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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화. 위선자의 아들 (111/208)

111화. 위선자의 아들2021.05.24.

유니가 넘겨준 쪽지에는 무언가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16562822126205.jpg“이게 뭐야?”

16562822126212.jpg“망자의 왕들의 외모래. 아가씨가 무덤에서 직접 보신 거야.”

16562822126205.jpg“무덤에서 봤다고? 첼레스테나 선왕 전하 말이야?”

엔지는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순진한 동생은 누나가 수년간 무덤에 있었다는 걸 까맣게 몰랐고, 그래서 유니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했다. 엔지가 멍청한 표정을 짓자 유니가 답답하다는 듯 다그쳤다.

16562822126212.jpg“말고, 바보야. 아직 무덤에 있는 왕들. 그 뭐야, 심장이 많은 왕이랑 맹수 왕.”

16562822126205.jpg“많은 심장을 가진 왕하고 사자를 가둔 왕 말이야?”

16562822126212.jpg“그래, 그거.”

엔지는 얼떨떨해하며 다시 시선을 내렸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별로 단정치 못한 필체였고, 그다음 주의를 끈 건 아주 집요한 묘사였다. ―많은 심장을 가진 왕. ―남성. 20대 후반 또는 30대 초반의 외견. 흑색 머리카락, 붉은색에 가까운 갈색 눈동자. 6피트 가량의 큰 키. 피부는 제국인보다 짙은, 밀크 초콜릿과 비슷한 색. ―복식은 더운 지방에서 입는 옷으로 보임. 얇고 폭이 넓은, 그래서 치마처럼 주름지는 하의를 입었으며 상의는 입지 않음. 대신 상체에는 황금으로 된 장신구나 비단으로 된 가운을 걸침. 가운은 자주색에 금색 자수. 문양은 다음과 같음. ‘다음과 같음’ 바로 아래엔 넝쿨처럼 감긴 복잡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쪽지에는 장신구의 형태나 제국의 것과는 차별되는 신발의 모양 등도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그걸 보던 엔지는 저도 모르게 중얼댔다.

16562822126205.jpg“이거 동남부의 고대 제국 얘기 같은데…….”

16562822126212.jpg“그것만 보고 알 수 있어?”

유니가 놀라서 묻자 엔지는 머뭇대며 끄덕였다.

16562822126205.jpg“음, 나도 글로 본 게 다여서 정확한 건 아니지만, 이런 옷을 입은 기후면 남부가 맞긴 할 거야. 게다가 이 넝쿨 문양은 아열대 지방에서 자주 쓰는 거고…….”

16562822126212.jpg“이래서 너한테 주라고 하셨나 봐.”

16562822126205.jpg“응?”

16562822126212.jpg“아가씨가 너라면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했어.”

16562822126205.jpg“레나 루벨이 그랬어?”

유니의 말에 엔지는 놀라서 되물었다. 시무룩하던 녀석의 얼굴이 모처럼 활짝 피어, 유니는 조금 떨떠름하게 끄덕였다.

16562822126205.jpg“진짜야? 정말?”

16562822126212.jpg“그렇다니까?”

엔지가 믿지 못해 재차 묻자 유니는 퉁명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얼떨떨해하던 엔지의 눈에 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유니가 질색하며 다그치자 엔지는 황급히 눈가를 훔쳤다. 그러더니 언제 울었냐는 듯 쪽지를 보며 웃었다.

16562822126205.jpg“그림 못 그리는 건 똑같네…….”

16562822126212.jpg“너희 누나가 너 되게 얄미워했지.”

16562822126205.jpg“치사한 건 누나였어.”

16562822126212.jpg“누가 남매 아니랄까 봐.”

유니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대자 엔지는 기분이 조금 더 좋아졌다. 소년은 한결 밝아진 얼굴로 쪽지를 마저 읽었고, 이내 자신 있게 말했다.

16562822126205.jpg“어느 범위를 찾아야 할지 알 것 같아.”

이 정보는 정답까지 알려주지는 못했다. 다만 엔지는 이것을 통해 왕들이 생전에 지낸 지역과 시대를 유추할 수 있었다. 아무런 단서도 없이 왕들의 이름을 찾아야 했던 사제들에게 이건 대단한 도움이었다.

