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실종2021.06.17.
남부공은 습격자들을 쫓지 않았다. 겉으로는 바쁘니 놓아준다는 듯 돌아섰지만, 실은 그들이 쫓아오면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업화를 다시 일으키니 몸 안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속에 있는 불을 다 쏟아내야 할 것 같았다.
‘정녕 끔찍한 힘이다.’
일말의 빌미를 얻은 힘이 그를 집어삼키려 들었다. 한평생을 외면했는데도 이 정도라니. 남부공은 진저리를 내며 더 힘껏 말을 몰았다. 이윽고 장벽에 가까워졌을 때, 성문이 열리며 푸른 제복의 기사들이 마주 달려왔다.
“저하!”
남부공을 알아본 남부의 기사들이었다.
“무사하셨군요!”
“다행입니다……!”
“집행자는?”
남부공은 동부인의 존재를 덮기 위해 일부러 레나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기사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레나 경은 지금 이곳에 없습니다.”
“레나 경 뿐만 아니라 북부공과 동부공, 그리고 북부 왕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휘가 한 말이 전부 사실인 모양이다. 남부공은 놀란 척할 여유도 없어, 차가운 얼굴로 고삐를 다잡았다.
“들어가서 얘기하지.”
***
“남부공 저하께서 돌아오셨다고요?”
엔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되물었다. 며칠 내내 죽은 사람처럼 넋을 놓던 소년이 반응하자, 북부 기사는 곧장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아마 낙석이 떨어질 때 절벽 아래 하천으로 떨어지셨던 모양입니다.”
“그, 그럼 혹시 혼자 오셨나요? 다른 사람은, 유니라는 여자애는 옆에 없었나요?”
엔지의 절박한 물음에 기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에 잠시 생기를 되찾았던 소년의 눈이 다시금 가라앉았다. 엔지 루벨은 불과 어제 부상자들과 함께 요새로 들어왔다. 고귀한 가문의 도련님답지 않게 피투성이 흙투성이가 되어, 마치 패잔병처럼 입성했다. 유니를 찾지 못한 것에 좌절하던 엔지는 요새에서 또 다른 비보를 전해들었다. 이우라 플레누스 전하와 루비드 전하, 레나 루벨과 동부공까지 모두 사라졌다는 소식이었다. 그 소식을 들은 엔지는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쓰러졌고, 한나절 만에 깨어나서는 먹지도 말하지도 않고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그 모습이 염려스러웠던 기사가 넌지시 말했다.
“공자, 심적으로 많이 힘든 것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잘 추스르고 기다리면 아버님께서 오실 겁니다.”
기사의 말에 엔지가 덜컥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아버지요……?”
“후작 각하께 연통을 넣었습니다. 아마 소식을 받으시는 대로 달려오실 겁니다.”
엔지는 눈을 크게 뜨고 입술을 떨다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당황하는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아버지가. 아버지가. 아버지가.
‘설마, 아닐 거야. 아니겠지…….’
엔지는 애써 되뇌면서도 은밀히 핀 의심의 싹을 어쩌지 못했다. 까마귀의 예상치 못한 습격, 이례적인 규모의 피해, 그리고 북부공 전하의 실종. 이 모든 것이 아버지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생각은 지나친 비약일까? 아버지는 이미 3개월 전에 남부공을 해치기로 마음먹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추기경 전하 앞에서. 때문에 엔지는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이 일이 아버지의 소행일지도 모른다고. 두엄의 궁에서 그랬던 것처럼 계획적으로 덫을 놓은 건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의심하면서도 착각이길 바랐다. 아버지가 친구와 사람들을 죽였다고는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엔지의 주머니엔 아직 유니가 건네준 쿠키가 남아 있었다. 저도 모르게 눈가가 뜨거워져, 엔지는 황급히 말을 돌렸다.
“아, 알겠어요.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엔지는 그렇게 말하며 얼굴을 감췄다. 기사는 공자의 눈가가 젖은 걸 이미 봤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언뜻 그것은 안도의 눈물처럼 보였고, 그래서 기사는 아버지가 온다는 소식에 유약한 공자가 마음을 놓았구나 생각했다. 기사는 몇 마디 당부를 남기며 방을 나섰다. 다시 혼자가 된 엔지는 소리 없이 울음을 터트렸다. 그때 소년의 귓가로 기분 나쁜 속삭임이 들려왔다.
―무슨 자격으로 슬퍼하는 거야?
엔지는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다 알고도 입 다물어놓고.
텅 빈 곳에서 다시금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차가운 조롱에 엔지는 아득히 절망했다.
―이 위선자 자식.
그건 엔지 루벨, 본인의 목소리였다.
*** 남부공은 자리에 앉자마자 레나를 보좌하던 이든 피에타를 불러들였다.
“어찌 된 일인지 설명하게.”
