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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화. 데자뷰 (114/208)

114화. 데자뷰2021.06.03.

레나에게 소식을 전해준 루비드는 린과 한참 동안 눈싸움을 하더니 들어올 때처럼 문을 박차며 나갔다. 그 정도 없는 씩씩함에 레나가 웃어버리자, 린이 조금 시무룩하게 물었다.

16562822837506.jpg“친해?”

16562822837511.jpg“네?”

16562822837506.jpg“루비드 플레누스 말이야.”

린은 수치를 견디며 덧붙였다. 실은 별로 하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동시에 꽤 오랫동안 참은 의문이기도 했다. 루비드 플레누스 그라샤는 어쩌다 레나와 마주치면 반드시 틱틱댔고, 레나는 그걸 또 너그럽게 받아주었다. 린은 그때마다 신경이 쓰였지만 일부러 의식하지 않았다. 어차피 안 보는 날이 보는 날보다 훨씬 많으니 대충 무시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저놈이 별것도 아닌 소식을 알려주겠다며 레나의 방까지 밀고 들어온 걸 보니 더는 지켜만 볼 수가 없었다.

16562822837506.jpg“혹시 친해?”

16562822837511.jpg“아뇨, 딱히…….”

심상치 않은 물음에 레나가 살짝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그에 린은 속 좁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며 되물었다.

16562822837506.jpg“그런데 왜 찾아와?”

하지만 어떤 표정을 지어도 이건 멋져 보이기 어려운 말이었다. 린은 스스로 구차하게 느끼면서도 초조하게 대답을 기다렸고, 레나는 새삼 애쓰는 린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덕분에 가련한 수컷은 한층 더 자괴감에 빠지고 말았다.

16562822837511.jpg“아, 웃어서 미안해요.”

하지만 너무 귀여워서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16562822837511.jpg“음, 루비드 씨요. 방금 전엔 무례했죠. 숙녀 방에 함부로 들어오다니.”

레나는 애써 웃음을 지우고 창피해하는 연인을 달랬다.

16562822837511.jpg“저 사람은 동부공의 약혼녀에게 조금 더 예의를 지킬 필요가 있죠. 다음에 단단히 주의를 줄게요.”

레나는 일부러 자신을 동부공의 약혼녀라 칭했고, 예상대로 그 말은 린을 기쁘게 만들었다. 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린의 어깨를 토닥였다. 단지 그뿐인데 린은 만족한 듯 끄덕였고, 레나는 그 모습이 또 귀여워 장난스레 덧붙였다.

16562822837511.jpg“그래도, 형보다는 동생 쪽이 낫지 않아요?”

16562822837506.jpg“루비드 플레누스가 이우라 플레누스보다 낫다고?”

16562822837511.jpg“네, 그나마 인간적이잖아요.”

레나의 말에 린이 충격받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루비드의 편을 드는 레나가 야속하다는 투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묻는 투였다.

16562822837506.jpg“인간적인 건 모르겠지만…… 북부공이 루비드 플레누스하고 비교될 인물은 아닌 것 같은데…….”

16562822837511.jpg“왜요?”

16562822837506.jpg“이우라는 어쨌든 역할에 충실하고, 그나마 상식적이고…….”

16562822837511.jpg“하지만 너무 재수 없잖아요?”

린은 레나의 표현에 깜짝 놀랐다. 연인의 고상한 입에서 설마 재수 없다는 말이 나올 줄은. 하지만 레나는 자신의 발언을 후회하지도 철회하지도 않고 잠잠히 3개월 전을 떠올렸다.

165628228657.jpg―여긴 여자가 감정적으로 하는 말이 허용되는 장소가 아니다.

이우라는 그 한마디로 레나를 세 번이나 무시했다. 레나가 여자인 것을 무시했고, 레나의 말을 ‘감정적인 말’로 폄하하며 무시했고, 레나의 앞선 주장까지 모조리 무시한 셈이었다. 그게 상당히 어처구니없던 레나는 그래서 조만간 그의 말을 받아치려고 기회를 노렸다. 하지만 이후 이우라는 린에게 하듯 레나마저 없는 사람 취급했고, 덕분에 북부공에게 무시당하는 사람은 둘에서 셋으로 늘어났다. 그로써 루비드 플레누스 그라샤, 리그난 아이테르너에 이어 레나 루벨까지 위대한 북부공 전하께 사이좋게 무시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16562822837511.jpg“그 사람은 예의가 너무 없어요.”

16562822837506.jpg“예의가 없는 건 루비드 쪽이 더…….”

16562822837511.jpg“루비드 씨는 형처럼 냉정하진 않잖아요.”

16562822837506.jpg“그렇게 헤집고 다닐 바엔 냉정한 편이 낫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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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나와 린은 한마디씩 주고받으며 서로의 생각이 아주 다른 것에 새삼 놀랐다. 레나는 냉철한 이우라보다는 철딱서니 없지만 만만한 루비드에게 너그러웠고, 린은 천지 분간 못하는 망나니보다는 제 역할에 집중하는 이우라가 낫다고 여겼다. 그래서 두 사람은 플레누스 형제를 두고 한참 동안 상반된 주장을 펼쳤다. 피차 양보하길 잘하는 그들에게 이런 언쟁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 실랑이가 말싸움으로 번지는 일은 없었다.

