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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화. 붕괴 (115/208)

115화. 붕괴2021.06.07.

까마귀라는 말에 레나와 린은 눈을 홉떴다. 까마귀가 남부공을 습격했다니, 말도 안 된다고 외치고 싶었다.

16562823049292.jpg“확실한가?”

하지만 차마 그럴 수 없던 린은 조용히 되물었다. 그에 전령이 무겁게 끄덕였다.

16562823049298.jpg“생존자가 목격한 바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까마귀 탈을 쓴 자가 절벽 위에 모습을 드러냈고, 직후 절벽이 무너졌다고 합니다.”

까마귀가 제국의 공작을 노린 건 처음이 아니다. 북부공도 서부로 오던 중 까마귀의 습격을 받았고, 동부공은 기습을 당해 실종됐다가 겨우 구조되었다. 때문에 전말을 모르는 이들은 이번 일도 당연히 까마귀의 소행이라고 믿었다.

16562823049302.jpg“그럼 사제단은 무사한가요?”

16562823049298.jpg“네, 앞서가던 남부의 기사들만 낙석에 휘말렸고 뒤따르던 사제단은 파편에 맞거나 낙마한 이들 외에 부상자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엔지는 무사하다. 동생의 안전을 확인한 레나는 조용히 쓴 물을 삼켰다. 말을 다 전한 전령은 레나의 창백한 얼굴을 조심히 바라보다 돌아섰다. 이윽고 린과 둘이 남자 레나가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16562823049302.jpg“혹시 린 씨가 보호하는 사람들과 연관이 있나요?”

16562823049292.jpg“아니야.”

린은 단호히 부정했다.

16562823049292.jpg“제국군은 건들지 말라고 당부해뒀어. 그리고 절벽을 무너트릴 정도의 일이라면 내게 먼저 상의했을 거야.”

16562823049302.jpg“그렇다면 누군가가 까마귀를 사칭했다고 봐야겠군요.”

린의 대답에 레나는 선선히 끄덕였다. 애당초 그 물음은 의심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린은 당연히 아니고 린의 동포들도 아니라면 대체 누구지? 누가 까마귀의 행세를 하며 남부공을 습격했지? 서부에서 어슬렁대는 다른 배교자들? 가능성은 희박하다. 까마귀의 이름을 빌려서 공작을 습격해봤자 무슨 이득이 있을까. 게다가 그 가련한 잡배들에게 그만한 매복 능력이 있을 리도 없다. 그렇다면 누구지? 대체 누가 남부공을.

16562823049302.jpg‘설마 아버지가.’

불길한 예감에 레나는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그러곤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을 이었다.

16562823049302.jpg“무슨 일이 생긴 건지 직접 확인해야겠어요.”

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동요를 삼켰다. 그래, 이건 그때와 똑같다. 린이 사라졌을 때. 그때처럼 직접 확인하기 전까진 믿지 않을 거다.

16562823049292.jpg“같이 갈게.”

린은 당장 나가려고 준비하는 레나를 붙잡았다. 이대로 두면 정말 혼자 달려나갈 것 같았다. 그에 레나는 우두커니 서서 린의 손을 뿌리칠지 말지 갈등했다. 불청객이 찾아온 건 바로 그때였다.

16562823078136.jpg“소식은 들었겠지.”

다짜고짜 찾아와 말한 자는 다름 아닌 이우라였다. 그 역시 급보를 전해 듣고 곧장 이리로 넘어온 모습이었다. 남부공에게 일어난 사건이기에, 레나는 이우라가 남부공 대리인인 자신에게 무언가 상의하러 왔다고 생각했다. 가련한 착각이었다.

16562823078136.jpg“대기해라.”

이우라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16562823078136.jpg“저번과 같은 단독행동은 허락하지 않겠다.”

16562823049302.jpg“허락……?”

레나는 그만 얼이 빠졌다. 혹시 잘못 들었나 싶었다. 하지만 이어진 말을 통해 확인했다. 자신이 착각한 게 아님을.

16562823078136.jpg“자신의 위치를 자각해라. 저번처럼 섣불리 움직여 동요를 일으키지 말고.”

16562823049302.jpg“……내 위치는 남부공을 찾으러 가야 마땅한 위치일 텐데요.”

16562823078136.jpg“경이 혼자 달려간다고 뭐가 달라지지?”

16562823049302.jpg“그게 무슨…….”

16562823078136.jpg“설마 저번처럼 아무도 찾지 못한 자를 혼자 찾아내겠다는 건가?”

16562823049302.jpg“당신, 아직도 날 의심하나요?”

