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그럼에도 그들은2021.04.29.
린은 많이 놀란 표정이었다. 레나가 망자의 왕이 되었다는 말에 적잖이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레나는 그걸 보며 안타깝게 웃었다.
“망자라고 다 괴물은 아니에요.”
“아…….”
린은 뒤늦게 자신의 무례를 깨닫고 표정을 수습했다. 그러곤 레나가 이전에 한 말들을 떠올렸다. 레나는 존재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자신을 지워버린 아버지에게 책임을 지우러 왔다고 했다. 당신이 지웠으니 당신이 되돌려 놓아야 한다고 했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이제야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레나는 자신의 존재를 되찾는 것을 시작으로 자신과 같은 이들을 세상에 드러낼 생각이었다. 그건 이해했지만, 아직 납득할 수 없는 게 남아 있었다.
“그래서 무덤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거야?”
망자의 왕이니까. 망자는 무덤에 있어야 하니까.
“하지만 너는 살아 있잖아.”
“맞아요. 저는 아직 살아 있어요.”
레나는 씁쓸히 덧붙였다.
“그럼에도 용서받지 못한 자들에게 속해 있죠.”
사실 레나가 왕이 되겠다고 했을 때 그들은 동의하지 않았다.
―너는 살아 있는 자.
―산 자가 망자의 왕이 되는 건 생을 포기한다는 의미.
―우리는 희생을 바라지 않는다.
그들은 도리어 레나를 밀어내려 했다. 희생양들은 더 이상 희생을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품고 있던 레나를 다시 돌려보내려 했지만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그곳은 모든 것이 죽고 흩어지고 다시 구성되는 세계. 무덤에서 생의 의지를 버렸던 레나는 서로 닮은 속성의 망자들이 군집을 이루듯 자연히 그들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그로써 레나는 아직 살아 있지만 망자의 왕이기도 한 기이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레나가 그 미묘한 법칙을 설명했지만 린은 여전히 수긍할 수 없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레나는 호흡하고 있었다. 온기를 가졌고, 움직였다. 린은 여기서 다른 것을 더 바라지 않았다. 그저 이대로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냥 지금처럼 있으면 안 되는 거야?”
“이 상태가 유지된다면 상관없겠죠.”
“이 상태?”
“균열이 있어서 망자들이 산 자들의 세계로 불려 나오는 상태요.”
이상한 전제였다. 망자들이 산 자들의 세계로 불려 나오는 상태라니. 그런 상태가 있다는 건, 그렇지 않은 상태도 있다는 말이었다. 생과 사가 뒤엉킨 제국의 생태에 적응한 린에게 그건 이상하고 낯선 가설이었다.
“저는 존재하기 위해 여기 왔지만, 그것만을 바라지는 않아요. 우리가 바라는 건 그 이상이죠.”
그들이 바란 것, 그리고 레나가 동의한 것. 그건 더 이상 자신들과 같은 이가 나오지 않는 것. 혼란이 가라앉고 다툼도 잦아들어 연약하더라도 괜찮아지는 것.
“그러려면 망자들은 그만 물러나야 해요.”
그건 최소한의 선행조건이다. 평화가 시작되려면 침략이 끝나야 하고, 사람들이 살아가려면 죽음과 멀어져야 한다.
“린 씨는 균열이 있어서 망자들이 나온다고 생각하죠?”
“아니야……?”
“그것도 틀린 건 아니지만 전후 관계가 조금 달라요. 균열이 있어서 망자가 나온 게 아니라 밖으로 나온 최초의 망자 때문에 경계가 무너진 거죠.”
“최초의 망자?”
“레지나요.”
불안한 얼굴로 묻는 린에게 레나는 무거운 목소리로 고백했다. 아니, 폭로했다.
“균열이 계속 생기는 건 레지나가, 니힐 황제가 여기 있기 때문이에요.”
. . . 클라비스는 말했다.
―그 후 지상으로 돌아온 니힐 그라샤는 제국을 세우고 대륙을 통일했습니다.
―지상을 노리는 망자들로부터 연약한 민족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지요.
