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앞으로 1년2021.05.17.
“1년이요?”
레나의 대답에 소년의 눈이 동그래졌다. 소년은 이 끔찍한 제국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물었다. 그에 대한 레나의 대답은 1년이었고, 소년은 놀란 표정을 짓더니 픽 웃었다.
“실없는 소리를 다 하십니다.”
그는 레나의 말을 진지하게 듣지 않았다.
“그래도 듣기는 좋습니다.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레나도 소년의 생각을 굳이 고치려 들지 않았다. 여기서 더 주장해본들 득 볼 것도 없어, 레나는 마주 웃으며 말을 돌렸다.
“그렇게 되면 뭘 하고 싶어요?”
“고향에서 친구들을 만나고 싶습니다. 거기서 내 사람들하고 사람답게 살고 싶습니다.”
“사람답게요?”
“왜 웃습니까? 나이가 어려도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정도는 압니다.”
레나가 웃으며 중얼대자 소년이 진지하게 반박했다.
“이렇게 숨어 사는 건 사람다운 게 아니지요. 늘 두려워하며 사는 것도요.”
“미안해요, 웃을 이야기가 아니었네요.”
레나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사과했다. 그러자 소년은 화난 기색 없이, 하지만 조금 의기양양하게 끄덕였다. 그 야무진 모습이 마치 동생 같아 레나는 무심코 물었다.
“이름이 뭐예요?”
“통성명 해도 되는 사이입니까?”
레나는 뒤늦게 아차 했고 소년은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진이라고 합니다. 누님 이름은 몰라도 됩니다. 형님 같은 까마귀니까요.”
형님 같은 까마귀. 레나는 그 말에서 린에 대한 신뢰를 느꼈다. 그래서 조금 궁금해졌다. 까마귀라는 신원미상의 존재가 자신들의 운명을 쥐고 있는데, 정말 궁금하지 않을까? 나라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정체를 알아낼 것 같은데. 하지만 레나는 질문을 삼켰다. 어리다고 방심했다가 연이어 허를 찔린 탓이었다. 그런데 소년, 진은 그 생각마저 읽은 것처럼 태연히 말했다.
“제국에서는 까마귀를 불길하게 여기지요? 동방에서는 반대입니다. 우리 고향에서 까마귀는 매일 밤 태양을 먹는 신령입니다.”
“그래요?”
“네. 그리고 신령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지만 사람과 접촉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러다 잘못하면 사람이 되어버리거든요. 까마귀 형님도 그런 겁니다.”
그러니까 까마귀는 까마귀로 남겨두겠다, 뭐 이런 말인가? 레나는 갸웃대며 생각하다 흠칫 놀랐다.
‘설마……?’
설마 린 씨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는 건가? 레나가 속으로 의심하는데 진이 해처럼 웃으며 덧붙였다.
“그래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뭐가요?”
“형님이 혼자가 아니어서요.”
그 말에 레나는 확신을 얻었다. 그래, 모를 수 없다. 이 사람들도, 어쩌면 린 씨도. 다만 서로의 상황 때문에 거리를 두는 거다.
“계속 곁에 있어 주실 거지요?”
진이 눈치를 보며 되물었다. 그게 마치 흠 많은 형을 부탁하는 투여서 레나는 왠지 울고 싶어졌다. 까짓거 내가 책임질게요, 이렇게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빈말은 할 수 없었다.
“……계속은 어려워요.”
“어째서요?”
“개인 사정이요. 하지만 1년 정도는 가능할 거예요.”
“인색합니다.”
“인색하다뇨.”
그게 저한텐 남은 평생인걸요. 레나는 웃으며 이 뒷말을 삼켰고, 진은 다시 뭐라고 대꾸하려다가 레나의 뒤를 보고 소리쳤다.
“앗, 오셨습니까!”
그를 따라 돌아보니 길 어귀에 까마귀 탈을 쓴 남자가 서 있었다. 막 돌아온 참인 듯한데, 어째선지 그는 멈춰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얘길 들었나?’
레나가 혹시나 싶어 살피는 사이 린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는 동부어로 뭐라 말했고, 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후다닥 언덕길로 내달렸다. 곧 둘이 되었지만 린은 말이 없었다. 그래서 레나가 먼저 물었다.
