, 다음에 탈 모양이 변한 걸 보고 폭소했다. 동시에 슬쩍 드러난 까마귀의 턱이 자신의 아들 못지않게 어린 것을 알고는 형언하기 어려운 기분을 느꼈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까마귀를 의심하고 경계하던 사람들 중 일부가 마음을 연 것은, 이따금 찾아오는 그를 일원으로 받아들인 것도.
“상냥한 사람들이네요. 린 씨처럼.”
레나의 말에 린은 기쁜 듯 끄덕였다. 그 모습이 마치 자랑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아까는 뭐라고 한 거예요?”
레나가 린을 따라가며 물었다. 그러자 집의 문을 열던 린이 잠시 멈칫했다.
“사람들이 엄청 놀라던데…….”
“그냥 소개했어.”
“저를요? 뭐라고요?”
“내 약혼녀라고…….”
이젠 익숙한 호칭에 레나는 그렇구나 수긍하다가 한발 늦게 놀라서 린을 쳐다봤다.
“왜……요?”
“어쩌다 보니…….”
굳이 그럴 필요 없는 곳에서, 그것도 자기 고향 사람들에게 약혼녀라고 소개했다니. 두 사람은 잠시 침묵하며 까마귀 탈에 감사했다. 만약 탈을 쓰지 않았다면 그들은 서로에게 달아오른 낯빛을 들켰을 것이다.
“그래서 그랬나?”
“뭐가?”
“아까 거기 있던 아가씨들이요.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는 표정을 지어서 무슨 일인가 했는데.”
레나는 괜히 말을 돌리다가, 아까 소녀들과 기 싸움한 것을 떠올리고 실소했다. 어쩐지 깜짝 놀라서 하얗게 질리더라.
“알다가도 모를 일이네요. 까마귀 탈을 쓴 남자를 좋아할 수 있다니.”
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린을 째려봤다. 그 아가씨들이 설마 괜히 좋아했을까, 저 사람이 친절하게 굴었겠지. 레나는 린이 무자각의 탕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걸 괘씸히 여겨 노려보자, 눈치 빠른 린은 알아서 변명했다.
“그래서 약혼녀라고 했어.”
“그래서?”
“너 안심하라고.”
린은 그렇게 말하며 도망치듯 집 안으로 들어갔고, 레나는 얼떨떨하게 서서 그 말을 곱씹다가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이지 귀엽고 기특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레나는 행복하게 웃으며 린을 따라갔다. 아니, 따라가려고 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레나는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레나는 방금 그 말을 알아들었다. 제국어였기 때문이다. 숲길 저편, 조금씩 내리는 어둠 사이로 불빛이 보였다. 그리고 무언가를 잔뜩 짊어진 사람의 모습도 불그스름한 불빛 위에 함께 어렸다. 이윽고 레나와 린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예의 그 아낙과 소년이었다.
“밥이랑 이불이랑 가져왔습니다! 이건 우리 어머니 휘예요!”
소년이 독특한 말투로 옆에 선 아낙을 소개했다. 아낙, 휘가 소년에게 또 무어라 중얼댔고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제국어로 말했다.
“어머니가 제국 사람 맞는지 물어보래요!”
갑작스러운 물음에 레나는 당황했다. 그래서 아무 말 없이 서 있자 소년이 다시 소리쳤다.
“딴 게 아니라 음식이 매울 수 있어서 그런대요!”
소년이 설명할 때, 휘는 집 밖에 있는 너른 마루에 들고 있던 쟁반을 내려놓았다. 그 위에 얹은 싸개를 걷자 큼직한 그릇에 담긴 요리가 보였다. 아주 가느다란 면 요리였다.
‘파스타……?’
레나는 평소 보던 것과 조금 다른 음식과 휘라는 여인을 번갈아 보았다. 휘는 순수한 호의를 가진 듯도 같고, 레나가 제국인인지 떠보려 하는 듯도 싶었다. 레나가 침묵하자 린이 동부어로 대신 대답했다.
“믿을 만한 사람이야.”
