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레나 루벨의 경멸2021.05.13.
동생이 명랑한 목소리로 누나의 이름을 불렀다.
“레나.”
하지만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 그는 더 공손한 태도로 누나를 불러보았다.
“누나.”
그제야 소파에 누워 있던 누나가 고개를 돌렸다. 비스듬히 몸을 일으킨 그라샤의 국왕, 레지나는 피곤한 눈으로 자신의 동생인 클라비스 대공을 바라보았다. 클라비스는 대공답지 않게 어리고 예쁜 얼굴로, 잉크가 잔뜩 묻은 종잇장을 들고 있었다. 격무에 시달리다 모처럼 휴식하던 임금은 자신의 집무실로 쳐들어온 동생을 귀찮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클라비스는 누이의 시선을 무시하며 철없이 물었다.
“내가 준 거 읽어봤어?”
“어.”
“그럼 거기서 ‘꽃을 드리겠습니다’가 나아, ‘꽃을 드리려 합니다’가 나아?”
동생의 명랑한 물음에 레지나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작문은 클라비스가 가진 유일한 재능이었다. 하지만 그나마도 시나 노래를 짓는데 허비하고 있으니, 누가 이 녀석을 왕족이라 여길까 싶었다. 레지나는 예쁜 얼굴 말고는 어디에도 쓸모없는 동생이 한심스러웠지만,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답해주었다.
“그게 뭔 차이야?”
“전자는 이미 결정한 거고, 후자는 계획을 세우는 단계인 거지. 어감은 ‘드리겠습니다’가 더 좋은데 어미를 통일하려면 ‘드리려 합니다’가 더 나아서 어떤 걸 할지 고민 중이야.”
“아니, 그래서 그게 무슨 차인데?”
“무슨 차이냐니, ‘드리겠습니다’랑 ‘드리려 합니다’는 엄청 다르잖아?”
“어쨌든 준다는 거잖아. 아니, 그 전에 밉다면서 꽃을 왜 주는 거지? 독풀이냐?”
“……누나, 너는 존재 자체가 문학에 대한 모독이야.”
“뭐 임마?”
클라비스는 문학적 표현을 조금도 이해 못 하는 레지나를 비난했고, 레지나는 건방지게 기어오르는 동생을 잡으려고 몸을 일으켰다. 누나의 성미를 아는 클라비스는 냉큼 몸을 내뺐다. 하지만 도망쳐봐야 손바닥 안이었다. 레지나는 토끼를 사냥하는 사자처럼 클라비스를 단숨에 붙잡았고, 붙잡힌 클라비스는 웃다가 비명을 지르고 다시 웃었다. 동생이랑 한바탕 놀아준 레지나는 다시 소파에 풀썩 앉았다. 마냥 낄낄대며 웃는 동생과 달리 누나는 피식대면서도 눈가에 근심이 가득했다. 그걸 본 클라비스가 카펫에 엎드린 채 물었다.
“잠은 좀 잤어?”
“잤겠냐?”
레지나는 피곤한 듯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미친 꼰대들, 나라를 이따위로 만들어놓고 떠넘기다니…….”
“그 말 대신들이 들으면 난리 날걸.”
“그러니까 너한테 하잖아.”
누이의 투박한 불평에 클라비스는 두 손으로 턱을 괸 채 빙긋 웃었다. 그걸 본 레지나가 왜 쪼개냐며 타박했다. 클라비스는 풀밭에 누운 소년처럼 레지나를 올려다보며, 하늘처럼 푸르고 맑은 눈으로 대답했다.
“레나, 너는 잘할 거야.”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내 누나.
“나 대신 누나가 왕이 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단단한 어깨로 세상을 짊어진 나의 왕.
“넌 정말 뛰어나니까, 사람들도 곧 알아볼 거야.”
누구보다도 존경스러운, 그리고 강인한 레지나. 너라면 분명 해낼 수 있을 거야. 고통받는 백성을 구하고 모두에게 사랑받게 될 거야. 왜냐하면 너의 진심은 정말 고결하고 이 세상도 사실은 다정하니까.
“그러니까 기운 내, 레지나.”
클라비스의 다정한 격려에 레지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그를 쳐다봤다. 그러고 나서 뭐라고 했지? 아, 맞아. ‘당연하지’라며 여느 때와 같이 거만하게 웃었다.
너는 내 한심한 격려를 가소로워하면서도 기꺼워했고, 나는 네게 이렇게나마 힘이 될 수 있던 것에 만족했다. 그리고 한 세기가 지난 지금 나는 그 모든 것을 후회한다. 널 몰아세운 안일함도, 세상의 악의를 얕보았던 순진함도, 네 곁에서 쓰던 시의 모든 구절까지도. 하지만 그게 내 잘못만은 아니지.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춤을 춘다. 평생토록,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 자가 용서받게 될 때까지. *** 레나는 일지를 바쁘게 넘겼다. 하지만 ‘영원히 춤추는 자’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없었다. 그저 그들을 감시하는 상황에 대해서만 주기별로 짤막하게 보고될 뿐이었다.
