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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화. 아들도 어머니를 알아본다 (125/208)

125화. 아들도 어머니를 알아본다2021.07.12.

레나는 무너진 절벽 사이에 몸을 숨긴 채 잠시 숨을 골랐다.

16562825271306.jpg‘린이 왜 두려워했는지 알 것 같아.’

북부공 이우라 플레누스와의 싸움은, 사람이 아니라 재해와 맞서는 기분이었다.

16562825271306.jpg‘망자의 왕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레나는 새빨간 하늘을 보며 푸념했다. 물론 권능의 위력만 따지면 망자의 왕들보다 못하다. 하지만 이우라가 권능을 운용하는 능력은 탁월하다 못해 무서울 정도였다. 짜증 날만큼 예리하고 집요하게 빈틈을 노리는 성격은 싸울 때도 똑같아서, 레나는 벌써 몇 번 시간이 멈추는 감각을 느꼈다.

16562825271306.jpg‘보통 사람이라면 이미 몇 번은 죽었겠어.’

확실히 동생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때문에 레나는 슬슬 초조해졌다. 딱히 궁지에 몰린 건 아니지만, 이대로 결착을 내지 못하면 앞으로 계속 발목 잡힐 것이 뻔했다. 레나가 이우라를 어떻게 밟을지 궁리할 때였다. 검은 새가 붉은 하늘 저편에서 날아오는 게 보였다. 새? 아니, 용이다.

16562825271306.jpg‘아까 사라졌던 그건가?’

린이 조종하는 걸지도 모르는 망자. 어느 순간 사라졌던 용이 다시 돌아오자 레나는 반사적으로 주위를 살폈다.

16562825271306.jpg‘이우라가 참격을 날리는 건 아니겠지.’

레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용은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내려앉았다. 그러더니 돌연 쾅쾅대며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16562825271306.jpg‘뭐지?’

레나는 놀라서 용이 착지한, 그리고 굉음이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이어 소리가 몇 번 더 울리더니 언덕 위로 검고 거대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많은 머리를 꿈틀대는, 한데 뒤엉킨 뱀이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붉은 제복을 입은 금발의 청년이 뱀들에게 쫓기며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16562825271306.jpg‘루비드?’

레나가 그를 발견한 순간 루비드가 고래고래 소리쳤다.

16562825271338.jpg“레나 루벨!”

호명 당한 레나는 깜짝 놀랐다.

16562825271306.jpg‘왜 루비드지? 린은?’

만약 저 용을 타고 누군가가 나타난다면 그건 당연히 린이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했던 레나는 뜻밖의 인물이 나타나 자신을 찾자 조금 당황했다. 게다가 저토록 사납게 몰려오는 뱀들은 또 뭔지. 이 근방의 망자들은 다 정리된 거 아니었나? 뱀들은 루비드를 노리고 있었다. 그걸 본 레나는 별 수 없이 절벽 밖으로 나섰다.

16562825271306.jpg“루비드 씨!”

레나가 나와 소리치자 루비드도 레나를 발견했다. 그러더니 대뜸 알 수 없는 말을 외쳤다.

16562825271338.jpg“테메툼 칼리고!”

16562825271306.jpg“어?”

16562825271338.jpg“이름! 테메툼 칼리고!”

이름? 레나가 영문을 몰라 눈을 깜빡이는데, 한데 얽혀 있던 뱀들이 루비드의 등을 노리며 화살처럼 날아들었다.

16562825271306.jpg“루비드 씨, 피해요……!”

레나가 놀라서 소리치자 루비드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거대한 뱀들이 입을 크게 열며 날아오고 있었다. 루비드는 잇소리를 내며 레이피어를 들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루비드를 노리던 뱀들이 모조리 찢겨 떨어졌다. 옆에서 날아온 거대한 참격 때문이었다. 레나와 루비드는 참격이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 선 것은 이우라였다. 이우라가 다시금 참격을 날려 뒤엉킨 뱀들을 쳤다. 그러자 루비드를 쫓던 뱀들이 산산조각 나며 그 안에 숨어 있던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16562825271306.jpg“……린?”

그 안에는 상상도 못한 인물이 서 있었다. 눈동자가 붉게 변한 린이었다. 레나가 놀라서 다가가려고 하는데, 그 사이 레나의 옆으로 온 루비드가 막아섰다.

16562825271338.jpg“그놈이 아니야.”

16562825271306.jpg“네?”

16562825271338.jpg“네 약혼자가 아니라고!”

루비드가 소리치는 순간 린의 등 뒤에서 뱀들이 솟구쳤다. 표정이 없는 린과 달리 뱀들은 무언가에 극히 노한 듯 다시 루비드를 공격했다. 하지만 그 공격은 루비드와 함께 있던 레나에게 덧없이 막혔다. 레나가 루비드를 등 뒤로 감싸며 소리쳤다.

