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맹수의 눈을 가진2021.07.15.
“나자 아이테르너…….”
린의 속삭임에 묶여 있던 뱀이 한차례 비늘을 들썩였다. 그게 마치 부름에 대답하는 것 같아 린은 숨이 턱 막혀버렸다.
‘당신이 왜…….’
린이 아연한 얼굴로 눈앞의 존재를 살펴볼 때였다. 철컹 소리가 나며 린이 갇힌 철장 안으로 한 사람이 들어왔다. 짙은 피부와 사자 갈기 같은 머리털을 가진, 그리고 이국의 옷을 걸친 남자. 린은 그의 붉은 눈동자를 보고 그가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테메툼 칼리고.”
린이 잠긴 목소리로 중얼대자 그 남자, 칼리고의 얼굴이 포악하게 일그러졌다. 직후 린의 눈앞으로 번쩍하고 낙뢰가 떨어졌다. 칼리고가 주먹으로 린의 얼굴을 힘껏 후려쳤다. 팔이 묶여 피하지도 막지도 못한 린의 입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칼리고는 분이 안 풀리는지 몇 번이나 더 주먹을 휘둘렀다. 퍽, 퍽! 둔탁한 소리가 스산한 감옥에 울려 퍼졌고, 일방적인 폭행이 이어지자 감옥 저편에 갇힌 뱀이 몸을 뒤틀었다. 하지만 몸에 박힌 단단한 속박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뱀은 피 흘리며 요동칠 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주제넘은 것들.”
칼리고가 피 흘리는 린과 묶인 뱀을 번갈아 보며 짓씹었다.
“당장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지만 목숨은 부지시켜주마.”
칼리고는 그렇게 말하며 엉망이 된 린의 턱을 쥐었다. 그러곤 그의 턱을 비틀어 드러난 목덜미에 이빨을 박아넣었다.
“큭!”
맞는 동안 숨소리도 안 내던 린은 저도 모르게 신음하며 몸서리쳤다. 이윽고 린의 목덜미를 물어뜯은 칼리고가 입을 훔치며 고개를 들었다.
“똑똑히 기억해라. 네 목숨이 이어지려면 내가 건재해야 함을, 내 소멸이 곧 네 죽음인 것을.”
사납게 으르렁댄 칼리고는 그 말을 끝으로 돌아섰다. 그러곤 자신을 노려보는 뱀을 마주 쏘아보곤 그대로 자취를 감췄다. 꼼짝없이 봉변을 당한 린은 찢어진 입안을 핥으며 한숨을 토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그는 천천히 상황을 확인했다.
‘자신의 소멸이 내 죽음이라고?’
칼리고가 물어뜯은 목덜미를 보고 싶었다. 대체 뭘 한 거지? 덧없이 고개를 숙여본 린은 소용없는 걸 깨닫고 미간을 좁혔다. 그러곤 입안을 훑어 피 섞인 침을 뱉어냈다. 린은 바닥에 자신이 뱉은 피를 보며 생각했다. 레나가 무섭긴 무서운 모양이라고. 그러지 않고서야 저렇게 격분하면서 나를 굳이 살려놓을까.
‘시간은 번 건가.’
린이 다시금 한숨을 내쉬는데, 저편에서 철그렁대는 쇠사슬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에 린은 고개를 들었다. 실은 외면하고 싶었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를 더는 못 본 척 할 수 없었다. 아까 거칠게 몸부림치던 뱀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얌전해졌다. 하지만 그것이 가진 포식자의 눈빛은 미처 가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린은 오히려 확신했다. 저 존재가 나자 아이테르너인 것을.
‘왜 저렇게 묶여 있는 거지?’
린은 스스로의 의문에 스스로 답할 수 있었다.
‘……그때 우릴 내보낸 것 때문이구나.’
레나와 함께 칼리고의 함정에 빠졌을 때, 저 뱀이 나타나 공간을 깨부쉈다. 린은 그때 ‘네가 감히!’라며 노여워하던 칼리고의 목소리를 똑똑히 기억한다. 그런가 보다. 저건 그 일에 대한 징벌인가 보다. 이미 죽은 자를 죽일 방법이 없어 저렇게 묶어뒀구나. 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저편에 갇힌 뱀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기억에 묻어둔 목소리가 다시금 귓전에 울렸다.
―네가 살아 있는 줄 알았으면……!
잔뜩 격양된 무서운 목소리. 나자의 목소리를 떠올린 린은 문득 기분이 이상해졌다. 저 사람을 이토록 오랫동안 마주본 적이 있었나? 없었다. 당신은 나를 낳았지만 동시에 내게서 모든 것을 빼앗고, 나는 그런 당신을 무엇보다 두려워했으니까. 그런 존재가 지금 눈앞에 있다. 자신과 똑같이 사지가 묶인, 아주 형편없는 몰골로. 린은 참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차갑게 가라앉은 마음으로 천천히 떠올렸다. 나자를 처음 만난 순간을. . . . 그날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야속하리만치 볕이 좋은 봄날이었다. 산새도 풀벌레도 평소처럼 찌르르 노래하던 그날, 하늘이 무너진 양 절망하는 건 오직 인간뿐이었다.