16562822837511.jpg“어느 쪽이든 그리 좋지는 않네요.”

16562822837506.jpg“그러게.”

어차피 남이나 다름없는 자들이다. 한참 사이 좋은 연인이 자신들과 별 상관도 없는 형제를 두둔하려고 편 갈라 싸울 이유는 전혀 없었다.

16562822837511.jpg“사실 안 마주치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해요.”

16562822837506.jpg“나도.”

레나와 린은 드디어 합의를 보고 만족했다. 말마따나 굳이 얽히지 않는 게 나은 형제다. 게다가 오며 가며 가끔 마주치고는 있지만 그 이상 얽힐 일은 없었다. 서부 균열을 막기 위해 함께 파견되었지만 동부와 북부의 역할은 이미 칼같이 나뉘었고, 협력보다는 각자 자신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진작에 합의가 되었다. 그러니 굳이 신경 쓸 필요 없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레나와 린은 그렇게 믿었다. 수명이 그리 길지 않은 믿음이었다. *** 다음 날, 루비드가 한발 앞서 알린 소식이 동부공과 남부공 대리에게도 정식으로 전해졌다. 교회에서 왕들의 이름을 알아냈고, 그 이름을 찾아낸 사제단이 북부공과 함께 서부로 오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 소식을 들은 기사들은 단비를 만난 농부들처럼 기뻐했다. 지난 3개월간 그들은 거대한 균열 앞에서 하루 밀고 하루 밀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끝도 없이 나타나는 망자들과 달리 그들은 다치고, 죽고, 지쳐가고 있었다. 하지만 왕들의 이름을 알아냈다는 건 이 지겨운 전쟁도 곧 끝난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여름을 걱정하던 기사와 병사들은 기뻐하며 다시 사기를 높였다. 게다가 레나에겐 반가운 소식이 하나 더 있었다.

16562822837511.jpg“제 앞으로 편지가요?”

레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전령이 내민 편지를 받았다. 그러곤 전령이 나가자 린의 옆에 앉아 편지를 열어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레나의 얼굴이 한층 밝아졌다.

16562822837511.jpg“유니가 편지를 썼어요.”

16562822837506.jpg“유니가?”

레나는 기쁘게 끄덕이며 린과 함께 편지를 읽었다. 레나 아가씨께. 안녕하세요, 아가씨. 유니예요. 저 없이 잘 지내세요? 설마 잔소리하는 사람 없다고 늦게까지 주무시거나 대충 하고 다니시는 건 아니죠? 만약 그러고 계시다면 조금 더 즐기도록 하세요. 제가 곧 갈 거니까요. 유니의 선전포고에 레나는 실소를 터트렸고 린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16562822837506.jpg“여기로 오고 있다고?”

16562822837511.jpg“그런가 봐요.”

레나가 반가운 얼굴로 말했다. 그러곤 예쁜 글씨로 또박또박 적힌 편지를 마저 읽어내려갔다. 지금 영감님하고 같이 서부로 가고 있어요. 아, 서부라니. 옛날 생각나네요. 별로 좋은 기억은 아니지만, 아가씨를 만난 장소가 서부니까 그냥 좋은 걸로 칠게요. 그리고 저는 엔지 루벨이랑도 같이 있어요. 같은 마차를 탄 건 아니지만 가끔 밥 먹을 때 얼굴을 보기는 해요. 걘 요즘 쓸데없이 세상 다 산 표정인데, 제가 아가씨 만나기 전에 교육 시켜 둘게요. 아가씨랑 이렇게 오래 떨어져 있는 건 처음인 것 같아요. 지금까진 그립다는 말을 잘 이해 못 했는데 이젠 알겠어요. 보고 싶으니까 빨리 보러 갈게요. 아가씨의 유니가, 서쪽으로 부지런히 달려가며. 레나는 편지를 다 읽고 포근히 웃었다. 린도 비슷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잘 아는 아이는 아니지만, 퉁명스러운 듯 사나운 듯 애정이 넘치는 게 마치 고양이 같았다. 게다가 레나를 향한 무한한 애정도 이 아이의 사랑스러운 구석이었다. 옆에서 보는 본인도 이런 심정인데, 레나가 이 아이를 얼마나 아낄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16562822837511.jpg“그러고 보니 유니에게 아직 얘길 안 했네요.”