새하얀 옷을 입고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뭐라고? 린은 숨이 턱 막히는 걸 느꼈다. 그가 제국의 만행에 진저리를 내면서도 마지못해 따른 이유는 어쨌든 망자들을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망자라는 맹목의 살육자와 맞서려면 제국이라는 괴물이 필요함을 인정했기에 이제껏 견뎌온 거였다. 그런데 그 균열이 생긴 원인이 니힐이라면, 그렇다면……. 린의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으며 손등에 힘줄이 불거졌다. 격정과는 거리가 먼 성격이지만 이번만은 싸늘히 타오르는 속을 쉽게 달랠 수 없었다. 린은 당장 뛰쳐나갈 사람처럼 이를 악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래서 레나는 그의 손등에 잠자코 손을 포갰다.
“알아요, 어떤 기분인지.”
하지만 린은 그 말에도 거부감을 느꼈다. 레나를 사랑하고 아끼는 것과 별개로 그는 레나가 이 기분을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레나는 잠잠히 덧붙였다.
“그 안에도 있었어요. 제국에 모든 걸 빼앗긴 자들이요.”
황제에게 나라도 생명도 빼앗겨 기어이 무덤으로 떨어진 자들. 용서받지 못한 자들은 그들도 기꺼이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거기 제국의 희생자들이 있다고?”
“네.”
“……어떻게?”
린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댔다. 레나가 말한 그들은 순계자들이었다. 모든 걸 빼앗기고도 숨죽여 기도하는, 숭고하다 못해 기괴한 자들이었다. 먼 과거의 희생자들이 그렇게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놀랍기는 해도 받아들였다. 그런데 자신과 같은 자들이 그런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레나와 레지나가 그랬던 것처럼 거부감마저 느꼈다.
“나락까지 떨어졌다고 반드시 망가져야 하는 건 아니에요.”
그래서 레나는 자신과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에게 자그맣게 대답해주었다.
“물론 분노할 수 있죠. 복수를 원할 수도 있어요. 그것도 정당한 일이에요. 하지만 모든 사람이 반드시 그래야 하는 건 아니에요.”
레지나가 선택한 핏빛 존재들. 비록 방향은 다르지만 그들의 본질도 결국 용서받지 못한 자들과 같다. 그들도 한 아기였고, 한 노파이자 한 소녀이며, 침략 당한 세계의 한 소년이었다. 다만 그들은 복수를 원했다. 원하지 않을 이유가 없기에 그 길을 택했다. 그것을 감히 비난할 수는 없다. 그들은 빚을 갚고자 했을 뿐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길만 당연하다고 주장할 수도 없다. 누군가 복수를 바라듯 누군가는 평화를 바랄 수 있다. 설령 그들이 가혹하게 찢긴 자라 하더라도. 레나의 설명에 린의 싸늘한 분노도 주춤 수그러들었다. 아직 혼란스럽지만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니힐이라는 미친 황제를 만든 것도 복수인 걸 생각하면, 그와 똑같이 눈 뒤집고 달려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린이 조용히 수긍하자 레나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우리는 무덤의 모든 것이 폭로되길 원해요. 그 안에 파묻힌 자들의 존재도, 세상이 그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도.”
그래서 더 이상 우리와 같은 이가 무덤에 떨어지지 않길 바란다. 그로써 용서받지 못한 채 죽은 듯이 가라앉은 이들이 무덤의 어두운 골짜기를 빠져나가길 바란다.
“모든 게 밝혀지면, 그리고 잘못된 걸 바로잡으면 망자의 왕들은 무덤으로 돌아가겠죠. 그래야 무너진 경계도 다시 설 테고요.”
이 시대는 망령에게 휘어 잡혀 노예가 된 시대, 그로써 더욱 가혹한 시대이다. 그것을 끝내기 위해서라도 과거의 망령들은 무덤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 문을 완전히 닫으려면,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닌 레나 루벨 또한 얌전히 무덤에 가라앉아야 한다. 이 이야기를 난생처음 입 밖으로 꺼낸 레나는 스스로의 처지를 잠시 헤아리다가 가볍게 덧붙였다.
“그러니까 린 씨를 좋아하지 않으려고요.”
레나는 농담처럼 말하고 싶었다. 하여튼 제 상황은 이러합니다, 참 유감입니다. 그러니 제 몫까지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그냥 이렇게 말하고 적당히 웃어넘기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런 게 어디 있어.”
하지만 린은 조금도 어울려주지 않고 아프게 신음했다. 진작에 일어나 앉은 그는 머리가 아픈 듯 연신 이마를 쓸었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들어 혼란스러웠다. 한편으로는 드문드문 맺혀 있던 의문이 하나로 엮여 풀리는 것도 같았다. 매사 이상하게 초연한 숙녀. 무덤을 거침없이 휘젓던 용병. 놀랍도록 강하지만, 당장이라도 사라질 듯 위태로웠던 레나 루벨. 그간 레나가 보여준 모습이 하나씩 납득되어 린은 끓는 납을 마신 것처럼 괴로워졌다. 그래서 곁에 앉아 눈치를 보던 레나는 별수 없이 중얼댔다.