16562822126205.jpg“그런데 너희 아가씨는 왕들을 언제 만난 거야?”

기뻐하던 엔지가 불현듯 물었다.

16562822126205.jpg“무덤 정복 중에 다른 왕들과 만났다는 얘기는 못 들었는데.”

유니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댔다. 아가씨가 예전에 무덤에 있었던 걸 이야기해도 되나? 짧게 고민한 유니는 이내 새침하게 대꾸했다.

16562822126212.jpg“그건 나중에 직접 물어봐. 기회가 되면.”

엔지가 치사하다고 졸랐지만 유니는 한사코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이 끈질긴 녀석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16562822126212.jpg“그걸로 왕들의 이름을 알아내면 교회를 통해서 발표해달라고 하셨어.”

16562822126205.jpg“남부에만 따로 전하는 게 아니라?”

16562822126212.jpg“그럴 수나 있어?”

16562822126205.jpg“……아니.”

유니의 코웃음 섞인 물음에 엔지는 겸손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버지와 북부에 대한 심각한 배신이다. 레나는 엔지가 차마 그럴 수 없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어쩌면 교회를 통해 정식으로 발표하라는 당부는, 정보를 독점해서 북부로 빼돌리지 말라는 이야기인지도 몰랐다. 엔지는 조금 서운해하다가 붕붕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유니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16562822126205.jpg“너 좋아하는 사람 있어?”

16562822126212.jpg“나한테 관심 갖지 마라.”

16562822126205.jpg“그게 아니라…….”

유니는 말도 꺼내기 전에 칼 같은 단호함을 보여주었고, 얼토당토않은 오해에 엔지는 급히 해명했다.

16562822126205.jpg“그런 게 아니라 만약에 말이야.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각하던 것과 다르면 어떨 것 같아?”

16562822126212.jpg“무슨 소리야?”

16562822126205.jpg“그러니까 네가 따르던 상대가 알고 보니 조금, 아니. 상당히 나쁜 사람이라면…….”

16562822126212.jpg“고민할 게 뭐 있어, 당장 버리고 도망쳐.”

16562822126205.jpg“……만약 레나 루벨이 그러면 버릴 거야?”

16562822126212.jpg“그건 아니지.”

이거 안 통하네. 유니는 저도 모르게 부정한 후 속으로 혀를 찼다. 묻는 내용을 보니 대충 아버지 이야기인 것 같아 의절을 부추겼는데, 하필이면 아가씨를 예시로 들다니. 결국 유니는 엔지의 내적 갈등에 동조한 꼴이 되었고, 엔지는 그럴 줄 알았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소년은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이 쪽지로 레나가 가까워진 만큼 아버지가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그걸 보던 유니는 고민하다 말했다.

16562822126212.jpg“만약 아가씨가 내 생각보다 나쁜 사람이어도, 나는 끝까지 같은 편으로 있을 거야.”

16562822126205.jpg“그래……?”

16562822126212.jpg“하지만 그게 같이 나쁜 사람이 되거나 지켜보겠다는 뜻은 아니야.”

16562822126205.jpg“그럼?”

16562822126212.jpg“그럼 안 된다고 할 거야.”

돌아온 대답은 간단했다. 그리고 간단한 만큼 강력했다. 엔지는 조금 놀란 얼굴로 유니를 바라보았다. 유니는 당연한 거 아니냐며 그를 마주 보았고, 엔지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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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562822245056.jpg―엔지 군, 누나를 좋아하지?

16562822245056.jpg―나도 그래.

제국의 비밀을 알려주던 날, 클라비스 추기경은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엔지는 궁금했다. 이게 대체 누나와 무슨 상관인지. 이걸 다 알아내면, 누나는 우리에게 돌아올 수 있을까? 소년은 덧없이 고민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곤 방금 유니에게 받은 쪽지를 추기경에게 어떻게 보고할지 고민했다. ‘레나 경이 왕들에 대한 단서를 남겨주었습니다.’라고 하면, 추기경 전하께서는 뭐라고 하실까? 엔지는 노심초사하며 궁내의 성전으로 향했다. 그런데 거기서 우연히, 정말 우연히 앞서가는 아버지를 발견했다.

