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파멸을 바란 이2021.04.22.
묵묵히 이야기를 듣던 린은 손을 뻗어 레나의 뺨을 쓰다듬었다. 마치 예전에 흘린 눈물을 이제라도 닦아주려는 듯, 속눈썹이 내려앉은 눈가를 다정히 쓸었다. 그 상냥함에 레나는 아프게 웃었다.
“직접 말한 적은 없지만 레지나를 정말 좋아했어요.”
“그랬을 것 같아.”
레지나는 그 험한 곳에서 레나를 돌봐주던 유일한 존재였다.
“내 편이라고 믿었어요. 실은 믿고 싶었던 거죠. 그땐 너무 어렸으니까.”
그래서 누구든 필요했으니까. 레나는 한숨처럼 말하며 린의 손에 뺨을 기댔다. 그러곤 남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 레나는 자신을 삼킨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셀수도 없이 많은 손이 레나의 전신을 휘잡으며 속삭였다.
―구해줘.
레나는 텅 빈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구해달라니, 누구한테 비는 거야? 나한테? 설마 내가 너희를 구할 만한 사람으로 보이는 거야? 레나는 몸이 아득히 가라앉는 걸 느끼며 그들의 호소를 비웃었다.
―구해줘.
―제발 구해줘…….
하지만 그들은 간청을 멈추지 않았다. 몇 시간, 혹은 며칠, 어쩌면 그 이상의 시간이 흐른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레나는 그들의 목소리를 외면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더는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레지나가 자신을 찾으러 오는 상상을 했다. 그러면, 만약 그렇게 해준다면, 나는 당신을 용서할텐데. 하지만 끝내 레지나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게 죽을 만큼 괴로워, 레나는 침묵 속에서 시를 외웠다. 하지만 습관처럼 외운 시도 더는 레나의 마음을 위로하거나 흔들지 못했다. 우리는 만나리라. 서로 치고 찢던 손의 핏자국을 지우고 그곳에서 다시 만나리라. 사는 동안엔 진리를 몰라 선물 같던 그대를 아프게 했지만 그곳에서 부끄러움을 깨달으리라. 그래서 다시 만난 그대와 영원한 시간 가득 입을 맞추며 그곳에서 아픔을 씻으리라. 모든 버림받은 자들과 용서받지 못한 그대도 그곳에서는 함께 웃으리라. 시를 되뇌던 레나는 문득 지겹다는 생각을 했다. 이 시가 참으로 속편하고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만나서 함께 웃자니, 죽고 나면 생전의 일은 모두 훌훌 털어 없앨 수 있다는 소린가? 누구 마음대로. 아, 당신은 모르겠지. 무덤이 이런 곳인 걸. 당신이 상상한 그곳 따위는 없는 걸, 인간들은 죽어서도 여전히 서로를 뜯어먹는다는 걸. 아마 이런 시를 쓴 당신은 행복했을 것이다. 부족함 없이 차고 넘치게 사랑받았겠지. 그러니 이토록 예쁘고 순진한 시를 썼겠지. 그걸 어찌 비난할까. 세상엔 그런 행운아도 있는 법이고, 타고난 복이 제각각 다른 것뿐인데. 그런 생각이 들자 시를 외우는 것도 더는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레나는 그제야 멍하니 레지나에 대해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레지나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안식을 주겠다며 레나를 죽이려 들었다. 무슨 자격으로 그러나 싶었는데, 동생의 과오를 지워주고 싶었던 걸까? 믿었는데, 적어도 너만은 내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레지나…….”
레나는 저도 모르게 친구의 이름을 읊조렸다. 그러자 레나의 탄식을 들은 손들이 그 이름을 따라 불렀다.
―레지나…….
―그 왕은 우리를 택하지 않았어.
―그 왕도 우리를 버렸어.
그러더니 같은 말만 메아리처럼 반복하던 손들이 처음으로 알 수 없는 말을 중얼댔다.
“그 왕……?”
레나가 무심코 반응하자 손들이 레나의 눈과 귀를 감쌌다. 동시에 머릿속에 낯선 광경이 그려졌다. . . . 아아아! 무서운 함성과 함께 붉은 하늘에서 한 여자가 추락했다. 백의를 걸치고, 길고 찬란한 금발을 나부끼며 떨어지는 젊은 여인.
‘레지나?’
레나는 그를 본능처럼 알아보았다. 비록 온전한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지만, 저 사람이 레지나라고 확신했다. 어쩌면 레나를 감싼 손들이 알려준 건지도 몰랐다. 레지나가 무덤으로 추락하자 무덤의 검은 땅이 열리며 무수한 손들이 그 몸을 떠받쳤다. 지금 레나를 붙잡은 그 손들이었다. 손들이 말했다.
―왕이시여.
―우리와 같은 옷을 입은 왕이시여.
손들이 레지나를 극진히 높이며 간청했다.
―죄 없이 버려진 왕이시여.
―부디 우리의 청을 들으소서.
―바라옵건데 우리를 살피소서.
