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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화. 노예는 주인을 알아본다 (124/208)

124화. 노예는 주인을 알아본다2021.07.08.

등줄기를 긁는 오싹함에 린은 흠칫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등 뒤엔 아무것도 없었다.

16562825033991.jpg‘뭐지?’

아까부터 계속 위화감이 느껴졌다. 마치 불쾌한 시선이 전신을 핥는 듯한 느낌이 간헐적으로 엄습해왔다. 린은 한차례 주위를 둘러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

16562825033991.jpg“……여기서 나가려면 공간을 부숴야 해.”

16562825034002.jpg“그걸 어떻게 알아?”

16562825033991.jpg“두엄의 궁에서 무덤을 탐색하다 마주친 적이 있어. 그때도 똑같은 함정에 빠졌고.”

16562825034002.jpg“레나 루벨도? 그래서 신부니 뭐니 하는 거냐?”

루비드의 물음에 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루비드가 코웃음을 치며 빈정댔다.

16562825034002.jpg“여자면 다 좋다는 건가?”

레나를 폄하하는 말에 린은 울컥해서 루비드를 쏘아봤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린은 놀라서 눈을 도로 홉떴다.

16562825033991.jpg‘잠깐.’

린은 문득 깨달았다. 많은 심장을 가진 왕은 레나에게 신부 운운하며 집착했던 일을. 그리고 레나가 지금 무덤에 있다는 사실도.

16562825033991.jpg‘레나도 무덤에 있는데, 왜 레나를 놔두고 이쪽으로 온 거지?’

생각해보니 이상하다. 상당히 절절하지 않았었나? 변덕? 단지 루비드에게 흥미가 생겨서?

16562825033991.jpg‘만약 그렇다 해도, 그럼 진작 가뒀어야지.’

내가 나타나서 훼방을 놓기 전에. 하지만 많은 심장을 가진 왕은 루비드를 몰기만 했다. 그가 이 공간을 만든 건 린이 나타난 이후였다. 루비드를 어떻게 하고 싶다면 혼자 있을 때 손을 쓰는 편이 훨씬 나았을 텐데. 왜 그렇게 안 한 거지?

16562825033991.jpg‘만약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거라면?’

린은 불편한 가설에 마른침을 삼켰다. 동시에 아까 뱀왕이 한 말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16562825062608.jpg―그래, 네 주인이다.

16562825062608.jpg―그런데 내 신부의 약혼자가 되셨다고.

16562825033991.jpg‘약혼에 대해선 어떻게 안 거지?’

린은 곧 답을 찾았다.

16562825034002.jpg―레나 루벨은 왜 너 같은 놈하고 약혼했지?

그래, 하늘에서 장막이 내려오기 전에 루비드가 이런 말을 했다.

16562825034002.jpg“뭔 생각을 그렇게 하냐?”

린이 한참 동안 말이 없자 루비드가 불평했다. 린은 그 어수룩한 왕자를 바라보았다. 다시 봐도 싫은 녀석이다. 잘생기기로 유명한 건 알지만, 오랜 악감정 때문에 예쁘다는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는다. 아무리 이성을 잃었어도 그런 대상에게 동하는 게 가능한가? 그럼 아까 루비드를 덮친 건 정말 내 본능이었을까, 아니면 놈을 눈여겨본 많은 심장을 가진 왕의 의지였을까. 린의 생각은 점점 더 불길한 쪽으로 흘렀다. 동부의 권능은 지배. 그리고 그 힘의 근본이 많은 심장을 가진 왕이라면, 그 왕의 능력도 역시…….

16562825033991.jpg‘윽!’

골똘히 생각하던 린은 무언가에 찔린 사람처럼 몸을 비틀었다. 또다. 또 섬뜩한 감각이 목덜미를 긁었다. 하지만 주위엔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다. 엄습해온 감각도 거짓말처럼 사라져 그를 혼란스럽게 했다.

16562825033991.jpg“……생각 중이야. 나갈 방법을.”

위화감이 한층 더 짙어졌지만 린은 모르는 척 대답했다. 그러곤 자신의 손등을 은밀히 내려다보았다. 그의 팔엔 아까 뱀에게 물린 자국이 남아 있었다. 생각해보면 이것도 이상하다. 왜 굳이 물게 했을까. 내 피를 마시면 지배당할 걸 알 텐데. 가만히 살펴보니 뱀에게 물린 상처가 부어 있었다. 이게 그저 다쳐서인지 침 따위가 들어가서인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알게 된 후엔 늦을 것이다.

16562825033991.jpg“전엔 큰 뱀이 공간을 깨트렸어.”

16562825034002.jpg“뱀이?”

16562825033991.jpg“그래, 허공을 공격해서 공간을 부쉈다. 그래서 북부의 참격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데…….”

린이 은근슬쩍 흘린 말에 루비드는 곧장 기고만장해졌다. 루비드는 해보겠다며 벌떡 일어났고, 린은 왕자를 부추겨놓고서 다시 궁리했다.