16562822126205.jpg‘어?’

엔지는 흠칫 놀라 저도 모르게 기둥 뒤로 숨었다. 처음엔 잘못 봤나 싶었다. 하지만 다시 봐도 그는 루벨 후작이었다.

16562822126205.jpg‘황궁엔 왜 오신 거지?’

이우라 저하께서 퇴궁을 명하셨는데. 엔지는 물음에 대한 답을 곧 찾았다. 북부공은 지금 황궁에 없다. 그러니 지금 후작이 황궁에 출몰해도 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부재중이라고 명령이 철회되는 건 아닌데 저렇게 대놓고 입궁하면……. 아들은 아버지의 출현에 적잖이 당황했다. 게다가 지금 그는 곧장 성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16562822126205.jpg‘날 만나러 오신 건 아닐 텐데……. 혹시 추기경 저하를 뵈러 온 건가?’

엔지는 묘한 예감을 느꼈다. 대외적으로는 아무 친분도 없는 두 사람이지만, 왠지 뭔가 있는 것 같았다. 레나 루벨에게 진득한 관심을 가진 추기경을 떠올리면 충분히 수상했다. 엔지는 불안한 눈으로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때 문득 유니의 말이 떠올랐다.

16562822126212.jpg―하지만 같이 나쁜 사람이 되거나 지켜만 보지는 않을 거야.

망설이던 엔지는 입술을 꾹 깨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성전은 경건함이 보장된 장소. 때문에 밀회를 나누기에도 염탐하기에도 더 없이 좋은 곳이다. 마음을 굳힌 엔지는 성전의 뒷문으로 향했다. 그러곤 안뜰에 난, 나이 어린 사제들만 아는 개구멍을 비집고 들어갔다. 소년은 작은 몸을 수풀에 감추고 살금살금 기어갔다. 이윽고 그가 멈춘 곳은 커다란 창문 앞, 추기경의 집무실 밖이었다. 그때 마침 안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16562822245056.jpg“이렇게 대놓고 찾아오기예요?”

추기경의 웃음 섞인 목소리.

16562822245087.jpg“조용히 뵙고 싶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루벨 후작의 굳은 목소리였다. 소름이 돋은 엔지는 손으로 입을 꾹 틀어막았다. 예상이 맞아떨어졌는데 전혀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기분이 엄습했다. 엔지가 어깨를 떠는 사이 대화가 이어졌다.

16562822245056.jpg“용건은요?”

16562822245087.jpg“전하께서 명령하신 대로 했습니다.”

16562822245056.jpg“내 명령?”

16562822245087.jpg“레나 루벨과 교섭해 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16562822245056.jpg“아.”

클라비스는 자신이 했던 말을 그제야 떠올린 듯 웃었다. 하지만 그건 이미 두 달이나 지난 일이다. 레나 루벨이 막 나타났을 때 한 얘길 이제야 가져오다니.

16562822245056.jpg“부단히 죽이려 들기에 무시한 줄 알았는데.”

클라비스가 가볍게 중얼댔고, 그 소릴 들은 엔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16562822245056.jpg“결과는 어땠어요?”

16562822245087.jpg“대화의 여지가 없습니다.”

16562822245056.jpg“흐음?”

16562822245087.jpg“그 아이가 원하는 건 복수이고, 나를 끝내 파멸시킬 생각이었습니다.”

이어진 말에 엔지의 심장이 다시금 박살 났다. 하지만 그걸 까맣게 모르는 후작은 여상히 말을 이었다.

16562822245087.jpg“이걸 나 혼자 감당할 수는 없습니다.”

16562822245056.jpg“그럼 누가 같이 감당해야 하죠?”

16562822245087.jpg“우린 공범입니다.”

공범. 그 한마디에 엔지는 싸늘한 추위를 느꼈다.

16562822245087.jpg“그러니 책임져주십시오.”

