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가능성2021.04.15.
레나가 곁에 와 앉았지만 린은 말이 없었다. 그래서 레나는 그의 침묵하는 등을 바라보다가 넌지시 속삭였다.
“금방 어두워졌네요.”
“……숲이니까.”
“피곤하죠? 오늘 많이 달렸잖아요.”
“조금.”
어렵사리 대답하는 린의 목소리는 필요 이상으로 잠겨 있었다. 덕분에 분위기도 점점 더 가라앉았고, 레나는 그걸 풀어보려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왜 그렇게 긴장해요. 혹시 야한 생각 하고 있어요?”
레나가 기대한 건 화들짝 놀라서 부정하는 린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돌아온 건 죄책감 어린 눈빛의 린이었다. 매도당하고도 잠잠한 린을 보며 레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되물었다.
“설마 진짜?”
“아니.”
린은 그제야 느리게 부정했다. 그러더니 고민하다 덧붙였다.
“……걱정한 거야. 혹시 다치게 할까 봐.”
다치게 할까 봐. 레나는 그 말을 잠시 곱씹더니 이내 티 없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게 결국 야한 생각 아닌가요?”
“그건…….”
린은 그만 말문이 막혔다. 엄밀히 따지면 레나의 말이 맞다. 지금 린은 레나를 다치게 할까 봐 긴장한 상태였고, 그가 레나를 해치는 건 관능적인 감각을 전제로 했다. 레나가 그걸 콕 집어냈지만 린은 여느 때처럼 창피해하지 않았다. 그것도 여유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사실 그는 레나가 하얀 가운 차림으로 나타났을 때부터 심각했다. 어둡고 고요한 가운데 단둘이다. 거리는 가까운데 갖춰 입은 옷의 개수는 턱없이 부족했다. 막 씻고 나온 레나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무방비해 보였고, 린은 그것을 초연히 대할 자신이 없었다. 심지어 일렁이는 등불까지 그의 마음을 어수선하게 흔들었다. 그 순간 린이 느낀 것은 평범한 애욕이 아니라 두려움이었다. 그는 이런 분위기가 어떤 상황을 만드는지 익히 알고 있었다. 그가 겪어온 연인들은 이런 순간이 오면 기다렸다는 듯 다가와 그를 시험했다. 그러곤 늘 처참한 결말에 닿았다. 그때를 떠올린 린은 문득 두려워졌다.
“……역시 따로 자는 게 나을 것 같아.”
주저하던 린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는 잠깐 용기가 났는데 막상 닥쳐오니 자신이 없어졌다. 그에게 레나는 너무 예쁜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에게 잘못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자신의 음흉한 속내를 들키는 건 더더욱 싫었다. 그래서 일어나려 했지만, 린은 자리를 뜨지 못했다.
“어딜 가려고요.”
레나가 그를 붙잡아 도로 앉혔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린은 털썩 주저앉았고, 그 다음엔 심장이 쿵 떨어져 내렸다. 린을 잡아당긴 레나가 그대로 그의 등에 얼굴을 묻은 탓이었다.
“레나……?”
“가지 마요. 조금 난폭해져도 괜찮으니까.”
린이 신음하자 레나가 자그마하게 속삭였다. 그건 배려나 허락이 아니라 요구였다. 아니, 차라리 부탁에 더 가까웠다. 레나에겐 린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감각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가 이대로 곁에 있기를 바랐다. 그래야 그때 느낀 감정들이 조금이나마 희석될 것 같았다.
“여기 있어요.”
레나의 간곡한 청에 린은 낮게 신음했다. 곁에 있고 싶기는 그도 마찬가지였다. 린은 살며시 기대온 레나를 느끼며 낮게 되물었다.
“정말 괜찮아?”
“괜찮아요.”
린은 자신의 어깨에 놓인 레나의 손을 잡으며 몸을 돌렸다. 그러곤 이미 충분히 가까운 거리를 좁히려고 몸을 기울였다. 그때 레나가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어차피 다치는 건 린 씨인걸요. 하지만 혹시 그런 일이 생겨도 너무 심하겐 안 때릴 테니까 가지 말고 여기 있어요.”
