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제국의 공작 된 자2021.06.10.
이상한 사람이다. 그게 눈앞의 인물에 대한 아이의 첫인상이었다. 이름조차 없는 아이는 경계심과 호기심이 섞인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사람은 어렸다. 이제 예닐곱 살인 아이만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른이라고 불릴 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이제 겨우 열세 살, 네 살쯤 되었을까? 그런데도 그 사람은 강했다. 정말 무척이나 강해서, 아이를 제물로 바치려던 배교자들을 모조리 혼내주고 내쫓아 버렸다. 그래놓고 아까부터 멍하니 혼란스러운 표정이다.
“거기는, 이름이 뭐야……요?”
결국 아이가 먼저 쭈뼛대며 말을 걸었다. 원래는 누구에게나 날카롭게 구는 꼬마지만, 이 사람은 자길 구해줬으니 일단 존댓말을 썼다. 그러자 그 사람은 아주 느리게 대답했다.
“레나…….”
“레나?”
아이가 갸웃대며 되묻자 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희미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너는……?”
“나는 이름 없어요.”
“이름이…… 없어?”
“그냥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면 돼요.”
아이는 덤덤히 말하며 일어났다. 그들이 통성명하던 장소는 방금전까지 배교자들이 수상한 의식을 거행하던 곳이었다. 때문에 여기저기 핏자국이 남아 살풍경했지만,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구석구석을 뒤져 딱딱한 빵과 육포를 찾아냈다.
“자요.”
아이는 육포를 으적으적 씹으며 그 반쪽을 레나에게 내밀었다. 레나는 아이의 행동을 황당하게 쳐다보더니 이내 마른 음식을 받아들었다. 하지만 그걸 입에 대지는 않고, 한참을 고민하다 입술을 달싹였다.
“이름, 내가 지어줄까?”
“내 이름을요?”
갑작스러운 제안에 아이가 고개를 갸웃댔다. 그러더니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들어보고 결정할게요.”
“유니…….”
“유니? 무슨 뜻인데요?”
“내가 좋아하는, 책에 나오는…….”
“책? 책을 읽을 줄 알아요?”
아이가 의외라는 듯 물었다. 레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의 눈이 더 커졌다. 행색이며 말투며 영락없는 동네 바보인 줄 알았는데, 글을 읽을 줄 안다니.
“어디서 배웠어요?”
“가정교사에게…….”
“그게 뭔데요?”
아이는 맹랑하게 물었고 레나는 천천히 설명했다. 잠시 후 가정교사라는 개념을 겨우 이해한 아이는 놀라서 되물었다.
“설마 귀족이에요?”
아이가 얼떨떨해하며 묻자 레나는 다시금 끄덕였다. 그러자 아이가 눈을 빛내며 소리쳤다.
“그럼 레나 아가씨라고 불러도 돼요?”
아이의 씩씩한 목소리에 레나의 얼굴이 잠시 멍해졌다. 레나는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더니 소리 없이 눈물을 떨어트리기 시작했다.
“왜 울어요?”
“갑자기 생각나서…….”
“네?”
레나가 무어라 대답했지만 아이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울지 마요. 누가 괴롭힌 것도 아닌데 왜 울어요?”
아이가 레나를 달래려는 듯 손을 뻗었다. 아이의 손이 닿자 레나는 그 작은 손에 기댔다. 아이는 갑자기 우는 레나가 이상했다. 하지만 손을 뿌리치거나 물러나지는 않았다. 그저 옆에서 말했다.
“울지 마요. 날 도와줬잖아요. 그러니까 울지 마요. 나도 도와줄게요.”
. . . 막 잠에서 깬 유니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여긴 어디지?’
허름한 천장 위로 빗살무늬 햇살이 드리우고 있었다. 왜 이런 게 보이는 걸까 고민하던 유니는 곧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뭐야, 어떻게 된……!”
유니는 혼란스러워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조금 떨어진 곳에서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났느냐?”
“영감님!”
유니는 남부공의 목소리를 바로 알아듣고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남부공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이불에 풀썩 넘어졌다. 이불에 코를 박은 유니는 아파하며 자신의 발목을 돌아보았다. 단단한 밧줄이 유니의 작은 발목에 감겨 있었다.
“아얏, 뭐야 이거……!”
“놀라지 마라.”
“어떤 새끼가 이딴 짓을!”
“……놀라지 않았구나.”
남부공은 기세등등한 유니를 보며 침음했다. 그러곤 부산을 떠는 꼬마에게 낮게 경고했다.
“목소리를 낮춰라.”
