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0화. 온기 (110/208)

110화. 온기2021.05.20.

16562821840469.jpg

  레나 루벨이 황궁을 떠난 지 며칠이 지난 날이었다. 가볍고 빠른 발소리가 울리더니, 남부공의 집무실 문이 벌컥 열리며 한 아이가 등장했다.

16562821840475.jpg“저기요! 영감님!”

1656282184048.jpg“오늘도 무엄하기가 이를데없군.”

하얗게 질린 비서들 사이에서 남부공이 혀를 찼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호위 기사들이 만류할 틈도 없이 몸통으로 문을 박차고 들어온 유니가 남부공의 안전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 화난 걸음에 연둣빛 치마가 찰랑대며 흔들렸다. 유니는 예의 흑색 하녀복이 아니라 귀족 아이처럼 연노랑색과 녹색이 섞인 고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유니는 옷이 거추장스러운지 치마를 움켜쥔 채 남부공에게 따졌다.

16562821840475.jpg“왜 절 감금하시는 거죠?”

1656282184048.jpg“감금이라니 큰일 날 소릴…….”

남부공은 한숨을 쉬며 해명했다.

1656282184048.jpg“곡해 마라. 가두는 게 아니라 호위하는 거다.”

16562821840475.jpg“아무 데도 못 가게 하는 건 가두는 거죠.”

1656282184048.jpg“가고 싶은 곳을 말하면 기사들이 데려다줄 텐데 뭐가 문제냐?”

16562821840475.jpg“그러니까 커다란 아저씨들이 감시하며 따라오는 게 문제예요!”

남부공은 귀가 따가운지 잠시 귀를 막았다. 그러곤 노여워하는 꼬마에게 설명했다.

1656282184048.jpg“일전에 납치당할 뻔하지 않았나. 하여 필요한 조치를 했을 뿐인데 무슨 불만인가?”

두엄의 궁이 무너지던 날, 유니가 어디론가 끌려갈 뻔했던 걸 남부공도 잘 알고 있었다. 루벨의 사주로 남부 기사들이 벌인 짓이니 모르려 해도 모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레나가 서부로 떠난 직후 유니에게 호위를 붙였다. 황궁에서 혼자 알짱거릴 꼬마의 신변이 염려된 탓이었다.

16562821840475.jpg“그 사람들은 이미 쫓겨났잖아요, 그러니까 필요 없어요.”

1656282184048.jpg“그건 모를 일이다. 네게 사고라도 나면 집행자가 가만히 있지 않을 터. 걱정을 끼치고 싶은 건 아니겠지.”

16562821840475.jpg“그건 그렇지만……!”

직설과 직언이 무기인 유니는 상대의 맞는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실은 유니도 호위가 붙은 까닭을 이해했다. 필요성에도 동의했다. 그럼에도 이렇게 항의하는 이유는 레나가 남긴 부탁 때문이었다.

16562821840475.jpg‘아가씨가 그 녀석한테 전해주라고 한 게 있는데…….’

그 녀석. 엔지 루벨. 갑자기 서부로 향하게 된 레나는 떠나기 전에 무언가를 잔뜩 쓴 종이를 유니에게 넘겼다. 그러면서 그걸 엔지에게 전해 달라고 했다. 그리 어렵지 않은 부탁이었다. 그런데 남부공이 호위를 붙이며 상황이 달라졌다. 유니는 더는 세탁실에 갈 일이 없어졌고, 혼자 돌아다니는 것도 불가능해졌으며, 그래서 엔지를 만날 수도 없어졌다.

16562821840475.jpg‘차라리 솔직히 말할까?’

아가씨가 엔지한테 전해주라고 한 게 있다고. 잠시 생각하던 유니는 곧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16562821840475.jpg‘아가씨가 엔지를 꼭 집어서 말한 건 이유가 있을 거야.’

생각해 보니 남부공 영감이 이 일을 반가워할 리 없다. 어쨌든 엔지 루벨은 북부 귀족이니까. 게다가 이 쪽지 내용을 들키면 괜한 의심을 살 수도 있다. 때문에 난관에 부딪힌 유니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혼자 끙끙댔다. 그렇게 불만 섞인 눈으로 쳐다보자, 남부공이 비서에게 손짓해 무어라 속삭였다. 잠시 후 궁인들이 과자나 케이크 따위를 잔뜩 가져왔고, 뇌물을 대령한 남부공이 유니에게 한숨처럼 말했다.