레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되물었다. 이우라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게 대답이었다. 덕분에 레나는 천천히 속이 뒤집혔다. 위로 따위를 하러 올 위인이 아닌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곧장 달려와 하는 말이 이딴 소리라니. 이성적으로만 따지면 그의 말이 맞다. 이미 서부 접경지의 병사들이 주변을 수색하고 있을 것이다. 거기에 레나 혼자 달려가 본들 상황이 크게 나아질 리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우라의 말대로 성채를 얌전히 지키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남부공은 레나에게 좋은 협력자였고, 유니는 레나가 이 세상으로 돌아온 이유였다. 레나는 심장이 타들어 가는 기분을 참으며 애써 온화하게 말했다.

16562823049302.jpg“좋을 대로 해요. 의심하든 매도하든 그건 당신 자유니까. 하지만 내 앞을 막진 마세요.”

16562823078136.jpg“대기하라고 했을 텐데.”

16562823049302.jpg“어디서 명령이야.”

경어를 포기한 레나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고, 입가엔 미소마저 남아 있었다. 그래서 이우라와 린을 비롯한 그 자리의 기사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레나도 어쩔 수 없었다. 지금 레나는 가식을 떨지 못할 만큼 초조했다. 린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보다 더 그랬다. 그때는 너무 놀라서 정신이 돌아올 동안 생각을 정리할 틈이라도 있었다. 의심스러운 구석도 많았고, 무엇보다도 린을 향한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엔 경우가 달랐다. 남부공은 노인이고 유니는 어린아이다. 게다가 서부와는 연이 얼마 없는 사람들이라 린처럼 숨겨둔 패가 있을 리도 없었다. 그 와중에 낙석이라니, 추락했다면 그나마 희망을 가져보겠지만 돌에 깔렸다면 사실상 끝이라고 봐야 한다. 생각은 이미 거기까지 미쳤지만 레나는 섣불리 절망하지 않으려 자신을 필사적으로 추스르고 있었다. 그 와중에 나타난 이우라는 레나의 속을 지독하게 뒤집었다.

16562823049302.jpg“그만 나가주시죠.”

16562823078136.jpg“거절한다면?”

16562823049302.jpg“그럼 계속 그러고 있던가.”

레나는 단 한 번도 마음에 들어본 적 없는 남자를 노려보며 나직이 말했다. 그러곤 실랑이할 시간도 아깝다는 듯 그를 지나쳤다. 혹여 그가 뒤에서 팔을 낚아채면 손목을 꺾어버릴 작정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대치할 겨를은 없었다.

16562823049298.jpg“전하!”

새로이 몰아닥친 소식 때문이었다.

16562823049298.jpg“성채 앞에 까마귀가 나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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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까마귀가 나타났다는 소식에 레나와 린, 그리고 이우라와 루비드까지 성벽 위로 달려갔다. 성벽엔 이미 기사들과 병사들이 저 너머를 경계하고 있었다. 레나는 궁수들이 석궁을 겨누고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석양이 내리는 시간이었다. 지평선으로 기울며 더 찬란해진 황금빛 태양 아래 그림자처럼 불길한 존재가 서 있었다.

16562823136578.jpg“저게 까마귀?”

루비드가 반신반의하며 중얼댔다. 그림자가 길게 진 절벽 위에 검은 망토를 두른 자가 서 있었다. 그가 뒤집어쓴 부리 달린 가면은 분명 까마귀의 형상이었다. 게다가 그 앞엔 푸른 제복을 입은 자가 무릎 꿇고 앉아 있었다.

16562823078136.jpg“남부공인가?”

16562823049298.jpg“아닙니다. 젊은 사람입니다.”

이우라의 물음에 전방을 주시하던 기사가 답했다. 그에 이우라의 눈썹이 구겨졌다. 남부공도 아닌 일반 기사를 데리고 단신으로 성채까지 찾아오다니. 이우라는 까마귀의 의도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성채와 절벽 사이의 거리가 아무리 멀다 해도 눈에 보이는 이상 그곳은 북부공의 사정권이었다. 그걸 뻔히 알면서 찾아왔다는 건 어떤 속셈이 있다는 뜻. 그래서 이우라는 잠자코 기다렸다. 까마귀가 뭔가를 제안하면 정보만 확인하고 사로잡거나 죽일 생각이었다. 그런데 까마귀가 돌연 검을 빼 들었다. 석양을 반사한 날붙이가 용암처럼 빛나는가 싶더니, 까마귀는 그대로 앞에 앉은 기사를 내리쳤다.

16562823136649.jpg“큭……!”

예상치 못한 처형에 성벽에 선 기사들이 이를 악물었다. 이미 하늘이 붉어 흐르는 피는 그리 두드러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어 나타난 붉은 것은, 석양과 같은 빛깔임에도 무서운 존재감을 드러냈다.

16562823049298.jpg“저건…….”