“무슨 얘기 하고 왔어요?”
“실종자가 생겼어.”
“실종자요?”
“접경지 쪽을 감시하는 사람들이 며칠째 돌아오지 않았대.”
린이 조금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접경지라면 레나가 지나온 곳이다. 레나는 가만히 듣다가 놀라서 되물었다.
“혹시 그 사람들도 린 씨처럼 동물 탈을 쓰나요?”
“봤어?”
“제단으로 망자를 조종하고요?”
“맞아. 본 거야?”
“네. 접경지 쪽 계곡에서요. 그 사람들이 북부공을 습격했어요.”
레나의 대답에 린이 난감한 듯 턱을 쓸었다. 그래서 레나는 서둘러 덧붙였다.
“하지만 잡히진 않았어요. 기사들이 발견한 건 동물 탈 뿐이었어요.”
“그럼 왜 아직 안 돌아오지?”
린의 혼잣말에 레나가 또 한 번 놀라서 대답했다.
“동부 기사들이 계곡에서 아직 린 씨를 찾고 있어요. 그래서 못 돌아오는 걸지도 몰라요.”
동부 기사들은 주인의 시신이라도 수습하겠다며 그 일대를 수색 중이다. 그러니 계곡에 숨었다면 그들은 옴짝달싹 못 하는 상황일 거다.
“서둘러 돌아가야겠어요.”
레나의 대답에 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바쁘게 움직이는 대신 낮게 물었다.
“너는 무슨 얘기 했어?”
“저요?”
“1년이라는 건 뭐야?”
아, 역시 들었구나. 왜 멀리 서 있나 했더니, 진에게 하는 말을 듣고 멈췄나 보다. 레나는 공교롭다고 생각하면서도 순순히 대답했다.
“말 그대로예요. 앞으로 1년을 생각하고 있어요.”
린에게는 이미 모든 것을 알려주었다. 그러니 더 감출 이유도 없어 레나는 조용히 털어놓았다.
“저는 1년 안에 니힐과 무덤으로 돌아갈 거예요.”
*** 수색을 마치고 성채로 돌아온 이우라는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무장도 풀지 않고 귀빈실로 향한 그는 그대로 문을 박찼다. 이우라가 기사들과 함께 들이닥치자 방 안에 있던 여자가 소리쳤다.
“노크도 없이 대체……!”
그렇게 외친 여자, 레나 루벨은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 이우라는 레나의 항의를 무시하고 침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방금 보고받은 그대로다. 석양이 내리쬐는 침대에 죽은 줄 알았던 동부공이 누워 있었다. 이우라는 두말 않고 동부공의 가슴에 덮인 이불을 걷었다. 그러자 벗은 상체가 드러났다. 그의 몸은 만신창이였다. 동부공의 몸이 드러나자 그의 약혼녀가 화를 내며 일어났다.
“이게 무슨 무례죠?”
“어디서 찾았지?”
“서부 도심에서 찾았어요! 궁금한 게 있으면 내일 정식으로 물으시죠, 누워 있는 사람 앞에서 이럴 게 아니라!”
레나는 매섭게 쏘아붙이며 이우라가 던진 이불을 다시 가다듬었다. 하지만 이우라는 개의치 않고 되물었다.
“도시에 있는 건 어떻게 알았지?”
“그걸 꼭 지금 확인해야 하나요?”
“대답해라.”
“계곡에선 못 찾았으니까요.”
“거짓말을 한 이유는?”
“거짓말이라뇨?”
“경은 위험하니 수색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했다. 동부공을 찾으러 간다고 하지 않고.”
연이은 추궁에 레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그러더니 화를 꾹꾹 눌러 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신이 동의할 것 같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거짓말을 하고 혼자 찾아왔다? 동부의 기사들이 며칠 동안 수색해도 못 찾은 자를?”
“날 의심하는 건가요?”
“여지는 충분하다.”
“당신, 동부공을 사람 취급도 안 했잖아.”
기어이 레나의 두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레나는 상처받은 얼굴로 이우라를 노려보며 말했다.
