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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화. 그리움 (113/208)

113화. 그리움2021.05.31.

린은 아득한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16562822627491.jpg‘여긴 어디지?’

그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반추해보았다. 하지만 제대로 생각나지 않았다. 이상하게 나른했다. 그래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데, 온통 검던 눈앞에 차츰 빛이 맺혔다.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싶더니 시원한 바람이 그의 몸을 스쳤다. 이윽고 펼쳐진 것은 무척이나 그립고 애틋한 시절이었다. 나무가 우거지고 야생화가 핀 뜰에 고즈넉한 정자가 있었다. 그곳에 앉은 건 붓을 조심히 쥔 아이. 하얀 종이에 미끄러진 선은 깊은 먹빛, 나뭇잎을 지나쳐 반짝이는 햇살은 옥빛. 그리고 때마침 불어온 바람은 여름을 닮아 투명하다.

16562822627491.jpg‘이건 꿈이구나.’

아니면 기억, 환상, 내 그리움. 린은 애틋한 마음으로 정자에 앉은 아이를 바라보았다. 단정한 비단옷을 입고 긴 머리를 하나로 묶어 내린 그 아이는 작은 손에 붓을 쥐고 조심조심 난을 치고 있었다. 어린 시절, 아직 제국으로 끌려가기 전의 린이었다. 린은 그것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저 모습을 보니 까맣게 잊고 있던 것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저 때는 먹으로 장난치는 걸 좋아했다. 린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채롭게 바라볼 때였다.

16562822627501.jpg“또 그림 그리냐?”

경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62822627501.jpg“사내 녀석이 검이나 활을 갖고 놀아야지.”

16562822627491.jpg“형님!”

어린 린은 엎드린 몸을 일으키며 반갑게 소리쳤다. 린은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가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정자 밖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동부의 청년들이 으레 그러듯 그도 머리를 길게 내려 묶고 있었다. 몸에 걸친 도포는 원래 점잖은 티가 나야 옳지만, 그가 걸치니 참으로 허랑방탕해 보였다. 린은 그 익숙한 남자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어릴 땐 미처 몰랐는데, 그는 지금의 자신과 꼭 빼닮은 얼굴이었다. 그 남자는 린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더니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주었다. 막 사 온 찹쌀떡이었다. 어린 린은 그 뽀얀 떡을 냉큼 받아 물었고, 그 바람에 흰 가루가 얼굴에 묻자 남자가 손끝으로 슬슬 털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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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지냈냐, 뭐 하고 지냈냐, 별일 없었냐. 남자가 이런저런 안부를 물었다. 어린 린은 떡을 오물대며 건성으로 대답하다가 토끼 같은 눈으로 말했다.

16562822627491.jpg“형님, 어머님께서 집에 좀 오래요.”

16562822627501.jpg“가봐야 무슨 좋은 소릴 듣는다고.”

16562822627491.jpg“곧 아버님 생신인데 장남이 없으면 어떡해요?”

16562822627501.jpg“속만 썩이는 장남이면 없는 게 낫지.”

어린 동생이 의젓하게 부모의 뜻을 전하는데, 까마득하게 나이 많은 형은 능글대며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16562822627501.jpg“잔소리는 됐고, 활이나 잡아라.”

남자는 부모 이야기가 싫은지 막무가내로 린을 일으켰다. 어린 린은 몸이 들려 끌려가면서도 남아 있던 찹쌀떡을 입에 물었다. 무인 집안답게 그들이 있는 뜰 한편엔 과녁과 활이 놓여 있었다.

16562822627501.jpg“과녁 좀 봐라, 아버지가 뭐라고 안 하시냐?”

남자가 웃으며 핀잔했다. 과녁은 깨끗하면서도 지저분했다. 깨끗한 건 가운데였고, 지저분한 건 가장자리였다. 전부 빗맞은 흔적들이었다.

16562822627501.jpg“해봐, 형님이 봐줄게.”

