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사냥의 시간2021.06.14.
예상은 했다. 묘하게 다른 생활양식, 모습을 한사코 감추는 행동을 보며 이들의 정체를 어느 정도 추측했다. 하지만 설마 정말 동부인일 줄이야. 남부공은 3년 전 동부공이 저지른 만행을 떠올렸다. 그 시절, 동부공은 제 동포를 서부 망자들의 먹이로 내몬 것 때문에 악평이 자자했다.
‘설마 그때 빼돌린 자들인가?’
동부공을 오해하지 말라는 레나의 말이 문득 떠올라, 남부공은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그때 저편에서 한 소년이 달려왔다. 그는 여인 앞에 서더니 제국어로 외쳤다.
“우, 우리가 당신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알고 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대들을 해치지 않을 것이다.”
남부공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유니가 작게 종알댔다.
“도망칠 마음은 애당초 없으셨군요.”
“조용히 있거라.”
유니가 깐죽대는 사이 동부인들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그들은 남부공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남부공은 한층 온화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나를 가두었나?”
“일부러 가둔 건 아닙니다! 돌려보낼 방법이 없었을 뿐입니다!”
“무슨 방법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우리를 장벽 근처에 풀어주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남부공이 말하자 소년은 동부어로 그 말을 여인에게 전했다. 그러자 여인이 소년을 통해 대답했다.
“그러려고 했지만 상황이 변했습니다!”
“상황이 변했다고?”
“이틀 전 장벽이 무너졌습니다!”
소년의 대답에 남부공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그에게 업혀 있던 유니도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망자들에게 습격을 받았습니다. 장벽 일부가 무너졌고 북부공과 동부공은 행방이 묘연한 상황입니다!”
연이은 비보에 유니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빡였고, 남부공도 적잖이 당황해 업고 있던 유니를 내려놓았다. 충격을 받은 두 사람을 보며 여인, 휘는 모두 사실이라는 듯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동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남부공까지 구조해낸 휘는 바로 다음 날 까마귀에게 연락을 취했다. 남부공과 아이를 조용히 제국으로 돌려보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까마귀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평소엔 아무리 늦어도 반나절 안에 망자를 통해서 반응했는데 이번엔 어쩐 일인지 하루가 다 가도록 잠잠했다. 다시 연락을 시도해봐도 마찬가지였고, 결국 휘는 정찰대에게 장벽의 상황을 살펴보도록 했다. 그로써 전해진 소식은 휘에게도 매우 뜻밖이었다. 그 견고한 성은 군데군데 허물어져 엉망이었고, 기사와 병사들의 분위기는 평소보다 더 살벌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정찰을 나선 이들은 성벽에서 허드렛일 하는 자를 붙잡아 추궁했고, 그로써 북부공과 동부공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다치거나 죽은 게 아니라 사라졌다고?”
“그렇습니다!”
“그, 그럼 남부공 대리는요?”
그때까지 얌전히 있던 유니가 소리쳤다.
“레나 루벨이요! 동부공의 약혼녀요!”
“같이 사라졌다고 들었습니다!”
소년의 대답에 유니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버렸다. 사라졌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남부공은 믿을 수 없었다. 동시에 허드렛일 하는 자에게서 들은 정보라면 그렇게 말이 전해지는 것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돌아가서 상황을 확인해야겠군.’
남부공은 마음이 한층 급해졌다. 서부 장벽에 있던 자들은 제국 최강의 전력이다. 균열에서 망자들이 몰려오는 와중에 그들이 홀연히 사라졌다니, 상황이 생각보다 더 심각했다.
“우리를 본 이상 당신을 돌려보낼 순 없습니다!”
그때 남부공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휘가 소년을 통해 말했다.
“순전한 도의에 따라 죽어가는 이를 구했지만, 그로 인해 동포들을 위험에 빠트릴 수는 없습니다. 당신은 이곳에서 나가지 못합니다.”
휘의 선언과 함께 남부공과 유니를 에워싼 동부인들이 조용히 무기를 들었다. 유니는 기겁하며 남부공의 뒤로 몸을 피했고 남부공은 그들을 보며 고뇌했다. 이들이 앞을 막아서는 것도 이해는 된다. 그의 추측이 맞다면 이들은 3년 전 서부로 보내진 동부의 반란군이다. 황제의 준엄한 명령으로 처형된 자들이 서부에서 멀쩡히 살아 있는 게 알려지면 황제가 어떻게 나올지는 뻔했다. 그러니 이들은 목숨을 걸어서라도 남부공을 막을 것이다. 잠시 궁리하던 남부공이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대들을 살린 것이 동부공인가?”
