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우리의 죄 앞에2021.05.10.
“끄아악!”
까마귀의 단단한 부리가 기사의 살점을 무자비하게 뜯었다. 다른 기사들이 그를 구하기 위해 몰려든 까마귀의 목을 내리쳤다. 까마귀는 막지도 피하지도 않고 맥없이 썰려나갔다. 까마귀의 머리가 땅에 떨어지자 지독한 향기가 폭발하듯 번졌다. 북부의 기사들을 여기까지 이끈 그 향기였다. 동료가 죽었지만 다른 까마귀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을 건드린 기사에게 몰려들어 그를 뜯어먹었다. 지독한 고통에 기사가 소리질렀다. 다른 기사들은 까마귀를 베어 넘기며 그를 구하려 했지만 순식간에 벌떼처럼 몰려든 까마귀를 어찌할 수는 없었다.
“손을 잡아!”
보다 못한 다른 기사가 검을 버리고 까마귀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그러자 까마귀들이 다시 우짖었다. 그들은 자신을 건드린 존재에게 다시금 득달같이 달려들었고, 또 한 명의 기사를 식탁으로 삼았다.
“물러나라!”
까마귀의 기이한 습성을 눈치챈 이우라가 소리쳤다. 결국 기사들은 뜯기는 동료들을 방치한 채 물러났고, 지독한 비명은 얼마 못 가 멈췄다. 소리가 그치자 탐욕스럽게 푸덕대던 까마귀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일어나 우아하게 춤추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게 시치미를 뗀들 그의 검은 부리와 깃털은 흥건한 피로 번들댔다. 그들의 발밑엔 참혹한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하지만 기사들은 전우의 시체를 거둘 수 없었다. 까마귀들이 그 주변을 맴돌며, 그리고 시체를 밟으며 춤을 췄기 때문이다.
“머리를 가져와라.”
이우라가 까마귀의 떨어진 머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기사들은 목이 베여 쓰러진 까마귀의 머리 하나를 주워 이우라에게 가져갔다. 이우라는 그 거대한 새 머리를 보며 설핏 인상을 썼다. 기사들이 보고한 대로 그건 탈 따위가 아니었다. 깃털도 부리도 진짜였다. 게다가 목이 베인 그것은 벌써 형태를 잃어가고 있었다.
‘썩는 건가?’
이렇게 빠르게?
“……망자.”
옆에서 루비드가 중얼댔다.
“무덤에서 죽은 망자는 바로 녹았어.”
마치 이렇게 흐물대며 땅에 녹아들었다. 루비드는 무덤에서 경험한 것을 떠올리며 말했고, 이우라의 눈빛은 더 심각해졌다. 인간의 몸에 까마귀의 머리를 지닌 존재. 괴이쩍기는 해도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는 없다. 짐승의 몸에 인간의 머리를 가진 존재도 있으니 그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 있을 수 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선 한가지 전제가 성립해야 한다. 그 존재가 망자일 것. 하지만 지금까지 이런 형태의 망자는 보고된 바가 없다. 그렇다면 이들은…….
‘용서받지 못한 왕의 망자.’
그래, 아직 실체를 드러내지 않은 다섯 번째 왕. 그 왕의 망자라고 가정하는 게 지금으로서는 타당하다.
‘하지만 망자라면 연기가 되어 사라져야 한다.’
그런데 이 망자들은 죽고도 연기가 되지 않고 천천히 녹아내리고 있다. 루비드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건 무덤에서 죽은 망자들의 방식이라는 건데, 무덤도 아닌 곳에서 이들은 왜 이런 현상을 보이는 거지? 게다가 지독한 유황 냄새 대신 진동하는 향수 냄새는 또 무엇이고. 이우라는 시체 위에서 태연히 춤추는 까마귀들을 노려보며 검을 뽑았다. 그러곤 단호히 참격을 날려 그들을 쓸어버렸다. 까마귀들은 울음소리도 내지 않고 동강 나 쓰러졌다.
“전사자들을 수습해라.”
이우라의 명령에 기사들은 빠르게 달려가 참변을 당한 이들의 시체를 수거했다. 그사이 다른 기사들은 절단되어 죽은 까마귀들의 상태를 살폈다. 루비드도 그 사이에 있었다. 루비드는 지독한 향기를 소매로 막으며 쓰러진 까마귀들의 옷차림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길 한참, 루비드의 자색 눈동자가 점점 가늘어졌다.
“……본 적 있어.”