남부공의 말에 유니는 씩씩대면서도 일단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가만히 기억을 더듬었다. 유니는 남부공과 함께 마차를 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렸고, 바위와 돌이 마구 쏟아져 마차를 때렸다. 와지끈 소리가 나며 마차가 기울었는데, 가파른 벼랑으로 밀린 마차의 문이 너무 쉽게 열렸다. 그리고 유니의 작은 몸은 그 틈으로 너무 쉽게 빨려 들어갔다. 전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대로 떨어진다 싶을 때 남부공이 유니를 붙잡았다. 하지만 끌어당길 수는 없었다. 밀려온 토사가 그를 떠밀어버린 탓이었다.
‘마차에서 떨어졌구나.’
그런데 어떻게 살아 있지? 유니는 다친 곳이 없나 제 몸을 만져보다가 옷이 바뀐 것을 깨달았다. 깨끗하긴 하지만 질이 좋지 않은 거친 옷이었다.
“벼랑 아래에 하천이 있었지. 거기로 떨어져 산 모양이다.”
“아하.”
유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남부공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가느다란 햇빛 틈으로 보이는 남부공의 상태가 이상했다. 그는 한쪽 팔을 붕대로 칭칭 감고 있었다.
“영감님 다쳤어요?”
“별거 아니다.”
“뭔데요, 으악!”
유니는 남부공에게 다가가려다가 다시금 고꾸라졌다. 연이어 코를 박은 유니는 화를 내며 발버둥쳤다. 그러나 발목을 묶은 밧줄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것 좀 풀어줘요!”
결국 유니는 남부공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에 남부공은 자신의 발목에 감긴 쇠사슬을 자르륵 들어 보였다. 묶여 있기는 남부공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저쪽은 사슬이었다. 상황을 깨달은 유니는 한층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영감님과 이런 곳에서 죽고 싶지 않아요.”
“고약한 발언이지만 겁먹어 우는 것보단 낫군.”
남부공이 혀를 끌끌 찼지만 유니는 도리어 콧방귀를 뀌었다. 겁먹어 울다니, 이래 봬도 서부 빈민가부터 남부 전쟁터까지 헤쳐온 몸이다. 유니는 어지간한 기사보다 나은 담력으로 태연히 말했다.
“그냥 사고가 아니었던 거죠?”
“그런 모양이다.”
“그럼 우리 인질이에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태평하시네요.”
“됐고, 네 머리맡에 놓인 종이나 읽어봐라.”
남부공이 유니가 누워 있던 자리를 가리켰고, 유니는 거기에 종이가 놓인 걸 그제야 깨닫고 주워들었다. 그러곤 소리 내어 읽었다.
“우리는 당신들을 습격하지 않았습니다……?”
남부공의 예상대로 보란 듯이 놓인 종이엔 누군가의 전언이 담겨 있었다.
“어, 당신들을 우연히 발견해 구조했지만 우리의 안전을 위해 가둡니다. 불가피한 상황임을 헤아려 주십시오. 우리가 당신들을 돌려보낼 때까지 부디 조용히 기다려주기 바랍니다……?”
“퍽 정중하군.”
유니가 쪽지를 소리내 읽자 남부공이 중얼댔다. 그러곤 속으로 생각했다. 영문을 더 모르겠다고. 아이보다 한발 먼저 깨어난 노인은 눈을 뜨자마자 주위를 면밀히 살펴보았다. 그로써 파악한 건 제대로 된 감금장치조차 없는 허술한 집의 구조, 급조한 것이 분명한 사슬 족쇄, 욱신대는 어깨를 단단히 감싼 붕대와 새 옷이었다.
‘보아하니 어딘가의 촌락으로 보이는데 우릴 가둔 이유가 뭐지? 숨어 사는 자들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제복 입은 노인을 구해놓고 이렇게 가둬둘 리는 없다. 하긴 서부에 배교자와 범죄자들이 숨어 사는 게 어제오늘 일도 아니다.
‘일단 기다려보는 수밖에 없나…….’
남부공이 그렇게 생각하는데 문이 덜컹 열렸다. 돌연 들어온 사람은 두건으로 얼굴과 머리를 모두 가리고 있었다. 유니와 남부공이 경계하자 그 사람은 거의 던지듯이 아이와 노인 앞에 무언가를 놓고 나가버렸다. 그것은 초라하지만 무례하지는 않은 한 끼의 식사였다. . . . 정체불명의 사람들은 그렇게 매 끼니를 챙겨주었다. 그러다 밤중엔 갑자기 여러 사람이 들어와 남부공을 둘러쌌다. 유니가 화들짝 놀라 뭐 하냐고 소리쳤지만, 이윽고 그들이 한 행동은 남부공의 붕대를 가는 것이었다. 그들은 오히려 남부공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고, 그걸 느낀 남부공이 차분히 말을 건넸다.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다. 그대들이 내 은인인 걸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 . .