소년은 그 말에 놀라 멈칫했고, 통역을 받지 못한 휘는 남부공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만으로도 대답은 충분했다.
“대답하지 않아도 이해하겠다. 그럼 그대들은 내가 남부공인 것을 아는가?”
남부공이 재차 묻자 소년은 뒤늦게 휘에게 말을 전했다. 소년보다 노련한 휘는 동요 없이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 전권을 이어받은 대리인이 동부공의 약혼녀임은 아는가?”
“……알고 있습니다.”
“그럼 내가 동부공의 흠을 덮어 줄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겠군.”
남부공의 말에 뒤에 있던 유니가 작게 중얼댔다.
“헐…….”
남부공은 헛기침을 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레나가 약혼하겠다고 할 때 그놈은 안 된다며 노발대발해놓고 이제 와 동부공을 사위 취급하려니 몹시 겸연쩍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들의 입장을 헤아리며 여기 남아 있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자신을 구해준 자들을 해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동부공과 운명공동체인 양 말하자 과연 효과가 있었다. 동부인들은 남부공의 말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결국 동부인들은 남부공을 세워두고 저들끼리 속삭였다.
“휘야, 우리는 동부공과 아무 관련이 없어야 한다.”
“이미 늦었소. 아무 관련 없다고 하면 저치가 믿겠소?”
“차라리 까마귀의 얘기를 해라.”
“안 되오. 저들을 공격한 자가 까마귀 탈을 쓰고 있었소. 게다가 까마귀 얘기를 하면 동부공이 더 의심을 살 거요.”
까마귀의 정체를 모르는 척하는 것이 이들의 철칙이었다. 하지만 남부공이 대놓고 동부공을 언급한 이상, 이들도 더는 시치미를 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남부공의 주장은 타당했다. 한편 동부공, 까마귀의 생사를 알지 못해 답답한 것은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 형님은 약혼녀 누님이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저 노인네도 괜찮지 않을까요?”
소년, 진이 휘에게 말했다. 심지어 까마귀는 제 약혼녀를 마을까지 데려왔다. 이렇게 된 이상 전원 공범인 셈이다. 진의 말은 타당했고, 그렇게 믿고 싶기는 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단지 믿을 만하다는 생각으로 그를 풀어주기엔 상황이 너무 엄중했다. 갈등하는 휘에게 진이 재차 말했다.
“우리도 형님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알아야 하잖아요?”
그 말에 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진을 시켜 다시 말했다.
“알겠소, 당신은 보내드리겠소. 다만 우리에게도 담보가 필요하오.”
“담보?”
“그 아이는 두고 가시오.”
“엥?”
가만히 듣다가 지명 당한 유니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남부공은 자신의 허리춤에 매달린 꼬마를 잠시 내려다보더니 이내 선선히 답했다.
“알겠다.”
“저기요, 영감님!”
너무 쉽게 볼모가 된 유니가 힘껏 항의하려고 남부공을 잡아당겼다. 그에 남부공이 나직이 말했다.
“우릴 구해준 자들이다. 지금은 여기 남는 편이 네게도 안전할 것이다.”
“아가씨가 무사하신지 확인해야 돼요!”
“그건 내가 하겠다. 집행자가 무사한데 네가 다치면 무슨 소용이냐?”
“으윽…….”
남부공의 말엔 빈틈이 없어 유니는 더 따지지 못하고 별수 없이 수긍했다.
“그대의 요구대로 아이를 두고 가겠다. 추후 동부공과 함께 아이를 찾으러 올 테니 잘 보호해주기 바란다.”
남부공의 말에 휘는 조용히 끄덕였다. 다른 동부인들도 이견을 달지 않았다. 다른 담보는 필요 없었다. 저 아이는 남부공이 물살에 떠내려오면서도 끝내 붙잡고 있던 아이였다.
. . .
“당신을 노리는 자들이 있소.”
남부공이 남부의 제복을 갖춰 입고 떠날 준비를 하자, 그를 지켜보던 휘가 말했다.
“절벽이 무너질 때 수상한 자들이 있었소. 그들은 까마귀의 탈을 쓰고 있었지만, 우리가 익히 보아온 까마귀와는 달랐소.”
