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기도하는 자들2021.04.26.
레지나의 반신이 찢겨진 꽃잎처럼 처연히 흩어졌다. 레지나는 자신의 반신을 내던지고 그것을 감싸 안는 손들을 경멸하듯 바라보았다.
“나는 너희에게 속하지 않겠다.”
레지나는 그렇게 말하며, 불길처럼 타오르는 복수자들의 손을 잡고 사라졌다. 외면당한 이들은 왕이 버리고 간 조각을 서글피 모아 맞췄다. 그러자 그 부스러기가 어설프게나마 레지나의 형상을 갖추었다. 하지만 본체가 아닌 일부이기에 얼굴은 가질 수 없었다.
‘레지나…….’
레나는 자신에게 익숙한 모습의 레지나가 나타나자 소리 없이 신음했다. 레지나의 분신인 레지나가 몸을 일으켰다.
―왕이여.
―왕이시여.
그러자 어리석은 손들이 그 반쪽짜리에게 다시 간청했다. 창백한 모습의 레지나는 그 손길을 서글피 바라보더니 이내 탄식하듯 말했다.
―어찌 나를 왕이라 부르느냐. 초라한 조각에 불과한 나를.
레지나는 금 간 손으로 자신을 힘겹게 이어 맞춘 자들의 손을 맞잡았다.
―왕이여.
―그렇게 부르지 마라.
하지만 레지나가 그들에게 허락한 자비는 거기까지였다.
―나는 너희를 택하지 않았다. 설령 내가 너희를 닮았어도, 나는 더이상 너희를 돌보지 않을 것이다.
레지나는 그들의 손을 떨쳤다. 그러곤 복수를 택한 본체를 따라 조용히 자취를 감췄다.
. . . 그 장면을 끝으로, 레나는 다시 아득한 공허 속으로 돌아왔다.
‘사람조차 아니었어.’
레나는 방금 본 것을 떠올리며 허탈하게 웃었다. 레나가 알던 레지나는 온전한 한 명조차 아니었다. 진짜 레지나가 잘라낸 조각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죽자고 매달린 꼴이라니. 어이가 없어서 그저 웃음이 나왔다. 실은 울고 싶은데 눈물이 나지 않아 차라리 웃어버렸다. 그러자 곁에서 손들이 다시 속삭였다.
―구해줘.
―제발.
다시 시작된 애원에 레나는 애써 머금은 웃음을 지웠다. 진저리가 났다. 대체 누군데 계속 구해달라고 징징대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러자 레나의 호기심에 화답하듯 그들이 정체를 알려왔다. 그 수많은 손의 생애가 머릿속을 스쳤고, 그로써 레나는 레지나가 그런 것처럼 그들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한 아기였다. 태어나자마자 왕이 되어 성벽 밖으로 던져진, 들개가 물어갈 때까지 시신조차 거둬지지 못한 신생아였다. 또한 그는 한 노파였다. 역병이 돌자 마녀로 몰린, 거짓말하는 자에게 약탈당하고 선동당한 자들에게 불살라진 무고하고 늙은 여자였다. 그리고 그는 한 여인이기도 했다. 가장 곱던 시절 미친 왕에게 바쳐져, 이름도 인격도 꿈꾸던 미래도 묵살된 채 그저 육체만 탐해지고 져버린 소녀들이었다. 그들은 전부 나약한 패자들이었다. 그걸 알게 된 레나는 지독한 혐오감을 느꼈다. 레지나가 이들의 정체를 알고 왜 경멸하며 돌아섰는지 알 것 같았다. 형편없이 짓밟힌 주제에 여전히 빌기만 하는 바보들. 그들을 보고 있자니 비참했던 자신이 떠올라 화가 치밀었다. 아니, 지금 이들에게 둘러싸인 것부터가 불쾌했다. 이들이 접근한 건 자신을 동류로 여겼다는 뜻이었다.
“나는 너희하고는 달라.”
한때는 비슷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제 강해졌고, 스스로를 위해 싸울 수 있다. 복수할 수 있다.
‘맞아. 복수…….’
잊고 있었다. 복수. 레나는 복수라는 한 음절 단어에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해지는 걸 느꼈다. 전부 지긋지긋하고 끔찍하지만, 이제 별다른 미련도 없지만 그래도 할 일은 끝내고 싶어졌다. 그래, 복수하자. 아버지에게, 그리고 레지나의 ‘남동생’에게. 레나가 그렇게 마음먹자 손들이 레나를 붙잡았다.