남부공은 곧장 설명을 요구했고, 이든은 남부공에게 안부도 여쭙지 못한 채 사흘 전의 일을 고했다.
“까마귀가 요새 안에서 균열을 열었습니다.”
“균열을?”
시작부터 뜻밖이라 남부공은 미간을 좁혔다. 제단은 두 가지 형태로 피에 반응했다. 하나는 살아 있는 자의 피를 마시고 망자를 이 세상에 불러들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죽은 자의 피를 마시고 산 자의 세계와 망자의 세계를 연결하는 것이다. 죽은 자의 피가 제단에 닿으면 균열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균열의 크기는 제단의 크기와 비례한다. 하지만 그 어떤 배교자도 감히 죽은 자의 피를 이용해 균열을 만들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균열에서 나온 망자는 제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균열을 만드는 건 배교자들에게도 금지될 일일 터…….’
남부공은 말로만 듣던 까마귀의 과격함에 혀를 찼다. 그사이 이든이 말을 이었다.
“심지어 한 군데도 아니고 여러 군데서 동시에 균열을 만들었습니다.”
“동시에?”
“네, 그래서 레나 경과 공작들이 대응에 나섰습니다.”
. . . 사흘 전, 요새로 남부공의 피습 소식이 막 전해졌을 때였다. 남부공 대리가 달려나갈 틈도 없이 까마귀가 나타나 요새 근처에 균열을 열었다.
“어림없는 짓을.”
그래서 북부공은 참격을 날려 절벽째로 까마귀와 제단을 베어버렸다. 콰앙! 절벽이 무너지며 까마귀가 추락했고, 제단도 흙더미에 파묻히며 균열이 사라졌다. 지켜보던 기사들은 문제가 단번에 해결된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땡땡땡! 밑에서 요란한 쇳소리가 울렸다. 비상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뭐지?”
루비드가 묻는 순간 밑에서 막 올라온 병사가 소리쳤다.
“요새 안에 균열이 발생했습니다! 망자가 밀려 나옵니다!”
“뭐?”
루비드가 놀라서 눈을 홉뜨는 사이, 이우라는 곧장 달려나가려는 듯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는 몇 걸음을 채 떼지 못했다. 정신없이 울리는 종소리, 지원을 요청하는 기사들의 고함, 그리고 비명. 한군데가 아니었다. 그 소리는 마치 내리는 비처럼 사방에서 울리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이우라는 계단으로 향하던 걸음을 멈추고 성벽 난간에서 여러 채로 지어진 요새를 둘러보았다. 요새의 창문 사이사이로 붉은 빛이 비쳤다. 한눈에 보기에도 수십 군데였다.
‘한 곳이 아니었나?’
작은 균열이 요새 안에서 마구 솟구치고 있었다.
“리그난 아이테르너, 레나 루벨, 그리고 루비드 플레누스 그라샤.”
이우라가 걸음을 멈추고 뒤에 선 자들을 호명했다. 루비드는 형이 자신을 부른 것에 놀라 눈을 깜빡였다.
“지금부터 흩어져서 균열을 봉한다.”
“방금 나한테…….”
루비드가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이우라는 더 할 말 없다는 듯 돌아섰다. 루비드가 당황하는 사이 가장 먼저 움직인 건 레나였다. 레나는 당장 유니와 남부공에게 가고 싶은 마음을 참고 내달렸다. 린은 레나와 동행했고, 루비드는 혼자 뒤처진 걸 깨닫고 서둘러 그들의 뒤를 따랐다. 이후 네 사람은 마치 약속한 것처럼 각각 동서남북으로 흩어졌다. 요새의 남쪽 성채로 향한 레나는 자신을 뒤따르는 기사에게 소리쳤다.
“이든 경, 균열을 닫는 법은 아나요?”
“압니다!”
그건 기사의 상식이다. 게다가 두엄의 궁에서 동부공과 북부공이 하는 걸 보기도 했다. 균열을 닫으려면 제단의 핏자국을 지워야 한다. 그래서 기사들은 이미 물을 길어 레나를 따르고 있었다. 몇 달 만에 제법 빠릿빠릿해진 그들을 보며 레나가 다시 소리쳤다.
“내가 길을 열 테니 경이 제단을 맡아요!”
레나가 외친 직후, 복도 저편에서 네발짐승의 형태를 지닌 망자가 달려들었다. 사자를 가둔 왕이 다스리는, 얼굴을 훔친 자들이었다. 방에서 빈손으로 나온 레나에게 이든이 검을 던졌다. 레나는 날아온 검을 낚아채 얼굴을 훔친 자를 베어 넘겼다. 그러곤 곧장 돌진해 다른 망자들까지 도륙했다.
“지금이다!”
