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진리를 탐하는 자2021.05.27.
“남부공은 이미 노쇠했고 후계자조차 없습니다. 또한 권능을 받았지만 사용하지 않고 방치했습니다.”
“그래서?”
“그 힘을 제게 주시면 전하를 위해 쓰겠습니다.”
“협박하면서 그런 말 해봤자 설득력이 전혀 없잖아.”
클라비스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후작은 마주 웃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덤덤히 대답했다.
“제국의 모든 것이 전하의 손에 달린 걸 압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전하의 자비뿐입니다.”
“이제 와서 아첨은.”
후작의 입바른 말에 클라비스는 재미있다는 듯 턱을 기울였다.
“권능을 달라니, 이런 참신한 요구는 또 처음이라. 하지만 그게 작위처럼 주고 싶다고 막 줄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알잖아?”
황제의 권능은 100년 전 제국의 공작들에게 분배되었다. 그리고 100년, 사방공에게 전해진 권능은 핏줄을 통해 이어졌다. 이때 필요한 조건은 두 가지다. 하나는 권능을 가진 자가 자신의 혈육 중에서 후계자를 선택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권능을 가진 이의 죽음이다. 권능은 왕권과도 같다. 그것은 오직 죽음으로만 계승되며, 적통 중에서도 적자를 가린다.
“하지만 남부공은 혈육이 없습니다. 길 잃은 힘은 결국 주인에게로 돌아가는 법.”
“하긴 선례가 없던 건 아니지.”
과거, 약 70년 전에 북부공 하나가 권능을 계승하지 않고 자살한 적이 있다. 그는 지긋지긋한 처형 강박에 시달리다가 자신의 대에서 저주를 끊겠다며 황제의 권능을 안고 죽으려 했다. 어림도 없는 짓이었다. 니힐은 자신에게 돌아온 권능을 보란 듯 그의 자식들에게 빠짐없이 나눠주었다. 북부의 참격이 후계자가 아닌 자식에게도 발현된 건 그때부터였다.
“폐하께서 원하신다면 그대도 권능을 받을 순 있어. 그런데 그 전에 확실히 해둘 게 있지 않나?”
“무슨 말씀입니까?”
“만약 권능을 받는다면 남부공이 죽은 후에 받겠다는 거야, 아니면 남부공을 죽여서 받겠다는 거야?”
클라비스가 뱀처럼 물었고, 그 말은 후작이 아닌 그의 아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거짓말……!’
엔지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동시에 숨이 턱 막혔다. 너무 놀란 탓인지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허억, 흑……!”
거짓말처럼 폐가 약한 소년은 호흡을 되찾으려고 몸부림쳤다. 그때였다.
“잠깐.”
클라비스가 소리를 들었는지 불현듯 말을 끊었다. 이어 의자 끄는 소리가 들려 엔지는 기겁하며 몸을 피했다. 엔지가 덤불 속으로 기어들어 간 직후 창문이 열렸다. 창문을 연 클라비스는 고요한 정원을 가만히 살폈다.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다만, 봄날의 여린 풀이 밟혀 꺾인 자국이 남아 있었다. 작은 발자국. 아마도 여자, 혹은 어린 소년. 클라비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 흔적을 내려다보았다.
“뭐가 있습니까?”
“아니, 아무것도.”
후작의 물음에 클라비스는 시치미를 떼며 몸을 돌렸다. 그러곤 창틀에 걸터앉은 채 웃었다.
“레나 양을 집으로 초대했다고 들었어.”
클라비스는 일부러 또박또박 분명히 말했다.
“화해하려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무슨 심경 변화야?”
추기경의 물음에 후작은 레나를 초대했던 날을 잠자코 떠올렸다. 그의 말대로 후작은 레나와 화해하고 싶었다. 원한다면 빌고, 엎드리고, 모든 것을 내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레나 루벨은 그런 아비에게 죽음보다 가혹한 것을 요구했다. 제 아비의 뒤를 캐고 기어이 약점을 찾아내 지독한 복수를 준비했다. 차라리 후작위를 달라고 했으면 줬을 것이다. 레나에게 전권을 넘기고 뒤에서 지켜보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레나가 후작의 치부를 폭로할 때 깨끗이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 불꽃 같은 감정이 차올랐다. 어쩌면 공포에 가까운,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에 대한 맹렬한 증오심이었다. 그건 레나를 향한 것이기도 하지만 레나가 말하는 상황에 대한 것이기도 했다. 왜 딸을 팔아야 했는지 밝히라니, 그건 그의 치부를 세상에 다 드러내라는 말이었다. 간신히 얻은 고귀함을 도로 내버리라는 말이었고, 이제껏 자신에게 조아리던 자들에게 머리 숙이고 멸시당하라는 소리였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죽는 편이 나았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자가 아니었다. 만약 그가 쉽게 순응하는 자였다면 지금도 여전히 천출의 사냥꾼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귀족에게 이용당해 죽임당하는 희생양이었을 것이고, 또 어쩌면 복수심에 불타는 여인에게 효수된 가련한 남자가 되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때마다 카르도 루벨이 된 자는 역경을 헤치고 이겨냈다. 이번에도 다를 것 없다. 회유도 타협도 안 되는 괴물이 목숨을 노리며 찾아왔다면,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불살라 덮으면 될 일이다.