―숨어라, 아가. 절대 나오면 안 된다. 알겠니?
어머님은 그렇게 말하며 어린 린을 안채의 장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아버님은 이미 손에서 놓았던 검을 수 년 만에 빼 들었다. 장에 넣어진 린은 입을 틀어막은 채 그 모든 것을 문틈으로 지켜보았다. 집안 곳곳에서 사람들의 비명이 울렸고, 다급한 발소리가 몰아쳤다. 침략자가 안채까지 들이친 것은 하얀 장지문 위로 핏방울이 뿌려진 직후였다. 군홧발로 규방을 짓밟으며 들어온 그들은 린의 아버님과 어머님을 보고 우뚝 멈췄다. 마치 이 집의 주인을 알아보기라도 한 것처럼.
―아녀자는 건드리지 마라.
아버님이 제국인들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그때 제국군 사이로 한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맹수의 눈을 가진 젊은 여자였다. 그는 마치 제왕처럼 오만한 눈으로 아버님을 내려다보았다. 그때 아버님의 뒷모습을 보던 린은 그의 표정이 어땠는지 미처 알 수 없었다.
―너는…….
다만 떨리는 목소리를 통해 짐작할 수 있었다. 아버님의 경악과 충격을, 그리고 공포를. 다음 순간 피가 솟구쳤다. 거짓말처럼 붉은, 동백꽃보다 새빨간 피가 정갈하던 안채를 물들였다. 아버님이 쓰러지자 어머님이 비명을 지르며 여자에게 달려들었다.
―네가 감히……!
하지만 여자는 무자비했다. 오열하는 늙은 여자도 지는 꽃처럼 붉게 떨어졌다. 선명한 피가 웅덩이를 이루며 넓게 퍼져나갔다. 그것이 바닥을 물들이고 이불을 적셨다. 그럼에도 린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몸을 떨며 숨을 죽이는 것 외엔, 아무것도. 어머님까지 무자비하게 베어 넘긴 여자가 돌연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러더니 흥건한 피를 밟으며 린이 숨은 장으로 다가왔다. 린은 입을 막고 목을 조르며 소리를 참았다. 차마 낼 수 없는 소리 대신 두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이가 더 이상 숨을 참을 수 없을 때 장문이 벌컥 열렸다. 그때 린은 정면으로 마주했다. 빛을 등진 검은 여자와 그의 맹수처럼 살벌한 눈동자를. 하지만 당시엔 미처 몰랐다. 그 여자의 이름이 나자 아이테르너라는 것도, 그가 자신의 생모인 것도.
***
“길을 찾아서 다행이네.”
루비드가 말했다.
“이제 쓸모없을 줄 알았는데.”
루비드가 말했다.
“무기고도 멀쩡했고.”
루비드가 또 말했다.
“마구간이 빈 건…… 유감이지만…….”
아까부터 루비드만 말하고 있다. 그래서 루비드 플레누스, 공허 속에서 메아리를 만드는 가련한 왕자는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 지금 여기엔 루비드만 있는 게 아니다. 그보다 몇 걸음 앞에는 듣는 것도 말하는 것도 할 줄 아는 사람이 둘이나 있었다. 레나 루벨과 이우라 플레누스라는, 아까부터 입을 꽉 닫고 걷기만 하는 아주 젠장맞을 것들이. 몇 시간 전, 문자 그대로 치고받고 싸우던 레나와 이우라는 칼리고의 이름을 알아낸 후 태도를 바꿨다. 우선 레나는 린을 찾아야 했기에 이우라와 실랑이할 겨를이 없었다. 게다가 숨기려 했던 린의 권능도 고스란히 들켜버린 터라 더 싸워본들 무의미했다. 이우라는 동부공의 생사엔 별 관심 없지만, 어쨌든 칼리고를 쳐야 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애당초 지금 판국은 그가 밖에서 세운 계획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우라는 엔지 루벨에게 왕의 이름을 전달받은 후 무덤에 갈 작정이었다. 그래서 이우라는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바로 칼리고를 잡기로 했다. 망자의 군대가 막아선 대균열을 통과하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일이었다. 그로써 공동목표가 생긴 레나와 이우라는 빠르게 합의하고 기존의 자세로 돌아갔다. 그러니까 멀찍이 거리를 두고, 동시에 절대 상대보다 뒤처지지 않으며 완벽한 평행선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에 침묵은 덤이었고, 덕분에 사이에 낀 왕자는 그야말로 환장할 노릇이었다.
‘내가 왜 저것들 눈치를 봐야하는 건데!’
아무도 그러라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저런 분위기가 몇 시간이나 이어지니 숨이 막혀서 견딜 수가 없었다.
“……좀. 대꾸 좀 하지?”