남자가 생색을 내며 린에게 활을 쥐여주었고, 린은 그런 남자를 뚱하니 바라보다가 여전히 찹쌀떡을 문 채 활을 당겼다. 탕! 경쾌한 소리와 함께 과녁 중앙이 꿰뚫렸다. 린은 이제 됐냐는 듯 남자를 바라보았고, 남자는 놀란 표정을 짓다가 어이없어하며 웃었다.

16562822627501.jpg“하인들은 네 활 솜씨가 형편없다던데.”

16562822627491.jpg“아버님 앞에서는요.”

16562822627501.jpg“일부러 그런 거야? 왜?”

16562822627491.jpg“과녁을 맞히면 사냥도 데려가실 것 같아서요. 살아 있는 걸 맞추는 건 싫어요.”

린이 자그마하게 불평하자 남자는 또 한 번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16562822627501.jpg“희한하네, 우리 집안에 이런 새가슴은 없는데.”

16562822627491.jpg“밖에서 주워온 자식인가 보죠.”

린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런데 직후 남자의 얼굴이 웃는 모양 그대로 굳었다. 남자의 눈이 흔들리는 걸 보고 어린 린의 눈도 흔들렸다. 무언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린은 재빨리 말을 돌렸다.

16562822627491.jpg“저, 저는 알아서 잘하니까 형님이나 어떻게 해보세요. 다들 형님이 노총각으로 죽을까 봐 걱정하고 있어요. 할아범이 그러는데 홀아비보다 딱한 게 노총각이래요.”

16562822627501.jpg“뭐?”

린의 반격에 남자가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16562822627501.jpg“할아범이 그래? 또 뭐라디?”

16562822627491.jpg“음, 다 컸으면 예쁜 부인 얻어서 손주를 안겨드리는 게 자식 된 도리라고 했어요.”

16562822627501.jpg“그래……?”

유쾌하던 남자의 웃음이 어쩐지 짙어졌다.

16562822627501.jpg“이상하네. 그런 도리라면 이미 다 했는데.”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댔다. 그러곤 자신과 꼭 닮은 아이를 보며 덧붙였다.

16562822627501.jpg“안 받아준 게 누군데.”

어린 린은 형님을 마주 보며 아무것도 모르는 척 눈을 깜빡였다. 아, 그랬다. 생각해 보니 늘 그랬다. 당신이 이렇게 진심을 내비칠 때마다 나는 모르는 척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사실은 나도 늘 궁금했다. 당신이 정말 내 형님인지. 형님에겐 한없이 엄격하지만 내겐 한없이 너그러운 부모님이 정말 나를 낳아준 분들이 맞는지. 당신이 집에 들어오지 않는 이유가, 그럼에도 이따금 들러 나만 보고 다시 떠나는 이유가 무엇인지. 혹시 당신이 기다리는 사람이 내 생모인지, 정말 그렇다면 대체 어떤 사람인지. 린은 자신을 둘러싼 비밀을 어렴풋이 알고, 하지만 차마 직접 묻지는 못하고 조용히 눈치를 보고 있었다. 만약 내가 좀 더 나이가 많았으면 말해줬을까? 하지만 우리에겐 성장을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도 후회한다. 함께 있는 동안, 그 꿈같은 시간이 영원할 거라 믿고 당신과 더 나누지 못한 순간들을. . . .

16562822681631.jpg“린 씨!”

다급한 부름에 린은 눈을 떴다. 급히 깨어난 그는 혼란스러워하며 눈앞의 여자를 바라보았고, 그 여자는 걱정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16562822681631.jpg“괜찮아요?”

레나의 물음과 함께 잠시 조각났던 현실감이 도로 합쳐졌다. 이곳은 서부의 균열 앞, 망자가 득시글대는 전장 한복판이었다. 린은 상황을 깨닫자마자 몸을 일으키며 되물었다.

16562822627491.jpg“어떻게 됐어?”

16562822681631.jpg“이쪽은 거의 정리 됐어요. 큰 망자들도 처리했고요. 린 씨 덕분이에요.”