“그 아이가 원치 않았습니다.”
“흐음?”
“모든 것을 내주고 용서를 구하려 했으나 그 아이가 바란 건 내 파멸이었습니다. 그래서 도움을 얻고자 전하께 왔습니다.”
“앞뒤가 안 맞잖아요. 내가 레나 루벨을 이용할 생각인 걸 알면서, 나한테 레나 루벨을 해칠 힘을 달라는 거예요?”
“해칠 마음은 없습니다. 단지 스스로를 보호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후작의 간곡한 청에 클라비스는 실소를 터트렸다. 이렇게 뻔한 거짓말을 표정 하나 안 바꾸고 하다니. 이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그만큼 자신 있는 거다. 자신의 패가. 거래를 위해 자기 자신마저 패로 쓰다니, 권력의 차이가 명백한데도 꾸역꾸역 틈을 만들어 비집고 들어오다니. 클라비스는 후작의 이런 모습이 제법 이채로웠다. 하지만 달갑지는 않았다.
“아무렴 황족의 고유 권한을 달라니, 욕심이 과하잖아요, 각하. 하여간 인간들은 이래. 하나를 주면 열을 탐내지. 이름도 없는 약소 귀족을 북부 후작으로 만들어주니까 이젠 공작위를 넘봐?”
클라비스는 진심으로 가소로워 실없이 웃었다. 동시에 생각했다. 이 녀석, 죽일까?
‘카르도 루벨이 없어진다고 레나 루벨이 곧장 떠나진 않겠지.’
동부공과 약혼했고 남부공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니까, 제 원수 같은 아비가 사라진다고 홀연히 자취를 감추진 않을 것이다.
‘다만 카르도 루벨이 갑자기 죽어버리면 의문을 갖겠지.’
그건 좀 귀찮을지도. 물론 감당하려면 감당할 수야 있지만 일이 복잡해지면 그의 계획에도 차질이 생긴다.
‘게다가 진짜 문제는 따로 있고.’
클라비스는 웃음을 유지한 채 힐끗 뒤를 보았다. 풀밭에 남은 발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루벨 가의 귀여운 소년. 엔지 루벨. 그 꼬마는 아버지의 죽음에 무너질 게 분명하다. 이제 막 용도를 정했는데, 벌써 그러면 곤란하다. 조용히 셈하던 클라비스는 루벨을 죽이면 안 될 이유가 생각보다 그럴싸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곤 맹수가 찡그리듯 웃었다.
‘운이 좋네.’
클라비스는 무심코 생각했다가 설핏 미간을 좁혔다. 과연 운일까? 아니, 후작은 충분히 계산하고 찾아온 거다. 레나 루벨에 대한 것도, 엔지 루벨에 대한 것도, 그리고 클라비스 자신에 대한 것도. 어쩌면 권능을 달라는 생떼도 시험에 가깝다. 내게 이런 패가 있으니 조심히, 신중히, 그리고 정중히 대하라는 경고.
‘그래봤자 패의 가치는 한시적이지만…….’
대신에 당장은 아주 쓸만하다. 천하의 추기경도 눈치를 볼 만큼.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클라비스의 눈빛이 변했다.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으나 미소의 결 또한 조금 더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경의 말도 일리가 있네. 하긴, 경은 자신의 가치를 잘 이해하는 사람이지.”
그러니 제 비천함을 알고 바득바득 위로 기어오르려 하지.
“폐하께 부탁은 드려볼 수 있어요.”
결국 클라비스는 한발 물러나기로 했다. 괜히 궁지에 몰린 쥐를 상대할 필요는 없다. 후작이 무슨 난장을 피우든 그에게 상처입히지는 못하겠지만, 대신 그의 염원을 일순간에 망칠 수는 있었다. 클라비스는 그것을 피하기 위해 적당히 시간을 끄는 편을 택했다.
“주인 없는 권능이 생기면 경을 추천할게요. 다만 권능의 주인이 언제 없어질지 나는 몰라요.”
“남부공은 80세 노인입니다.”
“정정하니 앞으로 10년을 더 살 수도 있죠.”
“당장 내일 어떻게 돼도 이상하지 않은 노년입니다.”
“그래요, 잘 해봐요.”