“당신이 동부공을 찾는 데 조금이라도 신경 썼다면 나도 솔직히 말했겠지. 하지만 당신은 동부공이 실종됐다는 소릴 듣고도 아무것도 안 했어. 여기 있는 당신 사람 단 한 명도 움직이지 않았다고. 그래놓고 이제 와서 왜 말 안 했냐고?”
레나는 빠르게 말하며 이우라를 맹렬히 쏘아봤다. 이우라도 가늘게 뜬 눈으로 그 시선을 마주했다.
“사실 죽기를 바란 거잖아. 동부공처럼 신의를 모르는 작자는. 안 그래?”
눈싸움을 하던 레나가 차갑게 중얼댔다. 하지만 그 가시 돋친 말에도 이우라의 표정은 여상히 단단했다.
“여긴 사교계가 아니다.”
“……무슨 뜻이죠?”
“여자가 감정적으로 하는 말이 허용되는 장소가 아니다. 언성을 높인다고 경의 수상함이 해명될 거라고 생각하나?”
이우라의 냉정한 대답에 레나는 일순 얼이 빠졌다. 가슴이 답답한 와중에 내심 섬뜩했다.
‘이 인간 쓸데없이 예리하잖아.’
게다가 필요 이상으로 재수 없다. 방금 레나가 내비친 분노는 모두 연기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우라의 반응은 끔찍했다. 만약 이 상황이 진짜라면 못견디게 억울할 것 같았다. 레나가 질린 표정을 지었지만 이우라는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그저 찾아냈다고 하면 납득할 거라고 생각했나?”
“제게 공을 납득시킬 의무는 없어요.”
“의심을 면할 책임은 있지.”
이우라는 집요했다. 그는 생환한 동부공의 처지 따윈 개의치 않았고, 심지어 기사들을 대동하고 온 터라 수적으로 열세인 동부 기사들은 함부로 나서지도 못했다. 레나가 이걸 어떻게 타개할까 고민할 때였다.
“시끄러워.”
잠기고 갈라진 목소리가 돌연 끼어들었다. 연이은 고성에 깨어난 동부공이었다.
“그렇게 잘 짖는지 미처 몰랐군. 내 앞에선 한마디도 안 해서 과묵한 줄 알았는데.”
상체를 일으킨 동부공이 이마를 짚은 채 중얼댔다. 그러더니 날카로운 비소로 이우라를 조롱했다.
“설마 여자 앞에서만 떠드는 거였나?”
“……천박한 놈.”
“누가 할 소릴.”
동부공이 코웃음을 쳤다. 그러더니 싸늘한 눈으로 되물었다.
“할 말이 남았으면 내게 직접 해라. 남의 여자에게 매달리지 말고.”
저열한 비난에 이우라의 이마에 금이 갔다. 그는 매몰찬 눈으로 동부공을 쏘아보다가 상종하고 싶지 않다는 듯 돌아섰다. 이우라가 빠른 걸음으로 떠나자 동부의 기사들은 그제야 겨우 긴장을 덜었다. 하지만 완전히 안심하지는 못했다. 동부공의 서슬이 여전히 퍼렇게 서 있는 탓이었다. 동부공을 지키지도 찾지도 못한 기사들은 처벌을 기다리듯 긴장하고 섰다. 그때 나긋한 목소리가 그들을 구했다.
“여러분도 그만 가보세요. 저하 곁엔 제가 있을게요.”
레나 루벨의 말에 기사들은 허락을 구하듯 동부공을 바라보았다. 동부공은 자신의 무능한 기사들을 싸늘히 주시하더니, 이내 귀찮다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그로써 해방된 기사들은 어느 때보다 신속하게 걸음을 옮겼다. . . . 한참 후, 둘이 남은 레나와 린은 약속이라도 한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곤 살얼음판을 막 건넌 서로를 격려했다.
“그래도 잘 넘겼네.”
“모르겠어요, 북부공은 정말 만만치 않네요.”
“그때 좀 더 깊게 벨 걸 그랬어.”
“기회는 또 오겠죠.”
