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차마 사랑할 수 없는2021.07.26.
나자의 품에 안긴 순간. 그리고 그의 체향이 몸을 감싸는 순간 린은 혼란에 빠졌다. 이상했다. 분명 놀라서 물러나야 하는 상황인데 몸이 선뜻 움직이지 않았다. 어쩐지 익숙해서, 익숙하다 못해 친숙해서, 묘하게 안심이 되어서. 린은 저도 모르게 나자의 옷자락을 꼭 붙잡았다. 그러곤 자신을 내려다보는 동부공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표정 없는 얼굴. 맹수 같은 눈. 정말이지 무섭게 생긴 사람. 그런데.
‘이젠 별로 무섭지 않아.’
무섭다기보다는, 그러니까 이 느낌은 왠지…….
‘그리워.’
린은 자신의 기분을 헤아리다가 퍼뜩 놀라 나자를 뿌리쳤다. 그러곤 경악하며 그에게서 물러났다.
‘그립다고?’
린은 자신이 얼마나 미친 생각을 했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정신 차려, 저 사람이 누군지 잊었어?’
무섭지 않다니, 안심된다니, 그립다니. 눈앞에서 부모를 죽인 사람을 두고 그런 생각을 하다니! 당황하는 린의 뇌리에 다른 소년들이 하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우릴 제국의 개로 키우겠다는 거지.
소름이 돋았다. 지난 1년 반 동안 어느새 그렇게 되어 있었다. 자연스럽게 제국의 말을 하고, 제국의 옷을 입고, 제국의 침략자들을 태연히 대하게 되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한 공간에 있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저 사람은 부모님을 해친 원수, 고국을 짓밟은 수탈자, 수많은 사람을 무참히 살해한 전쟁광. 그러니 나는, 나는…….
‘이 사람을 미워해야 해.’
지금은 발톱을 감춘 채 온유한 척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만행이 지워지는 건 결코 아니다. 목검을 가지고 노느라 그걸 잊다니. 린은 스스로를 책망하며 재처럼 흩어진 증오심을 애써 끌어모았다. 그러곤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날카로운 표정으로 나자를 쏘아보았다. 차라리 처벌받고 싶었다. 그러지 않고는 부모님께 면목이 없었다. 그래서 어린 린은 고초를 바라는 심정으로 나자의 판결을 기다렸다. 반항하는 포로를 동부공이 매섭게 내치길 바랐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말을 잃은 사람처럼, 아니. 무수한 말을 참는 사람처럼 린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린은 그 모습이 어쩐지 슬펐지만, 애써 스스로를 다잡았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을 지탱해온 무언가가 무너질 것 같았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이지만, 본능처럼 그렇게 생각했다. 그 일이 있고 얼마 되지 않아 나자는 다시 전장으로 떠났다. 그 후 나자 아이테르너가 돌아온 건 1년 후였다. 그리고 린이 죽기로 결심하여 성에서 뛰어내린 것도, 꼭 그 시기였다.
. . . 나는 당신의 아들이고 당신은 나의 어머니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서로 나눈 말은 서른 마디도 채 되지 않는다. 우린 다른 모자보다 훨씬 더 많은 말을 나눠야 했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도 이렇게 제자리다. 린은 어둡게 잠긴 눈으로 포박된 나자를 올려다보았다. 저 사람은 괴물이야. 어린 시절 린은 나자를 볼 때마다 이렇게 되뇌었다. 그 탓인가. 그래서 당신은 정말 괴물이 되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는 망자가 되어 나타났나. 린은 자신을 주시하는 거대한 뱀을 향해 입술만 달싹이다가 결국 입안에서 맴돌던 말들을 삼켰다. 말을 포기한 린은 나자가 갇힌 우리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당신의 아들이고 당신은 나의 어머니이다. 그럼에도 나는 당신을 차마 사랑할 수 없다. 린은 그 사실을 무겁게 되뇌며, 나자의 몸에 박힌 창을 뽑았다. *** 그 어떤 향기도 혼자서는 즐겁지 않으리. 사람의 소리에 지쳐 잠시 떠났어도 숲을 향해 내 형제라 하고 달을 향해 내 벗이라 하며 좋은 것만 보고 맡으며 마음을 달래어도 종국엔 그대를 그리며 함께하길 바라리라. 비트라의 이 시는 한 줄로 요약하면 대충 이런 내용이다.
‘지랄하는 인간 놈들 짜증나지만 혼자는 심심해.’