16562825033991.jpg‘이건 어디까지나 가설이다.’

하지만 서둘러 판단해야 하는 발밑의 가설이다. 많은 심장을 가진 왕은 우리를 보고 있다. 아니, 나를 보고 있다. 그 왕은 나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고, 나아가 내 의지를 지배할 수 있다. 이게 사실이라면 지금도 어떤 기회를 노리며 나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16562825033991.jpg‘만약 그렇다면…….’

대책이 필요하다. 그래서 린은 루비드를 지켜보는 척, 조용히 자신의 권능을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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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휘가 남부공을 막 배웅하고 돌아왔을 때였다.

16562825062608.jpg“어머니, 까마귀 형님한테 연락 왔어요!”

16562825062608.jpg“이제사?”

진이 달려와 하는 말에 휘는 다급히 아들을 따라갔다. 휘와 진이 향한 곳은 작은 오두막이었다. 헛간처럼 생긴 그 오두막은 안이 텅 비어 있었다. 다만 바닥에 모래가 깔렸고, 그 가운데 뱀 한 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16562825062608.jpg“어찌 된 일이오, 왜 이리 연락이 안 되었소?”

휘가 성큼 들어와 묻자 뱀이 꼬리로 모래에 글씨를 썼다. ―본궁에서 온 소년 사제가 왕들의 이름을 알고 있다. 뱀, 까마귀에게 지배받는 망자는 휘에게 대답하는 대신 묘한 말을 꺼냈다.

16562825062608.jpg“본궁에서 온 소년 사제?”

  ―그 소년이 가져온 이름을 알아오기 바란다. 까마귀가 휘를 비롯한 사람들에게 무언가 부탁하는 일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휘는 까마귀에게 하려던 말을 삼키고 바닥의 문장을 찬찬히 곱씹었다.

16562825062608.jpg“이게 대체 무슨 말이지?”

16562825062608.jpg“유니한테 물어볼까요?”

휘가 고민하자 오두막 밖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던 진이 물었다. 그리고 그 말은 까마귀, 린의 귀에도 들어갔다.

16562825033991.jpg‘유니?’

상상도 못 한 이름이 들려오자 린은 다시 모래판에 글을 썼다. ―제국인을 보호하고 있나?

16562825062608.jpg“안 그래도 이야기하려고 했소. 우리가 남부공과 한 여자아이를 발견해 치료했소.”

  ―둘 다 살아 있나?

16562825062608.jpg“그렇소. 남부공은 방금 막 요새로 돌아갔고 아이는 남았소. 볼모요. 잘못이오?”

  ―아니. 린은 고맙다는 말을 쓰고 싶었지만 참았다. 대신 속으로만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아이를 만나고 싶다. 까마귀의 요청에 휘는 진을 보냈다. 그리고 기다리는 동안 넌지시 운을 뗐다.

16562825062608.jpg“요새에 있던 공작들이 다 사라졌다 들었소. 북부 왕자도, 남부공의 대리자도 말이오.”

까마귀가 동부공인 것은 그야말로 공공연한 비밀. 그래서 휘는 그저 정세를 읊듯 이곳의 상황을 전했다.

16562825062608.jpg“제국군들은 머리가 사라져서 우왕좌왕하는 모양이더군. 어제는 봉화를 피워 황궁으로 소식을 전하는 것 같더이다.”

휘가 일부러 모르는 척 하는 말에 린은 눈을 홉떴다.

16562825033991.jpg‘어제?’

린은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물었다. ―남부공을 발견한 게 언제였지?

16562825062608.jpg“나흘 전이오.”

돌아온 답에 린은 더 얼떨떨해졌다. 그가 무덤에 떨어지고 보낸 시간은 넉넉하게 잡아도 한나절 남짓이다. 그럼 밖에서는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야 했는데 나흘이라니.

16562825033991.jpg‘시간의 흐름이 역전됐어?’

무덤에서는 시간이 더 천천히 흐르는 게 아니었나? 린이 뜻밖의 소식에 당황하는 사이 진이 유니를 데려왔다.

16562825120356.jpg“뱀이다!”

낭랑한 목소리와 함께 야무지게 생긴 여자애가 오두막으로 들어왔다. 유니였다. 린은 건강한 유니를 보고 다시금 안심했다. 휘가 자리를 비켜주자 유니는 고개를 갸웃대며 오두막으로 들어왔다. 사람만큼 큰 뱀이 앞에 있는데 그리 무서워하지도 않는 기색이었다. ―목소리 낮춰. 밖으로 들리지 않게.

16562825120356.jpg“말했다!”

린이 뱀의 꼬리로 글을 쓰자 유니가 놀라서 소리쳤다. 그러더니 뒤늦게 소곤댔다.

16562825120356.jpg“뱀이 사람 말을 해?”

  ―나는 린이야.

16562825120356.jpg“어? 정말?”

유니는 겁도 없이 손을 뻗어 뱀의 입을 잡고 벌렸다. 그러곤 시커먼 목구멍 안을 들여다보며 다시 속삭였다.