―구해줘.
―제발, 구해주세요.
다시 시작된 애원에 레나는 신물을 내며 그들을 쳐냈다.
“작작 좀 해!”
연이은 구걸을 더 참지 못하고 불같이 화를 냈다.
“빌기만 해서 뭘 어쩌자는 건데, 아무 소용 없는 걸 아직도 몰라?”
구해주세요, 도와주세요. 레나에게도 한때 그렇게 흐느끼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응답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버지도, 세상도, 신도. 결국은 레나를 모르는 척했다. 그래서 레나는 더 이상 부탁하지 않는다. 스스로 해내지 않으면 잔혹하게 짓밟히는 세상인 걸 아는 탓이다.
“구할 가치가 있으면 진즉에 구했지, 도울 필요가 있으면 알아서 도왔겠지! 그런데 아무도 안 했어, 그럴 가치도 필요도 없으니까!”
레나는 악에 바쳐 소리쳤다. 실은 그들에게가 아니라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아, 그렇다. 나는 가치가 없어 이 지경까지 떨어졌다. 내가 더 소중한 사람이었다면, 내가 남자아이였다면, 아버지에게 충분히 사랑받았다면 이런 일은 처음부터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나는 별 필요 없는 여자아이, 부모에게도 그리 중요하지 않은 덤이었다. 그렇다면 강하기라도 해야 했다. 사랑받지도 못한 주제에 연약하기까지 하니 이런 꼴을 당한 거다. 이게 그 결과고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걸 고작 열네 살인 자신도 아는데, 이미 죽기까지 한 자들이 그걸 모르고 매달리는 게 우스웠다. 짜증이 났다. 미련하게 울던 자신이 떠올라 화가 났다. 그래서 레나는 그들에게 진득한 증오를 담아 퍼부었다.
“이쯤 됐으면 주제 파악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미 죽어버린 주제에 대체 뭘 구해달라는 건데!”
그것은 물음이라기보다는 비난이었다. 하지만 백합처럼 하얀 손들은 레나의 마지막 말에 조용히 답했다. 그래서 레나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가느다란 손들이, 다름 아닌 레나를 가리켰기 때문이다. ***
“너를……?”
예상치 못한 전개에 가만히 듣던 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린의 어깨에 기대 있던 레나는 그 모습을 옆눈으로 보고 옅게 웃었다.
“황당하죠?”
그러더니 이해한다는 듯 부드럽게 말했다.
“저도 그랬어요. 저도 그 사람들이 당연히 자길 구해달라고 하는 줄 알았어요. 왜냐하면, 다들 너무 비참한 일을 겪었으니까요.”
그들은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가혹한 일을 겪었다. 그래서 레나는 그들이 당연히 스스로를 위해 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무력함을 외면한 채 자기연민에 젖어 덧없이 빌기만 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아니었어요. 그들은 나를 안쓰러워 한 거였어요.”
그들이 구해달라고 한 건 레나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품으로 떨어진 레나를 꼭 안고, 각자 믿는 존재에게 이 아이를 구해달라고 간청한 거였다. 우리는 이미 죽었지만 이 아이는 아직 살아 있으니, 부디 도와달라고 기도한 거였다.
“그때의 기분은 지금도 설명할 수가 없어요.”
레나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순간을 다시 떠올린 레나의 두 눈은 별을 처음 발견한 사람처럼 잔잔히, 그리고 벅차게 일렁이고 있었다. ***
“……뭐라는 거야.”
어린 레나는 놀란 얼굴로 자신을 가리키는 손들을 바라보았다.
“나를, 구해달라고?”
레나는 반신반의해서 중얼댔다. 맥락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나한테 빈 게 아니었어? 나한테, 구해줘 도와줘 애원하던 게 아니었어?
“……너희가 왜?”
잠시 할 말을 잃었던 레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억지로 조소했다.
“가장 비참한 꼴을 한 게 누군데, 자기 앞가림도 못 하는 주제에 누가 누굴 걱정해?”
레나가 그렇게 물으며 이를 악물자 손들이 대답했다.
―그래서.
“……그래서?”
―아픔을 알아서.
―절망을 알아서.
―아무도 구해주지 않는 슬픔을 겪어보아서.
그래서 너를 위해 기도했다. 부디 너라도, 이 수렁에서 벗어날 수 있게.
“뭐야, 그게…….”