그런데 이 시가 갑자기 왜 생각났을까? 레나는 무심코 생각했고 무심코 답을 찾았다. 아, 내가 지금 정말 어처구니가 없나 보다. 이 시를 떠올린 걸 보면. 아까까지만 해도 레나는 루비드와 함께 미로 같은 정원을 내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방향을 꺾는 순간 공간이 뒤바뀌며 별로 보고 싶지 않은 장면이 펼쳐졌다. 그건 칼리고의 화려하고 불우한 어린 시절이었다. 아, 하렘에서 태어난 왕자님. 아버지는 자식의 이름도 모르는 무심한 왕. 어머니는 망상에 시달리는 가련한 광인. 어머니의 품에 안겨본 적 없는 아이는 어느 날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모친을 찾아갔네. 다른 왕자들처럼 엄마 품에 꽉 안겨볼 마음뿐이었네. 하지만 어리석은 어미는 아들을 알아보지 못했네. 왕자의 붉은 눈만 보고 악마라 소리치며 그의 손에 못질을 해버렸다네.
“저런 미친…….”
어린 칼리고의 절규에 루비드가 질색하며 중얼댔다. 루비드는 꽤 성실한 관객이었다. 갑자기 튀어나온 어린 칼리고를 의심스럽게 바라보다가 그가 고난을 당하니 울컥해서 화를 낸다. 반면 관객으로서는 그보다 한참 불성실한 레나 루벨은, 한발 뒤에서 한숨만 연거푸 내쉬고 있었다.
‘지금 뭘 하자는 거지?’
눈앞의 촌극에 레나는 할 말을 잃었다. 조금 우습기도 했다. 동시에 슬그머니 화가 났다. 칼리고는 동정을 사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자신의 딱한 어린 시절을 내보였다. 부모의 보호를 받지 못한 아이. 심지어 정신증에 시달리던 어머니에게 학대당한 아이. 웬만한 사람은 마땅히 안타깝게 여기고 분노할 이야기였다. 하지만 레나는 그 이야기에 공감할 수 없었다. 그보다는 칼리고의 의도가 뻔히 보여 그저 어이가 없었다.
‘이런 상처가 있으니 봐달라는 건가?’
이제 와서? 레나의 눈에는 칼리고가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이런 아픔이 있는 사람입니다. 내 어린 시절은 이렇게 불우했습니다. 수백 명의 처녀를 겁간하고 고문하고 죽였지만, 열두 살이던 레나 루벨을 종종 목 졸라 무덤으로 끌어들였지만 어쨌든 나는 불쌍한 사람이에요. 그의 실체를 아는 레나로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레나를 위해 기도하던 자들 중에는 칼리고에게 찢겨 죽은 이도 있었다. 그를 통해 모든 것을 전해 들은 레나는 눈 앞에 펼쳐진 칼리고의 자기 연민을 매몰차게 비웃고 싶었다. 차라리 네가 한 짓을 보라며 그가 짓밟은 여인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인질로 잡힌 린 때문에 차마 그러지는 못하고, 레나는 연거푸 한숨을 쉬며 속을 삭였다.
“젠장, 저딴 걸 왜 보여주는 거야?”
다행히 레나가 하고 싶은 말을 루비드가 대신 해주었다. 그 와중에도 칼리고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큰 상처를 입은 칼리고는 은둔하다시피 별궁에 틀어박혔다. 그 와중에 왕자의 난이 일어나 왕이 죽고 왕자 대부분이 몰살당했다. 과격한 집안싸움으로 왕가의 권력과 위신이 땅에 떨어졌을 때, 칼리고는 왕으로 추대되었다. 실권을 쥔 신하들이 입맛대로 부릴 수 있는 허수아비 왕이었다. 왕이 되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나마 허락된 것은 하렘에서의 쾌락뿐. 소년이 된 칼리고는 왕홀을 손에 쥐었다. 그것으로 이야기는 끝났다. 암전이 찾아왔고, 칼리고를 제외한 모든 것이 사라졌다. 칼리고가 소년의 모습으로 레나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레나가 나직이 말했다.
“본체로 나오라고 했을 텐데.”
레나의 차가운 질책에 칼리고는 고개를 떨궜다. 그는 벌 받는 아이처럼 서 있더니 이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연인을 돌려드리겠습니다.”
“연인?”
하지만 레나는 도리어 코웃음을 쳤다.
“연인이 아니라 약혼자겠지.”
레나는 가소롭다는 듯 말하며 눈짓했다. 너도 왕족이니 약혼이 거래라는 것쯤은 알지 않느냐는 투였다. 그래서 어린 칼리고는 가련히 읍소했다.
“그자는 마지막까지 그대에게 내 이름을 전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인질로서 가치가 있다는 거야?”
레나가 표독하게 비웃자 칼리고뿐만 아니라 루비드까지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설령 진짜 연인이라 해도 방해가 되면 그게 무슨 가치가 있지?”