16562825271306.jpg“린 씨!”

연인의 외침에도 린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망자와 하나가 된 듯, 도사리는 뱀들과 묵묵히 서 있다가 돌연 그림자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린이 사라지자 레나는 다급히 달려갔다. 하지만 그 자리엔 아무런 흔적도 없었고, 레나는 허망하게 주위를 두리번댔다. 그사이 다가온 이우라가 나직이 루비드를 호명했다.

16562825299526.jpg“루비드 플레누스.”

차가운 목소리에 루비드는 흠칫 놀라 형을 바라보았다. 형에게 직접 이름을 불린 게 얼마 만인지. 루비드가 놀라서 쳐다보자, 이우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16562825299526.jpg“이쪽으로 와라.”

16562825271338.jpg“……싫다.”

맥락 없는 명령에 루비드는 당연히 반발했다. 그러자 안 그래도 경직된 이우라의 얼굴이 한층 더 무서워졌다.

16562825299526.jpg“여기까지 망자를 타고 온 거냐?”

16562825271338.jpg“그, 그게 뭐.”

싸늘한 추궁에 루비드는 당황해서 저도 모르게 실토했다.

16562825299526.jpg“그게 동부공의 권능인가?”

그로써 북부공의 화살은 다시 레나에게 향했다.

16562825299526.jpg“망자들마저 지배하고 조종하는 게.”

베일에 싸인, 실체 없이 지배라는 모호한 이름만 알려진 권능. 이우라가 그것을 짚어내자 루비드는 새삼 놀랐고 레나는 우뚝 멈춰 섰다.

16562825299526.jpg“경은 이미 알고 있었군.”

레나는 할 말이 없었다. 아니라고 해봐야 통할 상대도 아니었다. 결국 알려져 버렸다. 린이 망자를 수족처럼 부릴 수 있다는 걸.

16562825299526.jpg“동부공이 망자에게 습격당했던 것도 자작극이었나?”

그리고 이우라는 실마리 하나로 또 성큼 발을 내디뎠다. 숨통을 조이는 이우라의 추궁에 레나는 이를 악물었다. 유니와 남부공에 이어 린까지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래서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옆에서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니 미칠 것 같았다. 한계에 몰린 레나가 이우라에게 각을 세우려 할 때였다.

16562825271338.jpg“그딴 얘긴 나중에 해.”

옆에서 지켜보던 루비드가 신경질을 내며 끼어들었다. 레나는 이 철부지 도련님이 또 제멋대로 구는 줄 알고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막상 루비드를 쳐다봤을 때, 그의 분위기는 평소와 달랐다. 잠시 마주친 루비드의 눈빛은 여느 때처럼 사나웠지만 그렇다고 마냥 단순하진 않았다. 오히려 무언가를 나름 살피는 기색이었다. 시선이 자신에게 몰리자 루비드는 뻔뻔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16562825271338.jpg“테메툼 칼리고. 네 약혼자가 전하랬다. 많은 심장을 가진 왕의 이름이라고.”

뜻밖의 말에 레나와 이우라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16562825271338.jpg“그리고 남부공과 유니는 무사하다. 이 말도.”

그리고 이어진 말엔 레나만 놀랐다.

16562825271306.jpg“린 씨가 그랬어요?”

16562825271338.jpg“그래.”

레나는 멍한 얼굴로 루비드를 바라보았고, 루비드는 그 모습을 마주 보다가 이내 흥 하고 시선을 돌렸다. 눈을 깜빡이던 레나는 곧 천천히 상황을 이해했다. 린이 다스리는 망자들로 바깥 상황을 살펴본 모양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중요한 정보만 루비드에게 남긴 모양이다. 많은 심장을 가진 왕의 이름과, 유니와 남부공의 생사를. 천천히 한숨을 쉬던 레나는 저도 모르게 비틀댔다. 유니와 남부공이 무사하다는 말에 다리에서 힘이 풀린 탓이었다. 하지만 옆에 있던 루비드는 레나를 잡아주거나 하지 않았고, 레나는 저도 모르게 루비드의 팔을 잡았다가 놀라서 사과했다.

16562825271306.jpg“미안해요.”

16562825271338.jpg“흥.”

16562825271306.jpg“……고마워요.”

레나는 다시 중심을 잡으며, 시큰둥하게 고개를 돌린 루비드에게 인사했다.

16562825271306.jpg“덕분에 집중할 수 있겠어요.”

린에게, 그리고 많은 심장을 가진 왕에게. 레나의 감사 인사에 루비드는 또 한 번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동생의 의기양양한 표정에 이우라의 눈매는 한층 가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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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린은 어둠 속에 있었다. 그를 감싼 어둠은 마치 늪처럼 깊고 짙었다.

