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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화. 레나 루벨의 비망 (101/208)

101화. 레나 루벨의 비망2021.04.19.

나는 묻고 싶습니다. 당신이 오늘 눈을 떴을 때 평안했는지. 눈 부신 햇살이나 감미로운 빗소리, 혹은 눈의 고요함을 사랑스럽게 여겼는지. 일용할 양식에 감사하며 웃을 수 있었는지. 오가며 만난 사람들은 상냥했는지. 혹시 슬픈 마음으로 혼자인 적은 없었는지. 고된 하루를 마치고 다정한 위로를 얻었는지. 이 세상에 미움보다 사랑이 가득함을 느꼈는지. 그래서 내일도 살아갈 힘을 얻었는지. 나는 오늘도 그저 묻고만 싶습니다. . . . 레나는 말했다. 이제껏 자신이 겪어온 일을 처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았다. 린은 들었다. 레나가 하는 이야기를, 구절마다 놀람을 참고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다. 그로써 그는 알게 되었다. 레나가 후작과 클라비스의 제물이 되어 무덤에 떨어진 일과 그곳에서 레지나라는 존재를 만난 일. 이후 다시 살아가고자 하였으나 뱀 왕의 표적이 된 것과 그로써 결국 싸우게 된 것. 그리고 목숨을 거는 일에 익숙해진 후에 아버지를 죽이기로 결심한 것까지. 그 긴 이야기를 하는 동안 레나의 얼굴은 여느 때처럼 고요했다. 린은 그게 더 슬프게 느껴졌지만 괜한 위로를 하는 대신 레나가 이야기를 다 할 수 있게 기다렸다. 그래서 레나는 안심하며, 그에게 남은 이야기를 마저 털어놓았다. ***

16562819784267.jpg“죽일 거야. 날 팔아넘긴 인간도, 여기 떨어트린 인간도.”

레나가 이런 결심을 한 건 많은 심장을 가진 왕을 몇 번이나 찢어버린 직후였다. 그때 레나는 처음으로 강자의 기분을 이해했다. 포식자의 입장을 깨닫고 경험했다. 그러니 더 이상 숨죽일 필요가 없었다. 너희는 죽어 마땅한 자들. 그러니 죽일 것이다. 백작이든 공작이든, 어차피 나보다는 약할 테니까. 레나가 차갑게 이를 갈 때, 그를 막아선 건 레지나였다. 하지만 레지나의 설득은 통하지 않았고, 레나는 그날 처음으로 레지나에게 덤볐다. 뚫고 지나가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싸웠다. 레나의 공격은 갓 벼린 칼처럼 예리했지만, 레지나의 무겁게 쌓인 경험을 베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수십 번을 충돌한 끝에 레지나의 참격이 결국 레나를 상처입혔다. 하지만 레나의 어깨가 찢겨 피가 흐를 때, 레나보다 더 괴로워한 건 레지나였다. 그럼에도 레지나는 멈추지 않았고 결국 무릎이 꺾인 레나는 입술을 씹으며 신음했다.

16562819784267.jpg“왜 막는 거야…….”

아비라는 자는 딸을 팔고 어미라는 자는 그것을 방관했다. 저항도 반항도 할 줄 모르던, 지켜줘도 모자랄 딸을 지옥으로 떠밀었다. 어떤 귀족은 그걸 좋다고 데려가 조롱하고 비웃으며 결국 무덤으로 밀어 넣었다. 그뿐인가? 어떤 남자는 헤매는 여자애를 사창가에 넘기고 어떤 여자는 그걸 또 이용하겠다며 감금했다. 그러다 싸그리 타죽었다. 이런 세상이다. 레나 루벨이 겪은 것만 이 정도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까지 더하면 한도 끝도 없다. 저곳에서는 남의 멀쩡한 나라를 찢어발기고 이곳에서는 사람을 가축처럼 거래하며 위에서는 오늘도 하하호호 금화를 튕기지만, 밑에서는 시궁창 쥐라도 서로 먹겠다며 싸운다. 그 와중에 죽은 자들은 꾸역꾸역 밀려와 제 후손들을 도륙한다. 제국은 미쳤고 세상은 빌어먹으며 돌아간다. 그런데 왜. 이미 다들 그렇게 구더기처럼 사는데 왜.

16562819784267.jpg“왜 나만 못 하게 하는데!”

레나는 레지나를 원망하며 소리쳤다. 아버지를 죽이기로 결심한 그때, 레나는 아직 열세 살이었다.

16562819784282.jpg―이대로라면 네가 망가질 테니까.

16562819784267.jpg“아니, 이제 망가지는 건 그쪽들이야. 난 이미 이 꼴이니까!”

16562819784282.jpg―그 길을 선택한 자의 말로를 안다. 널 그렇게 만들 순 없어.

16562819784267.jpg“네가 뭔데, 대체 무슨 자격으로……!”

