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2021.05.03.
레나가 입을 맞춰올 때 린은 머릿속이 하얗게 비는 것을 느꼈다. 아찔한 기쁨 뒤로 두려움이 밀려왔지만 레나가 그의 손을 꼭 잡으며 달래주었다. 따스한 입맞춤이 이어지자 눈앞이 차츰 어두워졌다. 정신이 날아가는 감각과 함께 거부할 수 없는 충동이 그를 덮쳤다. 레나의 신음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렸다.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 그는 슬퍼졌다. 또 연인을 아프게 하나 싶었다. 맹수들도 사랑할 땐 발톱을 숨기는데, 고슴도치도 애정이 생기면 가시를 눕히는데. 가장 좋아하는 사람을 가장 상처입히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그걸 뻔히 알면서도 끝내 포기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미웠다. 아, 사랑하는 너를 원 없이 안아 볼 수 있다면. 그렇게 탄식하는 순간 아득하던 의식이 돌아왔다. 그리고 린은 달빛을 등진 레나를 발견했다. 입을 맞추던 순간 그들은 분명 앉아 있었는데, 어느새 두 사람은 몸을 포개어 누인 채 서로를 보고 있었다. 린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레나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하얀 얼굴, 붉은 입술, 아프게 배어나는 피, 그럼에도 다정히 웃는 당신.
“왜 울고 있어요?”
레나가 속삭여 물었다. 운다니. 린은 레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멍하니 있다가, 자신의 눈가가 젖은 걸 깨닫고 황급히 얼굴을 가렸다. 아팠다. 하지만 무엇이 이토록 아픈지 알 수 없었다. 아니, 무엇이 더 아픈지 알 수 없었다. 레나를 다치게 한 스스로가 아팠고, 조만간 자신을 버리고 갈 레나가 아팠다.
“울지 마요.”
레나가 린의 손을 치우며 속삭였다. 그러곤 그의 투명한 눈물에 다시 입을 맞췄다.
“괜찮으니까.”
린은 괜찮다는 그 말이 또 아파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럼에도 품 안에 가득한 온기와 향기를 저버리지는 못했다. 린은 말없이 레나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부족했다. 사랑만 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그는 덧없이 흐르는 분초를 천년 같이 아끼며 연인에게 입을 맞췄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오직 사랑하기만을 바라며 퍼붓듯 입을 맞췄다. *** 날이 밝았다. 아침잠이 많은 레나지만 오늘은 모처럼 일찍 눈을 떴다. 바로 등 뒤에서 자신을 꼭 끌어안은 린 때문이었다. 레나는 이불보다 포근하게 자신을 감싼 린의 체온을 느끼며 나른히 물었다.
“일어났어요?”
“……응.”
린은 조금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그러곤 일어나기 싫다는 듯 레나의 목에 얼굴을 파묻었다. 레나는 아이처럼 안긴 린을 보며 작게 웃었다.
“아프지는 않아요?”
찢어진 입안이 아까부터 따끔대지만 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괜히 민망해져 슬쩍 몸을 물렸다. 레나의 물음이 첫날 밤을 보낸 신부에게 신랑이 하는 말 같았기 때문이다. 사실 린은 간밤의 일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몇 번이나 입을 맞췄지만 그때마다 어김없이 기억이 끊겼고 정신을 차려보면 조금 흐트러진 레나와 몹시 흐트러진 자신이 있었다. 그걸 반복할수록 레나에겐 자잘한 상처가 늘었고 린의 가운은 점점 벌어지다 종국엔 거의 헐벗은 모습이 되었다. 그래서 레나가 자신만 벗기고 있다는 의심이 들 때쯤, 그는 잠이 들었다. 린이 드문드문 남은 기억을 모아 괴이쩍게 회상하는데, 레나가 나긋이 속삭였다.
“일어나야죠.”
“조금만…….”
린은 레나를 다시 꼭 안으며 중얼댔고, 레나도 그 모습에 또 한 번 웃었다.
“린 씨 강아지 같은 거 알아요?”
“개자식이라는 소리 자주 들어.”
“그런 거 말고 진짜 강아지요. 그러고 보니 입질하는 것도 비슷하네요.”
“입질…….”
린은 신음하면서도 레나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실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우리가 연인인 것을, 서로의 곁을 차지할 수 있는 사이임을. 레나는 간절히 파고드는 린을 기꺼이 받아들이다가 문득 생각했다. 지금 이 사람이 내 옆에 있는 건 권능으로 생긴 저주 때문이 아닐까, 하고. 이렇게 애정을 갈망하는 사람이 지금까지 혼자였던 건 그 불가피한 이유 탓이다.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그의 옆자리는 진작 누군가의 차지였을 것이다. 레나는 그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안타까워해야 할지 몰라 긴 숨을 내쉬었다.