16562822245056.jpg“난 이미 대가를 지불했어요. 바보 같은 짓을 해서 신임을 잃은 건 그대죠.”

클라비스가 웃으며 후작을 조롱했다. 덕분에 엔지는 다시금 숨이 막혔다. 추기경은 공범이라는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 상황을 유쾌하게 여기는 듯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무거운 공기 속에서 다시 울린 건 후작의 목소리였다.

16562822245087.jpg“전하께서 제 딸아이를 이용할 계획이신 걸 압니다.”

16562822245056.jpg“그래서요?”

16562822245087.jpg“이대로라면 전하의 계획을 망칠 수밖에 없습니다.”

엔지는 귀를 의심했다. 계획을 망치겠다니, 지금 협박하는 건가? 다른 이도 아닌 클라비스 시렌치움 그라샤를, 황제의 대리인을? 놀랍기를 너머 얼떨떨해서, 엔지는 떠는 것도 잊고 숨을 얕게 내뱉었다.

16562822245056.jpg“……정말 주제넘고 염치없는 인간이네.”

이윽고 돌아온 대답엔 짜증이 섞여 있었다. 그 반응이 매사 느긋하던 추기경답지 않아, 엔지는 다시 숨을 참았다. 클라비스 추기경이 날 선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16562822245056.jpg“그럼 그대는 무사할 것 같고? 이렇게 나오면 곤란해, 후작 각하. 딸린 식구들 생각은 안 해?”

16562822245087.jpg“어차피 내가 무너지면 같이 허물어질 자들입니다.”

16562822245056.jpg“위선을 떨려면 좀 성의껏 떨지 그래?”

클라비스는 신경질적으로 혀를 차더니, 이내 조금 누그러진 투로 말했다.

16562822245056.jpg“협박을 당하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 용기가 가상하긴 한데, 혹시 여기서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했어?”

16562822245087.jpg“전하께선 날 못 죽입니다.”

16562822245056.jpg“왜?”

16562822245087.jpg“내 죽음이 어떤 변수가 될지 모르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후작의 목소리는 어떤 과시도 없이 담담했다. 엔지는 그 말을 이해하려고 바쁘게 머리를 굴렸지만 미처 따라갈 수 없었다. 하지만 협박당하는 당사자는 곧장 알아들은 듯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16562822245056.jpg“……승부사인 건 알았지만 새삼 또 제법이네.”

클라비스는 후작이 던진 수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클라비스는 레나를 이용해서 하고 싶은 일이 있다. 후작은 그게 뭔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에게 오랜 염원이 있음을 확신했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이 레나 루벨이라면, 후작은 그 계획을 인질로 삼기로 했다. 황제의 시퍼런 서슬 앞에 모든 것을 폭로하는 방식으로. 게다가 이렇게 나와도 클라비스는 자신을 어쩔 수 없다. 이미 레나의 목적이 복수라고 연막을 쳐놨다. 그러니 복수의 대상인 자신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목적을 잃은 레나 루벨이 떠날 수도 있으니까.

16562822245056.jpg“레나 루벨이 누굴 닮아 그렇게 대범한지 알겠어.”

후작의 속내를 알아챈 클라비스가 한풀 꺾인 목소리로 말했다.

16562822245056.jpg“그래서 뭘 원하죠? 책임을 지라는 말이 마냥 지켜달라는 말은 아닐 테고.”

네가 남의 보호나 받으며 만족할 인간은 아니지. 클라비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전에도 그랬다. 6년 전, 딸을 넘길 때도 그는 아주 흥미로운 요구를 했다. 자신에게 칼을 겨눈 자들을 치워달라고 하지 않고, 그들을 스스로 치울 수 있게 길을 열어달라고 했다. 보통은 위기를 모면하는 데 급급한데, 이 자는 그마저도 기회로 삼아 위로 향하는 길을 찾았다. 그래서 클라비스는 그가 이번엔 또 무슨 제안을 할지 기대하며 물었다. 그에 돌아온 대답은 과연 예상대로였다.

16562822245087.jpg“남부공의 권능을 주십시오.”

역시나 주제 넘는 요구에 클라비스의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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