레나의 섬뜩한 예측에 린은 그만 실소를 터트렸다. 그러곤 다시 한번 숨을 길게 뱉었다. 레나와 린은 모두의 눈을 속이며 ‘가까스로 생환한 동부공과 그를 구해온 약혼녀’가 되었다. 이우라의 집요한 의심 때문에 잠시 위태로웠지만, 린의 말마따나 그럭저럭 잘 넘긴 것 같았다. 레나는 진이 다 빠져 이미 침대에 누운 린에게 말했다.
“저도 조금 있다가 갈게요.”
“어디를?”
“네?”
레나가 되묻자 린이 순진한 얼굴로 답했다.
“내 옆에 있는다며.”
“진짜 다친 것도 아닌 주제에…….”
레나가 중얼대며 타박했지만 린은 말없이 레나를 바라보았다. 레나는 그 애잔한 시선에 약했다. 그래서 못 이기는 척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하지만 린의 눈빛은 여전히 불쌍했고, 레나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더 못 이기는 척 린의 옆에 누웠다. 린은 그제야 만족하며 레나에게 팔베개를 해주었다. 레나는 스스럼없이 닿아오는 린을 보며 마주 웃었다. 다른 사람에게 폭 안기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너무 오랜만이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사람의 체온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린도 레나가 품에 들어오자 안심한 듯 눈을 감았다. 그러곤 레나의 긴 머리카락을 찬찬히 쓸었다. 성채에 도착하자마자 씻어서 레나의 머리는 조금 젖어 있었다. 린은 그 매끈함을 느긋이 감상하다가 속삭였다.
“그거 아직 나한테 있어.”
“그거요?”
“그 머리 장식.”
머리 장식? 아, 기사들이 동부공의 짐을 풀다가 전해준 진청색 리본.
“생일인 줄 알았으면 더 좋은 걸 샀을 텐데.”
린이 문득 생각난 듯 말했고 덕분에 레나는 상당히 부끄러워졌다. 그 리본을 린에게 집어던진 일이 생각난 탓이다. 그땐 너무 감정적이었다. 그래서 민낯을 고스란히 보여준 게 레나는 적잖이 창피했다.
“……이유 없는 선물이라서 더 기뻤어요.”
레나는 민망함을 삼키며 대답했다. 진심이었다. 그건 네가 아무 이유 없이 날 생각해줬다는 거니까.
“다음 생일엔…….”
린은 무심코 입을 열다가 멈췄다. 다음 생일이라니, 그때도 함께 있을 수 있을까? 레나는 1년이라고 했다. 앞으로 겨우 1년. 숨 가쁠 만큼 짧은 시간이다. 린이 말을 멈추자 레나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곤 웃으며 그와 눈을 맞췄다.
“린 씨, 그런 표정 지으면 너무 불쌍한 거 알아요?”
“……몰라.”
“짧지 않은 시간이에요.”
레나는 린을 달래려는 듯 자그마하게 속삭였다. 린은 말 없이 레나에게 고개를 파묻었다. 레나는 자신을 안아주던 사람이 안겨 오자 그가 했던 것처럼 다정히 끌어안았다.
“길지도 않은 시간이야.”
“쉽지도 않을 거예요.”
그들의 앞에 놓인 일들은 하나같이 험난하다. 레나의 일도, 린의 일도,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상황도. 하지만 이미 발을 내디딘 이상 레나는 물러날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걱정 마세요. 내가 린 씨를 지켜줄게요.”
당신의 몸과 마음, 그리고 홀로 지켜온 것들도. 레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스스로에게 놀랐다. 이 사람이 언제 이렇게 소중해졌나 싶었다. 아, 어쩌면 이미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시를 닮은 사람. 내가 이곳에서 얻은 마지막 시. 레나는 선물 같은 그에게 남은 시간을 다 줘도 아깝지 않았다. 그리고 레나에게 평생을 바치고 싶은 건 린도 마찬가지였다. *** 보름 후 서부에서는 대대적인 토벌전이 벌어졌다. 그 가운데 레나와 린도 함께 있었다. 죽은 자들과의 치열한 전쟁이 이어졌지만 그들은 차라리 이 순간이 계속되길 바랐다. 적어도 싸우는 동안엔 함께 할 수 있으니까. 앞으로 1년. 사랑만 하기에도 모자란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