루비드는 즐비한 시체를 뒤집으며 그것들이 입은 연미복 형태, 그리고 드레스의 모양을 향해 중얼댔다. 소년 시절 미학 수업을 받으며 시대별로 유행한 복식에 대해서 배운 바 있다. 비슷하지만 미묘하게 다른 문양, 실루엣, 단추의 형태까지 그는 꽤 흥미롭게 학습했었다. 때문에 루비드는 확신하며 말할 수 있었다.
“이건 100년 전 그라샤에서 입던 옷이다.”
“100년 전이요……?”
기사가 반신반의하며 되묻는데, 저편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이쪽을 보십시오!”
루비드와 이우라는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 기사가 경악한 얼굴로 땅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맨 처음 목이 떨어진 까마귀의 시체가 있던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미 십 수 분이 지나 다 녹아버린 시체는 땅에 스민 후였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서 무언가 불쑥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땅에서 솟구친 불분명한 형태는 기괴하게 몸을 비틀더니 이내 막을 찢고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자태를 뽐내는, 까마귀였다. 최초의 그것을 시작으로 땅에 스며든 다른 까마귀들도 하나둘 부활했다. 그러곤 다시 서로서로 손을 잡고 정답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북부의 기사들은 마치 홀린 기분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 클라비스 시렌치움은 늘 생각했다. 망자들의 이름은 하나같이 고약하다고. 영아를 제물로 바친 자에겐 ‘첫 울음을 삼킨 왕’이라는 별명을, 화형을 일삼은 자에겐 ‘태움과 그을림의 왕’이라는 악명을. 누가 지은 이름인지 모르겠지만 어지간한 시인 못지 않아, 남은 왕들의 정체도 더 궁금해진다. ‘많은 심장을 가진 왕’이나 ‘사자를 가둔 왕’은 또 어떤 만행을 저질러 그런 이름으로 조롱받는 걸까? 하긴 무엇이 되었든 ‘용서받지 못한 왕’만큼 얼토당토않은 이름은 아니겠지.
“……기경 전하, 드릴 말씀이…….”
상념에 빠져 있는 추기경의 귓가에 소년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스쳤다. 클라비스는 나른히 고개를 들어 눈앞에 서 있는 앳된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의외라는 듯 웃으며 중얼댔다.
“누가 들여보냈지?”
“네?”
“아, 내가 허락했구나. 미안. 사람이 나이가 많아지면 이래.”
클라비스는 그렇게 말하며 큭큭 댔고 그를 찾아온 소년, 엔지는 속으로 당황했다.
‘별로 많은 나이는 아니신 것 같은데.’
엔지는 그가 여느 때처럼 실없는 농담을 한다고 여겼다.
“그래, 무슨 일이야? 엔지 군. 조사는 진척이 좀 있어?”
“그건…….”
클라비스가 말한 조사는 ‘많은 심장을 가진 왕’과 ‘사자를 가둔 왕’의 진짜 이름에 대한 것이다. 엔지는 클라비스의 총애를 받으며 유수의 학자들과 함께 고대사 조사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관련해서는 안 그래도 보고할 내용이 있었다. 레나 루벨이 자신의 하녀에게 상당한 단서를 남겨둔 걸 엔지는 최근에 알았다. 하지만 엔지가 지금 찾아온 이유는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최근에 전하를 찾아가셨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하셨는지 알고 싶어요.”
엔지가 침착한 얼굴로 대답했다. 요 몇 달 사이 소년은 분위기가 많이 변했다. 공작들 앞에서 첼레스테에 대해 말할 때가 두 달 전이다. 그때 엔지는 순진하고 밝았다. 그저 호기심이 많고 부끄럼 잘 타는 꼬마였다. 그런데 아버지의 이면을 알게 되며, 그리고 제국의 진실을 훔쳐보며 그 소년은 이전의 쾌활함을 대부분 잃어버렸다. 소년은 우울해졌고 얼굴엔 그늘이 졌다. 그럼에도 그 소년은 아직 정직했다. 아니, 순진했다. 이렇게 클라비스를 직접 찾아와 묻는 게 그 증거였다.
“엔지 군은 아버지랑 참 안 닮았네.”
클라비스가 웃으며 한 말에 엔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더니 작심하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이우라 전하의 눈 밖에 난 건 저도 알아요.”
그러지 않고서야, 다들 서부로 향하는데 루벨 후작만 수도에 떼어놓고 갈 리 없다.
“그리고 그 이유도요.”
엔지는 두엄의 궁이 무너지던 날, 아버지가 꾸민 일들을 똑똑히 보았다.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거죠, 엔지 군?”
“혹시 아버지가, 나쁜 계획을 갖고 계신가요?”