손들은 왕을 간절히 기다린 듯 레지나를 떠받들며 청했다. 하지만 막 무덤으로 떨어진 레지나는 아직 자신의 상황을 깨닫지 못한 듯, 붉은 하늘을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나는 죽은 건가?”
레지나가 혼잣말처럼 중얼댔다. 그 순간 고요하던 레지나의 두 눈이 커졌다. 그의 하늘빛 눈동자에 무덤의 붉음이 가득 담겼다. 눈동자 위에 부풀었던 눈물이 기어이 흘러내렸고, 동시에 레지나의 하얀 목덜미에 깊은 상처가 그어졌다. 목을 한 바퀴 휘감은 상처에서 쏟아진 피가 흰옷을 붉게 적셨다. 이어 황금빛 머리카락은 목덜미 근처에서 썩둑 잘리더니 마치 성애가 피듯 하얗게 빛이 바래버렸다.
“……그래.”
레지나가 희미하게 중얼댔다.
“나는 죽었구나.”
자신이 죽던 순간을 떠올린 듯, 백발의 레지나는 허망하게 속삭였다. 그러더니 자신의 가슴팍과 손을 다 적신 피를 내려다보며 덧없이 웃었다. 그러자 손들은 더 간곡하게 레지나를 불렀다.
―왕이시여.
―우리를 보소서…….
그 부름에 레지나가 비로소 반응했다.
“왕?”
더 없이 싸늘한 목소리로, 그리고 형형한 시선으로 그들을 쏘아보며 되물었다.
“이제껏 왕 노릇을 하다가 죽었는데 지옥에서도 왕이라 불릴 줄이야.”
레지나는 참으로 우습다는 듯 자신을 지탱한 손들을 뿌리쳤다.
“너흰 뭔데 나를 왕이라 부르지? 또 어디에 이용하려고.”
―우리는…….
그때 무어라 말하려던 손들이 일제히 흩어졌다. 저편에서 끔찍한 형상의 망자들이 몰려든 까닭이었다.
―새로운 먹이가 떨어졌다.
―간만에 맡는 지상의 냄새다.
―여자인가?
―찢어라, 다시 맞추지 못할 때까지.
각기 다른 형상의 그림자 속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레나에겐 익숙한 광경이었다. 레나가 처음 무덤에 떨어졌을 때도 망자의 왕들은 저렇게 몰려들어 레나를 노렸었다. 그런데 레지나도 같은 일을 겪었던 모양이다. 다만 레지나의 반응은 레나의 그것과 많이 달랐다.
“놔라!”
뱀들이 사지를 옭아매고 개들이 주위를 에워쌌지만, 불 붙은 독충과 앙상하게 마른 망자들도 당장 달려들 듯 몸을 들썩였지만 레지나는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감히 내가 누군지 알고!”
위축되기는커녕, 레지나는 악에 받쳐 망자들을 맨손으로 찢어발겼다. 망자들도 레지나를 도륙하려고 덤벼들며 지독한 사투가 벌어졌다. 온갖 종류의 망자들이 덤볐지만 갓 죽은 왕의 독기는 그들에게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잠깐.
그걸 지켜보던 뱀들이 돌연 움직임을 멈췄다.
―여자에게서 익숙한 냄새가 난다. 이건…… 재 냄새가 아닌가?
뱀들을 움직이던 많은 심장을 가진 왕이 말했다. 그 말에 불타는 독충들도 공격을 멈추고 허공을 유영하기 시작했다.
―나의? 설마, 그라샤인가?
거대한 벌레 한 마리가 레지나의 얼굴을 살펴보려는 듯 가까이 다가왔다. 레지나는 그것을 단번에 때려잡고 싶었지만 그라샤라는 말에 일단 참고 대답했다.
“나는 레지나 그라샤. 그라샤의 일곱 번째 왕이다.”
직후 벌레들이 불꽃을 뿜으며 기이하게 움직였다. 마치 놀라서 호들갑을 떠는 것 같았다.
―오오, 이럴 수가. 어서 오렴, 손녀야. 용케 여기까지 왔구나.
벌레들에게서 돌연 정다운 음성이 들려왔다. 심지어 그는 다른 괴물들에게도 이렇게 말했다.
―자, 다들 멈춰라. 모처럼 내 손녀가 왔다.
벌레들의 왕이 중재하자 다른 괴물들도 순순히 이빨을 감추고 물러났다. 그래서 레지나도 경계를 풀며 직전의 말을 곱씹었다.
‘손녀?’
손녀라니. 물론 이곳이 지옥이라면 다른 죽은 자를 만나도 이상할 것은 없다. 다만 이자가 내 조부나 고조부라면…….
“당신은 누구입니까? 이름을 알려주십시오.”
묘한 예감에 레지나는 동요를 삼키며 물었다. 그러자 독충들이 서로 뭉쳐 무딘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얼굴이 채 완성되지 않은 그 존재가 레지나에게 다가와 웃으며 말했다.
―얘야, 이곳에선 이름을 함부로 알려서는 안 된다.
