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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화. 어는점의 앙숙 (123/208)

123화. 어는점의 앙숙2021.07.05.

레나와 이우라는 평행선을 그리며 걷고 있었다. 입은 꾹 다문 채였고, 시선은 저 멀리 보이는 균열만 응시했다. 그렇게 몇 분, 아니. 몇 시간은 족히 걸은 것 같았다. 문득 머리 위에서 파락대는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레나와 이우라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고, 붉은 하늘 아래 검은 용을 발견했다.

16562824771891.jpg‘망자.’

레나는 또 망자들이 몰려오나 싶어 허리에 묶어둔 검을 들었다. 그런데 망자의 움직임이 조금 이상했다. 놈은 피막 날개를 활짝 펴고 독수리처럼 하늘을 빙빙 돌기만 했다.

16562824771891.jpg‘뭐지?’

레나가 의아하게 바라보는데 용이 움직임을 바꿨다. 여전히 같은 자리를 맴돌지만, 몸으로 그리는 도형의 형태가 바뀌었다. 용은 마치 벌처럼 8자로 빙빙 날았다. 아니, 8자도 아니다. 그보다는 조금 더 각진…….

16562824771891.jpg‘리본?’

레나는 저 용이 뭘 그리는지 눈치채고 눈을 홉떴다.

16562824771891.jpg‘린!’

레나는 연인의 첫 선물을 떠올리며 저 용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때 옆에 있던 이우라는 조용히 검을 빼 들어 참격을 준비했다. 그걸 본 레나가 급히 달려가 막았다.

16562824771891.jpg“괜히 건드리지 마요.”

레나가 단호히 제지하자 이우라의 시선이 내려왔다. 이우라는 찌르는 듯한 눈으로 레나를 보더니 낮게 물었다.

1656282477192.jpg“무리를 부르는 거라면?”

16562824771891.jpg“건드려서 오히려 눈에 띄면요?”

레나는 똑같은 추측으로 대꾸했다. 이우라는 심기가 불편해졌는지 눈매를 더 가늘게 만들었다. 레나와 이우라가 서로를 쏘아보는 사이 용은 눈치껏 몸을 피했고, 레나는 그제야 눈싸움을 끝내고 돌아섰다. 그러곤 용을 놓쳐서 기분이 나빠진 이우라를 뒤로한 채 몰래 생각했다.

16562824771891.jpg‘정말 린이 맞을까? 공격하지 않고 물러난 걸 보면 맞겠지? 그럼 린도 지금 무덤에 있는 건가?’

레나가 바쁘게 생각하는데, 등 뒤에서 이우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6282477192.jpg“이대로 균열까지 걸어갈 셈인가?”

뜻밖의 물음에 레나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1656282477192.jpg“서두르는 게 남부공의 안위 때문이라면 그 전에 이성을 찾아라.”

이우라의 충고에 레나는 일순 얼이 빠졌다. 여태 말 한마디 없이 걷다가 대뜸 훈계라니. 레나는 이우라에게 이런 식으로 가르침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

16562824771891.jpg“무슨 상관이신지.”

1656282477192.jpg“감정적으로 행동할 때가 아니다.”

16562824771891.jpg“그러니까 무슨 상관이시냐고 물었습니다.”

1656282477192.jpg“이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피차 협력해야 할 텐데.”

이우라의 대답에 레나는 더 기가 막혔다. 그의 말에 틀린 부분은 없었다. 오히려 아주 되바라져서 듣는 사람을 열 받게 할 정도다.

16562824771891.jpg“지난 3개월 동안 없는 사람 취급하더니, 이제 필요하니까 협력하자고요?”

레나의 물음에 이우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당연한 걸 굳이 왜 물어보냐는 투였다.

1656282477192.jpg“이성적으로 판단해라. 남부공에게 한시 빨리 가고 싶다면 더더욱.”

이우라는 오히려 레나를 채근하더니, 레나의 황당한 눈빛을 보고 덧붙였다.

1656282477192.jpg“남부공이 아니면 하녀 때문인가?”