레나가 불현듯 말하며 린을 돌아보았다. 레나는 서부에 와서 린과 정말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걸 알면 유니가 뭐라고 할까? 린을 이용해서 더 놀리지 못하는 걸 아쉬워할까? 어쩌면 린에게 깐깐한 처제 노릇을 할지도 모르겠다. 레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들떴고, 린은 레나를 기분 좋게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한가지 질문을 떠올렸다. 혹시, 그 애도 네가 떠나는 걸 알아? 하지만 린은 이 질문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스스로 답을 찾았기 때문이다. 레나는 린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남에게 말하는 건 처음이라고 했었다. 그러니 이 작은 하녀도 모를 것이다. 이토록 따르는 아가씨가 앞으로 몇 달 후 떠날 작정이라는 걸.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린은 이 아이가 안타까워졌다. 그리고 자기 자신은 그 이상으로 불쌍해졌다. 레나를 조만간 빼앗기는 건 이 아이만이 아니었다. 그걸 새삼 깨달은 린은 레나의 머리카락을 조심히 쓸어내렸다. 레나는 린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고, 그걸 단지 연인의 다정함으로 여기고 린에게 몸을 기댔다. 린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따금 슬퍼지지만 레나에겐 잘 들키지 않았다. 시간이 모자라다. 좋은 기억으로만 채우기에도, 사랑만 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그는 슬프지 않은 척 연인을 다정히 끌어안았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얼마 가지 않아 무색해졌다. 사흘 후에 날아든 비보 탓이었다. *** 엔지는 혼자 서서 첩첩이 쌓인 계곡과 절벽을 바라보았다. 이제 이곳만 다 지나면 서부 접경지역이다. 그리고 거기 가면 누나, 레나 루벨을 만날 수 있다. 이번에 레나 루벨을 만나면 전처럼 망설이지 않고 정식으로 면담을 요청할 생각이다. 거부하진 않겠지. 그래, 왕들의 이름을 알아내도록 종용한 건 누나 너니까, 더는 날 모르는 척하지는 않겠지. 엔지는 초조하게 뛰는 심장을 손으로 짚었다. 그러고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데, 뒤에서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62822919474.jpg“혼자 뭐 하냐?”

유니였다. 그 아이는 아가씨 흉내가 벌써 질렸는지 여느 때처럼 검은 하녀복을 입고 있었다.

16562822919474.jpg“또 울어?”

16562822919483.jpg“아니거든…….”

유니의 무신경한 물음에 엔지는 자그맣게 대답했다. 그래서 유니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그에게 툭 던져주었다.

16562822919474.jpg“옜다.”

16562822919483.jpg“뭐야?”

16562822919474.jpg“영감님이 저번에 들린 도시에서 사준 거야.”

유니는 무심히 대답했고, 엔지는 종이로 된 포장지를 벗겼다. 이윽고 드러난 건 버터 냄새가 가득 풍기는 과자였다. 유니가 과자를 양보한 건 대단히 큰일이지만, 엔지는 까닭을 몰라 유니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16562822919474.jpg“인상 쓰지 말고 그거나 먹으라고. 누가 보면 세상 망한 줄 알겠다.”

엔지는 어색하게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었고, 유니는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처음 볼 땐 정말 시끄럽게 징징대는 놈이었는데, 어느 날부터 점점 어두워지더니 지금은 완전히 죽상이다.

16562822919474.jpg“그런 얼굴로 아가씨한테 가면 이번엔 정말 못 알아보실걸?”

유니의 과장에 엔지는 미간을 찡그리며 웃었다. 농담인 건 알겠지만 재미없다는 투였다.

16562822919483.jpg“이번에도 모르는 척하면 나도 가만히 안 있을 거야.”

16562822919474.jpg“가만히 안 있으면?”

16562822919483.jpg“내가 아는 모든 치부를 폭로할 거야.”

16562822919474.jpg“그건 너무 잔인하잖아…….”

유니의 대꾸에 엔지는 비로소 예전처럼 웃었다. 그러곤 유니에게 다시 무어라 말하려는데, 유니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16562822919474.jpg“앗, 다시 출발하나 보다. 나 간다!”

유니는 사람들이 자길 찾는 걸 알고 종종대며 달려갔다. 고맙다고 인사하려던 엔지는 그 뒷모습을 허탈하게 바라보다가, 별수 없이 자신의 마차로 돌아갔다. 그러곤 흔들리는 마차 속에서 나중에 인사해야지 생각했다. 계곡이 무너지는 소리가 난 건, 말들이 요동치고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몇 시간 후의 일이었다. ***

16562822837511.jpg“습격이요?”

레나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에 전령은 무겁게 고했다.

16562822947551.jpg“매복에 당했다고 합니다.”

16562822837511.jpg“그래서 상황은요?”

16562822947551.jpg“사제단은 비교적 무사합니다. 다만 남부 쪽의 피해가…….”

16562822837511.jpg“남부공 저하는 무사하신가요? 그리고 저하와 함께 있는 여자 아이는……!”

16562822947551.jpg“저하께서는 행방불명 상태이십니다. 그리고 여자아이의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보고는 아직 없습니다.”

다급히 묻던 레나는 전령의 대답에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충격에 빠진 레나를 대신해 린이 물었다.

16562822837506.jpg“누구의 소행인지는 확인됐나?”

동부공의 물음에 전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굳은 얼굴로 덧붙였다.

16562822947551.jpg“남부공 저하를 습격한 건 서부의 까마귀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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