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시가지 저편을 가리켰다. 거리에 뱀과 용의 형상을 한 망자들이 널브러져 연기를 뿜고 있었다. 이 구역은 많은 심장을 가진 왕의 망자들이 득시글대는 곳이었다. 동시에 모든 길이 이어지는 중앙 광장이어서 반드시 돌파해야 하는 요충지였다. 레나와 린은 이곳으로 파견되어 망자들과 싸우다가 용의 형상을 한, 아주 거대한 망자와 맞닥뜨렸다. 그 망자의 몸집은 어지간한 건물보다 컸고, 때문에 레나의 채찍은 물론 기사들의 창칼도 도무지 닿지 않았다. 그래서 린은 고육지책으로 활에 자신의 피를 묻혀 놈의 아가리에 박아넣었다. 동부공의 피를 마신 망자는 동부의 권능에 고스란히 노출되었고, 린은 이 망자를 지배하던 왕에게서 주도권을 빼앗는 데 성공했다. 이후엔 이 흉포한 놈을 다루며 다른 망자들을 쳤다. 그러다 그 망자가 찢겨 죽는 순간 함께 정신을 잃고 말았다. 상황을 이해한 린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16562822627491.jpg“끝났구나.”

16562822681631.jpg“네, 일단은요.”

힘겨운 전투가 승리로 끝났지만 린은 그다지 기쁘지 않았다. 하늘을 가로지른 균열은 여전히 거대했다. 그리고 그 아래엔 끝없이 펼쳐진 전장이 있었다. 이미 3개월째 마주하고 있지만,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광경이었다. ***

16562822627491.jpg“머리가 많이 길었어.”

린이 레나의 젖은 머리를 빗겨주며 말했다. 전투를 위해 작전지에 머물던 두 사람은 보름 만에 승리를 거머쥐고 성채로 돌아왔다. 망자들을 몰아낸 지역에 초소를 마련하는 건 북부의 역할이어서 레나와 린은 이제 한동안 휴식이었다.

16562822681631.jpg“이번 전투도 꽤 길었으니까요.”

레나가 대답하는 순간 삭둑대는 가위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레나는 린에게 머리를 맡긴 채 눈을 감았다.

16562822627491.jpg“벌써 3개월이 지났네.”

16562822681631.jpg“그러게요, 곧 여름이에요.”

레나의 머리카락을 잘라주던 린은 여름이라는 말에 한숨을 쉬었다. 말마따나 서부로 온 지도 벌써 3개월이 지났다. 동부공 실종사건 이후, 동부의 병력도 서부 접경지로 도착하며 토벌 준비가 갖춰졌다. 이후 제국군은 북부공의 지휘에 따라 균열 밖으로 나온 망자들을 압박했고, 창날처럼 싸우는 동부공과 남부공 대리의 활약으로 그들이 차지한 구역을 조금씩 확보하고 있었다. 꽤 순조로운 편이지만 그럼에도 이 전쟁은 살아 있는 인간 쪽이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곧 무더위가 시작된다. 죽은 자와 달리 산 자의 전력은 현저히 떨어질 것이고, 전쟁은 길어질 것이다. 또 그럴수록 제국은 이 막강한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제국민과 식민지를 더 가혹하게 착취할 것이 뻔했다. 린은 근심하면서도 레나의 푸석해진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다듬어주었다. 레나는 거울을 통해 적당한 길이로 잘린 머리를 살피더니 린을 돌아보며 말했다.

16562822681631.jpg“린 씨도 좀 다듬어야 하지 않아요?”

16562822627491.jpg“내가 직접 할게.”

레나가 호의를 담아 물었지만 린은 단호히 거부했다. 린은 레나를 정말 좋아하지만, 레나가 뭐든지 잘한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애당초 린이 레나의 머리를 다듬어주기 시작한 것도 레나가 거추장스럽다며 단검으로 머리카락을 베어내려 들었기 때문이었다.

16562822681631.jpg“가능하겠어요?”