레나가 균열 입구에서 망자들을 막아서자 이든이 기사들에게 외쳤다. 기사들이 균열 아래 핏자국에 물을 퍼부었고, 끈적하게 말라가던 피는 순식간에 씻겨나갔다. 핏자국이 흐려지자 허공을 가르던 균열이 아물기 시작했다. 그 흉흉한 틈은 마치 얼음이 얼 듯 쩌적대며 메꿔졌고, 균열 바로 앞에서 싸우던 레나는 휘말리기 전에 얼른 물러났다. 그로써 상황이 일단락되자, 레나는 다른 균열로 달려가기 전에 이든에게 말했다.
“제단을 회수하세요.”
“경, 이걸 좀 보십시오.”
이미 제단을 살펴보던 이든이 레나를 불렀다. 이든은 물에 젖은 바닥을 가리키고 있었다. 방금 균열이 생겼던 곳인데,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흔한 돌바닥이었다.
“제단은 어디 있죠?”
레나의 물음에 이든은 단검을 꺼냈다. 그러더니 그걸로 바닥 돌 하나를 들어냈다. 편편한 돌이 뒤집히며 뒷면이 드러났다. 거기엔 제단을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건…….”
“쉽게 들리는 걸 보니 오래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이든의 보고에 레나의 미간이 좁아졌다. 제단은 요새에 미리 숨겨둔 모양이다. 그럼 죽은 자의 피는 어떻게 뿌린 거지? 주위를 두리번대던 레나는 곧 답을 찾았다. 바닥에 부러진 화살이 있었다. 그리고 그 화살엔 작은 주머니가 묶여 있었다. 아직 피가 떨어지는 가죽 주머니였다. 화살을 발견한 레나의 시선은 자연히 복도에 난 창문으로 옮겨졌다. 바닥에 심어진 제단, 그 옆의 창문, 그리고 피를 옮긴 화살까지.
“요새의 구조를 잘 아는 자의 짓이네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이건 교활하게 준비된, 아마 꽤 오랜 기간 공들인 함정.
‘하지만 왜 이런 짓을…….’
레나가 골똘히 생각하는데 복도 저편에서 다시금 비명이 들려왔다. 결국 레나는 길게 생각하지 못하고 소리를 따라 달려갔다. 그러곤 직전에 한 것처럼 망자들을 치고 균열을 닫았다. 그렇게 두세 번 반복한 레나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균열을 닫고 제단을 회수하는 건 레나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건 린에게도, 루비드에게도, 물론 이우라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럼 이 함정을 판 자는 왜 이런 짓을 벌인 걸까? 이래선 기껏 파묻은 제단을 빼앗기기만 할 텐데. 게다가 시기도 이상하다. 만약 요새를 정복할 작정이라면 동부공과 남부공 대리가 전장에 나가 있을 때를 노리는 게 맞다. 그런데 범인은 하필 주요 전력이 모두 모인 날을 선택해 일을 쳤다. 모르고 그랬을 리는 없다. 요새에 제단을 심어둘 만큼 용의주도한 자라면 당연히 공작들의 위치부터 파악했을 터.
‘대체 뭐지?’
수상했지만 레나는 별수 없이 균열을 격파해나갔다. 그렇게 일곱 번째 균열에 도달했을 때였다. 기사들이 제단의 핏자국을 닦게 하려면 레나는 균열에 거의 들어가다시피 하며 망자들을 막아야 했다. 레나는 이번에도 균열에 한 발을 걸치고 망자들을 막았다. 기사들이 피를 지우면 재빨리 몸을 빼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때, 기척을 감추고 천장에 매달려 있던 망자가 위에서 레나를 덮쳤다.
“윽!”
예상치 못한 습격에 레나는 다급히 몸을 피했다. 그 바람에 레나가 균열 안으로 들어가게 되자, 망자는 기다렸다는 듯 제단의 핏자국을 핥아서 지워버렸다.
“레나 경……!”
이든이 소리쳤지만 그사이 균열은 아물었다. 그리고 레나 루벨도 붉은 하늘과 함께 사라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기사들은 레나의 빈자리를 황망히 바라보았다. 그중 한 기사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
“하, 함정이다! 공작들께 전해라! 균열로 다가서면 안……!”
목소리를 높이던 기사는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다. 레나를 균열로 밀어 넣은 망자가 그의 몸을 단숨에 씹어 삼켰기 때문이다. 우지끈 소리가 나며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 바닥의 제단에도 다시금 피가 스몄다. 방금 막 죽은 자의 피였다. 새로운 균열이 생겼다. 하지만 아까와 다른 곳으로 연결되었는지, 그곳에 레나는 없었다. 대신 흉측한 망자들이 기다렸다는 듯 쏟아져 나왔다. 기사들은 펼쳐진 악몽 앞에서 급히 대열을 갖췄다. 지금 그들이 할 일은 레나를 찾는 것도, 소식을 전하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은 살아남는 게 우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