‘대체 뭐지?’
레나는 그들에 대해 아무것도 추론할 수 없었다. 린에게 물어보면 더 자세히 알 수 있을까? 레나는 의문을 뒤로한 채 책장을 넘겼다. 그러자 또 다른 접힌 페이지가 펼쳐졌다. ―93년 3월 11일. ―균열 감시를 위한 인력 파견. 배치 인원 350명. 교대자 포함. 새롭게 발견된 문장에 레나는 설핏 미간을 좁혔다.
‘균열…….’
어떤 균열을 말하는 거지? 93년에 있는 균열이라면 남부의 균열이다. 그런데 고작 350명을 보낸다고? 침묵 전쟁이 한창인 곳에?
‘외부로 보내는 인력은 아니야.’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
‘서부 성 지하에 있던 균열이다.’
그래,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타당하다. 시기도 규모도. 서부에 저 대규모 균열이 발생한 건 95년이니까, 이때 말하는 균열은 클라비스가 성에 숨겨둔 작은 균열을 말하는 거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레나의 뇌리에 서늘한 기억이 스쳤다. 6년 전, 집에서 끌려 나와 도착한 서부 성. 레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남자는 겁에 질린 레나에게 만찬을 베풀었다. 그다음엔 목욕을, 새 옷과 푹신한 침대도 선물했다. 그로써 레나가 겨우 기력을 되찾자 그는 레나를 성 지하의 붉은 균열 앞으로 데려갔다. 마치 깨진 유리창처럼 흉측하게 벌어진 붉디붉은 균열 앞으로. 레나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책장을 넘겼다. ―93년 3월 13일. ―제물 2명이 균열로 진입함. 특이사항 없음. ―93년 3월 16일. ―제물 17명이 균열로 진입함. 특이사항 없음. ―93년 3월 21일. ―제물 33명이 균열로 진입함. 특이사항 없음. ―93년 4월 5일. ―균열에서 망자가 나와 감시병 38명 사망. 인원 보충 요망. 균열의 규모를 축소하는 것을 건의함. ―93년 4월 6일. ―제물 47명이 균열로 진입함. 특이사항 없음. 기록을 읽던 레나는 어지러움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일지에 기술된 사무적인 보고는 레나에게 구역질을 일으켰다. 예상은 했다. 내가 처음일 리 없다고. 심지어 그가 직접 말하기도 했다.
―어떤 곳인지 궁금해서 친구들을 많이 보냈는데 아직 아무도 안 돌아왔어.
―그래서 조건을 맞춰봤어. 황제처럼 곱게 자란 여자아이면 될까 싶어서.
당시엔 알아들을 수 없던 말이 이제야 선명히 이해되어 레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고요히 분을 삭이던 레나는 흠칫 놀라 책장을 빠르게 넘겼다. 하지만 원하는 날짜가 나오지 않자 레나는 다른 책을 집어 들었다. 무언가를 분주히 찾던 레나의 손이 덜컥 얼어붙었다. 한 줄의 기록이 있었다. ―94년 4월 19일. ―제물 1명이 균열로 진입함. 특이사항 없음. 단 한 줄이었다. 앞서 적힌 것과 다를 것이 없는, 흔하고 무의미한 한 줄.
“누님,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레나가 굳어 있자 소년이 걱정스레 물었다. 그래서 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무것도.”
그래,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그들의 문장으로 6년 전 무덤으로 떠밀려진 아이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특이사항 없음’이 되었다. 자신의 처지는 이미 잘 알지만 그걸 눈으로 직접 확인하니 심정이 참담했다. 레나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숨을 깊게 마셨다. 그리고 다시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찬란한 아침의 하늘이 사랑하는 시구를 떠올리게 했다.
‘그래, 증오할 가치도 없어.’
클라비스 시렌치움 그라샤. 망령 중의 망령. 그런 자에게 소모할 감정은 없다. 시간은 손 틈새로 흐르는 모래처럼 빠르게 사라진다. 사랑하기에도 부족하다. 좋은 것으로 채우기에도 모자라다. 그래서 레나는 클라비스에 대한 경멸을 키우는 대신 잠자코 시를 외웠다. 하지만 사랑하는 시인의 당부처럼 그에게 꽃을 바칠 마음은 차마 들지 않았다.
‘복수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많이 봐준 거야.’
레나는 차갑게 코웃음 치다가 도로 표정을 굳혔다. 아니, 복수를 더 달갑게 생각하려나? 클라비스는 말했다. 죽고 싶다고. 오직 바라는 건 그뿐이라고. 그럼 네가 무덤으로 뛰어들던가. 불쑥 짜증이 솟구쳤지만 레나는 다시 꾹 눌러 참았다. 그러곤 조금 지쳐서 책을 덮었다. 아직 볼 게 많이 남았지만, 이 소년을 이대로 옆에 세워둘 수는 없었다. 게다가 배도 고팠다. 그래서 레나는 잠시 후 다시 살펴볼 요량으로 책을 덮었는데, 지켜보던 소년이 성에 차지 않는 듯 끼어들었다.