이어진 말에 레나의 눈썹이 곤두섰다. 앞서 한 말은 그냥 어이가 없었는데 이번엔 기분이 나빴다. 위대한 북부의 왕이 일개 하녀의 존재까지 알고 있다니. 레나는 이우라가 자신을 무시하면서 뒤를 캤다는 생각에 울컥 화가 났다. 단지 관심이 없는 거면 피차 마찬가지라 여기고 말 텐데, 이우라는 알아낼 건 다 알아낸 후 사람을 구석에 처박았다. 정말 형편없는 취급이었다.

16562824771891.jpg“무슨 얘길 하고 싶은 거죠?”

그래서 레나의 목소리도 자연히 날이 섰다. 하지만 이우라의 태도는 여상히 냉랭하고 고요했다.

1656282477192.jpg“고작 하녀 때문에 동요하는 건지 묻는 거다.”

16562824771891.jpg“고작 하녀.”

레나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실은 유니가 이런 식으로 언급되는 것도 짜증이 났다.

16562824771891.jpg“이상한가요? 하긴 남들은 자식도 형제도 버리는 마당에 ‘고작 하녀’ 때문에 이러면 우습기도 하겠네요.”

레나는 해사하게 웃으며 끄덕이더니, 이내 웃음을 지우고 매섭게 충고했다.

16562824771891.jpg“사고방식이 다른 건 알겠는데 입조심하시죠. 고작 하녀가 아니라 내 친구니까.”

그건 충고보다는 경고에 가까웠고, 어쩌면 위협이라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이우라의 눈빛은 싸늘하기만 했다. 상대의 분노는 안중에도 없는 듯, 그저 레나의 반응을 관찰하는 투였다. 그 숨 막히는 태도에 레나가 질린 얼굴로 중얼댔다.

16562824771891.jpg“루비드 씨가 왜 마음 둘 곳이 없는지 알겠네요.”

그때 이우라의 가면 같던 얼굴이 처음으로 흐트러졌다. 그는 마치 급소를 맞은 사람처럼 미간을 찌푸렸고, 뜻밖의 반응에 레나는 짐짓 놀랐다. 하지만 그가 감정을 드러낸 건 아주 잠깐이었다. 그는 분노인지 고통인지 모를 표정을 곧장 지웠다. 그러곤 다시 지극히 사무적인 투로 말했다.

1656282477192.jpg“무덤의 시간은 외부와 다르다. 그러니 밖에 있는 자들 때문에 무모하게 움직일 이유는 없다.”

16562824771891.jpg“그래서요?”

1656282477192.jpg“루비드와 동부공을 먼저 찾아야 한다.”

16562824771891.jpg“그 사람들이 여기 있다고 어떻게 확신하죠?”

1656282477192.jpg“그런 함정이었으니까.”

16562824771891.jpg“함정에 빠지지 않았을 수도 있잖아요. ……설마 본인이 당했으니 그들도 당연히 당했을 거란 생각인가요?”

이우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긍정이었다. 그 뻔뻔함에 레나는 또 한 번 황당해졌다.

16562824771891.jpg‘뭐 이런 인간이 다 있지?’

하지만 정말 분하게도 역시나 다 맞는 말이었다. 린은 높은 확률로 무덤에 있다. 그리고 루비드, 그 왕자님은 백이면 백 함정에 빠졌겠지. 레나는 이우라에게 동의하기 싫지만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내심 거북해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이우라가 유독 불편한 이유. 그는 잘났다. 지위도 실력도 흠잡을 데가 없고 눈치도 빠르며 판단력도 좋다. 게다가 외모도 루비드의 형답게 출중하다. 그런데 대단히 싸가지가 없다. 싸가지가 좀 없어도 루비드처럼 얼빵하면 귀여운데 이 자식은 아니다. 그 와중에 권위적인 태도로 맞는 말만 하니 기분은 나빠도 어쨌든 수긍을 해야 한다. 그러니까 주도권을 뺏기기 싫어하는 레나와는 완벽히 상극인 셈이었다. 레나는 이우라의 속성을 이제야 조금 이해했고 그만큼 더 싫어졌다.