1656282184048.jpg“그거나 먹어라.”

16562821840475.jpg“주시니 먹을 뿐 할 말이 끝난 건 아니에요.”

유니는 말대꾸하면서도 테이블에 앉아 적극적으로 과자를 집어 먹었다. 그런데 팔을 움직이는 내내 소매에 달린 레이스가 거추장스럽게 흔들렸다. 유니는 그게 못내 불편해 다시 투덜댔다.

16562821840475.jpg“게다가 옷은 왜 이렇게 입으라는 거예요?”

1656282184048.jpg“널 지키는 자들은 모두 유수의 귀족이다. 그런 자들이 하녀를 호위할 순 없지 않은가?”

16562821840475.jpg“노란 옷은 지켜주지만 검은 옷은 못 지킨다니 습성 한번 독특하네요. 혹시 겨울잠도 자나요?”

유니의 빈정거림에 남부공은 끄응 하고 노기를 삼켰다. 좋은 옷을 입혀줘도 불평이다. 하기야 하녀복을 입고도 공작 앞에서 큰소리치던 녀석이니 그 시커먼 옷을 입고도 불편함이 없었겠지. 남부공은 정말 희한한 꼬마라고 생각하다가 문득 떠올렸다. 몇 해 전, 침묵 전쟁 한복판에서 초연한 얼굴로 돌아다니던 이 녀석을. 처음엔 웬 깍지콩만 한 어린애가 전쟁터를 기웃대서 주변에 영문을 물었다. 부하들은 집행자가 데려온 꼬마인데 그가 싸우는 동안엔 박쥐처럼 숨었다가 싸움이 끝나면 나와 수발을 드는 아이라고 했다. 집행자도 돌아오면 어김없이 저 아이부터 찾아 챙긴다고 하니, 아무래도 동생 같다고 했다. 그래서 애틋한 남매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남매는커녕 자매도 아니었다. 남부공은 그 묘한 첫인상이 생각난 김에 물었다.

1656282184048.jpg“너는 출신지가 어디냐?”

16562821840475.jpg“출신지요?”

1656282184048.jpg“집행자가 후작가 영애라면 너도 어디 가문 출신이겠지.”

16562821840475.jpg“엥, 전혀 아닌데요. 고아라서 부모 얼굴도 몰라요.”

1656282184048.jpg“고아? 그럼 집행자와는 어떻게 만난 게냐?”

16562821840475.jpg“예전에 아가씨가 도와줘서 저도 지금 아가씨를 도와드리고 있는 거예요.”

고아라는 말에 남부공이 신기하다는 듯 중얼댔다.

1656282184048.jpg“행실이 고아답지는 않은데.”

16562821840475.jpg“영감님이 나이답지 않게 정정한 거랑 똑같죠, 뭐.”

유니는 똑같은 투로 되받아쳤고, 보다 못한 비서가 나직이 호통쳤다.

16562821897529.jpg“무엄하구나. 저하께서 너그럽게 대해주시니 정도를 모르고…….”

16562821840475.jpg“설마 몰라서 그러겠어요? 아가씨 덕을 보는 고아답게 행동하는 거죠.”

유니의 코웃음에 비서가 다시 무어라 혼내려 했다. 하지만 그 전에 남부공이 손을 들어서 막았다.

1656282184048.jpg“됐네.”

16562821897529.jpg“저하…….”

1656282184048.jpg“새삼스러운 것도 없잖나?”

남부공은 대수롭지 않은 투로 유니의 빈정댐을 넘겼고 비서는 마지못해 물러났다. 저 꼬마는 일개 하녀 주제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남부공과 맞먹었다. 아무리 집행자라는 후광이 있다지만 지나치게 방만한 태도였다. 하지만 비서에게 더 난감한 건 남부공이 그걸 은연중 허용한다는 거였다. 그 너그러움이 마치 피붙이를 대하는 것과 같아 비서는 못내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남부공의 관대함을 느낀 건 유니도 마찬가지였다. 유니는 레나가 없는데도 태도가 한결같은 남부공이 조금 신기했다. 동시에 비벼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어 냉큼 조잘댔다.