린은 기울이던 몸을 비틀어 원래 그러려고 했던 것처럼 얌전히 앉았다. 레나의 뺨을 감싸려던 손도 침착하게 궤도를 이탈해 바닥을 짚었다. 레나가 말한 괜찮음은 린이 생각한 괜찮음과 범주가 아주 달랐고, 행동하기 직전에 그걸 깨달은 린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경멸했다. 나는 파렴치. 멍청하기 짝이 없는 파렴치.
자칫 크게 실수할뻔한 린의 심장은 직전과 다른 의미로 두근댔다. 하지만 그걸 까맣게 모르는 레나는 그저 불안한 듯 되물었다.
“안 갈 거죠?”
양심의 가책을 느낀 린은 결국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레나가 안심하는 모습에 그의 가책은 더더욱 짙어졌다. 결국 린은 이제 아무렴 좋다는 심정으로 바닥에 깔린 이불 속에 들어가 누웠다. 아니, 이불 속이 아니라 이불 끄트머리에 가련히 몸을 웅크렸다. 그 노골적인 내외에 레나는 어이가 없어 중얼댔다.
“……그런데 꼭 그래야겠어요?”
“맞기 싫어…….”
린은 궁색하게 변명하며 몸과 마음을 더 꼭 여몄다.
“좀 들어와요, 이불 밖으로 나가면 춥잖아요.”
“나는 추워도 싸.”
“뭔 소리야…….”
레나는 린이 만든 거리에 불만스러워하며 그의 옆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레나가 부스럭대며 눕는 동안에도 린에겐 번뇌가 가득했지만, 레나는 그 사실을 알 수 없었다. 결국 레나와 린은 팔 하나 거리를 두고 나란히 누웠다. 푹신한 이불 속에 누우니 금방 잠이 몰려왔다. 종일 움직인 탓에 피곤하기도 했고, 바닥도 따뜻해서 몸은 금방 노곤해졌다. 하지만 레나는 눈을 감는 대신 린의 널따란 등을 바라보았다. 왠지 이대로 잠들고 싶지 않았다. 아까웠다. 그래서 레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팠어요?”
“응?”
“낮에, 내가 때린 거.”
“음…….”
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차마 아니라고 못 할 만큼 아팠다는 뜻이다. 그래서 레나는 잘못을 인정하고 겸손히 사과했다.
“미안해요. 사정도 모르고 화내서.”
“……사과 안 해도 돼.”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솔직히 고백했다.
“사실 기뻤어. 찾아줘서.”
그리고 지금도 기쁘다. 붙잡아줘서. 같이 있자고 해줘서. 린의 담담한 목소리에 레나는 어쩐지 마음이 먹먹해졌다. 찾아줘서 기뻤다니. 레나는 그 표현이 낯설지 않았다. 그래서 깨달았다. 당신도 늘 기다린 사람이라는 걸. 아무도 올 리 없는 걸 알면서도, 실망하고 체념하면서도 계속 기다렸다는 걸.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도리는 없다.
“그동안 힘들지 않았어요?”
레나가 넘치는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물었다. 그래서 린은 한숨처럼 웃었다. 힘들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린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괜찮아. 내가 선택한 일이니까.”
선택. 벼랑 끝에 내몰려 뛰어내리는 것도 과연 선택일까?
“린 씨는 꿈이 뭐예요?”
“꿈?”
“혹시 가능하다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아니.”
“왜요?”
“거긴 네가 없잖아.”
린의 대답은 쉬웠다. 하지만 가볍지는 않았다. 무겁게 다가온 진심이 레나를 더 아프게 만들었다. 레나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끝이 린의 등에 닿기 전에 멈췄다.
“……우리한테 정말 가능성이 있을까요?”
레나는 저도 모르게 물었다.
“함께 있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우리한테 뭐가 가능하죠?”
정말 무심코 물었다. 대답을 얻기 위해서도 아니고, 한탄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계속 곱씹던 생각이 흘러넘쳐 질문이 되었다. 가능성. 그건 예전에 린이 한 말이다. 마음을 감추는 레나에게 그는 아깝다고 했다. 레나의 물음에 돌아누웠던 린이 비로소 레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어둠 속에서 찾아낸 레나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속삭이듯 대답했다.