후작의 담담한 대답에 클라비스는 못 당하겠다는 듯 웃었다. 추기경의 끄덕임에 쭉 굳어 있던 후작의 입가에도 비로소 미소가 피었다.
“약속을 지켜주시리라 믿습니다.”
물론 거짓말이다. 믿을 게 없어서 저 뱀 같은 자를 믿을까. 하지만 상관없다. 다루는 법이야 많으니까. 지금처럼 저자가 움직일 만한 상황을 만들면 그만이다. 추기경과 후작은 같은 표정을 지은 채 같은 생각을 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것이 역겹기는 피차 마찬가지여서, 추기경은 그만 물러가라며 손짓했고 후작은 가볍게 묵례하고 돌아섰다.
“잠깐.”
그런데 불현듯 추기경이 후작을 불러세웠다.
“이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말씀하십시오.”
“혹시 미안한 마음은 없어요? 당신 딸한테.”
클라비스의 물음에 후작은 아주 희한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표정이 묘해졌다. 클라비스는 저 표정을 엔지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하며 더 자세히 물었다.
“죄책감이라던가, 후회라던가. 아주 조금이라도 말이야.”
“후회는 늘 하고 있습니다.”
내 오판에 대해서. 후작은 덤덤히 대답했고, 클라비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끄덕였다.
“맞아요, 세상엔 당신 같은 인간도 있죠. 별로 드물지 않게.”
난 당신 같은 인간 정말 싫더라. 클라비스는 이 말을 혀 아래 두었다가 도로 삼켰다. 하지만 눈치 빠른 후작은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금방 눈치챘다. 그래서 다시 돌아서며 생각했다. 피차 마찬가지라고. *** 엔지는 정원의 흙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호흡을 고르려고 애썼다. 애써 들이쉰 숨이 칼날처럼 날카로워 가슴이 찢기듯 아팠다. 눈물과 땀이 소년의 여린 얼굴을 애처롭게 적셨다.
‘아버지…….’
엔지는 고통과 혼란 속에서 신음했다. 듣고 말았다. 전부 다. 아버지가 남부공을 노린다는 걸, 그의 권능과 목숨을 훔치려 든다는 것도. 그리고 누나에게 무언가 잘못했다는 것도. 엔지는 그 사실이 무서워 숨죽여 울었다. 아버지의 기척이 사라지고 추기경이 창문을 닫을 때까지, 홀로 숨어 흐느꼈다. 한참 후 눈물도 입안도 다 말랐을 때 소년은 조용히 생각했다.
‘어떻게 하지?’
원치 않게 무거운 선택 앞에 섰다. 그때 문득 유니의 말이 떠올랐다.
―내 생각보다 나쁜 사람이어도, 나는 끝까지 같은 편으로 있을 거야.
―같이 나쁜 사람이 되거나 지켜보겠다는 뜻은 아니야.
―그럼 안 된다고 할 거야.
안 된다고 할 거라고? 그럼 나는 아버지를 찾아가서 그러지 말라고 말려야 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엔지의 여린 심장은 다시 얼어붙었다. 안 그래도 두엄의 궁이 무너진 직후 아버지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가 한 일을 안다고, 제발 그러지 마시라고 말하려 했었다. 그때 아버지의 반응이 어땠지? 엔지는 그날 처음 봤다. 누군가가 자신을 죽일 듯 바라보는 시선을. 그 싸늘한 기억에 엔지는 다시 울었다. 아무에게도 드러내지 못하고 몇 날을 밤마다 울었다. 그러다 겨우 마음을 잡고 찾아간 것이 클라비스 추기경이었다. 하지만 클라비스는 오히려 엔지의 용기를 조롱했다. 무책임하게 굴지 말고 아비와 누이 중 하나를 택하라고 신랄히 비판받았다. 그 말은 엔지를 다시금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소년은 선택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묵인할 수도 없었다. 마냥 선하게 자란 소년은 자신의 안락한 둥지가 타인의 뼛조각 위에 세워진 걸 그제야 깨달았다. 그리고 자연히 생각이 미쳤다. 아버지가 무너지면 우리 가문은, 어머니는, 그리고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그렇게 생각하자 간신히 마른 눈물이 다시 뚝뚝 떨어졌다. 왜 이렇게 된 거지? 우리는 문제 없이 행복했는데. 누나, 레나. 네가 나타나며 모든 것이 변했어. 하지만 원망하진 않을 거야. 진실을 알기 전까지는. 소년은 무너질 것 같은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다시 진실을 찾아 걸었다. 그로써 우리를 둘러싼 세상의 민낯을 보더라도, 부디 옳은 길을 택하길 바라며.
진리를 탐하는 소년이 죽은 왕들의 이름을 알아낸 것은, 그로부터 3개월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