“아직 제일 중요한 것을 안 보셨습니다!”
“네?”
소년이 책을 골라 손수 펼쳐서 보여주었다. 레나는 얼떨떨해하며 그 소년이 내민 것을 들여다보았다. ―95년 12월 20일. ―황제 폐하께서 서부 성으로 향하는 중이라는 첩보 입수함. 뜻밖의 문장에 레나의 눈이 커졌다.
‘황제가……?’
니힐 그라샤, 게으른 고양이보다 하는 게 없는 그 황제가? 벌써 수십 년째 황궁에서 두문불출한다고 하지 않았나? 레나는 얼떨떨해하며 다음날의 기록을 서둘러 읽었다. ―95년 12월 23일. ―황제 폐하께서 서부에 입성. 잠행 중임을 감안하여 최소의 인원으로 보좌. ―95년 12월 25일. ―황제 폐하와 서부공 접견. 특이사항 없음. 과연 특이사항이 없었을까? 레나는 불쾌한 예감에 미간을 찌푸렸다. 기록은 거기서 끊겼다. 아직 지면이 가득 남았는데, 아무 예고도 없이 덜컥 멈췄다.
‘서부에 균열이 생긴 게 정확히 언제지?’
레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기억을 더듬었다. 그건 겨울이었다. 레나도 어렴풋이 기억한다. 무덤에서 돌아와 낯선 도시에서 아름아름 살길을 찾고 있을 때였다. 새해가 밝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추운 날, 거리가 소란했다. 길거리의 사람들이 마구 떠들었다. 그들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래서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니 서부에 거대한 균열이 열렸다는 소리가 들렸다. 망자들이 쏟아져 나오고, 서부 사람들이 무수히 죽었다고 했다.
‘그럼 니힐이 방문하고 서부에 대균열이 일어났다는 건가?’
니힐이 직접 움직인 것에 아무 의미가 없지는 않을 터. 의심하던 레나의 뇌리에 클라비스와 나눈 대화가 퍼뜩 떠올랐다.
―황제의 총애가 어지간해서 말이야. 독을 먹였을 때도 안 죽었고, 서부가 박살 나도 오히려 추기경이 됐잖아? 아마 제국을 다 부숴도 나는 안 건드릴 거야.
온실 속 다과회에서 클라비스는 이렇게 말했다. ‘서부가 박살 났는데 오히려 추기경이 됐다’고. 그 인과관계가 과연 온전한 것일까? 그 교활한 추기경이 있는 그대로 말한 게 맞나? 만약, 니힐이 서부를 박살 내고 클라비스를 추기경으로 만든 거라면? 의심을 시작한 레나의 머릿속에서 조각들이 하나둘씩 맞춰졌다.
―황제가 날 안 죽여서.
―나는 너무너무 죽고 싶거든.
―지금도 오직 그 생각뿐이야.
누나를 죽이고 싶어하던 클라비스. 그리고 그런 동생을 놔주지 않고 살려두는 니힐. 하지만 니힐은 반역자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 폭군은 독을 먹은 날 그 날짜의 숫자만큼 사람을 죽였다.
‘그때, 범인이 클라비스인 걸 몰랐을까?’
만약 알았다면, 그런데도 클라비스는 놔둔 채 주위에 분풀이를 한 거라면. 서부 성 지하에서 클라비스가 하던 일이 발각되었을 때, 니힐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레나는 아찔한 가설에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넌 대체 얼마나 많은 죄를 지은 거지?’
그러고도 뻔뻔하게 사제복을 입고 기도하는 클라비스를 떠올리며 레나는 신물을 삼켰다. 겨우 마음을 가라앉힌 레나는 애써 웃으며 소년에게 인사했다.
“고마워요. 많은 도움이 됐어요.”
안 그래도 궁금했다. 자신이 무덤에 떨어진 후 서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름 조사해보려고 했지만 서부의 비밀을 파헤치는 건 아버지의 뒤를 캐는 것보다 어려웠다. 그런데 여기서 이런 수확을 얻다니. 레나가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자 소년은 기쁘게 끄덕였다. 그러더니 다시 조심히 운을 뗐다.
“까마귀 누님, 하나만 여쭈어도 되지요?”
“네, 괜찮아요.”
“제국이 앞으로 얼마나 더 지속될 것 같습니까?”
뜻밖의 물음에 레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무슨 의미인가 싶어 쳐다보니, 소년이 간절히 되물었다.
“세상이 영원히 이렇지는 않겠지요?”
그는 이 괴물 같은 나라가 언제까지 대륙을 통치할지 진심으로 궁금해하고 있었다. 덧없는 희망을 얻고 싶어서 한 말 같기도 했다. 레나는 어떻게 대답할까 고민하다가 이 소년에게 도움받은 걸 떠올리고 다정히 대답했다.
“네, 영원히 이렇진 않을 거예요.”
“그럼 언제쯤 끝이 날까요?”
소년이 다시 물었다. 그래서 레나는 이번에도 있는 그대로, 솔직히 답했다.
“1년 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