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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화. 싫은 왕자 (122/208)

122화. 싫은 왕자2021.07.01.

별안간 쓰러진 루비드는 제 위에 놓인 붉은 눈동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처음이었다. 이토록 붉게 타오르는 눈동자는,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진득한 감정도. 그 모든 것이 너무 낯설어 루비드는 저도 모르게 얼어붙었다. 그러자 리그난 아이테르너가 몸을 포개왔고, 지나친 접촉에 루비드는 그제야 퍼뜩 깨어나 동부공의 어깨를 밀었다.

16562824554873.jpg“뭐 하는 거야!”

하지만 동부공의 큰 몸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힘껏 밀쳤는데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동부공은 자신의 어깨에 닿은 손을 붙잡아 내리눌렀다. 발버둥 치던 다리도 무릎으로 찍어서 억눌렀다. 그로써 꼼짝없이 사로잡힌 루비드가 질겁하며 소리쳤다.

16562824554873.jpg“야! 뭐 하냐고! 미쳤냐고! 야, 이 미친 새끼야!”

루비드가 고래고래 소리쳤지만 동부공은 들리지 않는 듯했다. 석양보다 붉은 눈동자만 고요히 타오를 뿐이었다. 비록 연애 경험은 없지만 루비드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지금 이놈의 눈에 가득 차오른 게 더없이 불순한 정염이라는 것을. 갑자기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이대로 있다간 정말 험한 꼴을 당할 것 같았다. 그래서 아까보다 더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지만 역시 아무 소용없었다. 그사이 동부공의 붉은 눈동자는 점점 더 가까워졌고, 그걸 차마 마주볼 수 없던 루비드는 눈을 질끈 감았다.

16562824554873.jpg“으……!”

루비드가 신음하는 순간 그의 뺨으로 동부공의 뜨거운 숨결이 떨어졌다.

16562824554887.jpg“우웩…….”

그것은 헛구역질이었다. 눈을 꾹 감고 있던 루비드는 그 지저분한 소리에 도로 눈을 떴다. 어째선지 동부공의 눈은 다시 검은색으로 돌아와 있었는데, 무언가 굉장히 불쾌한 듯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16562824554873.jpg“이 새끼가…….”

그걸 본 루비드는 저도 모르게 욕했고, 한차례 헛구역질한 린도 진저리를 내며 물러났다.

16562824554887.jpg‘다행이다.’

그러곤 제 가슴을 부여잡고 진심으로 안도했다.

16562824554887.jpg‘다행이다……!’

정말 이놈에게 몹쓸 짓을 하나 싶었는데, 루비드를 향한 거부감이 저주를 이겼다. 아니, 애초에 이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동부공의 저주는 사랑하는 이를 상처 입히는 것. 하지만 린은 단 한순간도 루비드를 사랑스럽게 느낀 적이 없었다.

16562824554887.jpg‘그때랑 똑같아.’

린은 가슴을 겨우 쓸어내리며 생각했다. 과거 레나와 무덤을 탐색할 때도 이런 일이 있었다. 하늘에서 휘장이 내려오고 공간이 변했다. 그리고 린은 아무 조짐 없이 강한 충동에 이성을 잃었다. 옆에 있는 게 루비드라는 것을 빼면 모든 게 그때와 똑같다.

16562824554873.jpg“뭐야, 너.”

몸을 털고 일어난 루비드가 날 선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린은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다른 상대도 아닌 루비드에게 내가 너를 덮칠 뻔했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16562824554887.jpg“아깐…….”

16562824554873.jpg“그게 네 권능이냐?”

린이 애써 입을 여는데 루비드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16562824554873.jpg“눈이 빨갛게 바뀌던데, 그럼 동부의 권능은…….”

루비드는 처음 본 동부의 권능이 놀라운 듯 중얼댔다.

16562824554873.jpg“……번식?”

16562824554887.jpg“닥쳐…….”

16562824554873.jpg“그럼 뭔데?”

루비드의 말 같지도 않은 추측에 린은 짜증을 냈고, 루비드도 다시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린은 루비드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지만 자빠트려놓고 입을 다물기도 민망해 다시 입을 열었다.

16562824554887.jpg“……우선 여긴 많은 심장을 가진 왕의 영역이다.”

16562824554873.jpg“왕의 영역? 성?”

16562824554887.jpg“아니, 많은 심장을 가진 왕이 만든 별도의 공간이다. 그리고 아까 그건…….”

동부의 권능이 아니라 권능으로 인한 저주인데, 그걸 루비드에게 그대로 말하긴 어려웠다. 애당초 동부의 권능은 철저히 비밀이다. 그래서 잠시 뜸을 들이는데, 시기적절하게 불청객이 찾아왔다. 이마저도 예전과 똑같았다. 수풀이 우수수 흔들리더니 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들은 린과 루비드에게 덤비는 대신 저들끼리 얽히고설키며 사람의 형태를 갖췄다.

16562824583746.jpg―또 만나는구나.

눈만 붉게 빛나는 인영이 섬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16562824583746.jpg―내 힘을 훔쳐 쓰는 버러지야.