허공에 기이한 틈이 생기자 기사들이 눈을 홉떴다. 그 틈은 석양보다 붉고 깨진 유리처럼 날카로웠다. 그리고 살아 있는 세상을 맹렬히 갈망하는 망자들을 품고 있었다.

16562823049298.jpg“균열이 열렸다!”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참격이 날아갔다. 하지만 그 예리한 칼날도 이미 시작된 붕괴를 막을 수는 없었다. *** 서부 접경지의 요새가 습격당할 때, 요새로 이어지는 길목에서는 수색이 한창이었다.

16562823136662.jpg“부상자는 더 없나요?”

거칠게 타는 횃불 아래서 소년이 다급히 물었다. 그렇게 묻는 소년의 하얀 사제복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본인의 것이 아니라 낙석에 휘말린 부상자들을 돕다가 묻은 피였다. 그 소년 사제, 엔지는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연신 주변을 두리번댔다. 옷을 더럽혀가며 궂은일을 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건 이 도련님에게 어울리는 일도 아니었다. 아마 평소라면 무서워하며 뒤에 숨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엔지는 차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16562823136662.jpg‘유니, 어디 있어…….’

친구가 저 어딘가에 있다. 빨리 파내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엔지는 초조해하며 기사들이 토사를 파헤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배교자들이 또다시 습격해올지도 모르지만 길이 막힌 탓에 그들은 몸을 피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이 시간까지 요새에서 지원이 오지 않는 게 이상했다. 소식이라면 진즉에 전해졌을 텐데. 엔지는 손을 떨며 이 악몽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소년의 바람이 무색하게도, 생존자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 같은 시각, 토사가 쏟아진 계곡에서 서쪽으로 한참 떨어진 곳이었다. 물소리가 가득한 그곳에서, 동물 탈을 쓴 자들이 계곡에서 무언가를 건져내고 있었다. 서너 명이 밧줄을 당기자 물속에 있던 자가 무언가를 안고 뭍으로 나왔다. 어스름한 달빛 아래 그것은 한데 뭉쳐 있었다. 하지만 자갈 위로 꺼내놓고 보니 그것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다. 물속에서 막 나온 건 살았는지 죽었는지 아직 알 수 없는, 체구가 큰 노인과 아주 작은 여자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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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에서 나온 자가 숨을 헐떡이며 주저앉자 밧줄을 당기던 자들이 다가와 노인과 아이를 살폈다.

16562823049298.jpg“살아 있나?”

16562823049298.jpg“노인 쪽은. 대신 출혈이 심해.”

16562823049298.jpg“이쪽은 숨을 안 쉬어.”

숨을 안 쉰다는 말에 뒤에서 지켜보던 자가 빠르게 다가왔다. 그는 아이 앞에 앉으며 탈을 벗었고, 주위에선 그걸 만류했다.

16562823049298.jpg“가면 벗지 마.”

16562823049298.jpg“어린애잖아.”

16562823049298.jpg“하지만…….”

16562823049298.jpg“이렇게 어두운데 뭐가 걱정이냐.”

탈을 벗은 여인은 그렇게 말하며 몸이 차가운 아이에게 숨을 불어넣었다. 그렇게 가슴을 압박하며 숨을 불어넣기를 한참, 미동도 없던 아이가 왈칵 물을 토하더니 미약하게나마 호흡을 시작했다.

16562823049298.jpg“살았어?”

16562823049298.jpg“어. 하지만 이대론 오래 못 버텨.”

여인이 아이의 뺨을 쓸며 중얼댔다. 다 젖은 뺨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게다가 밤이 내린 이 계곡은 여름임에도 오싹한 한기가 돌았다. 이대로면 기껏 살린 수고가 무색해진다. 여인이 아이를 안아 들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자가 말했다.

16562823049298.jpg“이 노인은 남부공이야.”

16562823049298.jpg“확실해?”

16562823049298.jpg“아니어도 비슷한 수준의 인사겠지.”

탈을 쓴 자가 달빛에 드러난 제복을 보며 중얼댔다. 북부의 것도 동부의 것도 아닌 푸른 제복. 제국에서 제복을 입는 건 주로 기사의 역할을 수행하는 젊은이들이다. 만약 나이 많은 자가 제복을 입었다면 그는 통솔자라고 봐야 한다. 이런 추론으로 눈앞의 노인을 남부공으로 특정한 자는, 아이를 안아 든 여인에게 냉정히 말했다.

16562823049298.jpg“이 자는 안 돼. 정 데려가야겠다면 아이만 데려가라.”

동료의 주장에 여인은 쓰러진 노인을 내려다보았다. 창백한 달빛 아래 얼굴이 파리하게 질린 노인은, 피를 흘리며 천천히 죽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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