열셋, 그 어린 레나의 분노 속에는 혼란이 가득했다. 그의 외침은 단지 이유를 따지는 말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곳에는 여전히 애정을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레나의 분노는 사실 부탁이었다. 무너져가는 자신을 잡아달라는 본능적인 간청, 이대로는 정말 죽을 것 같으니 어떻게 좀 해달라는 애원. 잔뜩 금이 간 마음을 스승으로서, 친구로서, 그리고 나를 아끼는 유일한 사람으로서 채워달라는 간절한 호소였다. 레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만약 그때 레지나가 다른 말을 했으면 어땠을까? 그저 그런 훈계로, 아주 진부한 잔소리로 나를 말려줬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하지만 그날 레지나는 레나의 간절함을 외면했다. 레나가 진심으로 원하는 게 뭔지 알면서도 다정한 거짓말보다 잔혹한 진실을 택했다. 입바른 말을 하기엔, 그가 너무나 고결한 까닭이었다.

16562819784282.jpg―내 책임이니까.

레나의 연이은 추궁에 레지나는 결국 고백했다.

16562819784267.jpg“뭐……?”

16562819784282.jpg―네가 나락까지 떨어진 이유가 다 내 탓이니까.

레지나의 자백에 레나는 일순 화내던 것도 잊었다. 분노가 차츰 가라앉으며 마음 한구석에 진득한 불안이 피어올랐다. 따지고 싶은 마음보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레나가 얼어붙자 레지나가 말을 이었다.

16562819784282.jpg―내게 자격 따위는 없다. 책임만 있을 뿐.

16562819784267.jpg“그게 무슨 소리야…….”

레나는 차라리 레지나의 입을 막고 싶었다. 그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는 아직 모르지만, 어쩐지 아버지의 서재에 섰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애당초 레나가 원하는 건 진실 따위가 아니었다. 그가 원한 건 그저 사소한 위로, 그저 잠시 기댈 사람이었다. 설마 너도 나를 배신하는 거야? 레나는 떨리는 눈으로 레지나에게 물었다. 레지나는 그것을 외면한 채, 깨진 입술로 말했다.

16562819784282.jpg―이젠 네게도 알려줘야 맞겠지. 내가 누군지 정도는.

충분히 강해졌으니까, 이젠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으니까. 더는 네 앞에서 보호자인 척 위선을 떨어서는 안 되겠지. 고결한 왕은 자신의 죄에 짓눌려 눈앞의 여린 소녀에게 고백했다.

16562819784282.jpg―나는 레지나 그라샤. 널 이곳에 떨어트린 자의 누이이고, 그자가 널 추락시킨 이유이자 목적이며, 네 불행이 시작된 근원이다.

마치 선을 긋듯, 나는 네 스승이나 친구가 될 자격 따윈 없다는 듯이.

16562819784282.jpg―그리고 니힐 그라샤라는 이름으로 너희를 다스리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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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562819813192.jpg“……니힐이라고?”

조용히 경청하던 린이 경악하며 되물었다. 그는 누워 있을 수도 없는 듯 일어나 앉았고, 레나는 그 심정을 이해하며 함께 몸을 일으켰다.

16562819813192.jpg“아까, 레지나는 용서받지 못한 왕이라고…….”

린은 레나가 앞서 한 이야기를 떠올리며 신음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는 베일에 싸여 있던 용서 받지 못한 왕의 이야기에 이채로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존재가 니힐이라니. 제국의 황제가 망자의 왕이라니……. 린이 무너질 것 같은 눈으로 바라보자 레나는 묵묵히 끄덕였다. 그리고 린은 레나의 대답에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분명 충격적인 이야기인데 받아들이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의심스럽지도, 거부감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어긋나 달그락대던 조각이 비로소 제자리를 찾아 맞물리는 기분이었다.

16562819813192.jpg“그럼 니힐은…….”

린은 이제껏 자신이 품었던 의문이 한데 묶이는 것을 느끼며,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16562819813192.jpg“망자인 건가?”

린의 물음에 레나는 재차 끄덕였다. 그에 린은 눈을 감으며 탄식했다. 현기증 같은 아득함이 밀려와 그를 덮쳤다. 니힐이 망자라면 지금까지 제국이 해온 일은, 망자들을 막아온 일은 대체 어떤 의미를 갖는 거지?

16562819784267.jpg“망자의 성으로 들어가는 방법, 기억해요?”

고뇌하는 린에게 레나가 불현듯 물었다.

16562819784267.jpg“왕의 이름을 부르면 그들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했죠.”

왕의 이름은 왕의 성으로 들어가는 열쇠. 레나는 그렇게 첼레스테의 성을 정복했고 히엠스 그라샤를 쓰러트렸다.

16562819784267.jpg“처음 무덤에 떨어졌을 때 지상으로 다시 돌아온 방법도 그 방법이었어요.”

16562819813192.jpg“그 방법?”

16562819784267.jpg“무덤에서 레지나는 작은 문을 만들어줬어요. 그리고 자기 이름을 불러보라고 했죠.”

그때 레나는 영문도 모른 채 레지나의 말을 따랐다. 레지나가 만든 작은 성에 대고 주인의 이름을 속삭이자, 레나는 그라샤 제국으로 돌아왔다. 그곳이 용서받지 못한 왕, 레지나 그라샤의 영역인 까닭이었다. 쐐기를 박는 설명에 린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16562819813192.jpg“니힐이 망자의 왕이라면…… 공작들이 받은 권능은 뭐지?”