“너무 좋아하면 헤어질 때 가슴 아프잖아요.”
레나는 즉흥적으로 행동해서 일을 망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중 일을 헤아릴 줄 알고, 참거나 기다리는 데 능숙했다. 그건 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레나 못지않게 짊어진 것이 많았고, 그래서 신중했다. 린이 오래도록 침묵하자 레나는 힘없이 웃었다. 그가 납득했다고 생각한 탓이었다. 하지만 한참 후에 린이 꺼낸 말은, 레나의 생각을 한참이나 빗나간 것이었다.
“누구든 결국엔 헤어져.”
“……네?”
“둘 중 하나가 죽든 사고가 생기든 마음이 변해서든, 어쨌든 영원히 함께할 수는 없어.”
뜻밖의 말에 레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린은 그런 레나를 바라보며 잠잠히 말을 이었다.
“다들 주어진 시간 동안 함께 하는 거야.”
“린 씨…….”
“끝이 정해져 있다면 시간을 아끼면 돼.”
린은 구차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조용히 애원했다. 반드시 떠나야 한다면 남은 시간이라도 곁을 내어달라고 부탁했다. 레나의 말처럼 정해진 끝을 기다리는 건 두렵지만 그는 애써 희망을 찾았다. 그래, 누구든 결국엔 헤어진다. 그럼 언제 헤어질지 모르는 사람들보다 더 많이 좋아하면 된다. 끝을 모르는 사람들보다 더 소중하게 곁을 지키면 된다. 린은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황제에 대해서도, 제국에 대해서도 이제껏 몰랐던 사실이 산사태처럼 쏟아져 그를 짓눌렀다. 그럼에도 지금 그의 마음을 가장 사로잡은 건 눈앞에 있는 사람이었다. 시간이 없다면 일분일초를 아껴서라도 더 사랑하고 싶을 뿐이었다. 린의 조심스러운 구애에 레나는 한숨처럼 웃었다.
“가시밭길인 걸 알면서 왜 굳이.”
“지금 널 놓치면 후회할 것 같아.”
“린 씨는 바보네요.”
바보라도 좋으니 같이 걷고 싶었다. 지금도 흘러가는 시간이 너무 아까운데 나중 일 때문에 망설이고 싶지 않았다. 고요하지만 견고한 린의 마음에 애써 웃던 레나도 결국 탄식했다.
“두려워요.”
“뭐가?”
“린 씨를 너무 좋아하게 돼서 잘못된 선택을 할까 봐요.”
지금도 이미 너무나 좋아하지만, 안 보이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만큼 소중하지만 아직은 괜찮다. 아직은 그를 뒤로한 채 무덤으로 향할 수 있다. 하지만 이대로 마음이 더 깊어지면 당신과 이곳에 남는 상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크게 벌어진 비극을 모르는 척하며 당신의 곁에 머물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내가 그러기로 마음먹으면,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무덤으로 떨어진 끝에 나를 막으러 올까.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어떻게 확신해요?”
“좋아하는 사람이 잘못하게 두진 않을 거니까.”
“린 씨는 정말 바보네요.”
레나는 난처한 목소리로 중얼댔다. 바보라는 말을 연이어 들은 린은 조금 시무룩해져서 레나를 바라보았다. 그 처연함에 레나의 심정은 더 난감해졌다. 레나는 손을 뻗어 풀죽은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손끝이 입술에 닿았지만 두 사람 다 모르는 척했다. 린을 쓰다듬던 레나가 그에게 조심히 다가갔다. 린은 조금 주저했지만 결국엔 가만히 레나를 받아들였다. 조심스럽게 다가온 손가락이 서로 얽혔고 예정된 일처럼 그림자가 겹쳐졌다. 숨결이 섞이는 걸 느끼며 린은 눈을 감았고, 레나는 더 이상 떨림을 숨기지 못하고 그에게 안겼다. 이후 잠시 짐승의 소리가 났고 짧은 몸싸움이 일어났다. 두 사람 모두 입술의 여린 살이 찢어지고 피가 조금 흘렀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어찌 되었건 입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