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영원히 춤추는 자들2021.05.06.
―92년 10월 4일. ―성 내에 숨어 있는 배교자 수색 나흘째. 뚜렷한 성과 없음. 하수로에서 도주한 배교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신발 발견. 동부의 소년이 건넨 책엔 심상치 않은 문장이 가득했다. 심지어 그건 인쇄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손으로 일일이 적어서 채운 글씨였다.
‘이건…… 일지?’
레나는 그 책을 훑어보며 깨달았다. 이 손때 탄 책은 단순한 책이 아니라 기록이었다.
‘경비대의 일지인가? 말단? 아니, 관리자인가?’
레나는 책장을 빠르게 넘겨보았다. 경비대원의 배치, 수색의 방향성 등에 대해 기술한 부분도 보였다. 아무래도 경비대 중에서도 상당한 윗사람이 쓴 것 같았다.
“앞부분은 별 내용이 없습니다. 뒤에 가면 접어둔 부분이 있습니다.”
레나가 바쁘게 책장을 넘기자 지켜보던 소년이 덧붙였다. 레나는 소년의 말을 따라 종이 끝이 접혀 있는 부분을 펼쳤다. ―93년 2월 4일. ―동쪽 숲 감시대 교체. 특이사항 없음. 영원히 춤추는 자들은 여전히 춤추고 있다.
‘영원히 춤추는 자들?’
마치 망자를 부르는 듯한 이름. 하지만 이건 레나도 처음 보는 이름이다.
‘게다가 동쪽 숲이라면…….’
서부 성의 동쪽엔 서부 접경지의 장벽이 있다. 그 근처에 있는 숲. 지금 이우라가 수색 중인 숲이다. 레나는 동쪽 숲에 뭐가 있나 생각하다가 린과 나눈 대화를 퍼뜩 떠올렸다.
―아니. 비어 있지는 않아. 거기 있어, 이우라가 관심을 가질 만한 게.
―뭐가 있다는 거죠?
―모르겠어. 그게 뭔지는,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도.
린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그 숲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어쨌든 이우라의 관심을 끌기는 할 거야. 오늘 숲에 들어갔으니 며칠 내로 찾겠지.
이우라가 관심을 가질 만한 것.
‘설마 이건가?’
레나는 반신반의하며 책장을 더 넘겼다. *** 그 시간, 루비드 플레누스는 이우라 플레누스의 등을 보며 조용히 말을 몰고 있었다. 숲을 수색한 지 만 하루가 지났다. 간밤엔 아직 탄내가 진동하는 숲에서 야영했지만 고귀한 왕자는 불평하지 않았다. 이유는 둘이었다. 하나는 그의 불평을 받아줄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인데, 나름 고결한 자존심을 가진 루비드 플레누스는 누구에게나 지랄하지만 불평은 마음을 허락한 상대에게만 했다. 다른 하나는 그의 형이 코앞에 있는 탓이었다. 그는 형의 크고 먼, 그리고 과묵한 등을 보며 초조한 압박을 느꼈다.
이우라와 이토록 오랫동안 가까이 있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공식 석상에서 같이 설 때도 길어야 한두 시간인데, 요 며칠은 계속 눈 돌리면 보이는 곳에 형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루비드의 강박을 차갑게 자극했다.
‘젠장…….’
루비드는 불안과 강박이 스멀대며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날 죽일 거야. 내 목을 자를 거야. 단두대 앞에 서게 될 거야. 익숙한 발상이 자연스럽게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그것이 처형 강박으로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왜 자꾸 쓸데없는 생각이…….’
루비드는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을 짜증스레 떨쳤다. 과거엔 이런 생각이 들면 어김없이 처형 강박이 쏟아졌는데 근래 들어서는 그것에 사로잡히는 일이 없었다. 이유는 아마, 히엠스 그라샤를 칠 때 본 기억 때문일 것이다. 수년 전 루비드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추궁하며 이우라를 찾아갔고, 그때 처음으로 처형 강박에 빠져 정신을 잃었다. 며칠 후 깨어났을 때 그의 팔엔 깊은 자상이 있었다. 루비드는 그게 이우라가 낸 상처라 믿었고, 그 믿음은 루비드의 처형 강박을 부추기는 근간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히엠스 그라샤의 성으로 들어가며 루비드는 진실인지 환상인지 모를 광경을 보았다. 그 시절, 칼을 휘두르던 자신을 맨몸으로 감싸던 이우라를.