클라비스의 물음에 엔지는 긴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버지는 레나 루벨을 함정에 빠트리려다가 오히려 역풍을 맞았다. 그 때문에 입지가 상당히 위태로워졌다. 그래서 근신 중인 것으로 아는데, 아버지는 이우라 전하가 서부로 떠나자마자 다시 황궁으로 들어왔다. 그러고 찾아간 게 추기경이었다. 그걸 뒤늦게 알게 된 엔지는 무서워졌다. 지금은 재가 사제로 공부 중이지만, 엔지는 때가 되면 사제복을 벗고 북부의 귀족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엔지는 북부를 자신의 고향으로 여겼고 이우라를 존경하며 루비드를 좋아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만약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면, 정말 그렇다면. 엔지는 긴장한 얼굴로 클라비스의 대답을 기다렸고, 클라비스는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헛웃음을 터트렸다.
“정말이지 이렇게 순진해서야.”
클라비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더니 가늘어진 눈으로 속삭였다.
“혐오스러울 정도야, 엔지 군. 그런 무지는 죄악이야.”
“네?”
“그걸 나한테 묻는 저의가 뭐지? 아버지가 나쁜 사람 같으니까 나한테 이르는 거야? 아버지를 막아달라고 부탁하고 싶어?”
클라비스의 매몰찬 물음에 엔지는 놀라서 눈을 깜빡였다. 이 순진한 소년은 클라비스가 자기편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대단한 비밀을 공유해주었으니, 그 밖의 일들도 자연히 상의할 수 있는 상대라고 믿는 듯했다. 그 순진한 모습이 귀엽도록 불쌍해서 클라비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착한 아이가 되고 싶은 거라면 뭐 나쁘지 않은 판단이지만, 좀 무책임하지 않아?”
“무책임……이요?”
“엔지 군이 지금 이런 말 하는 걸 아버지가 알면 뭐라고 할 것 같아?”
클라비스의 물음에 엔지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 아버지가 이걸 안다면 노여워하실 것이 뻔하다. 그럼에도 엔지가 클라비스를 찾아온 건 아버지가 더는 잘못된 길로 가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었다. 그 마음이 빤히 읽혀, 클라비스는 다시금 고개를 저었다.
“나름 용기내서 온 것 같은데 판단이 틀렸어. 그것도 한참이나. 지금 네가 할 일은 다른 사람한테 도움을 구하는 게 아니라 선택하는 거야.”
“무슨 선택을…….”
“후작이 이우라에게 내쳐진 이유를 안다고 했지. 그럼 후작이 자충수를 둔 게 누구 때문인지도 알겠지?”
클라비스의 물음에 엔지는 머뭇대다가 끄덕였다. 아버지가 그런 위험한 일을 꾸민 이유. 그건 레나 루벨 때문이었다. 똑똑한 아이. 하지만 아직 순진한 아이. 사람을 좋아할 뿐인 유약한 아이. 클라비스는 이 소년을 보며 먼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다. 어쩌면 닮았는지도 모르겠다. 이 한심한 우유부단함이.
“안타깝지만 엔지 군, 아버지를 존경하면서 누나를 좋아할 순 없어. 방관자처럼 이 사람 저 사람 걱정하지 말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해.”
그래서 클라비스는 일부러 더 신랄히 말했다.
“지옥에서 돌아온 누나를 뒀다면, 동생도 그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어?”
클라비스의 충고에 엔지는 하얗게 질렸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니.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다. 아니, 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아버지와 누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니. 엔지는 상처입은 얼굴로 클라비스를 바라보았고, 클라비스는 그 가련한 소년을 향해 짙게 웃으며 턱짓했다. 더 할 말 없으면 나가보라는 뜻이었다. 결국 엔지는 상처 입은 얼굴로 묵례하며 돌아섰다. 클라비스는 그 모습을 턱을 괸 채 보다가 여상히 웃는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가슴 한 구석이 아릿하게 아팠다. 오랜만이다, 이런 감각. 이런 감정. 더 이상 죄책감 따윈 느낄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자신과 꼭 닮은 소년을 보니 모처럼 마음이 움직였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사람이 좋아서 우유부단하게 지켜만 보았고 결국 하나뿐인 누이를 지키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 와서는 너의 죽음을 열망한다.
“아.”
웃으며 생각하던 클라비스는 문득 떠올렸다. 서부로 향한 아이들. 강하고 영리한 제국의 개들. 너희들은 찾았을까? 아직도 춤추는 그날의 망령들을. 과연 우리의 죄 앞에 얼마나 가까워졌을까. 문득 가슴이 뛰었다. 공포와도 같은 설렘이었다. 클라비스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그 낯선 고동을 조용히 느꼈다. 그는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시를 쓰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