16562825120356.jpg“정말 린 씨예요? 어떻게 된 거예요? 아가씨도 같이 있어요?”

린은 유니의 과격함에 당황하며 대답했다. ―레나는 무사해. 무사하긴 하다. 이우라와 한창 싸우고 있을 뿐. 유니가 다시 뭐라 물었지만 길게 말할 시간이 없었다. ―망자의 왕의 이름이 필요해. ―엔지 루벨에게 알아낼 수 있어? ―최대한 빨리.

16562825120356.jpg“망자 왕의 이름이요?”

린이 모래판에 연이어 문장을 쓰자 유니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그러더니 아주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16562825120356.jpg“그거 내가 알아요, 걔가 알려줬어요!”

  *** 루비드의 참격은 빈번히 허공을 갈랐다. 루비드가 씩씩대며 불평하려던 차였다. 조용히 다가온 린이 새파란 하늘 한 쪽을 가리켰다.

16562825033991.jpg“저기.”

린은 뱀의 시야로 봤다. 이곳을 둘러싼 힘의 흐름을, 그리고 그중 약한 구석을.

16562825033991.jpg“저쪽으로 해 봐.”

그렇게 말하는 린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그래서 루비드는 덩달아 입을 다물고 참격을 날렸다. 카앙! 허공을 날던 참격이 무언가에 부딪혀 깨졌다. 그리고 파랗던 하늘에 금이 가며 새빨간 틈이 벌어졌다.

16562825033991.jpg“한 번 더.”

루비드가 놀랄 틈도 없이 린이 재차 말했다. 평소라면 명령하지 말라고 화를 냈겠지만, 린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루비드는 잠자코 따랐다. 연거푸 참격을 날리자 파란 하늘이 유리 조각처럼 떨어지며 커다란 출구가 생겼다. 그럼에도 많은 심장을 가진 왕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루비드가 불안한 듯 등 뒤를 살펴도 마찬가지였다. 그 사이 린이 밖으로 날려보냈던 용이 돌아왔다.

16562825033991.jpg“가자. 레나와 이우라가 싸우고 있어.”

뜻밖의 말에 루비드는 네가 그걸 어떻게 아냐고 물었다. 린은 봤어, 라고 짧게 대답하며 용에 올라탔다. 이윽고 용은 린과 루비드를 태우고 날아올랐다. 거대한 날개는 순식간에 하늘을 가로질러 레나와 이우라가 싸우던 곳까지 도달했다.

16562825034002.jpg“웬 난장판이…….”

용이 허공에서 천천히 선회하자, 지상을 내려다보던 루비드가 중얼댔다. 왕자의 말마따나 저 밑은 대단한 난장판이었다. 안 그래도 황폐한 땅이 여기저기 갈라지고 움푹 꺼져 있었다. 게다가 주위에 있던 절벽은 죄다 무너져 흙더미 꼴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곳에 레나와 이우라는 보이지 않았다.

16562825034002.jpg“여기 있는 거 맞아?”

16562825033991.jpg“몸을 숨기고 있을 거야.”

레나와 이우라 둘 다 전략적인 인물이다. 여기까지 맞붙었는데 결착이 나지 않으니 숨어서 기회를 노리는 편을 택한 거다. 용은 그 싸움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착지했다. 린이 용에서 내리며 루비드에게 물었다.

16562825033991.jpg“이우라에게 갈 거냐?”

16562825034002.jpg“아니.”

16562825033991.jpg“그럼 레나에게 전해줘. 절대 잊지 말고.”

린이 영문 모를 말을 지껄이자 루비드가 인상을 썼다. 아까부터 심각한 척 분위기나 잡고 거슬린다.

16562825034002.jpg“뭔 헛소리야? 흙 퍼먹고 체했냐?”

그래서 짜증을 냈지만 린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애당초 린은 분위기를 잡는 게 아니라 긴장한 거였다. 그는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단지 헛소리라면, 이게 다 괜한 생각이라면 혼자 바보가 되고 마는 거니까.

16562825033991.jpg“남부공과 유니는 무사해. 그리고…….”

린은 긴장을 삼키며 천천히 말했다.

16562825033991.jpg“테메툼 칼리고.”

그 순간 정수리를 칼로 찌르는 듯한 고통이 린을 덮쳤다. 하지만 린은 통증을 참으며 빠르게 말했다.

16562825033991.jpg“많은 심장을 가진 왕의 이름이야.”

16562825034002.jpg“무슨…….”

린이 긴박하게 말하자 루비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그를 쳐다봤다. 하지만 설명할 시간은 없었다. 목덜미에서 퍼져나간 통증이 이미 온몸으로 퍼져 그를 장악하려는 듯 도사렸다. 한계를 느낀 린은 마지막 힘을 짜내 말했다.

16562825033991.jpg“테메툼 칼리고, 외워서, 레나에게…….”

린은 말을 채 맺지 못하고 결국 무너졌다. 동시에 그림자에서 뱀들이 솟구쳐 그의 몸을 순식간에 휘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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