“서로를 찾는 게 가능하겠지. 상대가 어디에 있든지.”
서로를 찾아내는 것. 설령 까마귀 탈을 쓰고 있어도, 심지어 심연에 가라앉아도 기어이 달려가 만나는 것. 그래, 그런 가능성이라면 모든 것을 걸어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 레나는 린의 대답을 곱씹으며 눈을 감았다. 밖에서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달빛은 맑고 공기마저 달았다. 달콤한 봄밤, 아늑한 이불 속, 그리고 옆 사람의 숨소리. 이 모든 것에 레나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어제도 밤은 있었다. 하지만 그때 레나는 혼자였고 한 사람을 처절히 찾고 있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몰라 애태웠다. 그 사람이 지금은 곁에 누워 고른 숨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레나는 이 순간이 기적 같아, 넘치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린의 뺨을 쓸었다. 동시에 마음이 술렁여 잠긴 목소리로 속삭였다.
“전에 물어봤죠? 내가 린 씨를 좋아하는지.”
“……응.”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
“왜……?”
“함께 있을 수 없으니까.”
레나의 담담한 고백에 린의 시선이 흔들렸다. 상처 입은 얼굴이었다. 동시에 모든 것을 이미 이해한 얼굴이었다. 그래서 레나는 쓰게 웃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그게 린 씨 때문은 아니에요.”
진심이었다. 연인을 만지지 못하는 린의 상황은 레나에게 별로 큰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당신을 더 꽉 안아버리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차마 그러지 못하는 건, 그게 책임지지 못 할 일이어서. 당신을 길들이고 떠나는 건 안 된다고 생각해서.
“……나는 돌아가야 해요.”
“어디로?”
“무덤으로.”
처음이다. 이 이야기를 입 밖에 내는 건. 원래는 마지막까지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래서 할 일이 끝나면 아무도 모르게 사라질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젠 그럴 수 없게 되었다. 린이 사라졌을 때 느낀 상실감이 너무 뼈아파 차마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레나는 마치 고해성사하듯 곁에 누운 사람에게 말했다.
“왜냐하면, 이미 그곳에 속했거든요.”
“무슨 소리야?”
린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그에게 닿은 손끝에서도 동요가 느껴졌다. 그는 레나가 떠난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사람처럼, 그래서 모든 것을 빼앗긴 사람처럼 되물었다. 그래서 레나는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별로 특별한 얘긴 아니에요. 지금 자신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요. 시간을 거스른 황제부터 죽음의 경계를 넘은 망자들, 제국이 삼켜버린 나라의 사람들도.”
가당치도 않게 성직자 흉내를 내는 클라비스나 사냥꾼이었던 내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다 원래 있을 곳이 따로 있죠. 나도 마찬가지예요.”
“그게 무덤이라고?”
린의 물음에 레나는 잠자코 웃었다. 그 어떤 말보다 짙은 긍정이었다. 그래서 린은 조바심이 났다.
“어째서? 후작을 만나러 돌아온 거 아니었어?”
그게 복수인지 청산인지는 모르겠지만, 린은 레나의 목적이 아버지인 후작이라고 생각했다. 린의 오해에 레나는 여전히 웃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를 만나러 온 건 맞아요. 하지만 그건 목적이 아니라 과정이에요. 제가 원하는 건 처음부터 하나였어요.”
존재하는 것. 나를, 그리고 우리를 지워낸 세상에 다시 말하는 것. 알리는 것, 일깨우고 각인시키는 것. 하지만 이렇게 말해본들 지금의 당신은 이해하지 못하겠지. 레나 루벨이 무엇을 보고 겪었는지 모르는 이상은.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전부 해줘.”
“너무 긴 이야기인데.”
“듣고 싶어.”
린은 자신의 뺨에 놓인 레나의 손에 손을 포갰다. 그 따스함을 거스를 수 없어 레나는 자그마하게 속삭였다.
“그럼 들어줄래요? 내 얘기.”
이제껏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이야기. 이걸 당신에게 전하는 것도 어쩌면 가능성일지 모른다. 레나는 린이 말한 가능성에 기대,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