‘레나 루벨은 그게 지나간 시간이라고 했어.’
환상도 아니고 꿈도 아닌, 지나간 시간. 그래서 레나는 여기서 본 걸 비밀로 해달라고 했다.
‘그렇다면 내가 본 것도 사실이겠지.’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루비드가 지금까지 필사적으로 버텨온 이유가 사라진다. 지금까지 너, 이우라, 형에게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친 건데. 루비드는 혼란스러웠고, 조언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는 조언을 구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이전까진 그가 조금이라도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면 어느새 다가온 루벨 후작이나 클라비스가 알아서 지껄였다. 그들은 마치 루비드의 생각을 아는 것처럼 떠들었고, 때문에 루비드는 무언가를 더 묻거나 깊이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혼자 서야 하는 지금,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며칠째 전전긍긍하고 있다.
‘레나 루벨은 대체 어딜 간 거야?’
초조해하던 루비드는 괜히 레나를 탓했다. 레나는 위험하니 성채에 남겠다고 했으면서 이우라가 수색에 나서자 기다렸다는 듯 어디론가 떠났다. 그 소식이 전해지자 수색대는 다들 어처구니를 잃었고, 이우라는 고요히 분노했으며, 루비드는 묘한 부담감을 느꼈다. 하루아침에 약혼자를 잃은 레나 루벨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을까 하는, 그런. 바쁘게 주위를 경계 중인 기사들과 달리, 루비드는 그렇게 딴생각을 하며 말을 몰았다. 그가 아주 희미한 냄새를 맡은 건 그 덕분이었다. 어디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던 루비드의 코끝에 묘한 향기가 스쳤다. 사방에서 진동하는 재 냄새 때문에 어지간히 민감하지 않고는 느낄 수 없는 향기였다.
‘향수 냄새?’
루비드는 저도 모르게 냄새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꽃향기 따위는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짙고 강한 이 냄새는 분명 향수나 향유의 냄새였다. 아무도 없는 숲 한복판에서 향수 냄새라니.
“왕자 전하, 갑자기 어디로 가시는…….”
루비드가 대뜸 말머리를 돌리자 그를 보좌하던 기사가 물었다. 하지만 루비드는 대답하지 않고 냄새를 따라갔다. 기사들이 놀라서 그 뒤를 따랐고, 한참 앞에서 말을 몰던 이우라도 루비드의 이탈을 깨닫고 그를 쫓았다. 이윽고 루비드는 동굴을 발견하고 말을 멈췄다. 우거진 수풀에 가려져 있던 그 동굴은 폭이 사람 두어 명이 같이 들어가면 꽉 찰 만큼 비좁았다. 그리고 그 동굴 앞에 당도하자 다른 기사들도 놀라서 코를 킁킁댔다. 동굴 안쪽에서 매우 강한 향기가 나고 있었다.
“횃불 가져와.”
루비드가 검은 동굴 안을 보며 명령했다. 한낮이지만 동굴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고 어두웠다. 기사들이 루비드의 말대로 횃불에 불을 붙였다. 그대로 동굴로 들어가려 하자, 어느새 뒤따라온 이우라가 앞을 막았다.
“내가 간다.”
누구한테 하는 말인지도 분명치 않은 말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알아들을 명령이기에 평소의 루비드는 알아서 뒤로 빠졌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상황이 조금 달랐다.
“내가 찾았어.”
루비드가 물러나기는커녕 고집스럽게 버텼다. 기사들이 짐짓 당황해 눈치를 봤지만 루비드는 모르는 척 앞장섰고, 이우라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잠자코 뒤따라갔다. 그로써 북부의 형제와 기사들은 긴 줄을 이루어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은 균일한 넓이로 이어졌다. 게다가 일직선이 아니라 마치 통로처럼 구불대며 꺾였다. 문득 의문을 느낀 이우라는 동굴의 외벽에 손을 짚어보았다.
‘표면이 매끄럽다.’
자연히 생긴 동굴이 아니라 누군가가 파낸 굴이라는 뜻이다.
‘배교자들인가?’
배교자들의 근거지. 지금으로서는 그게 가장 유력한 추측이다.
‘그런데 이 냄새는 뭐지?’
하지만 단지 그렇게 생각하기엔 아까부터 진동하는 향기가 수상하다. 귀부인들이 사용하는 향수 냄새가 곳곳에서 번지고 있는데, 숨어지내는 반역자들이 이런 호사를 누릴 리는 없었다.