16562821840475.jpg“뭐, 호위가 필요한 건 저도 인정해요.”

1656282184048.jpg“이제야?”

16562821840475.jpg“배움의 속도는 각자 다른 법이니까요.”

말이나 못 하면. 남부공과 비서들은 저 악동의 변덕에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16562821840475.jpg“해주신 것들은 감사히 받을게요. 그런데요, 영감님. 부탁드릴 게 있어요.”

1656282184048.jpg“부탁?”

16562821840475.jpg“사실 친구가 있어요. 황궁에서 새로 사귄 친구예요.”

친구라는 말에 남부공의 턱이 기울었다. 그 노인은 아이에게 친구가 필요한 걸 새삼 깨달은 얼굴이었다.

16562821840475.jpg“세탁장에서 사귄 친구인데 요즘 통 못 만났어요. 제가 갑자기 안 나가서 실망했을 것 같아요.”

유니는 시무룩하게 중얼댔고, 남부공과 비서들은 짐짓 당황했다. 호위도 싫고 좋은 옷도 싫다며 떼를 쓴 게 친구 때문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그들은 아이가 나름 필사적이었구나 생각했고, 오해를 잔뜩 유발한 유니는 불쌍하게 중얼댔다.

16562821840475.jpg“그래서 조용히 만나고 싶은데 도와주세요.”

1656282184048.jpg“굳이 조용히 부를 필요가 있느냐?”

궁인 중 한 명이라면 지금이라도 불러서 데려오면 될 일이다. 남부공의 물음에 유니는 더 침울하게 대답했다.

16562821840475.jpg“걔가 하필 루벨 가의 후계자거든요. 저도 친해지고 난 다음에 알았어요.”

1656282184048.jpg“루벨 후작의 아들?”

16562821840475.jpg“네, 아마 제가 연락하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거예요. 그러니까 조용히 불러낼 수 있을까요?”

유니는 그렇게 말하며 남부공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꺼림칙한 기색이었다. 아무렴 어린애끼리의 만남이라도 관계가 예민한 귀족의 아들을 따로 부르는 건 위험했다.

16562821840475.jpg‘쳇.’

유니는 글렀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런데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1656282184048.jpg“언질 해놓으마.”

16562821840475.jpg“엥?”

남부공의 수락에 유니는 도리어 놀란 표정을 지었다.

1656282184048.jpg“친구라는데 생이별을 시킬 수는 없지.”

노인은 무심히 말하며 비서에게 무어라 지시했다. 그걸 본 유니는 조금 더 얼떨떨해졌다.

16562821840475.jpg“진짜요?”

1656282184048.jpg“부탁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못 믿고 되묻는 유니에게 남부공이 재차 답했다. 덕분에 유니는 더 당황했다. 남부공이 자신의 생떼 같은 부탁을 흔쾌히 들어줄 줄 몰랐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레나 외엔 처음이었다. 드잡이질하며 대들 때 말고 누군가가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경험은, 다른 목적이 있어서 친절을 가장하지 않는 것은. 묘한 경험이었다. 그래서 유니는 남부공이 새삼 할아버지처럼 보였다. *** 남부공은 약속을 지켰다. 비록 편안한 세탁장이 아니라 불편한 응접실에서였지만, 유니는 바로 그날 오후에 엔지를 만날 수 있었다. 엔지는 영문을 모르고 불려온 듯 어두운 얼굴로 응접실에 들어왔다.

16562821840475.jpg“왔냐?”

1656282197867.jpg“어……?”

유니가 먼저 아는척하자, 눈앞의 여자애를 낯설게 보던 엔지는 뒤늦게 깜짝 놀랐다. 일순 유니를 못 알아봤던 엔지는 어안이 벙벙해서 물었다.

1656282197867.jpg“어떻게 된 거야?”

16562821840475.jpg“아무것도 아닌데?”

1656282197867.jpg“옷이 바뀌었잖아?”

16562821840475.jpg“옷이 왜 옷이야, 갈아입으니까 옷이지.”

유니의 투덜댐에 엔지는 눈을 깜빡이다가 결국 실소했다.

1656282197867.jpg“옷이 바뀌어서 세탁실도 안 오는 거야?”

16562821840475.jpg“기다렸냐?”