“왜 그래?”
“아뇨…….”
“얘기해 줘.”
린이 불안한 듯 물었고, 레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솔직히 대답했다.
“린 씨의 유서 깊은 연애사에 대해서 생각했어요.”
기습을 당한 린은 짐짓 당황했다. 하지만 절대 내색은 하지 않았다. 몸으로 하는 연애는 서툴러도 그 외의 연애경력은 제법 준수하기에, 그는 지금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설마 질투해?”
“뭐요?”
린은 언젠가 레나가 했던 물음을 똑같이 돌려줬고, 덕분에 레나는 일순 얼이 빠졌다. 조금 울컥한 레나는 자신의 허리를 감싼 린의 손가락을 잠자코 꺾었다. 꽤 아팠지만 린은 모르는 척 깍지를 끼며 용서를 구했다. 그 애처로운 간청에 레나는 못 당하겠다는 듯 웃어버렸고, 눈치를 살피던 린은 미소가 핀 레나의 뺨에 조심히 입을 맞췄다. 그는 자신을 등진 레나를 조심히 당겨 바로 눕게 했고, 자연스럽게 그 위로 올라가 연이어 입 맞췄다. 뺨에, 눈가에, 이마에, 턱선에, 목덜미에. 그러고 나니 간밤의 일을 이어가고 싶다는 욕심이 절로 생겼다. 게다가 어제는 내리 레나에게 깔려 있었다. 그러니 모처럼 우위를 점한 김에 조금 더…….
“기침들 하셨습니까!”
그때 밖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고, 린은 저도 모르게 중얼댔다.
“젠장.”
린이 짜증을 내는 모습에 레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레나는 린이 욕하는 모습이 처음이었다.
“들어가도 됩니까!”
“젠장…….”
밖에서 소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자, 린은 레나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며 다시금 신음했다. 다정한 시간을 방해받아서 진심으로 괴로운 기색이었다. 레나는 슬퍼하는 린을 얼떨떨하게 쳐다보다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젠장이라니, 그 착한 입에서 젠장이라니. 이 느긋함이 아쉬운 건 마찬가지지만 레나는 그를 차분히 밀어냈다.
“일어나요.”
“응…….”
가만히 있으면 밖에서 소년이 문을 박차고 들어올 것 같다. 결국 린은 다 풀어진 가운을 추스르며 마지못해 일어났다. 그는 밖에 대고 동부어로 소리치더니 안으로 들어가 빠르게 채비했다. 잠시 후, 까마귀로 돌아온 린이 아직 침상에 앉은 레나에게 말했다.
“다녀올게, 좀 더 쉬고 있어.”
그는 마치 일 나가는 남편처럼 말하곤 돌아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밖으로 항하던 걸음을 멈추고 다시 돌아왔다. 레나가 갸웃하며 쳐다보자 그는 마치 잊은 물건을 챙기듯 레나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러곤 비로소 밖으로 나갔다. 예상 못 한 애정표현에 레나는 놀라서 멍하니 앉아 있다가, 그가 문을 닫고 나간 후에야 촉감이 남은 이마를 매만졌다.
‘쟤 정말 작정했나 봐.’
레나는 어이가 없어서 속으로 중얼댔다. 진짜 작정한 거다. 그러지 않고서야 매사 조심스럽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돌변할까. 그렇게 생각하던 레나는 간밤의 일들이 하나둘 떠올라 깜빡이던 눈을 꾹 감았다. 얼굴에도 새삼 열이 올랐다. 나른함이 가시고 이성이 돌아오니 어젯밤 일들이 전부 꿈 같았다. 연인이 생겼다. 가짜 약혼자가 아니라 이번엔 진짜 연인이다. 무명의 용병이 아닌 레나 루벨로 황궁에 들어오며 레나에겐 소소한 목표들이 있었다. 기왕 잠시 머물게 된 거, 어린 시절 꿈꾸던 일들을 하나씩 해보자는 거였다. 사교계 데뷔, 무도회장에서 춤추기, 황제 폐하 알현, 정원에서의 티파티, 그리고 멋진 사람 곁에 연인인 듯 머물러보기. 물론 살얼음판인 황궁에서 이걸 전부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전부 아니면 말고 싶은 것들이었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하고 싶은 건 거의 다 했다. 비록 사교계 데뷔는 샴페인에 절여지고 첫 춤은 억압에 얼룩지고 황제 폐하는 대뜸 칼부터 겨누었지만, 심지어 정원에서의 티파티는 상대가 꼴도 보기 싫은 클라비스 시렌치움 그라샤였지만. 연인만은 상상한 것보다 몇백 배는 달콤해서 아직도 꿈을 꾸는 것만 같다. 물론 마음 한구석엔 두려움이 남았다. 린에게 너무 많은 것을 알려준 것도, 나중의 일도 따끔한 가시처럼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제 일을 후회하진 않았다. 시간이 없다. 그러니 아끼고 아껴서 더 사랑해야 했다. 무덤에 떨어져 혼자 남더라도 그를 기억할 수 있게, 그리고 이곳에 남을 당신에게도 행복한 추억으로 남을 수 있게. 레나는 조용히 다짐했다. 함께 있는 동안, 당신만은 지켜내겠다고. . . . 린이 나간 지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안에 계십니까!”