“아무렴 믿지도 못할 사람을 데려왔을까. 저게 매운 거고 이게 좀 덜하니까 알아서 드시오. 영 못 먹겠으면 물에 씻어주던가. 그리고 혹시 몰라 이불 가져왔는데 오늘 자고 가오?”
휘의 물음에 린은 하늘을 보았다. 이미 땅거미가 진 하늘은 밤이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휘는 알았다며 아들이 이고 있던 이불을 들고 성큼성큼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휘의 아들도 엄마를 따라 바쁘게 움직였다. 두 사람이 집 안으로 들어가자 레나는 린에게 방금 무슨 말을 했는지 물었다. 린이 있는 그대로 전하자 레나는 또 한 번 놀랐다. 용병 생활을 했던, 그리고 제국의 피폐함을 익히 보아온 레나는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얼마나 각박해지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숲에 숨어 지내면서 이런 인심이라니, 그들을 보고 있자니 린의 여상한 친절이 어디서 왔는지도 알 것 같았다.
“배고프지?”
휘가 들어간 사이, 린은 레나를 마루에 앉혔다. 그러곤 쟁반에 놓인 그릇과 알 수 없는 도구를 레나에게 건네주었다. 레나는 얼떨결에 받아놓고 그 가느다란 막대기 두 짝을 보며 물었다.
“이게 뭐죠……?”
“아, 처음 보는 거야?”
린은 그렇게 말하며 막대 두 개를 한 손에 쥐었다. 그러더니 그걸 집게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떻게 한 거예요?”
“동부에서 쓰는 식기야. 포크랑 용도는 비슷한데…….”
린은 레나의 손에 그 생소한 도구를 손수 쥐여주었다. 그러곤 손가락을 움직여보라며 이런저런 조언을 했다. 하지만 결과는 초라했다. 레나의 손에선 막대가 연신 흘러내렸고, 겨우 방법을 익힌 듯싶다가도 본격적으로 움직이면 삐끗하고 어긋나기 일쑤였다. 연이은 실패에 레나가 억울한 투로 말했다.
“동부에서는 이렇게 복잡한 도구를 조작할 줄 아는 사람만 식사할 수 있는 거예요?”
“익숙해지면 별로 어렵진 않은데…….”
레나는 난감한 기분으로 쓸 수 없는 도구와 그릇에 가득한 얇은 면을 번갈아 보았다. 파스타처럼 말아보려고 휘저어봤지만 역시나 건져지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러자 지켜보던 린이 레나의 도구를 가져가며 마치 아기에게 하듯 음식을 떠서 레나에게 내밀었다. 레나는 코앞까지 온 음식을 보며 조금 기가 막혔다. 남이 뭔가를 먹여 주는 건 아주 어릴 때 이후 처음이었다. 꽤 민망한 상황이지만 까마귀 탈을 쓰고 있어서 조금 뻔뻔해질 수 있었다. 그래서 레나는 얌전히 입을 벌려 린이 준 것을 받아먹었다.
“음……?”
레나는 부드러운 면을 씹다가 눈을 반짝 떴다. 처음 맛보는 소스는 약간 짭짤하고도 매웠다. 아직 생소하긴 한데, 상당히 레나의 취향이었다.
“매워?”
“아뇨, 맛있어요.”
“다행이다.”
린은 안심하며 다시금 면을 들어 레나에게 먹여주었다. 레나는 사양하지 않고 받아먹었고, 그러다 입가에 소스가 살짝 묻었다. 린은 먹여 주는 사람답게 묻은 것도 손끝으로 금방 닦아주었다. 그러더니 손에 묻은 소스를 제 입으로 가져가 핥았다.
“린 씨는 정말…….”
“응?”
레나가 그걸 보며 신음하자 린은 까닭을 몰라 고개를 기울였다. 정말 무심코 한 행동인 모양이었다. 레나는 린을 밖에 내놓으면 안 될 자식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가 다시 떠주는 음식을 향해 입을 벌렸다.
“허이고, 남세스러워라.”