레나는 다시 모진 말을 하려고 입을 벌렸다. 하지만 단 한마디도 더 할 수 없었다. 어이가 없었다. 스스로도 구하지 못한 자들이 다른 이를 구하고 싶어 한다니. 본인들은 이미 늦었으니 살아 있는 사람에게 기대를 걸겠다는 건가? 이건 또 무슨 비굴한 대리만족이지? 너희가 왜? 완벽한 타인 주제에 대체 무슨 자격으로. 레나는 속으로 짓씹으며 그들을 노려보았다. 그런데 문득, 정말 문득 그들의 손이 무척 희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소름 끼치고 기이하다고 느꼈는데, 악의가 없는 걸 알게 되니 그 모습이 묘하게 처연했다. 마치 무언가를 애도하는 백합 같았다. 그래서 그걸 멍하니 바라보는데 아무 이유 없이 한 구절의 시가 떠올랐다. 이미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하며 외면한 시가, 레나의 갈라진 마음에 다시 하나둘 차올랐다. 사는 동안 무수히도 많은 금이 생겼습니다. 마음의 잔금이 햇살에 찔린 물결만큼 많지만 상처입었다는 이유로 망가지진 않으려 합니다. 나를 강하게 하는 것도 약하게 하는 것도 당신이 아닌 내 자신임을 알기에 그럼에도 나를 미워하는 당신에겐 차라리 꽃을 바치겠습니다. 아. 레나는 마치 세상을 처음 본 사람처럼 눈을 크게 떴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불길과 안개가 차차 걷히는 기분이었다. 아. 나는 왜 그 시인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했을까. 왜 그 시가 순진하고 나태하다고 생각했을까. 이렇게 구절마다 안타까움이 가득한데. 세상에 찔렸을 누군가를 쉼 없이 걱정하고 있는데. 착각이었다, 곡해였다, 당신은 세상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누구보다 깊이, 그리고 세심히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세상의 냉혹함도 날카로움도, 그럼에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유도. 누구보다 절실하게, 그리고 사무치게 알기에 괜찮다며 위로한 것이다. 그럼에도 살아가 달라고 말한 것이다.
“윽…….”
레나는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로써 신음은 참았지만 이미 가득 차오른 눈물은 참을 수도 막을 수도 없었다. 아. 소녀는 탄식하며 결국 눈물을 떨어트렸다. 손들은 그 눈물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석인 것처럼 조심히 받아냈다. 레나는 더 견디지 못하고 허물어지듯 주저앉았다. 시를 되찾은 소녀는 자신이 진정으로 바란 것을 비로소 깨닫고, 그리고 그것을 바라는 것이 비참한 일도 잘못된 일도 아닌 것을 간신히 인정하고 엎드려 울었다. 레나는 꽃을 받고 싶었다. 특별한 이유 없이, 아무 대가 없이. 그저 한 번쯤은 받아보고 싶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런 것처럼, 상냥한 추억에 기대 새로운 하루를 견디고 싶었다. 레나는 자신이 그걸 간절히 바라왔던 걸 이제야 겨우 깨달았다. 채워진 후에야 비어 있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레나는 대가 없이 자신을 위해 기도한 이들 앞에서, 오래도록 울었다.
. . . 겨우 울음을 그친 레나가 그들에게 물었다. 너희는 왜 여기 머물러 있느냐고. 무덤에 머무는 망자는 모두 죄의 무게에 짓눌린 자들. 레나는 이들의 무고함을 알고 그렇게 물었다. 그들이 대답했다. 용서받지 못해 가라앉았다고. 레나는 잘못이 없는데 무슨 용서가 필요하냐고 되물었다. 그들은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벌을 받았기에 용서가 필요하다고 대답했다. 용서란 잘못을 벌하지 않는 것. 하지만 이들은 잘못 없이 벌을 받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용서를 구하는 이유는 세상이 이들의 존재를 잊은 탓이었다. 그들은 모두에게 잊힌 채 덧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처럼 용서받지 못한 왕이 탄생해, 그들이 아직 이곳에 있음을 세상에 알리기를. 그들이 이제라도 용서받을 수 있게 해주기를. 하지만 이들처럼 무고하게 핍박받은 왕은 기도가 아닌 복수를 택했다. 그로써 다시 버림받은 그들은 그저 바라고 있었다. 더 이상 우리와 같은 이가 없기만을. 이야기를 듣고 침묵하던 레나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내가 너희를 알리겠다고. 너희의 왕이 되어주겠다고. 그들은 레나에게 꽃을 주었다. 그러니 레나는 그들을 위해 못할 일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