밖에서 아주 또박또박한 발음의 외침이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뻔했다. 어제 본 휘라는 여인과 함께 있던 소년의 목소리다. 그는 레나를 배려하려는 듯 분명한 제국어를 구사했는데, 덕분에 집 안에 있던 레나는 오히려 고민에 빠졌다. 레나는 저 소년과 자연스럽게 제국어로 소통해도 괜찮은지 고민스러웠다. 그래서 주저하는데 밖에서 또 한 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도 주무십니까! 자더라도 끼니는 챙깁시다!”
결국 레나는 까마귀의 탈을 쓰고 일어났다. 만약 주의해야 하는 게 있다면 린이 먼저 경고했을 것이다. 그렇게 판단한 레나는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레나의 예상대로 어제 본 그 소년이 커다란 바구니를 들고 서 있었다. 밝을 때 보니 소년의 얼굴이 어제보다 잘 보였다. 그 소년은 린처럼 까만 눈에 흑단 같은 머리카락을 길게 땋아 내렸는데, 밝게 웃는 얼굴이 아침 햇살과 무척 잘 어울렸다. 그런데 소년의 명랑하던 얼굴이 레나의 얼굴 본 순간, 더 정확히는 까마귀의 탈 아래 드러난 입술을 본 순간 조금 굳었다.
“어젯밤에 싸운 겁니까?”
‘싸워?’
“그래도 이기셨나 봅니다. 까마귀 형님은 꼴이 더 가관이었습니다.”
아. 레나는 이 소년이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닫고 조용히 얼굴을 붉혔다. 확실히, 상대를 물거나 패대기치거나 제압하는 행위를 세간에서는 싸움이라고 부른다.
“심각한 싸움은 아니지요?”
소년이 걱정스레 물었고, 민망해하던 레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제국인만 제국어를 할 줄 아는 건 아니니까, 어느 정도는 말을 주고받아도 될 것 같았다. 레나의 대답에 소년은 한숨을 쉬며 가져온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그런데 바구니에 든 것은 레나의 아침 식사만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책도 몇 권이나 담겨 있었다. 금장으로 장식된 두꺼운 책. 레나가 제국에서 흔히 본 형태의 책이었다.
“까마귀 누님은 제국인이지요?”
소년이 불현듯 물었다. 빠져나갈 수 없는 물음에 레나가 주저하자 소년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우리는 가끔 제국의 도시에 다녀옵니다. 망자들만 잘 피하면 쓸 만한 것을 많이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숲에 이만한 마을을 꾸릴 수 있었던 건 망자들 때문에 사람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서부의 도시 덕분이기도 했다. 그곳엔 사람이 사는 데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이 있었고, 밀이나 쌀 같은 곡식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다.
“이 책도 원래는 겨울에 땔감으로 쓰려고 가져온 것인데, 제국어 공부를 하려고 보다가 중요한 것 같아 따로 챙겨두었습니다. 성벽에 있는 큰 방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봐주었으면 합니다. 제국에 대한 일입니다.”
소년은 그렇게 말하며 레나에게 책 한 권을 내밀었다. 레나는 그걸 빤히 쳐다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이걸 왜 까마귀가 아니라 나한테 주죠?”
“까마귀 형님은 제국인이 아닙니다. 형님이 제국의 일까지 맡을 필요는 없습니다.”
소년이 단호히 답했다. 단순한 주장이 아니라 마치 선언하는 투였다. 레나는 어쩐지 묘한 대답이라고 생각하면서 되물었다.
“나한테 주면 까마귀도 알게 될 거예요. 그건 상관없나요?”
“그건 누님의 자유입니다. 형님이 혼자가 아니어서 다행일 뿐입니다.”
‘중요한 문제지만 린 씨에겐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는 건가?’
레나는 수긍하며 소년이 건넨 책을 받아들었다. 그런데 막상 펼쳐보니, 그건 책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