그때 휘가 집에서 나왔고, 레나와 린은 화들짝 놀라 서로 떨어졌다. 두 사람이 잘못하다 들킨 사람처럼 긴장하자 이미 그 시절을 겪어 본 중년 여인은 다 안다는 듯 끄덕였다.
“요 깔아놨소. 불 땠으니까 금방 따습게 될 거요. 진이가 물 긷고 있으니 이따 물 덥히면 목간하고 쉬시오.”
휘는 그렇게 말하며 휘적휘적 걸어갔고, 레나와 린은 눈치를 보다가 다시 예의 방식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들은 배가 고팠고 음식은 맛있었으며 레나는 낯선 도구 사용에 서툴렀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서로 먹여 주고 받아먹는 한 쌍의 까마귀는 기괴한 외형에도 불구하고 제법 훈훈하게 보였다. 하지만 마냥 좋은 건 그때까지였다. 잠시 후 휘의 아들이 물을 다 길었다며 집에 들어가도 된다고 말했다. 마침 식사를 마친 터라, 그리고 이 까마귀 가면이 슬슬 답답하기도 해서 린과 레나는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한발 먼저 집에 들어간 린은 아까 자신의 발언을 후회했다. 방에는 딱 한 채의 이불이 놓여 있었고, 설상가상 베개 두 개는 정답게 붙어 있었다. 그것은 큰 까마귀가 작은 까마귀를 약혼녀라고 말해버린 결과였다.
. . .
“어떡할까?”
까마귀 탈을 벗은 린은 우선 레나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래서 레나는 그가 제법 용감해졌다고 생각했다. 평소라면 나가서 잔다며 알아서 내외했을 텐데. 레나는 그의 변화를 재미있게 여기며 바닥에 깔린 이불을 바라보았다. 이것도 레나에겐 조금 묘한 형태였다. 침대 대신 바닥에 두꺼운 이불을 깔다니. 그래서인지 이불의 두께가 유독 도톰했는데, 그걸 보니 더 가져다 달라고 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이 깊은 숲속에 물자가 넉넉할 리는 없으니 이마저도 애써 내어준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레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괜찮아요.”
“괜찮아?”
“네, 남자들하고 부대껴 자는 거 익숙하거든요.”
“……그게 왜 익숙해?”
린이 충격받은 얼굴로 되물었고, 레나는 그만 실소를 터트렸다.
“용병 시절에요.”
“아.”
어렴풋이 들었다. 레나가 남부 침묵 전쟁에 용병으로 참전했다는 걸. 린이 이해하는 사이 레나도 까마귀 탈을 벗었다. 종일 탈을 쓴 탓에 상태가 엉망이었다. 두꺼운 깃털 망토 때문에 땀도 많이 나서, 레나는 아까 소년이 제국어로 한 말을 떠올리고 말했다.
“먼저 씻어도 되죠?”
린은 몹시 부적절한 발언을 들은 사람처럼 놀라서 레나를 쳐다보았다. 레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를 마주 보았고, 린도 이내 벌어졌던 입을 도로 다물며 끄덕였다. 쓸데없이 결연한 긍정이었다. . . . 까마귀의 작은 집은 의외로 갖출 것을 다 갖추고 있었다. 린이 없는 날이 많을 텐데, 사람들이 이래저래 들여다보며 살펴준 모양이었다. 목욕을 마친 레나는 휘가 두고 간 커다란 가운 같은 옷을 입었다. 그러고 돌아가 보니 린도 비슷한 가운으로 갈아입은 채 앉아 있었다. 설마 씻지도 않고 옷을 갈아입었나 싶어 살펴보니 그는 어디서 이미 씻은 듯 머리가 젖어 있었다.
“씻을 곳이 또 있었어요?”
“어…….”
린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실은 레나가 씻는 동안 가만히 기다리는 게 불편해 밖에서 찬물로 씻은 거지만, 그걸 굳이 설명하진 않았다. 레나는 그 모습을 빤히 보다가 아직 덜 마른 머리를 쓸어 넘기며 린의 옆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