16562824771891.jpg“……그럴 수도 있겠네요. 동부공도 루비드 씨도 여기 있을 가능성이 높죠. 그럼 흩어져서 찾는 게 낫겠네요.”

레나는 속마음을 숨기고 동의하는 척 말했다. 아까 그 용이 정말 린의 지배를 받는 망자라면, 레나는 우선 이우라와 떨어져야 했다. 그래야 린이 접근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한 레나는 차라리 이우라와 찢어지기로 마음먹었다. 둘 다 어디서 당할 인물들은 아니니 이편이 합리적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우라가 뜻밖의 대답을 던졌다.

1656282477192.jpg“아니, 함께 움직인다.”

16562824771891.jpg“왜죠?”

1656282477192.jpg“아까 그 용은 뭐였지?”

레나의 물음에 이우라가 물음으로 답했다. 그래서 레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조용히 놀랐다.

1656282477192.jpg“경의 태도가 그 용을 본 후 변했다. 아닌가?”

16562824771891.jpg“무슨 소린지.”

레나는 어이없다는 듯 말하면서도 내심 오싹했다. 이우라가 무서운 건 아니었다. 다만 아무 조짐 없이 핵심을 간파하는 이 남자가 섬뜩했다. 딱히 단서를 흘린 적은 없는데 대체 어떻게 이러지? 찍은 건가? 아니면 북부의 권능 중에 독심술이라도 있나? 아마 이우라를 무서워하는 사람이라면 벌벌 떨며 있는 대로 털어놓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레나는 끝까지 시치미를 떼야 했다. 이 예리한 인간에게 린의 권능이 알려지면 서부에 숨은 동부인의 존재까지 드러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16562824771891.jpg“갑자기 왜 트집인지 모르겠는데, 대체 무슨 태도가 변했다는 거죠?”

1656282477192.jpg“망자를 건드리지 말라고 했지.”

16562824771891.jpg“설명했을 텐데요. 괜히 건드리면 눈에 띌 수 있다고.”

1656282477192.jpg“그럼 베고 지나가면 될 일이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16562824771891.jpg“그게 수상하다는 건가요?”

레나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묻자 이우라는 묵묵히 레나를 쳐다보았다.

16562824771891.jpg“단순한 추측이잖아요.”

1656282477192.jpg“단순한 추측이다. 그래서 언급하지 않았지만, 따로 움직이겠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이우라의 논리에 레나는 또 한 번 멍해졌다. 이건 추측도 아니고 억측이다. 하지만 동시에 타당하고, 실제로 진실과 가깝다. 왕으로 태어나 자연스럽게 군림해온 남자는 통제하는 것에 익숙했다. 상대방의 생각과 행동을 예측하는 데에 능했고, 그것을 자신의 손아귀 안으로 끌어들이는 데에는 더욱 탁월했다.

1656282477192.jpg“의심이 생긴 이상 혼자 보내지 않겠다.”

16562824771891.jpg“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1656282477192.jpg“감추고 싶은 게 생기면 화를 내는군.”

16562824771891.jpg“……당신은 온 세상이 당신 발아래 있다고 생각하나 봐.”

초조해진 레나가 얼음장 같은 얼굴로 웃었다.

16562824771891.jpg“아까부터 거슬렸는데, 왜 계속 평가질이지?”

그러곤 고드럼처럼 날을 세웠다.

16562824771891.jpg“사실 같이 움직이든 따로 움직이든 별 상관은 없어. 지금까지 나란히 걸었다고 딱히 동행한 건 아니니까.”

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이우라에게 한걸음 다가갔다. 그러곤 자기보다 몇 뼘은 더 큰 남자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말했다.

16562824771891.jpg“하지만 옆에서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건 너무 성가신데 어쩌지?”

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한껏 예쁘게 눈웃음을 지었다. 표정만 보면 연인을 유혹하는 모습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우라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마치 레나의 표정과 행동을 하나씩 뜯어 분석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레나는 다시 코웃음을 쳤다.

16562824771891.jpg“당신 동생이 왜 고분고분해졌는지 못 들었지?”