16562825356642.jpg‘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린은 혼미한 정신으로 생각했다. 그의 안 좋은 추측은 야속할 만큼 잘 맞아떨어졌다. 린이 많은 심장을 가진 왕의 권능으로 망자들을 부린 것처럼, 많은 심장을 가진 왕도 그를 지배하고 장악해버렸다.

16562825356642.jpg‘……루비드가 제대로 전했을까?’

레나에게, 왕의 이름과 유니의 소식을. 유니와 남부공이 실종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레나는 하늘이 무너진 표정을 지었다. 애써 냉정을 유지했지만 얼굴이 하얗게 질려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이걸로 부디 한시름 놓았으면. 아, 하지만 내가 이 모양이 되었으니 그러긴 어렵겠지. 아마 구하러 올 거다. 왕의 이름을 알았으니 성으로도 들어올 수 있겠지. 문제는 내가 그때까지 버틸 수 있느냐다. 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아까 유니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16562825385361.jpg―후보로 찾은 이름이 다섯 개 정도 있어요.

16562825385361.jpg―그런데 가장 유력한 이름은 이거예요. 테메툼 칼리고.

그 이름이 맞았다. 그래서 이름을 부르자마자 화를 내며 달려들었다. 많은 심장을 가진 왕, 테메툼 칼리고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욕하던 소리가 아직도 귀에 선하다.

16562825385361.jpg―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던 미치광이 왕이래요.

유니는 이렇게 종알대며 엔지 루벨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테메툼 칼리고. 천 년 전, 이제는 제국에 편입된 대륙 남동부를 다스리던 왕. 여색을 밝히지만 여인을 사랑한 적은 없는, 도리어 증오한 것이 분명한 악마 같은 폭군. 그 왕은 책무를 뒷전으로 미뤄둔 채 하루가 멀다고 여인을 탐했다. 그리고 왕의 침실로 진상된 여인 중 살아서 나온 이는 없었다. 왕은 무방비하게 끌려온 여인들을 잔인하게 학대한 끝에 살해했고, 그래서 그 나라엔 왕이 처녀들의 고기를 먹는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의 기행은 딸과 누이를 빼앗긴 백성들이 적군에게 성문을 열어줄 때까지 계속되었다. 심지어는 성이 함락되던 날에도 여인을 찾았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집착적으로 색을 탐했는지 더 강조할 필요도 없었다. 린은 유니를 통해 그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저주가 어디서 기인했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16562825385361.jpg―그리고 왕이 그렇게 된 건 어머니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어요.

16562825385361.jpg―왕의 어머니는 선왕의 수많은 후궁 중 하나였는데, 심한 망상증이 있었대요.

16562825385361.jpg―그래서 왕이 막 태어났을 때 아기의 눈동자가 빨간 걸 보고 악마가 태어났다며 도망쳤대요.

테메툼 칼리고의 어머니는 가련한 사람이었다. 그는 외국의 귀족 출신이었으나 정신이 온전치 않았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런 점을 치료하거나 보듬으려 하지 않았다. 후계자를 생산하는 것이 여인의 존재 이유인 시대였다. 그러니 그가 헛것을 보거나 환청을 들어도 주위에선 개의치 않고 왕의 하렘에 밀어 넣었다. 그로써 더욱 혼란에 빠진 여인은 왕의 아이를 낳고도 그게 자신의 아이인지조차 모르는 지경에 처했다. 하렘에서 태어난 왕자는 생존을 위해 어머니의 지지가 필요했다. 하지만 테메툼 칼리고의 어머니는 아들과의 접견조차 거부했고, 외면당한 아들은 결국 악마를 자처하며 어머니를 비롯한 여인들에게 복수하기 시작했다.

16562825385361.jpg―물론 다 핑계지만요. 그렇게 따지면 고아들은 전부 마왕이게요?

유니의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떠올라 린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그리고 웃는 입 그대로, 어둠에서 깨어났다. ***

16562825356642.jpg“윽…….”

정신을 차리자 신음이 절로 나왔다. 손목과 어깨가 끊어질 듯 아팠다. 그래서 몸을 비틀자 철그렁 하고 쇠사슬 소리가 났다. 린은 손목이 묶인 걸 깨닫고 눈을 번쩍 떴다. 눈을 뜨자 감옥처럼 창살이 드리운 공간이 보였다. 린은 그곳에 양팔이 묶인 채 벽에 매달려 있었다. 린은 사슬을 풀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찌르는 듯한 시선을 느끼고 흠칫 고개를 돌렸다. 창살 너머 또 다른 감옥이 보였다. 그리고 그곳엔 거대한 뱀이 있었다. 온몸이 사슬로 묶인, 장식용으로 채집된 나비처럼 몸 군데군데 창칼이 박힌 뱀. 이제껏 망자들과 지겹도록 싸워봤지만, 저토록 큰 뱀을 보는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그래서 린은 본능적으로 그 뱀을 알아보고 신음했다.

16562825356642.jpg“나자 아이테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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