“가만히 앉아서 먹고 노는 것도 고역이네요.”
유니가 그릇에 담긴 음식으로 장난을 치며 중얼댔다. 여기 온 지도 벌써 사흘째다. 대접이 나쁜 편은 아니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갇혀 있으려니 점점 초조해졌다. 그때 남부공이 투덜대는 유니를 불렀다.
“유니여.”
“네, 영감님.”
“예전에 서부에서 지냈다고 했지.”
“그런데요?”
“이들이 내주는 게 서부에서 흔히 먹는 음식인가?”
“아뇨, 이런 건 저도 처음 먹어봐요.”
유니는 그렇게 대답하며 앞에 놓인 그릇을 바라보았다. 나쁜 음식은 아니지만 확실히 독특했다. 이들도 그걸 아는지 나름 특색을 숨긴 듯한데, 그럼에도 먹다 보니 미묘한 차이가 있다. 가령 제국에서는 먹지 않는 종류의 풀을 곁들여 낸다거나, 제국에선 보통 구워서 내놓는 걸 삶아서 내놓는다거나.
‘도적 떼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만…….’
설마 생활양식이 다른 자들일 줄이야. 고민하던 남부공은 목소리를 낮춰 유니에게 말했다.
“이만 탈출해야겠다.”
“좋아요!”
유니는 놀라지도 않고 냉큼 동의했다. 남부공은 참 어지간하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자리에 놓인 이불을 찢어 발목에 묶인 사슬 틈에 쑤셔 넣었다.
“족쇄를 푸는 비법이에요?”
유니는 심각한 얼굴로 남부공을 따라 했다. 유니가 자신의 발목에 묶인 밧줄에도 이불 조각을 밀어넣자, 남부공은 애석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러더니 사슬을 붙잡고 눈을 부릅떴다. 일순 남부공의 눈이 파랗게 물들더니 사슬이 빨갛게 가열되었다.
“에엑…….”
그걸 본 유니가 질겁했다. 사슬과 발목 사이에 이불 조각을 끼워 넣었지만 지글대는 쇳덩이는 남부공의 발목에 살벌한 화상 자국을 남겼다. 하지만 남부공은 개의치 않으며 사슬을 끊었고, 상처 난 발목도 대충 싸맸다. 그러곤 유니에게 다가왔다.
“보다시피 비법이라고 할 만한 것은 아니다.”
남부공은 그렇게 말하며 유니의 발목을 묶은 밧줄까지 태워서 툭 끊어 버렸다. 자유로워진 유니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근데 벌써 사슬을 풀면 어떡해요, 밤에 탈출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 밤에는 더 눈에 띈다.”
지금 남부공에게 남은 무기는 권능뿐이다. 밤중에 불을 피우면 자신의 위치를 온 천하에 알리는 셈이 되니, 만약 탈출한다면 밤보다는 낮이 용이할 것이다.
“그럼 언제 탈출할 거예요? 저녁?”
“아니, 지금.”
남부공은 단호히 말하며 유니를 둘러업었다. 유니가 콩이 든 자루처럼 어깨에 매달리자 남부공은 자신을 둘러싼 오두막집을 단숨에 태워버렸다. 오두막은 눈 깜빡할 사이에 불길에 휩싸이더니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았고, 그걸 본 유니가 놀라서 소리쳤다.
“영감님, 이건 탈출이 아니라 깽판인데요!”
“그럼 제국의 공작 된 자가 꽁무니를 빼야 쓰겠느냐?”
“생각보다 막 나가시네요!”
오두막이 순식간에 전소되자 주위에서 사람들이 달려왔다. 주변에서 경계하던 모양인데, 그들은 하나같이 탈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제국의 공작 된 자가 은인의 얼굴조차 몰라서야 쓸까.”
남부공은 자신을 에워싼 자들을 향해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또 한 번 불길이 일어 사람들의 탈을 태워버렸다. 사람들이 기겁하며 불길을 털어냈다. 그런데 열기에 허둥대는 사람 중에 유독 한 사람만 놀라지 않고 남부공을 똑바로 주시했다. 흑단 같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 그리고 단아한 얼굴. 그 여인을 본 남부공은 놀라지 않고 중얼댔다.
“역시 동부인이었군.”
비록 알아듣진 못했지만, 그 여인, 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