하지만 레나는 끄떡도 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칼리고가 자신의 패에 확신을 갖지 못하도록 해야 했다. 린을 소중히 여기는 걸 알면 절대 내주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레나는 린을 돌려달라고 말하는 대신 싸늘히 웃으며 위협했다.
“인질이 있든 없든 나는 네 심장을 가져갈 거야.”
레나의 선언에 칼리고의 얼굴이 절망으로 젖어 들었다. 칼리고가 원망에 가깝게 중얼댔다.
“여자들은 정말 무심하군요.”
“그래서 매일 여자들을 죽였어?”
레나의 코웃음에 칼리고는 정말 괴로운 듯 입술을 깨물었다. 레나가 그의 상처 입은 얼굴을 보며 말했다.
“손.”
짧은 명령에 칼리고가 영문을 몰라 쳐다보자, 레나는 짜증스레 덧붙였다.
“내밀어봐.”
칼리고는 순순히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손엔 흉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마음이 조금 변했어.”
레나는 칼리고의 흉터를 보며 말을 이었다.
“너 같은 거 정말 역겹지만 한 번은 봐줄게. 당장 서부로 나온 망자를 거두고 내 약혼자를 내놔.”
“그럼…….”
“사자를 가둔 왕을 먼저 칠 테니까 그동안 숨든지 힘을 키우든지 그건 알아서 해.”
레나의 매몰찬, 거의 신경질 섞인 말에 칼리고의 얼굴에 비로소 화색이 돌았다. 레나는 그 모습을 신중히 살폈다. 대충 먹힌 모양이다. 대놓고 동정을 바라기에 마지못해 동정하는 시늉을 해줬는데, 그럭저럭 통했다.
“당장 그렇게 하겠습니다.”
칼리고가 안도하며 대답했고, 레나야말로 속으로 한시름 놓았다. 다행이다. 린을 돌려받을 수 있게 됐다. 앞서 칼리고가 린과 생명이 연결되었다는 둥 헛소리를 한 게 마음에 걸리지만, 일단 지금은 린을 되찾는 게 우선이었다. 레나는 마지못해 양보하는 척하며 칼리고가 린을 데려오길 기다렸다. 그런데 그때 멀리서 쾅 하는 굉음이 울렸다.
“뭐야?”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루비드가 중얼댔다. 그 직후 몇 번 더 쾅쾅대는 소리가 울렸다. 칼리고도 그 소리에 조금 당황한 기색이었다. 이윽고 사위를 덮고 있던 어둠이 먹물처럼 흘러내리며 레나와 루비드, 그리고 칼리고는 다시 정원의 미궁으로 돌아왔다. 암막이 걷히자 그 난폭한 소리는 더 크게 들려왔다. 쾅, 쾅, 쾅! 무언가를 부수고 뚫는 소리. 정원의 높은 담장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 저기 뭐가 있지? 레나는 이 소리의 정체를 직감하며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이우라 플레누스!’
짚이는 바가 너무나 확실했지만 레나는 확인차 칼리고를 채근했다.
“무슨 일이야?”
“그, 그대와 함께 온 자가 미궁을 부수며 앞으로 가고 있습니다.”
과연 돌아온 대답은 레나의 예상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덕분에 레나의 발등엔 불이 떨어졌다.
“네 본체는 어디 있어?”
“구, 궁안에…….”
“당장 나한테 와. 아니, 날 안내해.”
“그러려면 이 미궁을 지나야…….”
“없애면 되잖아?”
“하지만 미궁이 사라지면 저쪽에 있는 자를 막을 수 없습니다.”
칼리고가 겁먹은 목소리로 읍소했다. 놈은 자신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이우라를 레나 못지않게 두려워하고 있었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놈. 그런 주제에 자신보다 천 살 정도 많다는 점이 더 열 받는다. 레나는 혀를 차며 무기고에서 챙겨온 채찍을 휘둘렀다. 그러곤 미궁을 이룬 벽 위의 장식물을 휘감아 위로 올라갔다. 벽 위로 오르니 저편에서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보였다. 벽을 부수는 이우라였다. 이젠 놀랍지도 않다. 왠지 걸림돌이 될 거라고 느꼈지만 이렇게 착실히 방해가 될 줄이야. 레나는 피로를 삼키며 빽빽대는 루비드에게 채찍을 내려주었다. 그러곤 그를 끌어올리며 저편의 궁전을 바라보았다. 이제 정말 시간 싸움이다. 레나는 이우라 보다 먼저 칼리고의 본체를 찾아내 대피시켜야 했다. 이우라가 그의 심장을 뽑아내기 전에 말이다.