“출구가 보입니다.”
선두의 기사가 나직이 속삭였다. 말마따나 저 끝에서 빛이 비치고 있었다. 기사들은 차례로 횃불을 끄고 검을 뽑았다. 그러곤 이우라의 명령을 기다리며 조용히 숨을 죽였다. 그런데 그들이 걸음을 멈춘 순간, 그래서 동굴의 울림이 그친 순간 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기익, 기익. 기기긱. 녹슨 무언가를 긁어내는, 하지만 묘하게 조화로운 박자를 지닌 소리였다.
“바이올린……?”
루비드는 저도 모르게 중얼댔다. 그제야 기사들도 저 소리가 현악기 소리와 비슷한 걸 깨달았다. 누군가가 망가진 악기로 연주하고 있다. 상황을 확인한 이우라는 기사들에게 손짓하며 출구로 돌진했다. 이윽고 이우라와 기사들은 비좁은 동굴을 단숨에 주파하고 검을 치켜세웠다. 하지만 그들이 각오한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까마귀……?’
이우라가 눈앞의 광경을 놀랍게 바라보았다. 잠시 후 뒤따라온 루비드도 인상을 쓰며 중얼댔다.
“뭐야, 저게…….”
동굴, 아니. 통로 끝에는 커다란 공터가 있었다. 절벽으로 둘러싸인 넓은 분지, 그곳엔 화려한 옷을 입은 신사와 숙녀가 가득했다. 그들은 마치 무도회에 초대된 사람들처럼 서로 손을 잡고 춤을 췄다. 둥글게, 둥글게,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그저 둥글게. 그리고 그들 옆에는 연미복을 입은 악단이 다 부서진 악기를 재주껏 부리고 있었다. 현이 다 끊어진 바이올린, 목이 부러진 첼로, 깨진 클라리넷 따위가 바람 소리에 미약한 박자를 불어넣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괴한데, 루비드와 이우라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따로 있었다. 무도회의 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는 그들은, 하나같이 까마귀 탈을 쓰고 있었다. 덕분에 북부 형제를 비롯한 기사들은 잠시 얼어붙었다. 하지만 정적 저들은 북부의 기사들이 들이닥친 것에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아니, 인지조차 못 한 것 같았다.
‘까마귀의 패거리인가?’
이우라는 제국의 공적인 까마귀와 똑같은 가면을 쓴 자들을 보며 생각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이우라는 저들이 살아 있는 존재가 맞는지도 의심스러웠다. 문득 어머니의 오르골이 생각났다. 뚜껑을 열면 희미한 음악에 맞춰 작은 발레리나들이 춤추던 오르골. 지금 저기서 춤추는 자들의 모습은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너희는 누구냐?”
이우라가 목소리를 돋워 물었다. 하지만 까마귀 탈을 쓴 자들은 아무 대답 없이 계속 춤만 췄다.
“대답하지 않으면 치겠다.”
위협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말이 통하지 않자 이우라는 옆에 있던 기사들에게 눈짓했다. 명령을 받은 자들은 검을 앞세우고 춤추는 자들에게 접근했다. 기사들이 지척까지 접근해도 그들은 춤추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기사들은 거리를 과감히 좁히고 그들을 관찰했다.
“……탈이 아닙니다.”
잠시 후, 기사 하나가 외쳤다.
“탈이 아니라 머리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한 기사는 드레스 차림의 귀부인을 보고 있었다. 어깨와 목이 다 드러났기에 만약 탈이라면 뒤집어쓴 부분의 끝이 보여야 마땅했다. 그런데 그 기사가 발견한 건 목에 돋아난 검은 깃털이었다. 탈이 아니라 머리라니. 그렇다면 사람 몸에 까마귀 머리가 붙었다는 건가? 이우라는 굳은 얼굴로 춤추는 자들을 바라보다가 기사들에게 다시 손짓했다. 기사들은 지척까지 다가가도 꼼짝 않는 그들에게 손을 뻗었다. 이 괴이쩍은 머리를 뜯어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기사의 손이 까마귀 머리에 닿는 순간, 까마귀가 돌변해서 울부짖었다. 까아악! 그 울음소리를 신호로, 까마귀들이 기사에게 달려들어 그 목을 물어뜯었다. 검고 날카로운 까마귀의 부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