결국 루비드가 다시 덧없는 시도를 했다. 원래 사람이 두셋 모이면 각자 역할이 생기는 법이다. 특히 구성원의 사이가 안 좋을 땐 필연적으로 중재자가 생긴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중재자가 된 루비드는 앞서가는 인물들의 지독함에 그야말로 치를 떨었다.
‘젠장, 이우라 저 새끼는 그렇다 쳐도 레나 루벨 너는 뭔데!’
루비드는 이를 갈며 앞서가는 레나와 이우라의 뒤통수를 쏘아보았다. 그 소리 없는 아우성을 듣기라도 했는지, 레나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러게요. 길이 있어서 한결 낫네요.”
레나가 드디어 말을 받아주자 루비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잠깐 핀 루비드의 얼굴은 이어진 말에 도로 일그러졌다.
“그러고 보니 이 길을 만든다고 두엄의 궁을 부쉈죠. 북부에서.”
야, 그냥 닥쳐. 레나의 도발에 루비드가 질색하는데, 쭉 입을 닫고 있던 형 놈이 굳이 거들었다.
“그 두 건은 별개일 텐데. 무리난제를 할 셈인가?”
무리, 뭐? 알아듣기도 어려운 말에 루비드가 주춤하는 사이 레나와 이우라는 몹시 침착한 목소리로 서로 찔렀다.
“북부에선 별개인 셈 치고 싶겠죠. 그런 걸 꼬리 자르기라고 하던가요?”
“두엄의 궁에 대해선 남부공과 이미 대화가 끝난 걸로 아는데.”
“부럽네요, 편지 한 장으로 모든 게 해결된다고 믿는 낙관적인 성품이.”
“빈정대는 걸 보니 이번에도 약혼자의 안위는 별로 걱정스럽지 않나 보군.”
알겠으니까 둘 다 제발 닥쳐……. 마음이 한층 더 너덜너덜해진 루비드는 저들의 등짝에 참격을 날리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았다. 한차례 실랑이 끝에 다시 침묵이 흘렀고, 루비드도 이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그들을 따라 걸었다. 아무 준비도 없이 토벌에 나섰지만 다행히 그들에겐 다소의 행운이 따랐다. 첫 번째 행운은 루비드가 린과 함께 비행하는 동안 발견한 도로였다. 루비드는 하늘에서 대지 저편으로 이어진 도로를 보았고, 그게 일전에 북부에서 건설한 것임을 곧 깨달았다. 두 번째 행운은 북부의 물량 공세로 만들어진 그 도로가 각 왕들의 성으로 이어질 뿐만 아니라 중간중간 그럴싸한 병영까지 갖추고 있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세 사람은 병영 내의 무기고에서 그럴싸한 무장을 갖출 수 있었다. 서로 개 닭 보듯이 하는 레나와 이우라를 제외하면 제법 순조로운 상황이었다. 루비드의 덧없는 시도와 실패를 뒤로하고 세 사람은 길을 따라 걸었다. 그렇게 몇 시간, 혹은 며칠을 걸어 도착했다. 많은 심장을 가진 왕의 성 앞에.
“저건 왜 저렇게 멀쩡하지?”
루비드가 그 성을 보며 중얼댔다. 첼레스테나 히엠스 그라샤의 성은 마치 뭉개진 반죽 같았다. 하지만 많은 심장을 가진 왕의 성은 루비드의 말마따나 아주 멀쩡했다. 살아 있는 인간이 지내는 곳이라 여겨도 될 정도였다. 레나는 칼리고의 성이 멀쩡한 이유를 알지만 차마 말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 원인이 레나 본인이기 때문이다.
‘새로 만든 성이니 깨끗할 수밖에.’
레나는 칼리고와의 악연을 곱씹으며 작게 탄식했다. 100년 전, 니힐에게 패한 왕들은 그를 두려워하며 성을 만들었다. 그러곤 그 안에 틀어박혀 자신의 반쪽짜리 심장을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칼리고는 자신의 심장을 지키는 것보다는 생전의 폭력을 즐기는 게 더 우선이었다. 그래서 어린 레나를 노렸고, 종국엔 제 발로 성에서 나와 14세의 레나에게 탈탈 털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때 칼리고는 죽고 부활하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때마다 성이 무너졌고, 레나는 그놈이 성으로 도망칠 틈도 주지 않고 다시 잡아다 조졌다. 그러면서 완전히 무너진 성을 이번에 새로 지었으니, 그 외관이 다른 왕의 성보단 당연히 멀쩡할 수밖에. 그런 상대였다. 레나에게 칼리고는, 마음만 먹으면 손목을 비틀어 제압할 수 있는 송사리였다. 그런데 그런 놈이 린을 데려갔다고 생각하니 속이 은근히 뒤집혔다. 레나는 린을 되돌려 받기 위해 칼리고의 성으로 성큼 다가갔다. 그러곤 그 성에 대고 왕의 이름을 읊조리려 할 때였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 발 먼저 문이 열리며, 붉은 눈을 가진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의 주인이시여.
그렇게 말하며 레나에게 머리를 숙인 것은 많은 심장을 가진 왕, 칼리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