“그럼 당신의 아들이 누군지 말해주십시오.”
―굳이 그럴 필요는 없구나. 너는 내가 누군지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네가 쓴 왕관을 너보다 먼저 썼다. 네가 일곱 번째 왕이라면, 너는 내가 왕관을 물려준 내 손자에게서 왕관을 받았을 것이다.
형상의 속삭임에 안 그래도 굳어 있던 레지나의 안색이 삽시에 얼어붙었다. 내 조부에게 왕관을 물려준 자. 그건 그라샤의 다섯 번째 왕.
‘히엠스 그라샤.’
레지나는 그의 정체를 깨닫고 눈을 형형하게 빛냈다. 하지만 그걸 눈치챈 자는 아무도 없었다. 바로 다음 순간, 레지나의 두 손이 히엠스 그라샤의 가짜 몸을 반으로 찢었기 때문이다.
―무슨……!
예상치 못한 기습에 히엠스가 소리쳤다. 하지만 레지나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히엠스의 몸을 거칠게 밟아 터트렸다.
“히엠스 그라샤!”
이 무능하고 역겨운 폭군, 모든 일의 원흉, 날 희생양으로 내몬 미친 광신도! 레지나는 마치 화산처럼 분노를 터트렸다. 당황한 히엠스가 뭉개진 몸을 비틀어 빠져나가려 애썼지만 레지나는 그를 쉽사리 놓아주지 않았다.
―감히……!
결국 히엠스도 격노하며 망자들을 움직였다. 그러자 사방에서 화염을 안은 독충들이 레지나를 불사를 기세로 날아들었다. 레지나가 분노에 미쳐 맨몸으로 맞서려 할 때였다. 땅이 열리며, 또 한 번 무수히 많은 손이 솟구쳐 레지나를 휘감았다.
“이거 놔라!”
레지나가 그 손을 뿌리치려고 몸서리칠 때, 그는 이미 서 있던 곳과 아득히 동떨어진 공간으로 와 있었다. 그곳에서 또 한번 목소리가 울렸다.
―왕.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레지나는 깨달았다. 자신을 붙잡아 끌고 온 손들이, 아까 처음 본 손과는 다르다는 것을. 레나를 떠받쳤던 손은 희고 연약했지만, 지금 레지나를 옥죈 손들은 핏빛에 억세고 강했다. 또한 그를 부르는 목소리 또한 거칠기 짝이 없었다.
―우리의 손을 잡아라.
―왕이 되어라.
어지럽게 외치는 소리에 레지나는 저절로 깨달았다. 지금 자신을 부르는 자들이 무엇인지. 이들은 이미 죽은 자들이었다. 살아 있을 땐 분노에 미친 자들이었고, 원한을 풀기 위해 닥치는 대로 보복한 자들이었다. 그럼에도 뱃속의 불덩이를 다 식히지 못해 여전히 발을 구르는 복수자들이었다. 그들은 지독한 분노를 버리지 못해 이 너머 다음 세상으로 가지 못하고 이곳에 가라앉아 왕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 나타난 레지나에게는 그들 못지않은 불길이 있었다. 레지나는 자신을 내몬 자들을 증오하며 이 지독한 원망을 쏟아내길 염원하고 있었다. 때문에 같은 마음을 가진 그들은 파도가 달에 이끌리듯 서로를 알아보았다.
“……너희의 왕이 되면 내겐 무슨 유익이 있지?”
―힘을 주마.
―널 죽인 세상이 굴복하도록.
―복수와 두려움을 낳도록.
레지나는 매력적인 제안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꺼이 그들의 손을 맞잡으려는데, 옆에서 희미한 음성이 들려왔다.
―왕이여…….
―우리와 같은 옷을 입은 왕이시여.
돌아보니 또 다른 손이 있었다. 작고 여린, 레지나를 처음 맞이한 그 손이었다.
―우리를 버리지 마소서.
―우리는 당신처럼 버림받고 용서받지 못했으니.
―부디 우리를 기억하소서.
레지나는 그들을 돌아본 순간 또 다시 깨달았다. 이들이 누구인지도. 그리고 그걸 알게된 순간, 레지나의 얼굴은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감히 누가 너희와 같다는 것이냐.”
레지나는 그들을 경멸하며 돌아섰다. 아니, 돌아서려 했다. 그런데 몸의 일부가 그들에게 붙잡힌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거칠게 부정했지만 레지나의 일부는 그들과 같아, 손을 함부로 뿌리칠 수도 없는 지경이었다.
―잘라내라.
―힘을 원한다면.
―우리의 왕이 되려 한다면.
그때 복수자들이 레지나를 종용했다.
―그것은 파멸을 바라는 이에게 당치 않다.
그들은 레지나에게 연약함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레지나도 마찬가지였다. 갓 죽은 왕은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그는 연약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일부를 베어내고, 그것을 붙잡고 있던 이들이게 던지듯 넘겨주었다. 그러곤 지체않고 파멸을 바라는 자들의 손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