루비드에겐 조금 미안하지만, 이 남자를 도발할 방법이 달리 떠오르지 않았다. 의심을 풀든 이 남자를 박살내든 둘 중 하나를 해야 했다. 안 그러면 린이 위험해진다.

16562824771891.jpg“당신도 그렇게 울려주면 말을 좀 들으려나?”

정답이었다. 레나가 이렇게 말하며 농밀히 웃자, 쭉 차갑던 이우라의 눈빛이 살벌해졌다.

1656282477192.jpg“……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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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우라가 나직이 성을 냈다. 레나는 더 짙게 웃으며 검을 들었다. 그러곤 더 없이 오만방자한 눈으로 이우라를 겨눴다. 이우라도 말없이 검을 뽑았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천둥소리가 울리며 절벽이 무너지기 시작한 건 그 직후의 일이었다. 지축을 흔드는 소란에 망자들이 몰려왔다. 하지만 그들의 싸움은 어린 청년들의 싸움처럼 방해꾼이 나타났다고 멈추지 않았다. 가련한 망자들도 그들의 싸움에 휘말려 분쇄될 뿐이었다. *** 린이 움찔하며 눈을 떴다.

16562824908691.jpg“뭐야?”

가만히 앉아 있던 린이 돌연 경련하자 옆에 있던 루비드가 인상을 썼다. 이 와중에 졸았냐고 핀잔하는 투였다. 그래서 용의 시선으로 레나와 이우라를 지켜보던 린은 시치미를 떼며 식은땀을 닦았다. 레나와 이우라가 갑자기 미친 듯이 싸우기 시작했다.

16562824908695.jpg‘갑자기 왜?’

린은 얼떨떨해하며 루비드를 돌아보았다. 원래는 동생보단 형이 낫다고 생각했는데 이참에 다시 생각해봐야겠다 싶었다. 아무렴 마왕보다는 바보가 나을지도.

16562824908691.jpg“뭐, 왜?”

시선을 느낀 루비드가 득달같이 덤벼서 린은 못들은 척 고개를 돌렸다. 일단 레나와 이우라를 찾았다. 거리도 그렇게 멀지 않다. 대부분 근거리에 떨어진 게 맞는 모양이다.

16562824908695.jpg‘슬슬 나갈까?’

뱀왕이 흩뿌린 독 때문에 저릿대던 몸도 거의 나았다. 그러니 이제 나가서 싸움부터 말려야 한다. 이대로 있다간 무덤의 망자들을 다 끌어모을 판이다. 그런데 나가기 전에 해결할 문제가 있다.

16562824908695.jpg“야, 왕자.”

16562824908691.jpg“왜, 공작.”

린의 부름에 루비드가 답했다. 장난 같은 호칭을 뒤로하고 린이 진지하게 말했다.

16562824908695.jpg“너도 체면은 있겠지.”

16562824908691.jpg“갑자기 뭔 소리야.”

16562824908695.jpg“망자의 왕이 네게 추근댄 걸 사람들이 알면…….”

16562824908691.jpg“죽여버리겠다.”

린이 뭐라 말할 새도 없이 루비드가 으르렁댔다.

16562824908691.jpg“협박이냐?”

정말 쉬운 녀석이다. 린은 이미 반쯤 넘어온 루비드를 동정하며 말을 이었다.

16562824908695.jpg“아니, 제안이다.”

16562824908691.jpg“제안?”

16562824908695.jpg“내가 망자들을 움직이는 걸 비밀로 하면 나도 네 일을 함구하겠다.”

16562824908691.jpg“좋다!”

16562824908695.jpg“뭐?”

16562824908691.jpg“뭐!”

생각하지 않고 대답하는 루비드 때문에 린은 오히려 당황했다. 이놈 진짜 바보인가? 린은 이 단순무식한 놈이 영 못미더웠지만 일단 자리에서 일어났다.

16562824908695.jpg“그럼 여기서 그만 나가…….”

린은 말을 채 잇지 못했다. 오싹한 기운이 등 뒤를 덮친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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