16562819784267.jpg“정확한 건 저도 모르지만 추측은 하고 있어요. 린 씨도 눈치채지 않았나요? 그 권능이 무언가를 닮았다는 걸.”

린은 할 말을 잃고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그러더니 눈을 가린 채 중얼댔다.

16562819813192.jpg“……황제는 널 못 알아봤어.”

16562819784267.jpg“레지나와 니힐은 같은 사람이지만 오래전에 둘로 갈라졌어요. 그래서 레지나가 한 일을 니힐은 모르고 니힐이 한 일도 레지나는 몰라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개념이지만 의심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죽은 자가 살아서 돌아다니는 판에 더 이상 불가능한 일도 없었다. 린은 눈을 감은 채 잠시 괴로움을 감내했다. 무덤에서 본 나자의 모습이 떠오른 탓이었다.

16562819784267.jpg“많이 놀랐죠?”

레나가 연신 마른세수하는 린을 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린은 차마 아니라고 할 수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비밀 자체도 놀랍지만 레나가 그걸 혼자 떠안고 있었다는 것도 상당한 충격이었다. 그래서 린은 한참을 탄식하다가 아까 레나가 한 말을 떠올리고 되물었다.

16562819813192.jpg“그리고 널 떨어트린 자의 누이라면…….”

16562819784267.jpg“클라비스 시렌치움 그라샤요.”

레나는 린이 그걸 물어볼 줄 알았다는 듯 태연히 대답했다.

16562819784267.jpg“그 사람은 레지나의 친동생이에요.”

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쓰게 웃었다. 레나는 클라비스가 정말 싫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치지 않는 이유는, 그가 레지나의 동생이기 때문이었다. *** 레나는 레지나와 처음 만났을 때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16562819784282.jpg[너도 그 녀석이 보냈구나.]

16562819784282.jpg[대신 사과하마. 아니, 대신이랄 것도 없지. 사과하마. 네가 겪은 모든 일을.]

경황이 없어 지나친 말이다. 실은 애써 외면한 말이기도 했다.

16562819784267.jpg“지금 그런 말을 하면 어쩌라는 거야…….”

그걸 자비 없이 직면하게 된 레나는 입술을 떨며 신음했다.

16562819784267.jpg“전부 네 탓이니까 너한테 복수하라고?”

16562819784282.jpg―네가 원한다면.

레지나의 겸허한, 어쩌면 냉정한 대답에 레나는 하얗게 질렸다. 레나가 원한 건 이게 아니었다. 레나에게 필요한 건 악인을 함께 비난해줄 내 편이지 마지막 지지자마저 실은 나도 그런 악당이라고 고백하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걸 이렇게 떠넘기듯 폭로해버리면, 나더러 어쩌라는 거지? 차라리 용서해달라는 말이라도 하면 좀 나았을까? 하지만 레지나는 이미 심판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말이 없었고, 그로써 심판자가 된 레나는 이 냉혹한 단절에 몸서리칠 수밖에 없었다.

16562819784267.jpg“……그럼 날 도운 건 뭐였어?”

그렇게 묻는 레나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16562819784267.jpg“속죄였어? 자기만족이었어? 죄책감을 표현할 수단이었어?”

레나는 거칠게 물으면서도 실낱같은 기대를 품고 레지나를 바라보았다. 힘겹게, 그리고 간절하게 레지나의 자비를 구했다. 하지만 레지나는 끝내 자신의 신념을 선택했다.

16562819784282.jpg―부정하지 않겠다.

그 한마디로 가까스로 버티던 소녀의 세상이 부서졌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무덤이 갈라지며 움켜쥐는 손들이 쏟아져나왔다.

16562819784282.jpg―레나!

차가운 손이 레나를 휘감자 레지나가 소리쳤다. 하지만 레나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덮치는 손길에 속절없이 삼켜졌다. 레지나가 뭐라고 소리치는 것도 같았지만 이제는 아무렴 상관없었다. 레지나는 레나가 세상에 품은 마지막 신뢰였다. 그마저 잃어버린 아이는 아득히 절망하며 무덤보다 더 깊은 공허 속으로 추락했다. 빛도 소리도 없는 곳으로 끌려가는 동안 레나는 버릇처럼 시를 외웠다. 나는 묻고 싶습니다. 당신이 오늘 눈을 떴을 때 평안했는지. 눈 부신 햇살이나 감미로운 빗소리, 혹은 눈의 고요함을 사랑스럽게 여겼는지. 일용할 양식에 감사하며 웃을 수 있었는지. 오가며 만난 사람들은 상냥했는지. 혹시 슬픈 마음으로 혼자인 적은 없었는지. 고된 하루를 마치고 다정한 위로를 얻었는지. 이 세상에 미움보다 사랑이 가득함을 느꼈는지. 그래서 내일도 살아갈 힘을 얻었는지. 나는 오늘도 그저 묻고만 싶습니다. 공허하게 시를 외우던 레나는 저도 모르게 생각했다. 만약 누군가가 내게 이렇게 물어보면, 생긋 웃으며 죽어버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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