레나와 함께 있을 때하곤 영 딴판인 어조였다.

16562824554887.jpg“……많은 심장을 가진 왕.”

16562824583746.jpg―그래, 네 주인이다. 그런데 내 신부의 약혼자가 되셨다고.

그림자가 섬뜩하게 웃었고, 옆에서 듣던 루비드는 눈을 홉뜨며 끼어들었다.

16562824554873.jpg“신부라니, 누가? 레나 루벨?”

루비드는 이번에도 궁금한 걸 참지 않았고, 그 거침없는 태도는 린을 조금 당혹스럽게, 동시에 뱀왕을 꽤 즐겁게 만들었다.

16562824583746.jpg―생각도 못한 여흥이로다.

뱀왕이 키들대며 손을 뻗었다. 그러자 사방에서 뱀들이 솟구쳐 린과 루비드를 에워쌌다. 린과 루비드는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하며 검을 들었다. 그런데 뱀들이 다가오기 전에 뱀왕의 몸에서 짙은 향기가 흘러나왔다. 분명 향기롭지만 너무 진해서 오히려 악취처럼 느껴지는 냄새였다. 린은 황급히 소매로 입과 코를 막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냄새를 맡는 순간 눈앞이 아찔하게 흔들리더니 무릎이 덜컥 꺾였다.

16562824554887.jpg‘독?’

16562824583746.jpg―또 네 어미가 구하러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라.

뱀왕의 말에 린은 어지러워하면서도 눈을 홉떴다. 동시에 뱀들이 비틀대는 린과 루비드를 덮쳤다. 린이 힘 빠진 몸으로 저항하자 뱀들이 그의 몸을 물며 제압했다.

16562824554887.jpg“크윽!”

린의 신음에 루비드도 거칠게 저항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뱀들은 루비드를 포박할 뿐 공격하진 않았다. 대신 루비드에겐 많은 심장을 가진 왕이 다가와 그의 얼굴을 친히 들어 올렸다.

16562824583746.jpg―직접 보니 더 훌륭하군.

16562824554873.jpg“이 손 치……!”

루비드는 말을 맺을 수 없었다. 뱀왕의 손가락이 입안으로 들어온 탓이었다.

16562824554873.jpg“이익!”

루비드는 역겨워하며 입안으로 들어온 손가락을 물어뜯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딱딱한 뱀 가죽을 씹는 느낌에 턱만 아파졌다. 한편 뱀왕은 작은 고양이에게 물린 사람처럼 즐거워하며 말했다.

16562824583746.jpg―내 총희들 중에도 이만한 미인은 없었는데.

뱀왕의 읊조림에 린과 루비드는 물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얼어붙었다. 루비드는 멍한 얼굴로 뱀왕을 바라보다가, 그의 붉은 눈동자가 아까 동부공의 눈빛과 똑같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직전의 진저리나는 상황이 떠올라, 루비드는 빽 소리쳤다.

16562824554873.jpg“나, 나는 남자다!”

16562824583746.jpg―별로 상관없다만.

16562824554873.jpg“뭐? 왜!”

16562824583746.jpg―본디 남색을 하는 쪽은 아니지만 이런 얼굴이라면 즐겨봄직도 하지 않은가?

아까 쏟아진 게 찬물이라면 이번에 쏟아진 건 얼음물이었다. 루비드는 물론 린도 얼굴이 하얗게 질려 뱀왕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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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62824583746.jpg―아니면 몸은 버리고 머리만 잘라갈까? 나는 그것도 괜찮다만. 하긴 여자의 몸을 이어 붙여도 볼만하겠군.

이어진 뱀왕의 발언은 더욱 가관이었고, 그 중 머리를 잘라간다는 발언에 루비드는 움찔 동요했다. 일순간 처형 강박을 느낀 루비드는 이를 드러내며 뱀왕을 쏘아봤다. 그 흔들리는 눈빛에 뱀왕이 음산하게 웃었다.

16562824583746.jpg―겁먹지 말아라. 기고만장해야 울리는 재미가 있을…….

그 순간 뱀들이 돌연 뱀왕을 덮쳤다. 직전까지 린을 에워싸고 있던, 린의 몸을 물어 피를 삼킨 뱀들이었다. 묶여 있던 동안 조용히 장악한 린은 곧장 반격에 나섰다. 뱀들이 먼저 뱀왕을 휘감았고, 그 사이 린은 마비된 몸을 일으켜 뱀왕의 몸에 검을 박아넣었다.

16562824554887.jpg“역겨우니까 좀 닥쳐.”

린은 불쾌감을 드러내며 뱀왕의 몸을 재차 베었다. 뱀왕의 그림자가 무너지자, 린은 그의 머리를 짓밟아 터트렸다. 겨우 뱀왕을 쫓아낸 린은 지배한 뱀들로 루비드를 에워싼 뱀들을 물어뜯어 삼키게 했다. 풀려난 루비드가 그 광경을 반신반의하며 지켜보았다. 용을 부리는 것에 이어 뱀을 다스리는 모습까지 들켰다. 그래서 린은 루비드가 뭐라고 묻기 전에 선수를 쳤다.