거부당한 레나가 의심스럽게 물었고, 린은 레나가 나서기 전에 침착하게 면도칼을 꺼냈다. 그러곤 거울 앞에서 자신의 머리를 다듬기 시작했다. 린의 손놀림은 가벼웠다. 대충하는 것 같은데도 꽤 그럴싸하게 머리가 정리되자 레나는 결국 벼르던 마음을 접고 인정했다.

16562822681631.jpg“전부터 느꼈지만, 린 씨는 손재주가 정말 좋은 것 같아요.”

레나의 칭찬에 린은 조용히 뿌듯해하다가 문득 어릴 때를 떠올렸다. 그는 뒷산의 뜰에서 혼자 붓으로 놀기를 좋아했다. 아버지도 형님도, 심지어 어머님도 뼛속까지 무인이라 지필묵을 가까이하지 않았는데 유독 린은 그렇게 얌전했다. 전부 까맣게 잊은 일인데 그때가 갑자기 왜 떠올랐을까. 린은 정신을 잃었던 동안 떠올랐던 기억을 되짚다가 곧 원인을 찾아냈다. 시가지에서 뱀과 용의 형상을 한 망자들이 쏟아졌다. 그걸 본 린은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일전에 거대한 뱀 안에서 나자 아이테르너가 나타난 게 떠오른 탓이었다. 그는 두려웠다. 그 사람을 여기서 또 만나게 될까 봐. 돌연 옛날 꿈을 꾼 것도 아마 그것 때문일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조금 씁쓸해졌다. 그 표정을 본 레나가 까닭을 묻듯 곁에 섰다. 린은 다가온 레나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이내 큰 개가 주인에게 그러듯 레나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기댔다. 둘이 있으면 자주 하는 행동이라 레나는 말없이 토닥토닥 안아주었다.

16562822681631.jpg“피곤해요?”

16562822627491.jpg“조금.”

16562822681631.jpg“그럼 일찍 자요.”

16562822627491.jpg“여기서 자도 돼?”

16562822681631.jpg“당연히 안 되죠.”

16562822627491.jpg“왜…….”

왜긴 왜야, 보는 눈이 몇인데. 간호처럼 구체적인 사유 없이 한방을 썼다간 이런저런 구설이 돌 것이 뻔했다. 린도 그걸 알기에 덧없이 투정을 부릴 뿐, 진지하게 조르는 기색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연인답게 쓸데없는 실랑이로 시시덕댔다. 하지만 그 다정한 시간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16562822736919.jpg“레나 루벨!”

버릇없는 불청객이 대뜸 레나의 방을 박차고 들어온 탓이었다. 레나에게 팔을 감고 매달리던 린은 놀라서 몸을 일으켰고, 레나도 린에게서 한발 물러났다. 그러곤 막 들이닥친 주인공을 피로하게 바라보았다.

16562822681631.jpg“루비드 씨, 제국에는 노크라는 고급 예절이 있어요. 물론 모를 수도 있지만요.”

레나가 기껏 웃으며 말했지만 루비드 플레누스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레나의 방에서 린을 발견하자마자 눈매가 살벌해졌고, 린 역시 레나를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표정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두 남자가 서로를 노려보자 사이에 낀 레나는 한숨을 쉬었다.

16562822681631.jpg“무슨 일이에요?”

16562822736919.jpg“됐어.”

16562822681631.jpg“온 김에 말하고 가요.”

린을 보고 돌아서던 루비드는 레나가 붙잡으니 도로 걸음을 멈췄다. 한없이 삐딱한 주제에 은근히 순종적인 왕자는 불퉁한 얼굴로 레나를 바라보았다. 레나는 말해보라는 듯 끄덕였고, 루비드는 못 이기는 척 중얼댔다.

16562822736919.jpg“이쪽으로 오고 있단다.”

16562822681631.jpg“누가요?”

16562822736919.jpg“남부공하고 엔지 루벨.”

루비드가 전해준 소식에 레나는 몰래 웃었다. 알아낸 모양이다. 왕들의 이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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