유니의 비웃음 섞인 물음에 엔지는 욱하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부정하지는 않았다. 엔지는 기다렸다. 클라비스 추기경이 그를 시험대에 세우고 진실을 퍼붓듯 폭로한 이후, 어느 때보다 간절히 유니를 기다렸다. 누구에게든 조언을 구하고 싶었고, 유니를 통해 레나에게 가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그렇게 말할 수 없어 엔지는 입을 꾹 다물었다. 유니를 보고 잠시나마 밝아진 얼굴은 응접실에 들어올 때 이상으로 어두워졌다. 그래서 유니는 그의 안색을 살피다가 말했다.

16562821840475.jpg“선물 전해드렸어.”

1656282197867.jpg“선물?”

16562821840475.jpg“네가 아가씨한테 전해달라고 한 거 말이야.”

1656282197867.jpg“아, 그거…….”

엔지는 까맣게 잊고 있었는지 작게 중얼댔다.

16562821840475.jpg‘만나면 그것부터 물어볼 줄 알았는데.’

유니는 평소처럼 촐랑대지 않는 엔지가 이상해서 다시 물었다.

16562821840475.jpg“너 어디 아프냐?”

1656282197867.jpg“어?”

유니는 불쑥 손을 밀어 엔지의 이마를 짚었다. 유니가 골골댈 때마다 레나가 하는 행동이었다. 그렇게 기습적으로 열을 재자 엔지는 깜짝 놀라서 유니를 쳐다봤다.

16562821840475.jpg“이게 열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유니는 엔지의 이마를 짚은 채 중얼댔고, 엔지는 유니를 얼떨떨하게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후 코끝이 찡해지며 눈시울이 붉어진 건 순식간이었다. 엔지는 저도 모르게 울컥했고, 결국 아무 조짐도 없이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다. 그걸 본 유니는 화들짝 놀라 손을 뗐다. 엔지도 덩달아 놀라 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16562821840475.jpg“야, 왜 이래?”

1656282197867.jpg“당황스러워…….”

16562821840475.jpg“지금 내가 더 당황스럽거든? 뭔데?”

16562822034303.jpg

  유니가 손을 붕붕 흔들며 항의했다. 그에 엔지는 창피해하며 중얼댔다.

1656282197867.jpg“나는 아무것도 몰랐어…….”

16562821840475.jpg“너희 아버지?”

엔지는 대답하는 대신 울음을 그치려는 듯 소매로 눈을 가렸다. 그 모습을 본 유니는 두엄의 궁이 무너지던 날의 일을 금방 떠올렸다. 이 녀석, 후작의 사주를 받은 기사들 때문에 꽤 놀랐었지. 아무래도 자상하던 아버지가 비열한 모략꾼인 걸 알게 돼서 새삼 충격을 받았나 보다. 유니는 그렇게 생각하며 서툴게 위로했다.

16562821840475.jpg“괜찮아, 아버지는 어쨌든 아가씨가 너희 누나잖아.”

1656282197867.jpg“그게 대체 무슨 위로야…….”

유니가 애써 짜낸 위로에 엔지는 더 억울한 듯 중얼댔다. 그러더니 돌연 발끈해 중얼댔다.

1656282197867.jpg“레나 루벨은 날 아는 척도 안 하잖아.”

그렇게 말하는 순간 눈물이 다시 솟구쳤다. 누나가 자신을 미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다 헤아려지지도 않는다. 그런데 그걸 까맣게 모른 채 누나의 주변을 장난스럽게 기웃대던 자신이 죽도록 미웠다. 엔지는 결국 두 손에 얼굴을 파묻은 채 끅끅대며 숨을 참았다. 그걸 지켜보던 유니는 머뭇대다가 다시금 용기 내어 말했다.

16562821840475.jpg“사정상 그렇긴 해도, 딱히 널 싫어하진 않으셔. 오히려 그 반대일걸?”

1656282197867.jpg“반대라고?”

16562821840475.jpg“뭐, 조금은 믿고 계신 것도 같고.”

뜻밖의 말에 엔지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유니를 바라보았고, 위로가 적성이 아닌 유니는 조금 진저리를 냈다.

16562821840475.jpg“아, 몰라. 네가 직접 봐.”

유니는 더 설명하기 싫다는 듯, 간직하고 있던 쪽지를 엔지에게 던지듯 넘겨주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