16562824554887.jpg“봤으면 알아서 이해해라.”

어벙하던 왕자의 얼굴이 곧장 일그러졌고, 린은 그 모습을 무시하며 상황을 살폈다. 갑자기 왜 이런 일이 벌어졌나 했는데, 뱀왕은 아주 일관적인 존재였다. 저번엔 레나, 이번엔 루비드. 그 목적은 언제나 욕망이었다. 린은 이 불쾌한 존재가 자신과 이어져 있다는 생각에 진저리가 났다.

16562824554887.jpg‘레나도 이 공간은 어쩌지 못했지.’

린은 우거진 정원을 돌아보며 다시 생각했다. 무덤 안이지만 전혀 무덤 같지 않은 공간. 일전에 레나는 여기서 이삼일은 버텨야 한다고 했다. 그걸 단숨에 깨트린 게 큰 뱀이고, 그 안에 나자가 있었다. 아까 뱀왕이 나자에 대해 말한 것도 신경 쓰였지만, 린은 애써 상황에 집중했다.

16562824554887.jpg‘이 공간을 물리력으로 부술 수 있나? 만약 그렇다 해도 그만한 힘을 어떻게…….’

조용히 궁리하던 린의 시야에 바보의 금발이 들어왔다.

16562824554887.jpg‘북부의 참격이라면 가능할지도.’

린은 조용히 가능성을 점쳐보았다. 시도는 해볼 만했다. 그래서 린은 루비드에게 제안하기 전에 아까 밖으로 날려 보낸 용에게 먼저 집중했다. 다행히 지배력은 여전했다. 대책 없이 나가봤자 또 망자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될 테니, 린은 일단 대책을 충분히 세운 후 나가는 게 낫겠다 싶었다. 하지만 그것도 저놈이 말을 들어야 가능한 일. 린은 고민하다 조심히 입을 열었다.

16562824554887.jpg“루비드 플레누스.”

16562824554873.jpg“왜 불러.”

돌아온 대답은 역시나 날카로웠고, 그래서 린도 썩 곱지 않은 투로 말을 이었다.

16562824554887.jpg“많은 심장의 왕이 너를 간택한 것 같던데.”

16562824554873.jpg“무슨 미친 소릴…….”

16562824554887.jpg“놈에게 수청들고 싶은 게 아니면 협조해라. 여기서 벗어날 때까지만이라도.”

수청이라는 말에 일그러졌던 루비드의 얼굴이 협조라는 말에 도로 폈다. 린이 그 모습을 이상하게 쳐다봤지만 루비드는 개의치 않고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16562824554873.jpg“도움이 필요하다면 더 정중하게 말해 보시지!”

……뭐 이런 성가신 놈이 다 있지?

16562824554873.jpg“날 무시하지 말란 말이다!”

지랄 났다, 진짜. 린은 할 말을 잃고 루비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으로 고스란히 전해진 경멸은 루비드를 더 노엽게 만들었다. 루비드가 다시 발광할 것처럼 굴자 린은 한숨을 눌러 삼키고 대답했다.

16562824554887.jpg“……잡견 운운하지 않으면 고려해보마.”

린의 요구에 루비드의 눈썹이 슬쩍 들렸다. 호칭에 대해선 내심 찔리는 부분이 있던 루비드는 조금 고분고분하게 되물었다.

16562824554873.jpg“그럼 뭐라고 부르면 되는데?”

16562824554887.jpg“공작 저하.”

하지만 쌀쌀맞은 대답에 왕자의 눈썹은 다시 곤두섰다.

16562824554873.jpg“그럼 너도 왕자 저하라고 불러라.”

16562824554887.jpg“네가 경어를 쓴다면.”

16562824554873.jpg“너부터 존댓말 하던가!”

16562824554887.jpg“……너 몇 살이냐?”

16562824554873.jpg“뭐야, 나이는 왜?”

뜬금없는 물음에 루비드가 인상을 쓰자 린도 궁색함을 느끼고 입을 닫았다. 역시 짜증나는 녀석이다. 린은 이 자식이 언제부터 이렇게 싫었는지 되짚어보았다. 기억나지 않았다. 역시 처음부터 싫었던 것 같다. *** 린에게 지배받는 용은 무덤의 상공을 빠르게 가로질렀다. 그렇게 몇 시간을 날았을까, 용의 새빨간 눈에 무언가가 포착되었다. 그것은 지배자가 찾던 한 여자, 그리고 그 옆에 선 한 남자였다. 그들의 모습은 조금 이상했다. 일행이라기엔 너무 거리가 멀고, 모르는 사이라기엔 걷는 방향이 같았다. 정말 모르는 사이라도 이런 곳에서 단 둘이라면 서로 의지할 법한데 두 사람은 정말 단호하게 서로를 무시했다. 린과 루비드가 얼렁뚱땅 공동전선을 형성할 때, 레나 루벨과 이우라 플레누스는 서로 말 한마디 없이 묵묵히 걷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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