휘는 까마귀에 대해 조심히 덧붙였다. 그에 남부공은 말에 올라타며 끄덕였다.
“유의하겠네.”
“그리고 이 말은 빌려주는 거니 꼭 돌려주시오.”
“설마 애를 맡겨두고 말을 떼먹을까.”
남부공이 기가 막히다는 듯 중얼댔고, 휘는 진에게 그 말을 전해 듣고 씨익 웃었다. 딱딱하게 말하던 휘가 남부공에게 처음으로 보여준 미소였다. 남부공은 그 웃는 모습이 퍽 보기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차마 마주 웃지는 못했다. 이들이 여기서 숨어 사는 까닭을 아는 탓이었다.
“……동부공이 그대들에게 잘해주던가?”
남부공은 저도 모르게 물었다. 그에 휘는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별 희한한 걸 묻는군.”
별로 예의 바르진 않지만 적절한 대답이었다. 그래서 남부공은 자신이 동부공을 심히 오해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한 번쯤 이야기를 들어볼 필요는 있겠군.’
물론 그러려면 그자의 생사부터 확인해야겠지. 내 대리인의 생사도. 남부공은 그렇게 생각하며 힘껏 말을 몰았다. 숲을 빠져나오자 폐허가 된 서부의 도시와 균열이 보였다. 남부공은 득실대는 망자들을 뒤로한 채 곧장 장벽을 향해 달렸다. 남부공을 발견한 망자들이 간간이 달라붙었지만 그때마다 남부공은 권능을 사용해 그들을 불살랐다.
‘고조되는군.’
수십 년 만에 권능을 휘두르며 남부공은 이를 악물었다. 망자들을 태울 때마다 묘한 쾌감이 그를 자극했다. 황홀한 불꽃과 타들어 가는 향기, 그리고 몸부림치는 망자의 움직임이 그를 유혹했다. 남부공은 거기에 주의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부단히 자신을 억눌렀다. 그러곤 최대한 힘을 아끼며 장벽으로 내달렸다. . . .
‘역시 살아 있었나.’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그런 남부공을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다. 까마귀 탈을 쓴 그는 높은 언덕에서 서부의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만 포기할까 했는데, 그냥 돌아갔으면 큰일 날뻔했군.’
그는 까마귀 탈 속에서 조용히 웃었다. 안 그래도 남부공의 생사를 확인 못 해서 전전긍긍하던 차였다. 그런데 운도 좋지, 이렇게 스스로 나타나주다니.
“석궁을.”
까마귀 탈을 쓴 자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러자 곁에 있던 또 다른 까마귀 탈을 쓴 자가 그에게 장전된 석궁을 건넸다. 석궁을 건네받은 까마귀는 그대로 남부공을 겨누었다. 그런데 곧장 쏘지 않고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품에서 작은 약병을 꺼냈다.
‘가능성은 높을 수록 좋겠지.’
까마귀는 석궁에 독을 발랐다. 매우 값비싼 독이지만 상대가 남부공이니 아까울 것도 없었다. 다시 조준한 까마귀는 남부공이 달리는 방향으로 정확히 석궁을 쏘았다. 파악! 거친 소리와 함께 날아간 석궁은 순조롭게 남부공의 심장을 쫓았다. 그런데 그것은 남부공의 살갗에 닿기 전 화르륵 타오르며 튕겨져나갔다. 까마귀는 놀라서 석궁을 치우고 남부공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남부공과 눈이 마주쳤다.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정확히 돌아본 남부공은 눈을 매섭게 뜨며 까마귀를 쏘아보았다. 그 순간 언덕에 불길이 치솟았다. 삽시에 화염이 몰아쳤고 까마귀들이 소리를 지르며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으아악!”
남부공을 쏜 까마귀의 옷에도 불이 붙었다. 그자는 까마귀 탈을 집어 던지고 몸을 굴렸다. 불길 속에서 겨우 헤쳐나온 남자, 루벨 후작은 남부공이 있는 쪽을 서둘러 바라보았다. 혹여 공격이 이어지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남부공은 관심조차 아깝다는 듯, 자신을 노린 괴한들을 무시한 채 장벽으로 계속 달릴 뿐이었다. 그 뒷모습과 잿더미가 된 언덕을 번갈아 보던 후작은 이내 실소했다. 이토록 경이로운 힘이라니. 역시 나는 이 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